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도『타임머신』에서 음침한 몰록과 무기력한 엘로이라는 인류분화가 일부러 사회 계급 체계를 인간 유전자에 짜 넣은 것이라면, 그 역효과는 무시무시하다. 귀족들은 노동 계급의 고기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모로 박사의 섬』에 나오는 사고 실험의 결과도 나을 게 없다. 유전 법칙을 잘 모르던 시절 소설의 무대 속에서, 강박에 사로잡힌 과학자가 벌인 진화 조작은 오직 괴물들만 낳는 끔찍한 실패이다.
「달의 첫 방문자』에서는 실험 조건이 다르고 결과도 모호하다. 다양한 쓰임과 장점으로 스스로를 선택하고 개량하는 존재는인간이 아니라 외계인, 월인들이다. 월인(Selenites)들이 이성적이고실용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적 곤충들은 오랜 시간의 무작위 선택에 의해 맡은 일에 완벽하게 맞도록 만들어졌기에, 월인들은 유전자 통제와 태아나 유아 조작을 통해 신중하게 자신들을 개량하여, 가난도 폭력도 없는 효율적이고 평화로우며 조화로운 사 - P304

회를 만들었다. 그들의 고도로 전문화한 개별 신체가 인간의 눈에기괴하고 무서워 보인다는 점은 그들의 도덕성이 아니라 우리의편견을 비춘다. 미학적으로는 우리에게 소름 끼치는 존재지만, 윤리적으로는 아마도 우리보다 우월하지 않을까?
웰스는 이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판단을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에는 특히 부족한 서술자 두 명에게 맡김으로써, 결국 판단을 독자에게 맡긴다.
주요 서술자인 베드퍼드는 무엇에든 준비되어 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는 없는 부패하고 자아도취 심한 무능력자다. 잔인한면이 터져 나올 때면 역겹지만, 너무나 무능하지만 스스로의 무능함을 알지조차 못한다는 점에서 그는 악당이라기보다는 코믹 히어로로 받아들일 만하다. 홀로 귀환하는 여행에서 그는 한순간 우주적인 이해와 날카로운 자기 인식을 경험하지만ㅡ"머저리…………수많은 머저리들의 자손의 자손...….." - 하지만 그 순간은 곧 날아간다. 지구에 돌아온 베드퍼드는 다시 원래 모습 그대로다. - P305

소설 속에서처럼 삶에서도 웰스의 충동은 언제나 스스로의 해방이었던 것 같지만, 그는 부정하거나 배신하지 않으려고 힘들게 노력했다. 이렇게 정착하지 못하는, 혹은 정착을 거부하는 성향은 아마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두드러질 것이다. 동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시대의 끝이자 다른 시대의 시작에살고 있다고 보았고, 그럴 만도 했다. 웰스의 소설들은 자신이 "두시대 사이"에 존재한다고 느끼고, 이쪽저쪽으로 당겨지며 어느 쪽에도 편히 머물지 못하는 남자의 강렬한 시간적 고통을 보여 준다.
두 개의 시대에 살고, 두 시대 사이를 오가며 산다는 아이디어는웰스의 긴 경력 내내 강박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주제다.
그리고 여기, 그의 첫 장편에 그 정수가 담겨 있다.
내가 일곱 개의 과학 로맨스 seven Scientific Romances』라는 뚱뚱한 진녹색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몇 살이었는지,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통틀어 타임머신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얀스핑크스 아래 철쭉 사이에 펼쳐진 잔디밭은 내가 성장한 집의 정원처럼 친숙하다. 그 직접적이고 명료하며 자신감 있는(모방자들이생각한 "빅토리아 산문과 너무나 다른) 운율은 아직도 본보기가 된다. - P313

멜로드라마 같은 폭력이 펼쳐지는 한두 단락을 제외하면 이야기는 모두 가볍고 빠르고 확실한 필치로 쓰인다. 여행자가 집에 가져온 물건의 전부인 "아주 커다란 하얀 당아욱을 닮은 듯도한 두 송이 꽃이라든가, 타임머신이 실험실에 다시 놓였을 때 정확히 어디에 있었으며 왜 딱 그곳이었는지 설명하는 문장처럼 우아하고 능숙한 부분이 많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세세한 부분이야말로 SF적인 상상의 가장 순수한 정수이다. 흠잡을 데 없이 단단하다.
정원 전체가 상상의 산물이지만, 그 속의 두꺼비들은 진짜다.
타임머신은 잘 지은 제목이었다. 지금까지 낡아 가는 징후도 없이 3세기를 보았다. 상아와 니켈로 만든 막대며 석영 막대기도 온전하고 놋쇠 난간 구부러지지 않았으며, 그 언어와 통찰은 107년 전에 출발했을 때와 똑같이 새롭다. 이것이 몇 번이고 몇번이고 거듭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뭔가를 발견할 수 있는 여행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이 기계를 처음 타려는 독자들 모두를 질투했을 것이다. - P316

