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에서나 서평에서나 예외와 배제를 실천한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가 위대한 영국 소설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비평가는 애써 울프가 예외임을 보여 줄 수 있다. 멋진 요행이라고말이다. 예외와 배제의 수법은 다양하다. 여자 작가는 소설의 "주류"에 속하지 않았다고 밝혀진다. 그 작가의 글은 "독특하며 후대작가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어떤 "컬트"의 대상이다.
그 작가는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가슴 저미고, 감성적인 연약한 온실의 꽃이며 그러니 남성 소설가의 강력하고, 선 굵고, 대가다운) 활력과 경쟁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 P164

제임스 조이스는 거의 나오자마자 정전의 반열에 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전에서 배제되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여졌으며그러고도 수십 년간 의구심을 샀다. 정교하고 효과적인 서술 기법과 장치를 갖춘 『등대로』 쪽이 기념비적인 막다른 길인 『율리시스』보다 후대 소설 쓰기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는 주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침묵, 유배, 교묘함"을 선택하고 은둔 생활을 한 제임스 조이스는 스스로의 글과 경력 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나라에서 지적, 성적, 정치적으로 활발한 사람들이 이루는 비범한 집단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어른이 된 후 내내 다른 작가들을 읽고, 서평을 쓰고, 출간했다. 제 - P164

임스 조이스가 연약한 쪽이고, 버지니아울프가 굳센 쪽이다. 조이스가 컬트의 대상이고 우연이며, 울프는 20세기 소설의 중심에서지속적으로 풍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정전주의자들은 결코 여자에게 중심을 부여하지않는다. 여자들은 반드시 주변에 남겨져야 한다.
어떤 여자 소설가가 1급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배제 수법은 여전히 작동한다. 제인 오스틴은 존경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어떤 본보기로 여겨지기보다는 독특하고 흉내 낼 수 없는놀라운 우연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실종될 순 없어도, 완전히 포함되지도 않는다.
작가 생존기에 일어나는 폄하, 누락, 예외화는 작가의 죽음이후 일어나는 실종의 준비 작업이다. - P165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SF 쓰는 방법 배우기


시도하는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은 아니지만, SF를 읽은 적이 없다면 SF를 쓸 수가 없다. 하지만 다른 것을 읽은 적이 없어도SF를 잘 쓸 수 없기도 하다. 장르는 윤택한 방언과 같아, 그 언어를쓰면 어떤 것들을 특별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보편 문학 언어와의 연결을 포기해 버린다면 내집단에게만의미가 있는 은어가 되어 버린다. 장르를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유용한 본보기들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전복적이었던 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면서 많이 배웠다.
올랜도Orlando』를 읽었을 때 나는 열일곱살이었다. 그 나이에는 그 책이 반은 계시 같고 반은 혼란이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 - P171

다. 작가가 우리와 많이 다른 사회를, 아주 색다른 세상을 상상하고극적으로 살려 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엘리자베스 시대 장면들을, 템스 강이 얼어붙은 겨울을 생각하고 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나는 그곳에 있었고, 얼음 속에 타오르는 모닥불들을 보고 500년전 그 순간의 경이로운 기이함을 느꼈다. ‘완전히 다른 어딘가‘로 실려 가는 진짜 설렘이 있었다.
울프는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마구 쌓이지도 않고 설명이붙지도 않는 정확하고 구체적이며 자세한 묘사가 비결이었다. 독자가 상상력으로 그림을 채워 넣어 선명하고 완전하게 보도록 북돋는, 고도로 선별한 선연하고 효과적인 심상이었다. - P172

소설 『플러시 Flush』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개의 마음속으로들어가는데, 말하자면 비인간의 뇌이자 외계의 정신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대단히 SF적이다. 다시 한 번, 그 책에서 내가 배운 것은정확하고 선명하고 고도로 선별된 세부 사항이 가진 힘이었다. 울프가 글을 쓰느라 앉은 추레한 안락의자 옆에서 자고 있는 개를 내려다보며 ‘무슨 꿈을 꾸고 있니?‘라고 생각하고 귀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바람 냄새를 맡으며……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개의 세상에서, 산에 나가서 토끼를 쫓고 있는 개……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의 눈을 통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 P172

