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환경에서 자라기만 해도 아이의 정신이 잘 형성된다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인 요인이 자연보다 명백히 더중요하다. 아마 오클랜드 슬럼가에서 가난하게 성장한 아이의 발전에는 베이 지역의 비범한 자연 경관이 썩큰 요인이 아닐 테지만, 그 아이들에게 쇠퇴와 무질서로부터의 위안을 조금은 제공할 수도 있다. 사회적인 오염과 산업적인 추악함에서 멀리 떨어져 멋지고 다양한 풍경 속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평생 칙칙한 관목지밖에 보지 못하고 산 사람들보다 여유로운 영혼이나 고귀한목적을 품는 것 같지는 않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정신을 밝고 넓게만들려면, 아이가 남다른 관찰의 재능을 가졌거나, 성숙도와 함께점차 깊어지는 관찰과 심미안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칸방이나 좁은 아파트에서 자란 어린아이들은 지적, 공간적, 사회적 기술이 덜 발달한 채 학교에 입학한다는 증거가 있다. 성장한 공간의 물리적, 시각적 한계가 정신에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슬럼가와 빈민 구역의 비좁고 흉하고 더럽고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환경이 그곳에 사는 아이들에게 우울과 분노를 키우며, 세상을 온전히 인지하는 능력에 한계를 짓고 희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의심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독립성과 상호 책임에 대한 그 아이들의 인식은 혼자만의 방에서 성장한 중산층 아이의 인식보다 훨씬 강렬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든, 일부러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든 도덕적인 통찰력과 판단력을 육성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나는어릴 때부터 계속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경험함으로써 질서와 조화를 기대하게 자랄 수 있고, 그 마음은 도덕적인 명료성에 대한 적극적인 욕구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윤리와 미학을구별하기가 어렵다. 내 윤리 반응과 미학 반응은 둘 다 갑작스러울 정도로 즉각적인 경향이 있다. 진짜 새롭거나 복잡할 경우에만머뭇거리고, 교육을 받고 개선할 수는 있지만 고집스럽다. 두 반응이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내가 윤리적으로 반응하는지 미학적으로 반응하는지 확실치 않을 때가 많다. ˝그건 맞아. 그건 틀려.˝ 그런 자연스러운 확신은 얕아 보이지만 얕지가 않다. 오히려 내 깊은곳까지 뻗어 내려간 오래되고 얽혀 있는 무수한 뿌리들로부터 올라오는 깊고 무척이나 비합리적인 반응이다. 나는 그 반응을 정당화하고 이유를 찾으려 하자마자 수렁에 빠진다.  P115, 116

우리 주최 측에서 논의를 어떤 주제로 시작할지에 대해 몇가지 아이디어를 주더군요. 작가는 이 세상의 어디에서 힘과 희망을 찾을까? 지금 여기에서 작가의 소명은 무엇일까? 어떤 작업이변화를 가져올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목적 공동체를 만들 수있을까? 이런 것들이었어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같은 대답만 내놓으려니 민망하군요.
제가 이 세상 어디에서 힘과 희망을 찾느냐고요? 제 작업에서, 잘쓰려고 하면서 찾습니다. 지금이든 다른 어느 때든 작가의 소명이뭐냐고요? 쓰고, 잘 쓰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어떤 작업이 변화를가져오느냐고요? 잘 만든 작품, 정직한 작품, 잘 쓴 작품입니다.  - P92

그리고 어떻게 목적 공동체를 만들 수 있냐고요? 글쎄요. 작가로서우리의 목적 공동체가 서로 관심을 공유하고 글을 최대한 잘 쓰려고 하면서 성립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 일 말고 다른 뭔가에 의존해야 할 텐데요. 그게 목표든 의도든 메시지든 영향이든 간에, 글쓰기를 그 작업 바깥의 어떤 목표에 대한 수단에 불과하게, 메시지의 매개체로 만들어 버리잖아요. 그 목표가 아무리 가치 있다 해도요. 제게 글쓰기는 그런 게 아닙니다. 저를 작가로 만드는 것도 그게 아니에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목표에 대한 수단으로 글 쓰는 방법을배웁니다. 대부분의 글쓰기는 실제로 목표를 위한 수단이죠. 연애편지, 온갖 종류의 정보글, 사업상의 소통, 지시, 트위터 등 많은 글에는 메시지가 담겨요. - P93