그는 사회주의자가 되어 잠시 페이비언 협회에도 들어갔으나, 그곳은 웰스에게 충분히 활동적이지 않았다. 그는 유토피아미래주의자이자 (어느 정도는 페미니스트였고, 사회와 불평등과 자본주의 상업주의의 비평가요, 당선되지 못한 노동당 후보였고, 대격변과 사회개조 양쪽에 대해 지치지 않는 선지자였다. 『막다른골목에 다다른 정신Mind at the End of Its Tether』을 쓰던 70대 후반, 모든다툼과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고 대공세 내내 런던에서 폭격을 겪고 나서도 그는 아직도 인류를 위해 희망을 찾고 있었지만, 그 희망을 새로운 인류, 개선하고 변화시킨 새로운 인간 종이라는 아이디어에서밖에 찾지 못했다. "적응하느냐 소멸하느냐는 자연에 주어진 불변의 과제입니다." - P319

대단히 뛰어난 스승 밑에서 생물학자로 훈련받은 웰스는다윈의 역동적인 생물관을 받아들이는 데 흔들린 적이 없었다. 생명을 사회적 다원주의자처럼 우세를 점하기 위한 투쟁으로 보지않았고, 기독교인 다윈주의자처럼 인간으로 올라가는 것이 마지막 목표라고 보지도 않고 오직 진화로 이해했다. 멈추지 않는, 필요한 변화로 변하지 않고 머물면 죽는다. 적응하면 계속 살아간다.
유연하게 적응할수록 더 멀리 간다. 포용력이 전부다. 변화는 어리석고 잔인할 수도 있고, 지적이고 건설적일 수도 있다. 도덕성은 오직 생각하고 선택하는 정신이 있을 때만 체제에 들어간다. 웰스는어둡고도 밝은 미래 양쪽을 상상했는데, 그의 신념이 양쪽 다 약속하지 않으면서 양쪽 다 허용했기 때문이고 그의 80년 인생이 어마 - P319

살아생전에, 그리고 작가 자신의 눈에 웰스의 중요 저작은리얼리즘 소설들이었다. 「앤 베로니카Ann Veronica』와 『토노-번게이같이 개념 중심적이고, 사회 계층과 압박을 잘 관찰하며, 시사적이고 도발적이고 자주 풍자적인 데다가 때로는 열렬히 분개한 작품들은 버나드 쇼‘의 희곡에 비견할 만하다. 버나드 쇼는 그렇게 진부하지 않지만 말이다. 웰스는 별나고 때로는 서툰 소설가였으며,
그의 소설 대부분은 재미있고 번득이는 데가 있긴 해도 시대에 뒤떨어졌다. 스스로의 기대를 넘어서고, 우월 의식에 사로잡힌 모든평론가들의 저항을 넘어서서 남은 것은 그의 "과학 로맨스"들이었다. 판타지와 SF 소설들이었다. - P320

『타임머신』, 『달의 첫 방문자』, 『우주전쟁』, 『투명인간』, 모로 박사의 섬』…… 오늘날 우리에게 H. G. 웰스라는 이름은 이런 의미이고, 마땅히 그럴 만하다. 이 짧은 장편이나 중편 소설들은 장르 전체를 확립했다. 몇 세대 독자들의 마음속에 그리고영화 제작자, 그래픽 아티스트, 만화 애호가, TV 사이파이 팬, 팝 컬처 열광자, 포스트모던 전문가들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이미지와 표상, 원형을 남겼다.
웰스는 과학소설이 과학소설이라는 이름을 갖기 오래전에과학소설을 썼다. 그는 그것을 "과학 로맨스"라고 불렀다가 나중에는 "가능성의 판타지"라고 불렀는데, 지금 정착한 이름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웰스의 독창성과 창의력은 놀라웠다. 어떤 SF를 보든 웰스에게서 그 최초의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SF와 판타지를 구별하지는 않았는데, 그때는 아직 아무도 그 둘을 구별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수십년간 그랬기 때문이다.  - P321