우리 손끝에 달린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 읽기를 익힌 고집스럽고 내구력 있는 소수가 오랫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으리라 믿는다. 종이든 화면이든 찾을 수 있다면어떻게든 읽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그 경험을공유하고 싶어 하기에, 그리고 아무리 막연하다 해도 그 공유가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어떻게 해서든 책이 다음 세대에도 존재하도록만들고야 말 것이다.
기술 세대가 아니라 인간 세대 말이다. 지금 기술의 한 세대는 생쥐 수명만큼 짧아질 판이고, 이러다가는 초파리 수명만큼 짧아질지도 모른다.
책의 수명은 그보다는 말이나 인간의 수명, 때로는 참나무, 심지어는 레드우드의 수명과 비슷하다. - P183

문학 소설을 장르소설과 대립시킬 때의 문제점은, 소설 종류의 합리적인 차이를 말하는 척하면서 비합리적인 가치 판단을숨긴다는 겁니다. 문학이 우월하고, 장르가 열등하다고 말이죠. 이건 편견에 불과해요. 우리는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지적인 토론을 해야 합니다. 많은 영문학과가 다가오는 우주선을 다 쏘아 떨어뜨려서 담쟁이 우거진 상아탑을 지키려는 시도를 그만뒀습니다.
많은 비평가가 많은 문학이 근대 리얼리즘의 성스러운 숲 바깥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문학과 장르의 대립은 남았고, 그게 남아 있는 한 잘못된 단정적 가치 판단도들러붙어 있을 겁니다.
이 지겨운 곤경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한 가지 가설을 제안하죠.
문학은 문자 예술의 현존체이다.
모든 소설은 문학에 속한다. - P186

우리, 미국인들은 첫 번째 종류를 더 편안해하는 편이에요.
우리는 뭔가를 지어내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사실"과 "실제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편안해하죠. 우리는 "리얼리티"에 대해 말해주는 이야기들을 원해요. 어쩌나 원하는지, 심지어는 완전히 가짜상황을 꾸며 놓고 찍으면서 그걸 리얼리티 TV"라고 부를 정도죠.
이 모든 것들의 문제는, 당신의 진짜는 나의 진짜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현실(리얼리티)을 같은 방식으로 인지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현실을 아예 인지하지 못하죠. 폭스 뉴스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리얼리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이런 차이가아마 우리에게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일 거예요.
‘사실(fact)‘이 우리의 공통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상식같지요. 하지만 사실, ‘사실‘은 너무나 구하기 어렵고, 너무나 관점에 달려 있으며, 너무나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차라리 소설에서나 - P190

서로 공유하는 현실을 만날 수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답니다. 실제로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었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실제 사람은 아니지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도 있을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읽어 줌으로써 우리는 상상의 문을 열어요. 그리고 상상은 우리가 서로의 머리와 마음에 대해 알 가장 좋은 방법,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지요.
글쓰기 워크숍에서 저는 오직 회고록만 다루고 싶어하고,
자기들의 경험과 자기들의 이야기만 하고 싶어 하는 작가들을 많이 만나 봤어요. 그런 분들은 이렇게 말할 때가 많지요. "전 뭘 지어낼 수가 없어요. 그건 너무 힘들어요. 하지만 일어난 일은 말할수 있죠." 그분들에게는 경험을 재료로 써서 이야기를 짓는 것보다,
경험을 바로 가져다 쓰는 게 더 쉬운 모양이에요. 그분들은 일어난일을 그냥 쓸 수 있다고 여기죠. - P191

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걸 조작하기 시작한다면, 그러니까 일이 멋지고 깔끔한 이야기가 되는 방향으로 일어난 척하려다간 상상을악용하는 거예요. 지어낸 걸 사실인 척하는 거고, 그건 적어도 아이들이라면 거짓말이라고 할 일이죠.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소설은 사실 파악이나 거짓말이 아닌 다른 층위의 현실로 넘어가죠.
상상과 소망 충족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둘 다글쓰기에서나 삶에서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소망 충족은 현실에서 잘라 낸 생각이고, 어린아이 같을 때가 많지만 위험할 수 있는방종이에요. 상상은 아무리 마구잡이일 때라 해도 현실과 떨어져있죠. 상상은 현실을 알고, 현실에서 출발하고, 돌아가서 현실을풍성하게 만들어요. 돈키호테는 기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푹 빠진 나머지 현실과의 접점을 잃고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죠. 그게 소망 충족이에요.  - P192

