에이드리언 리치의 난파선 시 구절을 응시하다가 번역본에서는 어떻게 번역되었을까 찾아보고 그 구절을 읽어보고 아 이건 한국어와 영어의 차이뿐만은 아니로구나 알았다. 번역된 한국어 문장에서는 그 절절함이 와닿지 않았다. 왜 난파선에까지 다다르기 위해서 다이빙을 했는지 그 화자의 절절함이. 명확하게 의미 전달은 되지만 그 절절함은 느껴지지 않는. 그건 뭘까.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배울 수 있다. 정신과 의사가 알려준 비법이라는데 엄마, 사람들이 불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크나큰 방법은 이거래, 라고 유투브를 보다가 아이가 알려줬다. 아이의 말소리를 듣고 그건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효과가 그닥 크지는 않을 거 같다만, 아가, 하고 피드백을 보냈다.

대학생때 보았던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를 다시 보았다. 나의 르네 젤위거는 나와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었고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브리짓 존스 역시 나이가 들어 싱글맘이 되어 중년 여성의 삶을 이번에 새로 개봉하는 영화에서 보여준다고 하니 또 은근 기대가 생겨서. 물론 대학생이었던 그 어렸던 내가 20년이 흘러 싱글맘으로서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지만. 언제나 문제는 이런 거지. 중년 여성의 삶은 인생 이야기로서 적절하지 못하고 그저 심플하기만 하리라고 본다는 점. 그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을 읽는 동안 느낀 거다. 루시의 별볼일 없는 사위(엑스 사위라고 해야 하나)가 그저 서백녀가 쓰는 한심한 이야기일뿐, 이라고 서술하는 그 장면이 유독 와닿았다. 서양의 (중산층) 백인 여자가 쓰는 별볼일 없는 이야기에 왜 그렇게 사람들이 열광을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것.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과 유독 마음에 들어오는 것들에 더 시선을 담기 마련이고 그렇게 해서 그 시선과 그 마음의 충돌과 연쇄 작용으로 인해 각자의 가치관이 생성된다. 이걸 처음 내게 알려준 건 고등학생 시절 문학 담당이었던 2학년 내 담임이었고. 약 10년이 흘러 너에게서는 눈을 뗄 수가 없어, 라며 마음을 고백한 한 남성의 말소리였고. 히키코모리에 대한 영상을 아이와 잠깐 보다가 이게 문제인 거지, 라고 나도 모르게 또 지적질을 하고. 어제 다쳤던 마음은 오늘 아침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순순하게 반성의 전언을 받아서 다 치유됐다. 그냥 그 모든 것들은 다 현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현상을 서술하고 기록하면서 다시 되뇌어보는 활동은 인간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거고. 아이의 모든 것들을 캐치하려고 하지도 않고 모든 것들을 알 생각도 없다. 자신의 자유 안에서 아이가 응시하고 마음에 담아낼 것들이 있을 테니까. 다만 가끔 일기는 매일 쓰고 있는 거니? 라는 잔소리는 한다. 일기를 쓰는 건 자신의 난파선을 찾아 다이빙을 하는 행위니까. 세상에는 리듬을 들으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인간과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도 있을 수 있는 인간, 이렇게 나뉜다. 여기에는 어떤 판단도 없음.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세상에는 일기를 쓰는 인간과 일기를 쓰지 않는 인간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브리짓 존스는 이십여 년이 흘러도 계속 일기를 쓰고 있었다는 이야기인 거지. 개봉일을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다른 브리짓 존스도 봐야겠군. 다시 루시에게로 돌아가서 하여 나는 담담하게 마주한 것들을 계속 기록할 생각이다. 언젠가 남편(물론 현재로서는 나의 엑스)에 대한 글을 유머러스하게 쓴 적 있는데 이 글을 읽고 남편도 없고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여자들이 보면 얼마나 그렇겠니? 라는 한 친구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자기검열은 본인이나, 라는 말을 속으로 한 적 있다. 그런 식으로 모든 것들을 헤아리면 침묵해야지 뭐 하러 쓰나, 라는 생각도 하긴 했다. 그 에피소드도 덩달아 떠올라서 덧붙인다. 며칠 전에 엄마에게도 이야기한 적 있지만_ 레깅스만 입고 달리기를 하다가 엄마한테 겁나 깨지고난 후_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 내게 관심이 있고 내게 시선을 두고 내게 항상 마음이 있어 레깅스를 입고 동네를 달리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볼 거라는 건 엄마의 판타지라는 점. 더구나 달리는 동안 선글라스를 쓰고 모자를 써서 내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다.

자 이쯤에서, 일기의 효능은 어마무시하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인간에게 그렇게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다는 점. 애정이 있고 사랑이 있으니 더불어한다는 것, 가끔 가슴을 물어뜯을 것처럼 악다구니를 서로에게 지를 때도 물론 있지만. 함께_가 두려워서 혼자_를 택하는 경우라면 마땅히 혼자, 그걸 갖고 탓할 생각도 없고. 난파선의 스토리가 궁금해서 난파선에 가닿지 않는다는 것. 그저 그 난파선 자체가 내게 안겨주는 것들이 있기에 거기에 다다르려고 한다는 점. 그리고 거기에 다다르려는 행위 과정 자체와 거기에 닿았을 때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에. 더불어 그 난파선 자체가 내 사랑일 수도 있고 그 난파선 자체가 나의 삶일 수도 있다는 점. 하여 거기에 다다라 뭔가를 서술할 수 있는 이는 오롯이 그 본인뿐이고. 그 이야기를 두고 뻔한 서백녀 이야기, 혹은 별볼일없는 중년 여성의 넋두리, 라고 여긴다면 그건 또 그대로 시니컬하게 흘려보낼 수 있지 않나. 자기검열에 사로잡혀 자신의 이야기 하나 하지 못한다면 그건 또 그대로 문제가 있기도 있는 거라고 여기지만. 젊은 육체만 육체라고 여긴다는 점, 아름다운 이들에게만 사랑이 있으리라고 여긴다는 점, 세상이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건 확실하지만 걔네들만 살아가는 건 아니라는 게 또 사실이거든. 이 동네에서 30년 이상을 살아 네가 그렇게 레깅스만 입고 다니면 이 에미가 얼굴을 못 들고 다녀 엉엉 하길래 뭐 어쩔 수 없이 레깅스에 반바지를 걸쳐주는 센스를 발휘하고 달리기를 하러. 어떤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면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난파선에 직접 가닿아 그 깨진 조각들 사이에서 더 이상 배의 형상조차 찾을 수 없을 때 그 사이에서 이미 연기가 되어버려 전설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짐작하고 헤아릴 수 있을 때 하여 다시 바다 위로 올라가 새로운 배를 만들 수 있는 에너지를 갖출 수 있는 거고. 이미 끝나버린 중년, 하여 노년의 준비, 그걸 헤아리는 작업만 하는 것도 별로 매력 없어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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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4-10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기를 쓰는 건 자신의 난파선을 찾아 다이빙을 하는 행위니까.

이 문장 너무 좋아요. 저도... 저에게도 일기 쓰라 재촉해주세요~~ 플리즈!

수이 2025-04-10 18:54   좋아요 1 | URL
자 일기 써서 인증샷으로 제출하세요 광폭한 사랑둥이 단발머리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