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행성이건 어느 위성이건 그들의 표면을 변형시키는 과정은여러 가지가 있다. 우주에서 들어오는 물체와의 충돌과 같이 외부 요인으로 인한 과정이 있고 지진과 같이 내부 요인에서 비롯되는 과정이있다. 화산 폭발과 같이 순간적이고 파국적인 사건이 있는가 하면, 바람에 날리는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표면을 깎아 내는 것과 같이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는 과정도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외부에서 오든, 내부에서 일어나든, 드물고 격렬한 사건이건, 흔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현상이건, 어느 과정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가 하는 질문에는 딱 떨어지는 정답이 없다. 달에서는 외부적인 변화와 파국적인 사건이 더 크게 작용하고, 지구에서는 내부적인 변화와 느린과정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화성의 상황은 이 둘의 중간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 P191

이제 더 뜨거워진 표면 온도는 더 많은 양의 탄산염들을 이산화탄소로 기화시켜서 온실효과는 한층 더 효율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온실 효과의 폭주로 말미암아 지구의 표면 온도가 현재보다 무척 더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런 폭주 현상이 금성의 초기 역사에서 벌어졌던 것 같다. 지구보다 금성이 태양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현재 금성의 표면이 처한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엄청난 규모의 재앙이 지구의 위치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읽게 된다.
현대 산업 문명의 주요 에너지원은 화석 연료이다. 우리는 나무, 석유, 석탄, 천연가스를 태우고 이 과정에서 폐기 기체, 주로 이산화탄소를대기 중에 내보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구 대기의 이산화탄소 함량이점차 증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지구의 기온이 온실 효과로 인해 급격히 치솟을 가능성이 있다. 지구 전체의 평균 기온이 1도 내지 2도만 상승해도, 그것이 초래할 재앙은 자못 심각하다.  - P213

석탄, 석유, 휘발유를태울 때, 이산화탄소뿐 아니라 황산 기체도 대기 중으로 내보내진다. 그렇기 때문에 금성에서처럼 지구의 성층권에도 아주 작은 액체 황산의 방울들로 이루어진 상당한 규모의 황산 안개 층이 형성된다. 우리의 주요 도시들은 유독 가스로 오염돼 있다. 인간이 무심코 행하는 일련의 활동들이 장기간에 걸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상태에서 우리는 현재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고집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정반대의 측면에서도 기후를 교란시켜 왔다. 수십만년 동안 인간은 숲을 태우고 나무를 베고 가축을 초원에 방목함으로써초원과 밀림을 지속적으로 파괴해 왔다. 화전 농업과 산업을 위한 열대림의 개간, 그리고 지나친 방목이 지구 도처에 만연하고 있다. 그러 - P213

나 숲은 초원보다 어둡고, 초원은 사막보다 어둡다. 결과적으로 지표에 흡수되는 햇빛의 양이 줄어들고 있다는 이야기다. 즉 토지의 사용양식이 변함에 따라 지구의 표면 온도가 낮아질 수 있다. 이러한 식의냉각은 극지방에 있는 만년설 지대의 넓이를 증가시킬 것이다. 만년설지대가 넓어지면 햇빛이 더 잘 반사되어 지구 밖으로 나간다. 그 결과로 지구의 표면 온도는 더욱 낮아질 것이다. 이것이 온실 효과의 또 다른 방향으로의 폭주이다. 급격하게 치솟는 반사도" 때문에 지구는 종국에 ‘백색 재앙‘의 위기에 빠질지도 모른다. - P214

우리의 아름답고 푸른 행성 지구는 인류가 아는 유일한 삶의 보금자리이다. 금성은 너무 덥고 화성은 너무 춥지만 지구의 기후는 적당하다. 인류에게 지구야말로 낙원인 듯하다. 결국 우리는 이곳에서 진화해 왔다. 지구의 현재 기후 여건이 실은 불안정한 평형 상태일 가능성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 수단들을 동원하여 지구의 연약한 환경을 더욱 교란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초래할 심각한 결과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이다. 지구의 환경이지옥과 같은 금성의 현실이나, 빙하기에 놓여 있는 화성의 현재 상황으로 근접할 위험은 없는가? 이 질문에 당장 할 수 있는 답은 현재로서는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뿐이다. 행성 지구의 전일적 기후학 그리고 비교 행성학적 연구는 아직 초보 단계에 있다. 이 분야 연구들에지원되는 예산의 규모 또한 아주 보잘것없다. 우리는 지구 기후의 장 - P214