미겔 세르반테스는 기사이고 싶어 하는 한 남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전함으로써 우리의 웃음과 인간이해를 크게 증대시켰어요. 그게 상상입니다. 소망 충족은 히틀러의 천년왕국이고, 상상은 미합중국 헌법이에요.
이 차이를 알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위험해요. 우리가 상상을 현실과 아무 관계도 없는 한갓 현실도피라 여기고, 그래서 믿지않고 억누른다면, 상상은 손상되고 왜곡되어 침묵에 빠지거나 거짓말을 하게 될 거예요. 모든 기본적인 인간 능력이 다 그렇듯, 상상력도 어려서부터 평생 연습하고 단련하고 훈련해야 해요. - P192

상상력을 연습하는 좋은 방법 하나는, 어쩌면 제일 좋은 방법은 지어낸 이야기들을 듣고 읽고 말하거나 쓰는 거예요. 훌륭한창작이라면, 아무리 기발하다 해도 현실과 일치하는 지점과 내적일관성이 있어요. 그냥 소망 충족의 헛소리이거나, 서사인 척하는설교에는 지적인 일관성과 진실성이 없어요. 온전하지 않고, 유효하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않아요.
스스로에게 충실한 이야기를 읽거나 말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건 정신이 받을 수 있는 거의 최고의 교육입니다. 여기 미국에서조차도, 많은 이들이 아이들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샬럿의 거미줄>같이 상상력 풍부한 책을 읽히죠. 고등학교에서는SF와 판타지가 드디어 영문학 커리큘럼으로 인정이 됐어요.  - P193

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말해야만 하는 내용을 할 수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말하며, 그것이 이야기 자체의 정확한 말(words)입니다. 그래서 말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고, 그래서 말을 제대로 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그토록 오래 걸리는 거예요. 침묵과어둠, 시간과 인내심, 그리고 어휘와 문법에 대한 탄탄한 진짜 지식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경험에서 길어낸 진실한 상상은 알아볼 수 있으며, 독자들도 공유한답니다. 위대한 상상 이야기들에는 어떤 메시지든 넘어서는 의미가 있고, 수백 년이 넘도록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의미를 갖습니다. 『오디세이』, 『돈키호테」, 「오만과 편견, 크리스마스캐럴』, 『반지의 제왕』, 『뿔 속의 꿀』, 『점프오프 크리크』. 이 중에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어요. 다 순수한 허구죠. 그리고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이며,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더 큰이야기에, 인간의 역사에, 인간 존재의 리얼리티에 포함시키는 작품들이죠. - P195

바로 그래서 저는 소설을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지어 보라 격려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말을 제대로 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하죠. 말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자면 시간이 좀 걸려요. 연습이 필요하죠. 노력이, 그것도 몇 년의 노력이 필요하고요.
그러고 나서도 여러분이 쓴 글이 영영 출간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출간된다 해도 여러분이 생계를 꾸릴 정도로 팔리지 않을 게 거의확실해요. 하지만 그게 여러분이 원하는 거라면 그 무엇도, 세상그 무엇도 여러분에게 글쓰기보다 더 달콤한 보상을 줄 순 없어요.
글을 쓰는 일 자체도, 그리고 자신이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말을 제대로 하고 있으며 이야기를 만들고 진실하게 말했다는사실을 아는 것도 엄청난 보상이죠. 진실을 말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고, 희귀한 일이에요. 즐기세요! - P196

어떻게 하면 전자출판과 인터넷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용해서 쓰고 싶은 걸 쓰고 그 대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전 좋은 생각을 해내기엔 너무 늙었어요. 여기 온 여러분들은 답을 생각해 내야 할 거예요. 그리고 생각해 낼 겁니다.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
가끔은 모든 사람이 쓰고만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제 말 믿으세요.
더 많은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 그리고 자본주의 기술이 만든거대 기계의 뒷구멍과 틈 속 어딘가에서 작가들과 독자들은 언제나 그랬듯 서로를 찾아낼 거예요. 그렇게 되게 만드는 게 여러분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알기만 한다면, 방법은 여러분이 찾아낼 겁니다. 여러분에게 용기를, 그리고 세상 모든 행운을 빕니다.
- P198

