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 김서영의 치유하는 영화읽기 일상인문학 2
김서영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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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껏 미쳐 날뛰면, 그러니까 적당히 티는 나지 않게, 그러면 그 안에서 존재에 걸맞게 살아갈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그게 아니었던 거네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드러나는 문장들이 그다지 쓰게 다가오지 않은 건 잘난 척 전혀 없이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었고. 읽고난 후, 정말 싫어하는 사람 하나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내 삶과 내 생각 바깥으로 떠밀려 나갔다. 그는 한평생 결국 그렇게 살아갈 거 같아서_ 이제 다시는 마주하지 않을 거라서. 사람 하나를 완전히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구나 싶어서 나는 융을 조금 읽기로 했다. 더불어 일렁거리던 불안감도 사라졌다. 쉬이 타자화시키고 경계를 긋는 이들을 그런 글들을 나는 저어한다. 물론 나 역시 자연스럽게 그러한 경우들 있다는 거 알고 있고. 아니까 고칠 수 있는 지점들도 있으리라 본다. 김서영의 강점이 뭔지 알겠네. 후에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감사하다 말하고 싶다. 불안감을 없애는 글이라니, 그러한 마주침이라니, 그게 얼마나 불안해하는 존재에게 침묵의 위안이 되는지 저울로 잴 필요는 없어보이고. 


조금 더 깊이 있는 김서영의 글을 읽고 싶어 하나씩 다운로드하는 중이다. 대학교 2학년 전공수업을 듣던 중 선생님이 영화와 영화를 뒤섞어 설명해주시면서 보이는 눈과 뜨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진 차이가 얼마나 큰지 그걸 알려주셨는데 그때도 와 입을 벌리면서 넋놓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개인적인 아쉬움이라면 지면이 너무 짧았어. 하고싶은 말들을 너무 몰아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 아쉬움이 컸다. 개인적으로는 별 다섯개. 그 아쉬움에 별 하나 일부러 뺐다. 또 이런 글 써주시면 좋을 거 같은데 그때는 아주 길고 두껍게 써주시면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만족스러울 거 같다. 그리고 이제 지젝을 슬슬 읽을 준비를 해야겠다. 하여 이 책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존재에 걸맞게 살라_ 이다. 내 옷 아닌데 내 옷인척 내 몸에 억지로 끼워 입으려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 반백살을 앞에 두고 꼰대처럼 말하자면, 남의 옷 억지로 내 옷처럼 내 몸에 끼워 맞춰 입을 필요 없다는 거. 그러니까 백살 거의 다 된 할머니들이 자기 손녀들 앉혀놓고 하는 이야기 있지 않은가.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일단은. 할미가 살아보니까 그게 그렇더라구. 적당한 때, 적당한 타이밍 이딴 건 존재하지 않아.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을 때 다 해.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어. 걔네들은 너한테 관심 1도 없어. 그냥 너 좋은 거 너 웃을 수 있는 거 너가 땡기는 거 하면 돼. 내가 입고 싶은 옷은 따로 있는데 나를 빛나게 해줄 옷은 따로 있는데 다른 이들이 다 아름답다고 한 그 옷을 입기 위해서 고생고생을 하고 그 옷을 걸친다. 아 그래, 이게 나를 빛나게 해주는 옷이야. 라는 생각이 어느 시점에서 들까.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는 필요 없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이게 정말 내 옷이 맞나 라는 의구심이 든다면 당장 그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있는 게 옳다. 김서영 작은 책 읽고난 후_ 떠올랐다. 존재에 걸맞게. 이 말. 각자 인생이다. 누가 누구에게 충고를 하고 누가 누구에게 보편성을 이야기하는가 어른인 척 꼰대처럼 말하는 거 보면 좀 위선자 같아서 나는 싫던데. 이렇게 말하면 내 동생이 작작 해라 그냥 아주 막 살기로 작정했지, 라고 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어쨌거나 보편성과 평화를 찾는 건 그 이후야. 아 물론 제 말이 정답은 아닙니다. 타자화 싫어서 덧붙이는 거임. 꼰대처럼 이런 말까지 덧붙이고. 워낙 잘난 이들 많은 공간이라 추신처럼 덧붙임. 솔직히 제일 웃긴 건 쥐똥만큼 읽고 말하는 건 어마무시하다는 거, 경계 허물고 이거야말로 타자화의 끝판왕 아닌가 언제나 느끼던 바지만. 오랜만에 쓱쓱 읽었다. 내일은 정희진 선생님 강연 듣는 날, 할 일 다 끝내고 후다닥 합정역으로 날아가도록 하겠다. 선생님 책 다 읽지도 못하고 그냥 가겠네. 다시_ 김서영 읽으니 좋은 영화 막 보고싶은 마음 일어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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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31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31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4-02-01 0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 관련 책은 거의 (사실 거의 완전) 안 읽거든요. 모르니깐 읽어도 뭔말인지 잘 모르고요. 그래도 김서영책은 꼭 한 번 도전해보고 싶네요.
이름 적어두려고요. (약간 흔한 이름이시다) 김서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02-01 08:29   좋아요 0 | URL
알라딘 하실걸 아마도, 아니다, 지금은 안 하실지도! 저를 건드리시는 부분들 꽤 있어서 조금씩 아껴 읽으려구요🥰 단발님도 읽고 좋아하시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나 힘겹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히스테리의 전략을 사용하고 또 다른 사람은 강박증의 전략을 사용한다. 즉 자신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만족시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믿거나 또는 자기 자신이 결여되어 있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결국 자신들의 전략이 실패하는 지점을 경험하게 된다. 라캉에 의하면 이것은 병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미 익숙한 일상이다. 문제가 심각해지는 지점은 우리 자신들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이다. 불완전함을 견디는 사랑이 완전함을 목표로 하는 사랑보다 강하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식하는 사람이 완전한 인간이라는 환상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완전한 사랑과 완벽한 인간이란 인생의 중심에 똬리를 뜬 불완전한 틈새를 가려 덮는 허상에 불과하며 이에 집착할 때 일상을 견뎌내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보다 더욱 완성된 경지이며, 부족한 것이 완벽한 것보다 더욱 견고한 것임을 강조한다. 욕망의 움직임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무엇인가가 결여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 불안한 느낌들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두려움과 불안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성숙한 존재가 - P38