"나는 단편소설의 어떤 변함 없는 확고한 형식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웰스가 그렇게 한 것은 확실히 옳았다. 그러나 단편에대한 그의 오만하기까지 한 설명, "이 간결하고 유쾌한 글쓰기 방식"
은 좀 더 못한 작품들에는 잘 맞는 말일지 모르나 헨리 제임스나키플링, 심지어는 본인의 최고 작품들은 포함시키지 못한다.
물론 그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1939년, 아마도 그의 가장 뛰어난 단편일 눈먼 자들의 나라 수정을 논하면서 웰스는 아이디어 중심에 비밀 장치, 교묘한 결말로 이루어진, 그러니까 자신이 돈을 벌기 위해 써 보인 수많은 사례와 같은 작품들에 대한 인내심을 잃었다고 썼다. "웅웅거리는 발전기, 퍼덕이는 박쥐, 세균학자의 실험관, 뭐든 도움이 되는 것은 거의 손을 대어……… 그 장치를 둘러싼 인간의 반응을 살짝 첨가하고 오븐에 집어넣으면, 짜잔." 그는 언제까지라도 그럴 수 있었지만 "단편도 매력적이고 만족스러우며 의미 있을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느낌, - P323

그는 17세에 도제 생활을 그만두었을 때 천을 잘라 파는 일도 그만두었다. 단어를 길이당으로 판매하는 작업이 그를 작가로만들었으나,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런 형식 자체를 못 견디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1890년대에 단편소설이 꽃을 피우고 그 후에 시시해졌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편이라는 형식은 20세기 내내 발전하고 번창했다. 나는 혹시 웰스가 단편을 쓰지않게 된 것이 편집자들이 뛰어난 작품을 알아보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비평가들이 갈수록 소설을 사회적 심리적 리얼리즘에 구속하고, 그렇지 않은 작품은 다 문학 이하의 오락으로 치부하던 경향탓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품이 아무리 좋다 해도 주제가 환상적이거나 소재가 과학이나 역사나 다른 지적 훈련에 쏠려 있으면 "장르소설" 분류로 일축당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상상 영역을 다루는 작가들은 모두 겪는 위험이다. 문학적인 존경을 갈망하는 작가들은 아직까지도 자기들이 쓴 SF가 SF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어한다. 적어도 웰스는 상상의 총을 지켜냈다.
그러나 그 총을 쏘는 일은 그만두었다.
그런 한편, 타임머신』은 이제 10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절 - P324

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웰스의 단편소설 중에서 진정 영원히 읽힐 문학에 다가간 작품은 몇 편뿐이지만, 최고작들은 생생하게 살아있고, 놀랍도록 적절하며, 때로는 불안할 정도로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악몽처럼 달라붙거나 기억할 수 없는 꿈처럼 빛을 발한다.
나는 존 해먼드의 귀하고 거대한 『H. G. 웰스의 단편소설전집에 수록된 여든네 작품 중에서 스물여섯 편을 골랐다. 물론여기에서는 별 쓸모도 의미도 없는 리얼리즘 기준에서의 탁월함이 아니라 포괄적인 탁월함을 기준으로 선택했다. 이야기가 지적인 긴박감이나 도덕적인 열정, 특별한 미덕이나 기이함이나 아름다움 면에서 그 자체로 두드러지는가? 이야기가 같은 종류 중에서뛰어나며, 그 종류는 흥미로운가? 유익하고 중요하며, 다른 작가들의 다른 작품으로 이어지는가? 나는 오직 "위대함"만을 소중히 여기고 "위대한 예술은 흉내낼 수 없이 유일무이한 막다른 길로 정의하는 독자가 아니다. 나는 예술을 공간과 시간 양쪽에서 다 공동체 산업으로 보며, 홀로 뛰어난 불모의 작품보다는 더 많은 예술로이어지는 예술이 더 가치 있다 믿는다. - P325

그 이야기들을 다 합쳐서 한 세트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웰스는 포착하기 힘든 작가다. 확실히 책 전체에 걸쳐 웰스의 독특한스타일이 보이기는 한다. 많은 단편이 저널리스트 분위기로 쓰여, 쉽고 경쾌하며 극도로 자신감이 있지만 가식은 없고 명료하고 휙휙 나아간다. 하나같이 아주 단순하고 꾸밈없어 보이는데, 정확히저자가 원한 대로다. 웰스는 고도로 심미적인 태도를 불신했다.(헨리 제임스와 웰스의 우정에 따라붙는 매력적인 주석은, 두 작가 모두 서로의작품을 다시 쓰고 싶을 때가 많았다고 고백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주의 깊은 작가이자 지칠 줄 모르고 다시 쓰는 작가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자각했고 자신의 기술에 예민하고 능숙했다. 웰스의 글투를 바꾼다는 건 음악에서 조성을 바꿔 버리는정도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P326