이 소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이 굉장한 비중을 차지하던대공황기에 쓰였다. 이 소설이 그리는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이다. 기술 변화의 속도를 감안하면, 그 한 세기는 인간 역사에서 가장 긴 100년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데이비스가 그리는 그림이 무의미할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매혹적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인간이 문화를 시작하고부터 지금의 한두 세대 이전까지는 모두가 데이비스가 그리는 일의 세계 속에 살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가치는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아주 쉽게 그 세계로 돌아갈수 있다는 사실도. - P210

선연하고 박력 있는 언어, 건조하고 장난스러운 유머 슥슥휘두르는 붓질로 표현하는 광활한 풍경, 스스로와 두 산맥에 걸쳐있는 다른 모두에게 요란한 말썽을 일으키는 괴팍한 인물들 떼거리를 보면서도 이 책이 나에게 남긴 본질적인 느낌은 외로움이다.
아니면 미국식으로, 고독함이라고 할까. 고독한 사람들 거부감이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고독한 히어로를 찬양할지 모르나, 그런영웅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고독이란 우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TV와 휴대전화와 소셜미디어 덕분에 벗어난 무엇이다. 그렇다 해도, 많은 사람들이 서부에 그 고독을 찾으러 갔다. 공간을, 빈자리를, 정적을 말이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지만, 영혼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고독을 갈망한다.  - P210

어떤 목표도 이루지 못하고, 심지어 어지간히 이해가 가는일조차 해내지 못했다 해도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격렬한 생명력을 지녔다. 터무니없이 비극적이고, 고통스럽게 웃기고, 모든 도피처가 그렇듯이 저속하다. 광대하고 무관심한 오리건 풍경 전체에데이비스는 이단아와 외톨이들의 대열을 반대하는 목소리들로 이루어진 미친 교향곡을, 고집스러운 영혼들의 순례를 보낸다. 나는그 속에서 조금은 마지못해, 또 조금은 안도하고 어쩌면 기쁘기까지 한 마음으로, 내가 아는 시골 사람들을 본다. 인간으로 사는 방법을 찾는 비범한 미국의 실험에서도 가장 끝자락, 머나먼 서부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으로. - P213

개연성이야 관심 없다는 듯 무작위적인 일이 거듭 일어나고, 현실처럼 보이는 것과 현실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점점 서로를침투하면서 우리는 딕의 심연 가장자리로 끌려간다. 가능과 불가능, 진짜와 가짜, 역사와 창작의 괴리…… 일어난 일과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 일어나지 않은 일,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대치하는 영역, 단단한 바닥도 없고 믿을 수 있는 것도 없는 장소 아닌 장소……이 정신적 소용돌이에서 보는 딕의 상상은 지독히도 친숙하며, 딕은 이 소용돌이를 독자들에게 직설적이고 그럴듯한 방식으로, 아주 평범한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소설가들이 산책이나 디너파티를 묘사할 때처럼차분하게 우리가 아는 세상을 해체한다. 무섭도록 전복적이다. - P223

자신의 계급과 문화에 맞게 침착하면서도 극도로 절박하게 쓰였고, 불꽃놀이 같은 창의력 뒤에 난해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동기들을 숨겼으며, 쾌락을 혐오스럽고 모멸적인 것으로 그리고 자유를 무분별의 자격증으로 그리면서 쾌락과 자유 말고는 추악한 세계로부터 탈출할 다른 선택지를 내밀지 않는 『멋진 신세계는 심란하고 골치 아픈 책이며, 불안의 시대가 낳은 걸작이고,
20세기의 고통을 담아낸 선명한 기록이다. 그리고 또 아마 올더스헉슬리가 80년도 더 전에 그 태동을 보았던 길로 문명을 계속 끌고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아주 이른, 그리고 유효한 경고일것이다. - P235

어떤 독자들에게는 이것이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문제일수도 있다. 이 책이 대놓고 제기하는 역설적인 질문들, 그 밀도 높고경이로운 이미지로 우리를 괴롭히며 모든 정보를 불신하도록 자극하고, 우리가 환각을 뚫고 어쩌면 이 또한 착각일 수 있는 통찰에 이르게 하는 질문들보다 더 말이다. 반드시 물어야 하지만 답은 없는질문들을 묻는 것, 잊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이미지들을 창조하는 것…… 이거야말로 가장 대담한 예술가들의 특권이다. - P242