된다. 불안을 보듬고 감싸 안아야 한다. 내 중심에 배치된 불안은 나를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만드는 보석이다. 그것은 결코 내 약점이 아니다. 불안을 견디는 용기가 모든 것의 시작이다. 이를 라캉의 언어로 바꾸자면 우리는 상상계를 넘어 상징계로 이행해야 한다. - P39

상상계 속의 인물들을 잘 표현해 주는 단어는 ‘마마보이‘ 또는 ‘마마걸‘이다. 어머니의 치마폭에 싸여 마냥 칭얼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어른들이 적지 않다. 핸드폰에는‘집, 집, 집, 엄마, 엄마, 집, 엄마, 아빠, 엄마, 엄마‘가 찍혀 있고 무슨 일이든 ‘엄마‘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엄마‘라는 정답이 있으니 인생이 조금 편하다. 이것이 바로 상상계이다. 그 속에서 그들은 결코 자신이 진정 욕망하는 바를 말하지 못한다. 항상 정답이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거나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의 목표에 매진하기도 힘들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데도 시간이 걸리며 자신의 문제에 대한 고민과 사색보다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라캉은 아이를 놓아 주지 못하는 어머니의 욕망을 악어의 이빨에 비유한다. - P50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실재계라는 라캉의 용어를 기관의 에너지로 해석한다. 우리의 작은 몸을 이루고 있는 각 기관이 사실은 거대한 에너지의 보고라는 것이다. 그는 서사의 전체 구조와 관계없이 각 영화들의 세부에서 그러한 에너지를 파편적으로 제시한다. 한 예로 그는 「파이트 클럽」에서 주인공의 오른손이 갑자기 어마어마한 힘을 얻게 되어 자신을 초주검이 되도록 구타하는 장면을 지적한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손이라는 신체의 한 부분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젝에 의하면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눈의 감각 능력을 현저히 뛰어넘는 월등한 눈, 즉 카메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라캉의 실재계란 물리적인 능력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이 더욱 강조된 용어이다. 그것은 인간만이 감지할 수 있는 영역으로서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할 때 그/그녀의 정신세계가 내뿜는 에너지를 뜻한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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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옥타브의 목소리가 좋다. 