그래서 아이들은 제게 묻지요. "이야기를 쓸 때, 메시지를먼저 정하시나요, 아니면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서 메시지를 담으시나요?"
저는 아니라고, 저는 메시지를 쓰지 않는다고 하겠어요. 전이야기와 시를 써요. 그게 다예요. 그 이야기나 시가 여러분에게어떤 의미인지 그 "메시지"는 제게 그 글이 갖는 의미와는 전혀 다를 수 있어요.
이 대답을 들으면 아이들은 실망할 때가 많고, 충격받기까지 하지요. 제게 책임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교사들이그렇게 생각하는 건 분명하고요. - P93

그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모든 글쓰기는, 문학이라 해도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일지 몰라요. 하지만 제 작업의 진정하고도 핵심적인 가치가 작품이전하는 메시지에 있다거나, 정보나 위안을 제공하거나 지혜를 제시하거나, 희망을 주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면 전 이야기나 시를 쓸수없었을 겁니다. 그런 목적이 아무리 크고 고귀하다 해도, 그건 작품의 지평을 확실히 제한해 버려요. 작품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방해하고, 예술에 활력을 제공하는 가장 깊은 원천인 신비로부터 차단하고 말지요. - P94

의식적으로 어떤 문제를 다루거나 어떤 특정한 결과를 끌어내려고 쓴 시나 소설은, 그 작품이 아무리 강력하거나 유익하다해도 첫째가는 의무과 특권을 포기한 겁니다. 작품 스스로에 대한책임을요. 글의 제일 중요한 임무는 단순히 올바르고 진실한 형태를 주는 말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 형태가 곧 글의 아름다움이자글의 진실입니다.
잘 만든 토분은 그게 쓰고 버리는 테라코타든 고대 그리스항아리든 상관없이 토분일 뿐, 토분 이상도 토분 이하도 아닙니다.
제 마음속에서는 잘 만든 글도 그저 말들의 행렬이에요.
제 말들의 행렬을 쓸 때 저는 제가 생각할 때 진실하고 중요한 것들을 표현하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에세이를 쓰면서도 그러고 있죠.
하지만 표현은 계시가 아니고, 이 에세이는 쓸 때 예술성이 - P94

들어간다고 해도 예술 작품이기보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술은 메시지 이상의 뭔가를 드러내죠. 소설이나 시는 쓰고 있는 저에게 진실을 드러낼 수 있어요. 제가 진실을 집어넣는 게아니라요. 이야기를 만들면서 그 속에 든 진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독자들은 그 속에서 다른 진실을 찾을 수 있지요. 저자가 전혀 의도한 적 없는 방식으로 그 작품을 이용할 수도있어요. 우리가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를 어떻게 읽나 생각해보세요. 우린 3000년 동안 그리스 비극을 읽으면서 그 속에 혼을고, 그 속에서 인간의 열정에 대한 교훈, 정의에 대한 호소, 무궁무진한 의미들을 발견했어요. 저자가 원래 의도했던 종교적이거나도덕적인 교훈, 경고나 위로나 공동체의 기념으로 줄 수 있었던 의미를 훌쩍 넘어섰지요. 그 작품들은 예술의 원천이라는 신비와 심연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 P95

이 부분에서는 존 키츠도 제 편에 서 있고(키츠의 ‘마음을 비우는 능력‘ 원칙을 제가 맞게 이해했다면요.), 그릇은 비어 있음으로써그릇의 쓰임이 있게 된다 말한 노자도 그러합니다. 제대로 빚어낸시는 천 가지 진실을 담지요. 그렇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말하지는‘
않아요.
"예술을 위한 예술"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 유감스러운슬로건은 예술은 유아독존적이며, 향유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 P95

중요하지 않다고 암시하거든요. 그건 오해죠. 예술은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바꿔 놓습니다.
그리고 예술가는 공동체의 일원이에요. 예술가의 작품을보고 듣고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요. 저는 제 작품에 제일책임이 있지만, 제가 쓰는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있다면 당연히 그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제 소설의 의미가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하고, 쓰면서나 언뜻 볼 뿐이라 해도…… 그렇다 해도 그 의미가 없는 척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반짝이는 눈으로 질책하는 아이들이 제게 묻듯이이런 질문이 남지요. "뭔가를 안다면, 그냥 말씀하실 순 없나요?"
진실은 함축적일 수밖에 없느냐? 당신이 만드는 그릇이 왜비어 있어야 하느냐, 왜 그릇에 우리를 위한 물건들을 채울 수 없느냐? - P96