침묵당한 이들을 위해 말하는 일과, 그들의 목소리를 끌어들여 화자의 목소리로 묻어 버리는 일은 다르다. 후자와 같은 잘못을 너무나 오랜 기간 저질렀기에, 어쩌면 정직한 선의 선행을 아무리 쌓는다 해도 인디언에 대해 쓰는 백인 소설가(또는 회고록 저자,
또는 인류학자)가 또 강탈하겠구나 하는 의심을 완전히 씻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인디언과 백인이 관계를 맺은 역사 전체에서 죄의식은 피할 수가 없다.
죄의식이란, 죄의식을 인정함으로써 더 나은 곳으로 갈 수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주로 인디언 작가와 활동가들이 쉼 없이 의식화해 준 덕분에 우리는 서서히 더 나은 곳으로 향했다. 백인 작가들은 열렬한 동일시가 역겨운 침해일 수 있고,
이상화는 악마화 못지않은 모욕일 수 있음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이제 순진하게도 "인디언의 관점에서 소설 쓰기에 나서는 사람은별로 없다. - P253

50년 전의 9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가 영어로, 여기 미국에서 출간됐다. 작가는 자기 나라에서 이책을 출간하지 못했다. 10.
이 책은 그해 10월 내 스물여덟 살 생일선물이었다. 나에게 충격을 안긴 책이었다. 1950년대에는 냉전이 우리의 생각을 흐렸고, 이 책에 담긴 복잡한 정치적 입장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감정으로 이해되는 책이었다. 맹렬하게 지적인 책이지만, 반드시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파스테르나크는 우리에게 인간 역사의 기묘한 한 시기에대해 이야기할 능력을 갖춘 신비주의 리얼리즘 작가였다. 위대한 - P261

1917년 혁명기에 평범한 러시아인들이 보내는 매일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이다. 모든 것이 바뀌고, 친숙한 것들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거칠게 세워지더니 또 갑자기 무너져 내리고, 분파간 전쟁과 파괴가 끝없이 이어지던 신념과 이상의 거대한 혼돈 - 그리고 어떻게인가 그 혼란을 매일매일 헤쳐 나가는 평범한 사람들정신적인 회복력을다른 피난민들로 미어터지는 화물차에 아내와 아이와 함께 올라 모스크바에서 우랄까지 가는 유리 지바고의 긴 기차 여행과도 같은 이 엄청난 여정에 돌아가게 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책에는 시베리아의 눈밭 속 선로에 시커멓게 죽은 채로 서 있는텅 빈 기차처럼 잊을 수 없는 심상이 가득하다. 그리고 유리가 우랄에서 모스크바까지의 먼 길을 홀로 걸어서 돌아가는 동안 바람이 아니라 쥐 떼로 일렁이고 바스락대는 무르익은 곡물 밭을 말하는(마을 사람들은 죽어서 작물을 베지 못했고, 쥐들은 수백만으로 불어났기에) 그 조용하고 무시무시한 문장들이란. - P262

이 책은 모두 여행과 헤어짐과 만남이다. 등장인물 수십 명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그들은 열렬한 사랑으로 이어지지만 서로를 붙들고 있지 못하고, 열렬한 미움은 사랑만큼이나 끈끈하게 그들을 묶는다. 그들은 만났다가 헤어지고울고 다시 만나고도 만났음을 알지 못한다. 무질서가 아니라, 거대한 기차역의 선로들처럼 다루기 힘들고 복잡한 상호연결이다. 이 모든 교차하는 운명들, 진지하게 애쓰는 이 모든 영혼들, 모두가 혁명이라는 거대한 - P262

바람에 날려가는 먼지처럼 무력하다.
지금 나는 내가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소설 쓰는 방법을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올바른곳에 착륙하는 방법, 감정을 구현하는 정확한 상세 기술(記述), 더많이 생략해서 더 많이 얻는 방법…….
이건 거대한 책이다. 500페이지 분량은 러시아 전역과 40년의 역사, 한사람의 일생과 꿈을 담아낼 만큼 길지는 않다. 그러나 이책은 한 인간의 영혼처럼 방대하다. 여기에는 막대한 고통과 배신과 사랑이 담겨 있다. 내가 사랑하는 작품이거니와, 이건 위대한러시아 소설의 마지막 작품일지 모른다. 끔찍한 시기에 나온 이 아름답고 숭고한 증언은. - P263