카페에서 마주한 옆 테이블 젊은 여성의 분노와 흥분이 욕설과 함께 배어나오는 시간은 끔찍했다. 

오랜만에 간 서촌 단골 카페의 시간은 두 시간으로 제한되었다. 

책이 가득 담긴 가방을 들고 낑낑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꿈꾸게 만드는 목소리, 그 옥타브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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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내가 한창 『에크리』를 읽으며 논문을 쓸 때 프랑스 친구가 농담처럼 "너의 성경"이라고 지칭했던 이 책은 정말 성경과 비슷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성경은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지만 텍스트에 감춰진 비밀과 숨은 의미는 텍스트와 일체가 되어 그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그리고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비유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무한정 가능하게 한다. 『에크리』도 마찬가지이다. 텍스트는 텍스트로 머무는 게 아니라 ‘나의‘욕망의 언어로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에크리』가 던지는 메시지이다.
이렇게 보면 『에크리』는 경직된 텍스트가 아니라 그 속에서 나와 너를 볼 수 있고, 동시에 그 옆에서 넌지시 자신을감추고 있는 라캉의 모습도 훔쳐볼 수 있는 거울 같은 것이다. 아니 『에크리』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요술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라캉이 말하는 "읽을 수 없음"이라는 단어는 역설적으로 『에크리』의 암호를 푸는 열쇠가 된다. - P29

그리고 세미나 XI에서 처음으로 비중 있게 다뤄진 ‘충동‘ 개념을 통해 라캉이 이제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관심을 옮겨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상징계가 주체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의미화의 세계라면 실재계는 상징계의 한계와 욕망의 절대성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충동들이 겨냥하는 부분 대상들은 충동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충동 자체는 계속되는 순환을 통해 만족을 누리는데, 그 중심에는 영원히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욕망 즉 결여가 놓여 있다. 충동이 겨냥하는 것은 상징계를 넘어서는 실재이다. 여러 모로 1964년의 세미나는 중요하다.
그리고 1964년에 라캉은 자신의 학설을 실천할 새로운 조직인 파리프로이트학교(Ecole Freudienne de Paris, 이하EFP)를 주도적으로 창립한다. 라캉이 보기에 정신분석이 주된 탐구 주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욕망의 현실이며, 그것을 새로운 이론을 통해 규명하고 임상적 영역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보다 엄격한 조직적 훈련을 통해 분석가를 양성해야했다. - P56

이처럼 라캉의 삶은 IPA와의 투쟁과 계속되는 조직의 분화와 재창립의 반복으로 점철된다. 라캉에게 사상은 양보의대상이 아니었으며, 그것의 실천은 욕망에 따라 행동하라는정신분석의 윤리에 의해 정당화된다. 물론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개인적 차원의 욕구와는 구별된다. 욕망의 본질은 구체적인 대상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며,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해주는 그런 것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언어적인 존재이고 언어는 언제나 인간을 속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무엇인가를 찾으며 그것이 욕망의 대상이라고 착각하지만, 어떤 대상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여는 끈질기게 인간을 괴롭힌다. 그러기에 욕망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복합적 관계 속에서 작용하면서 죽음까지 지속되는것이다. 라캉 이론과 실천 속에는 욕망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이 있다. 욕망이 인간의 고유한 본질이며, 정신분석은 욕망이 무엇이고 어떻게 욕망의 윤리에 충실해야 하는지를 이론적으로는 물론 실천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 말이다. - P58