여기 수록한 조각글 중 많은 수는 원래 발표했을 때와 세세한 차이가 있다. 이 책에 실을 준비를 하면서 조금씩 편집했기 때문이다. 많이 바꾼 글은(주로 업데이트하느라 그랬다.) 실비아 타운센드 워너의 「도싯 이야기 Dorset Stories 』 서평 딱 한 편이다.
이 서평들은 연대순으로 정리할지, 알파벳 순으로 정리할지망설이다가 독자들이 찾고 싶은 작가를 쉽게 찾을 수 있게 알파벳순에 만족했다. 대부분 서평의 원래 발표 버전은 내 웹사이트에서찾을 수 있으며, 처음 발표한 지면 목록은 뒤에 실어 둔다.
나는 서평을 좋아하고, 서평을 계속 하기 위해서 읽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많은 책을 읽어 보아야 했다. 폐부를 쥐어짜는서정성을 갖춘 최고의 걸작이라고 선언하는 광고문들의 구름을몰고 도착한 책을 미리 읽어 봤더니 완전히 실패였을 경우는 슬프다. 하지만 대개는 내가 이미 흥미를 품고 있는 저자의 책이나, 별기대 없이 잡았다가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책에 대한 서평을 부탁받는 행운을 누렸다. - P330

여기 수록한 서평 대부분은 《맨체스터 가디언>에 실렸는데,
그곳 편집자들에게는 훌륭한 책을 서평할 기회를 많이 주셨다는점에서도, 놀랄 만큼 유연하고 지적인 편집에 대해서도, 1만300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고마울 따름이다. 뉴욕과미국 동부 해안 문학계는 언제나 내가 그 문학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뻐했을 정도로 외부에 관심이 없고 편협하다. 하지만런던에 살 때 나는 진지한 영국 문학 파벌들, 악랄한 경쟁, 허용되는 만행의 정도에 상당히 겁먹었다. 그런 심술도 이제는 어느 정도누그러들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가디언》에 영국책 서평을 쓸 때마다 내가 오리건에 산다는 게 기뻤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늘 그렇기는 하다. 캘리포니아에 대한향수를 느낄 때만 빼고 언제나. - P331

단편 하나는 극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붕 떠 있다. 우리는 두 번째 단편을 시작으로 넬을 따라가며 여동생과 부모와 함께였던 어린 시절을 지나고, 반(半)결혼의 우여곡절과(티그가 정말로그 끔찍한 아내와 이혼하고 넬과 결혼하긴 할까?) 아마추어 농사일과 늦은 부모됨의 시련을 거쳐 마지막에는 죽음의 문턱에 이른 부모의중년 딸이 되기까지 지켜본다. 하지만 첫 번째 단편은 연대상 마지막에 해당한다. 그것은 노년이 되어, 스스로 죽음의 문턱에 이른 부모가 된 빌과 티그의 초상이다. 왜 이런 역배치가 그토록 성공적인지 모르겠다. 첫 단편 「나쁜 소식」이 재치와 에너지, 애트우드 특유의 공포와 고통에 대한 가슴 아리도록 날카로운 감각이 전기처럼흐르는 눈부신 1번 타자라서일까. 이 단편에서 애트우드는 이보다더 날카롭고, 건조하고, 웃기면서 슬플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단편을 마지막에 놓지 않은 데에는 지혜로운 구석이 있는데, 마지막 단편의 두 사람은 곧 죽을 테고, 이 두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 P336

인류에게 그나마 좋은 얼마 안 되는 것들, 애정과 의리와 인내심과 용기가 우리의 오만한 어리석음과 원숭이 급의 영리함과 미친 혐오에 갈려 먼지가 되어 버린 데 대한 애도곡.
유전 실험이 인류를 대체할 휴머노이드들을 만들었다는사실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누가 섹스를 원할 때면 파랗게 변하는,
그래서 남자들의 거대한 생식기가 늘 파란색인 사람들에게 대체당하고 싶어 할까? (그리고 누가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야기가 SF가 아니라고믿고 싶어 할까??)책의 마지막 몇 문장은 뜻밖이었다. 언뜻 피할 수 없어 보였던 무자비한 결말이나 죽어 가는 내리막도 아니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해결법도 아니라니, 놀라움이자 수수께끼였다. 횃불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오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물 없는 홍수의 해에는 오직 정원사들만이 노래를 했다. 정원사는 다 죽은 게 아닌가?
어쩌면 이번에도 내가 단서를 놓쳤을지 모른다. 여러분이 이 비범한 소설을 읽고 직접 판단해야 마땅하다. - P345