기 변화에 대해서 참으로 무지하다. 인류는 자신의 무지를 망각한 채 대기를 오염시키고 숲을 제거함으로써 지표면의 반사도를 점점 높이고 있다.
수백만 년 전 인류가 오랜 진화 과정을 통해 지구상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을 때는 지구가 젊음의 격변기와 형성 초기의 격렬함에서부터 46억 년이나 되는 세월을 이미 보내고 중년기의 안정을 찾은 뒤였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인류의 활동이 지구에 아주 새롭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지능과 기술이 기후와 같은 자연 현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부여한 것이다. 이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인류의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무지와 자기만족의 만행을 계속 묵인할 것인가? 지구의 전체적 번영보다 단기적이고 국지적인 이득을 더 중요시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자녀와 손자손녀를 위한 걱정과 함께, 미묘하고 복잡하게 작용하는 생명 유지의 전 지구적 메커니즘을 올바로 이해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좀 더 긴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인가? 알고 보니 지구는 참으로 작고 참으로 연약한 세계이다. 지구는 좀 더 소중히 다루어져야 할 존재인 것이다. - P215

신들의 과수원들에서 그는 운하들을 감시한다.

-수메르 신화 에누마 엘리시』, 기원전 2500년경

우리의 지구가 다른 행성들처럼 태양 주위를 돌면서 빛을 받는 한 행성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라면, 나머지 행성들에도 지구에서와 같이 가재도구뿐 아니라 거주민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공상을 때때로 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곳에서 자연이 제멋대로 벌여놓은 수많은 일들을 탐구해 봤자 헛수고나 마찬가지라고 언제나 뻔한 결론을 내리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얼마전,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다소 진지하게 생각해 본 끝에 그렇다고 해서 (그 옛날의) 위대한 분들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고 간주해서가 아니라, 그분들보다 훗날에 살게 되는 행운을 가졌을 뿐이라는 뜻에서 이 탐구가아주 실행 불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온갖 어려움을 무릅써야 하는 그런 성격의 일도 아니고,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추측은 해 볼 만한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천상계의 발견, 1890년경 - P217

사람들이 눈의 기능을 크게 확장하여 지구와 같은 행성들을 볼 수 있는 날이 언젠가 우리 곁에 오고야 말 것이다. 
-크리스토퍼 랜, 그레샴 대학교에서 취임식
16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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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


살얼음 낀 겨울 논바닥에
기러기 한 마리

떨어져 죽어 있는 것은
하늘에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나팔꽃


한쪽 시력을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낮달


외다리 재두루미 한 마리
남은 한쪽 다리를 길게 쭉 뻗고
얼어붙은 하늘을 고요히
날고 있다

저수지 위에 뜬 겨울 낮달이
울음을 그치고 그 뒤를
고요히
따라가고 있다




가는 발목에 끈이 묶여
날지 못하는
오가는 행인들의 발길에 가차없이 차이는
푸른 하늘조차 내려와 도와주지 않는
해가 지도록 오직
푸드덕푸드덕거리기만 하는
한 마리
저 땅 위의

수표교


물의 깊이를 재는 넌
내 눈물의 깊이는 재어보았니

눈금을 새긴 돌기둥을 데리고
수표교 하나
내 눈물 속에 평생 잠겨 있어도

난 아직 내 눈물의 깊이의
깊이는 재지 못했네

돌이 된 내 눈물의 무게도
재지 못했네

스테인드글라스


늦은 오후
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높은 창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햇살이
내 앞에 눈부시다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나 아직 알 수 없으나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조각난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은
이제 알겠다
내가 산산조각난 까닭도
이제 알겠다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놓는다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
더이상 펴지지 않는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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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박힌 못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마음속에 박힌 말뚝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꽃이 인간의 눈물이라면
인간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꽃이 인간의 꿈이라면
인간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술 한잔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선암사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봄밤


