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의 강의 4강을 게으름을 피우다 오늘 아침 듣고난 후, '욕망은 관계성 속에서 드러난다.' 여기에 포인트를 잡고 오늘의 일기를 시작.

"주체는 자신의 메시지를 타자로부터 전도된 형태로 받는다." - 라캉

어젯밤 아홉시 넘어서 민이가 베프들과 방학이 시작되고난 후 처음으로 영통을 했는데_ 각자 방학 동안 보지 말고 충실하게 시간을 보내도록 해보자_라고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아니 방학 동안에 보지도 않는 건 베프들 사이에서 가능한 일이니? 묻고 싶었지만 너희들끼리 그렇게 결정했다고 하니 뭐 하고 속말을 삼키고 말았다_ 장장 3시간 넘게 통화를 하더라. 적당히 하고 자라, 얘들아_ 하고 3시간 동안 끝없이 민이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지는 걸 닫힌 문 너머로 들으면서 으흠 했다. 통화를 끝내고 온 민이는 엄마, 우리 2월에 만나기로 했어! 라는 말을 했고. 아무리 민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내내 웃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3시간 동안이라는 제한 조건을 두고서라도 3시간 내내 저렇게 내 앞에서 웃는 일은 없다. 관계성. 어제 읽은 히파르키아가 떠올랐다. 길의 철학자 견유학파에 속하는 크라테스와 결혼을 한 히파르키아. 길에서 살았고 길에서 살면서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아 키웠다고 한다. 히파르키아가 맞선 상대를 만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아테네로 향하는 동안 내 미래의 배우자는 어떤 철학자를 읽을까나 궁금해할 때. 아테네에서 만난 맞선 상대는 몸도 좋고 집안도 좋고 인물도 훤칠하지만 책을 읽지 않아, 서재도 없어, 독서가 취미라는 히파르키아에게 어떤 장르를 읽으시냐 묻고 주로 철학서를 읽는다는 히파르키아에게 농담도 잘 하시는구려 너털 웃음을 짓는다. 크라테스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 남장을 하고 길에서 강의를 듣는 히파르키아. 평상시 모습으로 크라테스의 강의를 듣기 위해 다가갔다가 남자들에게 매춘부인가 라며 희롱을 당하던 히파르키아의 당황해하던 모습은 이후 크라테스와 결혼을 하고난 후 달라진다. 여자가 학문의 장에서 완벽하게 배제되었다는 걸 저 장면으로 캐치. 무수한 남성들이 득시글거리는 학교에서 가끔 한 명씩 특출난 여성이 있기도 했다는 기록들도 겹쳤고. 책의 절정은 크라테스에게 청혼을 하는 히파르키아. 히파르키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오빠가 크라테스에게 얘 좀 말려줘, 라고 사정을 하는 동안_ 크라테스는 걸치고 있던 옷을 다 벗어던지고 내가 가진 거라곤 이 몸뚱아리뿐, 나와 같이 살겠다고 한다면 나처럼 살아야 하는데 이게 가능하겠는가? 묻고 히파르키아는 순간의 주저함 없이 옷을 다 벗어버리고 나신의 몸으로 난 당신과 함께 하고 싶다, 당신과 말을 나누고 싶다, 한다. 민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한데 아이는 현재 읽고 있는 책을 다 읽고 읽겠다 하니 민이 생각은 다음 기회에. 관계성. 히파르키아를 읽고 히파르키아처럼 살고 싶은 어미를 이해해줄 수 있는지 더불어 너 역시 히파르키아처럼 사유하고 행할 수 있는지 그걸 딸아이에게 건네면서 묻고 싶은 마음. 마음들의 관계성. 아침밥 차려줄 때가 되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생각해보니 할아버지, 책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 집안에서 이 할애비 빼고 유일하게 책을 읽는 손녀딸이라며 좋아하셨다. 방학 때마다 책 사라고 용돈을 그득 주셨다. 책이, 활자가 네 날개가 되어줄 거다, 아가. 하고 할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그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어제 히파르키아를 읽는 동안. 할아버지와 나의 관계성. 히파르키아가 새장 안에서 키우던 새가 새장 밖을 벗어나 창공 속을 날아다닐 때, 아 안돼_ 나직하게 외치던 실망감. 며칠이 흐른 후, 생각에 잠긴 히파르키아에게 살풋 날아와 말을 건네듯 새가 그를 바라볼 때, 히파르키아가 결심을 했을 때, 그 장면들. 그 관계성 역시. 누가 누구를 읽는지, 누가 누구를 만나는지, 누가 누구를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내는지, 어떤 말을 주고받는지, 어떤 사유들 아닌 것들을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 그러니까 그 관계성에 따라서 삶은 바뀐다. 누군가는 내 날개옷을 훔치고 누군가는 내게 날개를 달아주고. 그러한 것들 또한. 동일하게 나 역시 누군가의 날개옷을 훔치려 하는 이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날개가 되어줄 것이다. 관계성의 고찰. 왜 또 갑자기 메를로 퐁티인지는 사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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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1-27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청혼 장면 저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완전 멋있네요. 결국은 말이 통하는 사람에게, 갈 수 밖에 없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용해주신 문장 보고 속으로 그랬어요. ˝라캉씨, 기다려요........˝

수이 2024-01-27 15:31   좋아요 1 | URL
카페에서 진심으로 빵 터져서 엄청 웃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캉씨 기다려요, 이거 제목으로 써서 페이퍼 써줘

단발머리 2024-01-27 15:33   좋아요 1 | URL
이 댓글을 강명씨가 싫어합니다😆😆😆😆😆

수이 2024-01-27 16:20   좋아요 1 | URL
강명씨보다는 라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