레비스트로스, 알튀세르, 푸코 등 이상의 구조주의자들 명단에 우리는 『에크리』를 집필한 라캉을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주의자라 불리는 사상가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명칭으로 불리는 것을 몹시 싫어했지만 우리는 몇 가지 공통점을통해 구조주의를 정의할 수 있다. 구조주의자들은 주체 혹은의미적 차원보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영역인 상징적 질서가 더 본질적이라고 주장한다. 구조주의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À quoi reconnaît-on le structualisme」를 쓴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에 의하면 구조주의 사상의 첫번째 특징은 상징적인 것을 제3의 자율적 질서로 발견하고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상징적인 것은 차이화를 발생시키는 미분적인 관계들의 체계와 언어와 같은 구조의구성 요소가 만들어내는 특이성의 체계를 말한다. 구조주의에 의하면 주체의 행위와 의미는 구조의 요소들이 맺는 관계와 위치에서 발생하는 부차적 결과일 뿐이다. 다시 말해 자리들과 위치들이 그것을 점유하는 존재자나 현상보다 더 근본 - P64

적이라는 말이다. 당연히 이들은 자유, 의지, 실천 대신 인간의 죽음과 휴머니즘의 종말을 역설하고, 주체 없는 과정으로서 역사의 진행을 보여주려고 한다. 주체의 동일성을 부정하고 관념과 의미를 비의미적 요소들의 분산과 이동의 파생물로 본다는 점에서 구조주의는 전통적인 이성 중심주의 철학과 철저하게 대립된다. 라캉역시 상징계의 독립성과 우월성을 말하고, 주체를 언어의 효과로 본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라캉은 마지막까지 주체라는 개념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주체와 상징계의 관계에 욕망을 위치시키고, 욕망의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여타의 구조주의자들과는 다른 특이성을 보인다. 그리고 에크리』 이후 상징계를 벗어나고 그것에 저항하는 실재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론적인 전환을 보이기 때문에 라캉을 구조주의 테두리에만 묶어두려는 것은 자칫 라캉의 풍부한 이론과 문제의식을 박제화하거나 왜곡할 위험이 있다.
『에크리』가 출판된 1966년에는 구조주의 사유가 프랑스를 휩쓸고 있었다. 만약 『에크리』에서 제시되는 라캉 이론이 전통적인 데카르트적 주체를 부정하고, 상징계의 결정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라캉을 구조주의로 분류한다면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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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의 강의 4강을 게으름을 피우다 오늘 아침 듣고난 후, '욕망은 관계성 속에서 드러난다.' 여기에 포인트를 잡고 오늘의 일기를 시작.