지구여 봄밤이다
흔들리지 마라
꽃상여처럼 너울너울
길 가지 마라
새들이 꿈을 꾸며
잠들고 있다

지구여 봄밤이다
흐느끼지 마라
상주들도 상여꾼도
곡을 멈춰라
새들이 알을 낳고
잠들고 있다




님 그리며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며 님 그린다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님 그리며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며 님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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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사랑은 항상 공포로 얼어붙는다. 여자는 모든 것을 원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이 소녀는 훌륭한 정신(강한 열정과 자존심과 재주)을 가지고 있다. 남자들은 그런 포로를 좋아한다. 마치 재갈을 물어뜯고 땅을 발로 치는 말을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력을 더 많이 행사할수록더 큰 승리감을 느낀다. 여자의 의지가 무슨 소용인가? 그녀가 애써도 얻을 수 없고, 그러면 더는 사랑받지 못한다. 여자를 만들었을 때 신은 잔인했다. [39장] - P853

엘리엇의 모든 소설은 디나의 권리를 증명한다. 사이어스 비드처럼 책임감 없는 아버지는 온갖 이유로 물 때문에 죽을까 봐두려워한다. 궨덜린의 남편은 ‘말을 다루는 것처럼 항해도 쉽게 잘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품고 바다로 나가지만, 그는 무엇 하나 잘해낼 수 없고 자신의 주제넘음 때문에 벌을 받는다. 『플로스강의 물방앗간』에서 엘리엇이 설명했듯, ‘자연은 겉으로는 활짝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자신을•숨기는 교묘한 솜씨가 있어서 작디작은 인간들이 자연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비밀리에 그들의 자신만만한 예견을 반박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1부 5장] 네메시스처럼 여기에서 - P854

여자 주인공은 남자에게 분노하지 않고, 증오를 자신에게 되돌려 자신을 벌한다. 그리하여 자기 비하를 통해 자신이 계속 받드는 남자보다 도덕적우월성을 얻는다는 점에서 자신의 분신과 구별된다. 이런 ‘체념의 천사‘들은 부분적으로 앞장에서 우리가 탐색했던 자기혐오를 보여주는 동시에 남성적 세계에서 여자가 처한 조건에 대한 엘리엇의 태도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엘리엇은 이 여성들을통해 마치 남성 사회의 불의가 어떻게 부패한 사회질서로 인해권리를 박탈당한 채 태어난 여자에게 특별한 힘과 미덕, 특히감정의 능력을 부여하는지 탐색하는 것 같다.
샬럿 브론테가 저항했던 모든 부정적 전형이 조지 엘리엇에의해 미덕으로 전환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브론테는 여자가 지적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저주하는 반면, 엘리엇 - P855

은 지적인 결핍이 초래할 무서운 결과는 인정하지만 이 결핍 덕분에 여자에게는 감정적인 삶이 더 풍부해진다고 암시한다. 브론테는 여자가 자기주장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반면, 엘리엇은 남성적 경쟁이 아닌 서로 돕는 동지애에기초한 고유한 여성 문화의 미덕을 극화한다. 브론테가 여성의 감금이 불러일으키는 숨 막히는 구속의 느낌을 극화한다면, 엘리엇은 「미들마치」의 마지막에 인용한 던의 말마따나 자신의 사랑으로 ‘어디에든 작은 방‘을 만들 수 있는 여성의 창의성을 칭송한다. [83장] 브론테는 남자들이 소유한 권위 있는 자유를 부러워하는 반면, 엘리엇은 그 권위 때문에 사실상 남자들이 그들 자신의 육체적 심리적 진정성을 경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P856

『미들마치』에서 매우 흥미로운 에피소드 중 하나는 터티어스리드게이트가 지역사회에 입문하기 전에 경험한 연애 에피소드다. 파리에서 전류 실험을 하던 어느 날 밤, 그는 개구리들과 토끼들을 남겨두고 극장에 갔다. 멜로드라마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연인을 악당으로 오해해 칼로 찔러 죽이는 인물을 연기한 배우에게 매혹당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장면을 자신의 (이 불운한 인물로 분한) 실제 남편과 함께 연기했는데, ‘아내는 남편을 진짜로 찔렀고, 남편은 죽음이 명한 바에 따라 쓰러졌다. [15장] 젊은 리드게이트는 이를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라 확신하고배우 마담 로리에게 청혼한다. 마담 로리는 처음에는 ‘정말 발이 미끄러졌다‘고 은밀하게 말한다.  - P857