지난 세기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진지한 시인들은 오직 시만 쓰지, 소설은 쓰지 않는다고 배웠다. 그런 순수주의자들에게 괴테는 무의미했다. 그와 동시에, 모더니즘 소설 비평가들은 상상 문학을 쓰면 진지한 소설가로서 자격이 없어진다고 선언했다. 현실주의자들에게 메리 셸리는 무의미했다. 교수와 문학상 수여자들은순수주의를 더 좋아했기에, 타고난 재능 탓에 국경을 서성인 이단아 작가들은 계속 가시철조망에 부딪치고 말았다.
젊은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 울타리를 쉽게 뛰어넘어, 일찌감치 시와 소설은 물론이고 문학 비평에서도 캐나다 총독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오웰의 1984처럼 - P346

뛰어난 근미래 사회풍자 경고 SF의 본보기인 「시녀 이야기』로 높은 울타리와 맞섰다. 헉슬리와 오웰은 아무 문제 없었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는 문학 영역에서 미래가 추방당해 있었다. 문학상을바라보는 출판인은 누구나 SF라는 딱지를 두려워했다. 회피의 귀재인 애트우드는 그 딱지를 피했고, 그때도 그 후로도 약간의 대가를 치렀지만 유연하고 적응력 높고 매우 지적이며 대단히 고집스러운 재능 탓에 계속 기존의 리얼리즘으로부터 멀리 배회했다. 최근에는 애트우드도 장르를 자유롭게 가지고 놀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보는 일은 변함없이 흥미롭다. - P347

포위전 이후, 폭력과 인종차별자들의 공격이 수그러들고,
텔레비전도 가족 정보와 독서클럽 토론으로 되돌아가자 피어슨은우리에게 말한다. "일단 사람들이 소설에 대해 열렬히 말하기 시작하자 자유에 대한 희망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한 페이지를 넘겨,
책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분별 있는 이들이 깨어나 연대하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나면 더욱 강력한 공화국이 문을 열고 낙원으로손짓해 부르는 회전문을 돌릴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라거나 분별공화국 같은 말들은 의미가 손상된 나머지 무의미해진다. 이 서술자에게는 아무것도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고, 아무것도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하지만 정보 조작의 달인에게 이야기를 시켰을 때 문제는 독자가 그에게 그 자신이 던졌던 질문을 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어때서요?" - P355

침대에 누워서 크리스 앤드루스가 멋지게 새로 번역한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팽 선생」을 읽던 나는 갑작스러운 불안감과 더불어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한 엄청난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연민의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눈에 띄지는 않지만 계속 깜박거리는 독서등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주 오래된 영화 속 길거리 장면의 회색빛과 구름 낀 12월의 화요일에 내리쬐는 평범한 빛 사이를 오묘하게 오가는 햇빛 자체가 문제였을까? 더 심란한 건, 구체적인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건만, 이전에 이 책은 아니라도 이 책과 무척 비슷한 책을 여러 곳에서 여러 번 읽었다는 기분, 그런데 그 어느 것도 기억은 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 P356

혹자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도 하는세자르 바예호는 활동적인 공산주의자로, 조국 페루의 정부에서박해를 받아 인생 후반을 망명지에서 살았고, 1938년에 진단 미상의 병으로 파리에서 죽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구하려고 "대체요법" 의사들을 불러들였다.
이제는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후계자로 불릴 때가 많은 로베르토 볼라뇨는 독재자 피노체트가 권력을 잡자 조국칠레를 떠났고, 여생의 대부분을 망명지에서 보냈다. 『팽 선생쓴 것은 1983년, 서른 살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죽었다.
사실이라는 씨앗에서 상상의 거대한 덩굴이 자라나 한데얽히고 감기며 그림자를 드리우니, 그 덩굴이 맺는 열매는 때로는달고 때로는 쓰도다. - P359

ㄹㄹㄹㄹㅁ이 책에는 안식도, 평화도 없다. 화창한 캘리포니아의 아침햇살 속에서 먹는 아침식사마다, 채널 아일랜드의 아름답고 호젓한 해안과 산비탈을 찾는 순간마다 곧 닥칠 재난의 위협에 대한 예감에 내리눌리고 부질없어진다. 어떤 행복이든 의미 있기에는 너무 짧은 환상이다. 그 에너지와 긴박감에도, 그 역사적인 정확성과범위에도, 그 뛰어난 사건 쓰기와 동시대의 말과 생활에 대한 흠 없는 재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심장이 식을 만큼 황량하다. 그점에서는 우리가 우리 세상에 한 짓을 바라보고 책임질 방법을 찾는 대부분 사람들의 기분을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난파로 시작해서 어둠 속의 방울뱀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희망할 여지를 많이남겨 두지 않는다.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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