"주체는 자신의 메시지를 타자로부터 전도된 형태로 받는다." - 라캉

어젯밤 아홉시 넘어서 민이가 베프들과 방학이 시작되고난 후 처음으로 영통을 했는데_ 각자 방학 동안 보지 말고 충실하게 시간을 보내도록 해보자_라고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아니 방학 동안에 보지도 않는 건 베프들 사이에서 가능한 일이니? 묻고 싶었지만 너희들끼리 그렇게 결정했다고 하니 뭐 하고 속말을 삼키고 말았다_ 장장 3시간 넘게 통화를 하더라. 적당히 하고 자라, 얘들아_ 하고 3시간 동안 끝없이 민이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지는 걸 닫힌 문 너머로 들으면서 으흠 했다. 통화를 끝내고 온 민이는 엄마, 우리 2월에 만나기로 했어! 라는 말을 했고. 아무리 민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내내 웃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3시간 동안이라는 제한 조건을 두고서라도 3시간 내내 저렇게 내 앞에서 웃는 일은 없다. 관계성. 어제 읽은 히파르키아가 떠올랐다. 길의 철학자 견유학파에 속하는 크라테스와 결혼을 한 히파르키아. 길에서 살았고 길에서 살면서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아 키웠다고 한다. 히파르키아가 맞선 상대를 만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아테네로 향하는 동안 내 미래의 배우자는 어떤 철학자를 읽을까나 궁금해할 때. 아테네에서 만난 맞선 상대는 몸도 좋고 집안도 좋고 인물도 훤칠하지만 책을 읽지 않아, 서재도 없어, 독서가 취미라는 히파르키아에게 어떤 장르를 읽으시냐 묻고 주로 철학서를 읽는다는 히파르키아에게 농담도 잘 하시는구려 너털 웃음을 짓는다. 크라테스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 남장을 하고 길에서 강의를 듣는 히파르키아. 평상시 모습으로 크라테스의 강의를 듣기 위해 다가갔다가 남자들에게 매춘부인가 라며 희롱을 당하던 히파르키아의 당황해하던 모습은 이후 크라테스와 결혼을 하고난 후 달라진다. 여자가 학문의 장에서 완벽하게 배제되었다는 걸 저 장면으로 캐치. 무수한 남성들이 득시글거리는 학교에서 가끔 한 명씩 특출난 여성이 있기도 했다는 기록들도 겹쳤고. 책의 절정은 크라테스에게 청혼을 하는 히파르키아. 히파르키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오빠가 크라테스에게 얘 좀 말려줘, 라고 사정을 하는 동안_ 크라테스는 걸치고 있던 옷을 다 벗어던지고 내가 가진 거라곤 이 몸뚱아리뿐, 나와 같이 살겠다고 한다면 나처럼 살아야 하는데 이게 가능하겠는가? 묻고 히파르키아는 순간의 주저함 없이 옷을 다 벗어버리고 나신의 몸으로 난 당신과 함께 하고 싶다, 당신과 말을 나누고 싶다, 한다. 민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한데 아이는 현재 읽고 있는 책을 다 읽고 읽겠다 하니 민이 생각은 다음 기회에. 관계성. 히파르키아를 읽고 히파르키아처럼 살고 싶은 어미를 이해해줄 수 있는지 더불어 너 역시 히파르키아처럼 사유하고 행할 수 있는지 그걸 딸아이에게 건네면서 묻고 싶은 마음. 마음들의 관계성. 아침밥 차려줄 때가 되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생각해보니 할아버지, 책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 집안에서 이 할애비 빼고 유일하게 책을 읽는 손녀딸이라며 좋아하셨다. 방학 때마다 책 사라고 용돈을 그득 주셨다. 책이, 활자가 네 날개가 되어줄 거다, 아가. 하고 할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그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어제 히파르키아를 읽는 동안. 할아버지와 나의 관계성. 히파르키아가 새장 안에서 키우던 새가 새장 밖을 벗어나 창공 속을 날아다닐 때, 아 안돼_ 나직하게 외치던 실망감. 며칠이 흐른 후, 생각에 잠긴 히파르키아에게 살풋 날아와 말을 건네듯 새가 그를 바라볼 때, 히파르키아가 결심을 했을 때, 그 장면들. 그 관계성 역시. 누가 누구를 읽는지, 누가 누구를 만나는지, 누가 누구를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내는지, 어떤 말을 주고받는지, 어떤 사유들 아닌 것들을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 그러니까 그 관계성에 따라서 삶은 바뀐다. 누군가는 내 날개옷을 훔치고 누군가는 내게 날개를 달아주고. 그러한 것들 또한. 동일하게 나 역시 누군가의 날개옷을 훔치려 하는 이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날개가 되어줄 것이다. 관계성의 고찰. 왜 또 갑자기 메를로 퐁티인지는 사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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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1-27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청혼 장면 저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완전 멋있네요. 결국은 말이 통하는 사람에게, 갈 수 밖에 없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용해주신 문장 보고 속으로 그랬어요. ˝라캉씨, 기다려요........˝

수이 2024-01-27 15:31   좋아요 1 | URL
카페에서 진심으로 빵 터져서 엄청 웃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캉씨 기다려요, 이거 제목으로 써서 페이퍼 써줘

단발머리 2024-01-27 15:33   좋아요 1 | URL
이 댓글을 강명씨가 싫어합니다😆😆😆😆😆

수이 2024-01-27 16:20   좋아요 1 | URL
강명씨보다는 라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