이 남자들을 통해 엘리엇은 안정된 기원, 끝, 정체성의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는 이 남자들과 그들의 프로젝트 때문만이 아니라 확대해서 그녀 자신의 텍스트 때문이기도하다. 엘리엇은 양식에 대한 강박증과 그로 인한 강제에 관심을기울였다. 마치 이 모든 미들마치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을 말하기라도 하는 양,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 향수를 주제로 쓴 시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상실했다.‘ ‘글쓰기가 분명한 / 이 사물에접근할 수 있는 열쇠를!‘ 하고 외친다. ‘이 혼란, 이 광대함, 이흩어짐을 알아내고 결합시킬‘ 무엇인가가 틀림없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실하거나 숨겨진 열쇠를 찾는 이 탐색은 성과•없이 실패로 끝나버릴 운명이다. 다이앤 와코스키는 「태양」이라는 시에서 ‘어떤 새가 그 노래를 부르는가/키, 키‘라고 익살스럽게 묻는다. ‘열쇠들로 만들어진 한 마리의 새‘뿐이다.  - P874

사실상 엘리엇은 소설가 자신이 묘사한 궁극적 감금, 자아의감방 속에 갇힌 감금에서 탈출하면서 확장되는 여자 주인공 생애의 비전을 여자들 사이의 디나와 헤티, 루시와 매기, 에스더와 트랜섬 부인, 로몰라와 테사, 미라와 궨덜린 사이의) 호의적공감 행위와 매번 연결시킨다.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하는 「백설 공주」의 미친 여왕처럼 헤티와 트랜섬 부인, 테사, 궨덜린은 거울 앞에서 자신만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다. 창을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디나, 에스더, 로몰라, 미라는 창가에서 바느질하는 착한 여왕을 닮았다. 예를 들면 트랜섬 부인은거울에서 노파인 자신을 보지만, 에스더는 블라인드를 걷어올리고 ‘희미한 달빛이 있는 잿빛 하늘, 영원히 흐르고 있는 강줄기들, 나무들이 흔들리며 휘어지는 모습을 보기 좋아한다.‘ 그녀가 얻은 것은 ‘세상의 광대함‘에 대한 인식이다. [49장] - P885

많은 비평가들은 「미들마치가 사회를 서로 다르지만 서로 관련된 삶들로 짜인 직물로 묘사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예를 들면 이 마을의 역사는 도시적인 마을과 시골 교구 사이에 만들어진 ‘새로운 연결의 실‘이라는 측면으로 묘사된다. [11장] 반면시골 생활의 개인 관계들은 일종의 실로 꼬아 만든 듯한 창조물이 된다. 화자는 ‘이 대부분의 내면의 삶이란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갖고 있다고 믿는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그•의견들로 짠 천이 파멸의 위협을 받을 때까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64장]46 다만 이보다 덜 명확한 것은 연결의실을 바느질하는 것이 여자들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구성하는 의견의 천을 짜는 사람들도 여자들이라는 점이다. - P892

명상적이며 철학적이고, 유머러스하며 동정적이고, 도덕적이며 과학적인 화자는 그녀 자신을 우리 문화의 일반적인 분류를 훌쩍 넘어 젠더 구분을 초월하는 존재로 제시한다. 엘리엇은 지식을 추구하고 ‘남자의 머리와 여자의 가슴을 결합시키는전통적으로 남성적인 임무를 여자의 방식으로 수행하면서, 젠더에 기초한 범주들을 부적절하게 만든다. 엘리엇의 목소리는서로 반대되는 관점을 공감하는 듯한 태도로 말하기 때문에, 그목소리는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쓸 때조차 일시적이고 잠정적이기 때문에, 이 화자는 믿을 만한 ‘우리‘, 즉 사람과 사물 사이의 복잡한 친족 관계뿐만 아니라 의미의 미확정성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의 한계와 문화의 정의를 뛰어넘어 획득한 이런 성취는 관습적인 역할을 강요당하는 여성 인물들의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화자는 엉켜 있는실타래를 객관적으로 풀어내는 인물로 그녀/그 자신을 제시하고 있지만, 결국 애초에 그런 플롯을 짜놓은 사람은 작가다. - P895