흠, 우선은 철저히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죠. 공공연한 훈계보다는 "넌지시 말하기"가 훨씬 잘 먹히기 때문이에요. 더 효율적이죠.
하지만 도덕적인 이유도 있어요. 제 독자가 제 그릇에서 꺼내는 건 그 독자에게 필요한 뭔가이고, 본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저보다 본인이 잘 알죠. 저는 그릇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 뿐이에요. 제가 누구에게 설교를 하겠어요?
아무리 겸손한 정신으로 한다 해도 설교는 공격적인 행위인걸요. - P96

"큰 도(道)는 매우 단순하다. 아집을 버려라. 도가(道家)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전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제 안에도 제가 만든 아름다운 그릇에 제 사견과 제 믿음, ‘진실‘을 채워 넣고 싶어 하는 설교자가 있어요. 그리고 제 주제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같이 도덕적인 색이 짙으면 그 내면의 설교자가 사람들을 바로잡고 어떻게 생각할지 뭘 할지 지시하고 싶어서 근질거리죠. 그렇지요, 주님, 아멘! - P97

전 제 내면의 교사에게 더 믿음을 갖고 있어요. 이 교사는이해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기에 섬세하고 겸손하답니다.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고도 모순된 의견들을 담아내지요. "너희가 날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어"라고 중얼대는 오만한 예술가의 자아와 "이걸 들으라고!"라며 외쳐 대는 설교자 자아 사이를 중재할 수 있어요. 진실을 선언하지 않고, 제시만 하지요. 고대 그리스 항아리를 가져다가는 이렇게 말해요. "이걸 자세히 봐요. 연구해 봐요. 연구하면 보상이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 그릇에서 찾아낸 것들을 어느 정도 말해 줄 수 있어요. 당신도 이 그릇에서 그런 걸 몇가지 찾을지 모르지요."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렇듯 저도 제 예술이 제게 가르쳐 준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기 때문에, 내면의 교사가 필요해요. 하지만 그 교사조차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요. 결국 교사는아이들에게 메시지를 기대하라고 가르친 존재니까요. 교사의 본능은 "명확하고 명백해지는 거예요. 제 본능은 해설 없이 더욱 명쾌 - P97

하게 다가가려 노력하는 것이고요. 제 일은 의미를 완전히 작품 자체에 포함시켜서, 살아 있고 변화할 수 있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예술가가 도덕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발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선명하게 말하되, 그 말들 주변에 침묵의 영역을, 빈공간을 남겨 두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다른 진실, 더 나아간 진실과 통찰들이 생길 수 있게 하는 거죠. 그 공간이야말로 이런 말들이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대는 여전히 순결을 지킨 정숙한 신부그대는 정적과 더딘 시간이 키운 수양자식………그대 말없는 모습, 우리를 생각에서 몰아내는구나"
영원이 그러하듯이…… - P98

그 집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때면 자꾸만 그집의 편안함, 실용성과 비실용성, 계단, 냄새 같은 것들에 대해 말하게 된다. 아름다움 자체는 이야기할 방법을 모르겠다. 마치 아름다움이란 다른 뭔가를 설명할 때만 전할 수 있는 것 같다. 해가 저물고 제일 먼저 뜨는 별은 똑바로 보지 않아야만 볼 수 있듯이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한집에서 살면 확실히 그집과 정신적으로 얽혀 있게 된다. 어느 정도는 성별에 달린 문제일수도 있다. 여자들은 대부분의 남자들보다 더 자신들을 집과 동일시하거나, 집을 자신들과 동일시한다는 말을 듣는다. 나파 밸리의오래된 랜치하우스는 나에게 대단히 소중했고 지금도 소중하며, - P112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산 포틀랜드 집도 그렇다. 하지만 버클리 집은 나의 근본이다. 내 유년기를 떠올리면 그 집이 떠오른다. 그곳이모든 일이 일어난 곳, 내가 생겨난 곳이다.
그리고 내가 성장할 수 있었던 공간은 정말로 특별했다. 내가 말하려는 것도 그것이다. 그 집은 드물게 아름다웠다. 그냥 예쁘고 쾌적한 게 아니라, 그걸 훨씬 넘어서는 아름다움이었다. 메이벡의 예술적 기준은 아주 높았다. 실내에서 우리를 에워싼 모든 것이, 마구 어질러진 어린이 물건들과 일상의 혼란을 걷어 낸 모든 표면과 면적이 고상하게 균형 잡혀 있었고, 재질도 솜씨도 훌륭하고아낌없었으며 위엄 있고 상냥하고 널찍했다. - P113