그런데 그 덤불 속을 계속 나아가다 보니 곧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돌려 말해도 악몽이었다. 이전에 읽었던 현실적인 스릴러들도 이 책에 비하면 커스터드 크림이나 다름없었다. 한도시의 모든 사람이 갑자기 눈이 먼다는 아이디어, 그것도 한꺼번에도 아니고 며칠에 걸쳐 무작위로 눈이 먼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끔찍하다. 평범한 한 사람 한사람의 눈을 통해(문자 그대로) 상황을 묘사하는 사라마구의 단조롭고 고요한 이야기 투는 그공포를 더 뼈저리게 전한다. 통제해 보려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그 노력 때문에 도시는 빠르게 무너져 내린다. 눈먼 운전자들이 자동차를 몰고, 집집에 불이 나고, 공황에 빠진 군인들이 공황에 빠진 시민들과 마주한다. 초반에 눈이 먼 사람들을가둔 폐쇄된 정신 병원은 곧 두렵고 약해진 상태가 사람들에게 불러낼 수 있는 최악이 농축된 지옥으로 변한다. 괴롭힘, 노예화, 까닭 없는 잔인함, 강간……. 이 시점에서 나는 독서를 멈췄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 P265

정확히 말하면, 영어로 구할 수 있는 모든 작품을 다 읽었다. 사라마구는 모어인 포르투갈어로 글을 쓴다. 그의 소설들을탐색하면서 나는 작가 본인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그는 훌륭하고 솔직하며 설득력 있고 신중한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우리가 알아야 한다 싶은 내용을 다 말해 줬다. 1922년에 어느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열네 살이 될 때까지 맨발로 다녔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돼지 여섯 마리로 생계를 꾸렸고, 추운 밤이면 약한 새끼돼지들을 침대에 데리고 들어가 재웠다. 그는 가난 때문에 대학으로 이어지는 학교로 가지 못하고 직업 학교에 갔으며, 몇 년간 정비사로 일하다가 문학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노벨상 연설에서 쓰기를 "(이들이) 제가 알던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국가와 대농장 지주들의 공범이자 수혜자였던 카톨릭 교회에 속은 사람들, 끊임없이 경찰의 감시를 받는 사람들, 제멋대로 휘두르는 거짓 정의에 수없이 당한 무고한 피해자들.....… 그래도 저는 광활한 알렌테주 평원에서 제게 주어졌던 존엄의 예시와 같은 위대함을 조금 더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아직은 잃지 않았어요." - P266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지금도 공산주의자다. 44세가되었을 때 첫 시집을 냈다. 여러 신문에 글을 쓰고 사설과 에세이를 냈으며, 몇 년간은 번역가로 일하면서 콜레트와 톨스토이 같은작가들을 포르투갈어로 옮겼다. 1980년대, 60대가 되어서야 모든에너지를 소설 쓰기로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소설수도원의 비망록Memorial do convento』은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그때부터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미국의 후원을 받고 있는이스라엘의 정책들에 대해 공공연히 비판한 대가를 몇몇 비평으로 치르기는 했지만, 비평가들은 그의 정치 견해를 무시할 때가 많아 보인다. 지금 누군가가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고수할 수 있다는생각 자체를 무시한달까. 실제로 그러려면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인 소설가는 아니고, 설교하려 드는 소설가는 전혀 아니다. 그의 소설 주제는 복잡하고, 솔직하면서도 교묘하다. - P267

그에게는, 젊었을 때 우리가 모두에게 말하던 내용을 또 말하려 드는 젊거나 젊어지고 싶어 하는 작가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 질린 나이 든 독자들까지 포함해서, 모두에게 들려줄 소식이 있다. 사라마구는 힘겹게 헐떡이는 수십 년 세월 모두를 뒤로했다. 그는 성장했다. 젊음을 광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에게는 이단의 말이겠지만, 사라마구는 남자로서나 사람으로서나 예술가로서나 젊은 시절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가되어 보았고 더 배웠다. 20세기 대부분을 보았고 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졌으며,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하고 그 중요한 것을 어떻게 말할지 익혔다. 사라마구가 이야기할 때 쓰는 에너지와 장악력은 경이롭다. 그는 나와 같은 세대의 소설가 중에서 내가 몰랐던것, 아니 어쩌면 내가 아는 줄 몰랐던 것들을 말해 주는 유일한 소설가다. 내가 아직도 배우게 되는 유일한 소설가다. 그에게는 우리가 부족하나마 지혜라고 부르는 예리하고도 꾸밈없는 이해력을 얻어 낼 시간과 용기가 있었다. 지혜라고는 부르지만 흔히 지혜라고딱지 붙이는 번지르르한 다독임이 아니다. 그는 전혀 사람을 안심시키지 않는다. 체념하라는 조언을 읊어 대진 않지만, 친절한 트릭스터인 희망에 대해서도 별로 확신하지 않는다. - P271