그 집엔 기이한 데가 있었다. 그게 진실이다.
아름다움이란 퍽 까다로운 말이다. 아름다움에 곧바로 접근할 수가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불평했다. 사람들은 아름답다는 말을 예전처럼 자유롭게 쓰지 않고, 많은 예술가들(화가, 조각가, 사진가, 건축가, 시인은 그 말을 아예 거부한다. 아름다움을 판단할 공통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아름다움을 그냥 예쁘다는 뜻으로 축소시키고는 고결하게 경멸한다. 아니면 진실이나 자기표현, 날카로움, 그 외에 자기들이 더 귀하게 여기는 다른 가치를위해 일부러 아름다움을 버린다. - P120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두루 받아들일 만한 정의를 내놓지도 못하면서, 그런 아름다움에 대한 거부를 두고 토론할 능력이 있는 척하진 않겠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움이란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에 상관없이 예술가들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미학적인 요소를, 그 중요성을, 그 무게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 미학적인 요소를 제외하면 그들의 작업을 예술이라고 부르게 만들어주는 건 무엇인지? 뭔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겠다는 추구를 빼면무엇이 예술가를 만드는지? 지금 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예술가의 숫자만큼 많을 것이고, 나에게 다른 사람들의 답을 물을 권리는 없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저 질문들을 던지고, 최대한 정 - P120

직하게 답할 의무가 있다고 느낀다.
소설가들은 아마 다른 어떤 예술가들보다 아름다움에 대해 덜 이야기할 것이다. 소설가의 작업을 묘사할 때 아름답다는말은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가로서 나에게는 언제나 ‘아름다움‘이 내 작업을 생각할 때나, 다른 소설가들의 작품을 설명할 때나 중요한 말이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오만과 편견』은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다. 절묘하게 정확한 언어, 완벽한 균형과 보조와 리듬이 강력한 지성과 통찰과 강한 도덕 감정에 복무하여 완전하고 활력 넘치는 전체를 만들어 낸다면…… 그게 아름답지 않다면, 무엇이 아름답단 말인가? 이 말이 이해가 간다면 여러분도 기꺼이 내가 리틀 도릿』이나 전쟁과 평화』, 『등대로」, 「반지의 제왕」 같은 온갖 다른 종류의 소설을 설명할 때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쓰게 해 줄 수 있으리라. 아니면 여러분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은 소설들을 아름답다고 말하리라. - P121

행위이고, 변화이고, 여행이다. "자거라." 우리는 품에 안은아기에게 말한다. 잠의 나라로 가거라. 모든 게 다르고 네가 울 필요가 없는 그곳으로 가거라…………어린 아기들에게 물론 잠은 자연스러운 상태다. 아기들은천사처럼 지조 있게 그리로 돌아가며, 배고픔이나 불편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면 우리에게 자신들의 슬픔과 분노를 알린다. 아기가깨어 있는 시간은 드넓고 잔잔한 바다에 흩어진 작은 섬들이다. 그섬들이 하필 부모에게 수면 욕구가 가장 절실한 곳에 끊임없이 시끄럽게 모인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성장한다는 건 점점 더 자주 깨어 있는다는 뜻이다. 아기가깨어 있는 시간을 나타내는 섬들은 점점 늘어나다가 이어 붙어 낮의 대륙이 되고, 우리 어른들은 목적을 가지고 그 대륙을 돌아다니고 일을 하면서 우리는 깨어 (awake) 있으니 곧 자각하고(aware)있다고 확신한다. - P142

이끼는 남성우월주의 사회가 여자들에게 듣고 싶어 하는말을 하고 있어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남겨 둔 유일한 영역을 자랑스럽게 자기 것으로 주장하죠. 원시와 신비, 어둠의 영역을요. 그리고 테나는 거기 한정되기를 거부해요. 테나는 이성과 지식과 사상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고, 어둠만이 아니라 자기만의 햇빛까지차지하려 하죠.
저 대목에서 테나가 제 대신 말하고 있어요. 우린 어둠 속에 충분히 오래 살았어요. 우린 햇빛에 똑같은 권리가 있고, 이성과 과학과 예술과 나머지 모든 것을 배우고 가르칠 권리가 똑같이있어요. 여자들이여, 지하실과 부엌과 아이 방에서 나와요. 이 집전체가 우리 집이에요. 그리고 남자들이여, 그렇게나 무서워하는어두운 지하실에서나 부엌과 아이 방에서 사는 방법을 익힐 때가됐어요. 그러고 나면 우리 모두가 불가에 모여서, 우리가 공유하는 집의 거실에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우린 서로에게 할 말도 많고,
배울 것도 많아요.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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