모국에 대한 그의 사랑이 전자책 앤솔러지로 나온 유일한 논픽션 작품인 포르투갈로 가는 여행 Viagem a Portugal』의 원동력이다. 이 책은북쪽부터 남쪽까지 포르투갈을 훑는 자세한 여행 안내서이면서또한 발견과 재발견의 항해요, 정부의 종교적인 편협 행위에 대한저항으로 몇 년 동안이나 스스로 떠나 있었던 나라로 (돌아)가는여행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근본이 보수적이었는데, 이 말은사라마구가 경멸하는 네오콘들의 반동적인 헛소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무신론자이자 사회주의자로서 그는 그냥 믿음이나 견해가 아니라 합리적인 신념에 따라 발언하고 그 발언으로 고통받았다. 그 신념이란 거의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는 또렷한 윤리 체계에 기반하는데, 한 문장이기는 해도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영적 함의를 담고 있다. 그건 바로 ‘너보다 약한 사람들을해치는 건 잘못이다‘라는 문장이다 - P272

사라마구는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은 우주의침묵이고, 인간은 그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침이다." 그가 그렇게 극적인 경구를 내놓을 때는 자주 없다. 나라면 신에 대한 사라마구의 평소 태도를 꼬치꼬치 따지고, 회의적이고, 유머러스하고, 끈기 있다고 표현하겠다. 흔히 보는 절규하는 전문 무신론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무신론자이고 교권 반대론자이며 종교를 믿지 않고, 신실한 지도자들도 당연히 그를 싫어하거니와 그역시 진심으로 그들을 싫어한다. 매혹적인 책 노트북 The Notebook』(2008년과 2009년에 쓴 블로그 모음)에서 그는 10세 소녀의 결혼을 합법화함으로써 소년애 행위를 합법화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프티(율법학자)를, 또 사제들이 벌이는 소년애를 저주하기를 너무나 꺼리는 로마 교황을 혹평하는데, 이 또한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을 심하게 해치는 문제다. 사라마구의 무신론은 페미니즘의 한 조각이고 그의 페미니즘은 여자들에 대한 학대와 저임금 지불과 평가 절하에 대한 격분, 모든 사회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권력을 오용하는 방식에 대한 격노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그에게는 사회주의의한 부분이다. 그는 약자 편에 서 있다. - P273

노벨상 연설에서 사라마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가 사는 작은 경작지 너머로 모험을 떠날 수도 없었고 그러지도 않았기때문에, 남은 가능성이라곤 뿌리를 향해 땅속을 파고 들어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제 뿌리일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야심을 부려도 된다면 세상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그 힘겹고 끈기 있는 파내려가기가 이토록 가볍고 기분 좋은 책에 깊이와 무게를 더한다. 16세기 유럽의 어리석음과 미신 속을 여행하는 코끼리 이야기라면 우화가될 수도 있었겠으나, 이건 그냥 우화가 아니다. 여기엔 교훈이 없다.
행복한 결말도 없다. 그렇다, 솔로몬은 비엔나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2년 후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의 발자국은 독자의 마음속에 발자국을 남길 것이다. 흙 속에 찍힌 깊고 둥근 그 발자국은 오스트리아 궁정이나 지금까지 알려진 다른 어디도 아니고, 어 - P286

쩌면 좀 더 영속적인 가치가 있는 방향을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그 발자취는 이제 흙이나 책장, 머릿속만이 아니라 전자 위에도 찍혔다. 이제는 우리 컴퓨터의 진동 속에도 있고, 우리 화면의상징으로도 빛 자체만큼 무형이면서도 실제로서 존재하여, 앞으로 볼 모든 사람이 보고 읽고 따라가게 될 것이다. 사라마구는 심금을 울리는 품위와 재치를 담아, 그리고 자기 작품을 완전히 제어하는 위대한 예술가답게 단순하게 글을 쓴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원로이며 눈물이 있는 남자, 지혜로운 남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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