남성의 권위는 글쓰기(캐저반의 열쇠, ‘글로 쓸 만한 일을 하고, 내가 한 일을 스스로 쓰겠다‘는 리드게이트의 결심 [45장], 페더스톤의 유언장, 브룩의 신문, 프레드의 차용증서들, 가스씨의 서명, 그리고 벌스트로드의 보증서)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미들마치에서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여자인 가스 부인이 ‘자기 성에 가혹한 편‘이라는 것은 놀랍지않다. 가스 부인에 따르면 여성은 예속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스 부인은 딸 레티에게 오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레티는 이야기 속의 영웅 킨키나투스가 될 수없지만, 아들은 영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메리 가스는 마침내 책을 한 권 쓰는데 그것은 프레드의 업적이 된다. 그가 ‘고대인들이 공부했던 대학을 다녔기 때문‘이다. [종장] 이는 농작물과 소 사료에 대한 프레드의 책이 메리의 책으로 간주되는 것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  - P907

「진짜 유령 이야기」장에서 ‘하얀 수의를 입은 키가 큰 모습의 캐시는 오래된 저택을 활주하듯 돌아다니며 잠긴 문과 통로로 출입한다. 캐시는 자신의 고통을 참아내느라 쪼그라들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죽어버린 자아의 유령이며 리그리의 학대로 살해당한 자이다. 동시에 하얀 옷을 입은 이 흑인 여자는 스토가 묘사한 저항할 수 없는 가부장적 노예 경제에 의해노예화된 모든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를 보여준다. 리그리는 캐시의 ‘유령‘을 보고 자기 ‘어머니의 수의‘로 착각하는데, 그것은 옳다. 베일을 쓴 이 여자는 리그리 자신이 거부했던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권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살해하는 죄를 짓고 병들어 죽어가는 리그리는 끝까지 그죽음의 천사를 잊을 수 없다. ‘그가 죽어갈 때, 그 침대맡에는단호하고 하얀 옷을 입은 냉혹한 형상이 ‘오라! 오라! 오라!‘고말하며 서 있었다.‘ 흰옷을 입은 이 여자, 흔적 없는 아내를 통해 스토도 조지 엘리엇의 파괴의 천사가 자아 분노와 체념의 엉킨 실을 조명한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샬럿 브론테의 영혼이불러주고 자신은 그저 받아 적기만 했다는 스토의 주장도 진실임을 증언한다. - P913

당신 여자의 머리칼은, 나의 누이여, 온통 헝클어진 채,
고통 속에서 산발된 힘을 물에 띄우며,
당신 남자의 이름에 반박하는.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내가 쓴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검토해보니 […]16세기에는 위대한 재능을 타고난 여자라면 누구라도 틀림없이 미치고 말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자신의 재능을 시를 통해 발현하고자 했던, 소질이 뛰어난 소녀가 너무 심한 방해와 좌절 앞에서[..] 건강을 잃고 미쳐버렸으리라고 확신하는 데는 심리학의 도움을받을 필요도 없다.
-버지니아 울프

영국에는 학식 있는 여자들이 많았다. [...] 그러나 여성 시인은 어디있는가? […] 나는 여자 조상을 찾아 온갖 곳을 뒤졌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만일 디킨슨 부인이 따뜻하고 다정했다면 [...] 에밀리 디킨슨은 아마 어린 시절에 그녀와 동일시해서 가정적이 되어 인습적 여자 역할을 택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교회의 신도로서 공동체의 일에 적극적이었을 것이며, 결혼해 아이를 가졌을 것이다. 물론 창조의 잠재력은 여전히 있었겠지만, 그것을 그녀가 발견할 수 있었을까? 고통과 외로움으로 생기는 글쓰기의 동기를 도대체 어떤 동기가 대체할 수있었을까?
- 존 코디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 중반부에서 ‘여자 몸에 사로잡혀 엉켜 있는 시인의 가슴속 열기와 폭력성을 누가 가늠할 수있을까요?" 하고 역설한다. 울프는 상상 속 인물이지만 여성 시인의 전형인 ‘주디스 셰익스피어‘, 위대한 남성 시인의 뛰어난 ‘재능 있는 여동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울프는 자신의 오빠 윌(윌리엄 셰익스피어)처럼 주디스도 시인-극작가가 되기 위해 런던으로 도망쳤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울타리에 에워싸여 울고 있는 새도 그녀보다 더 음악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윌과 달리 주디스는, 극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유일한 미래는 섹슈얼리티의 착취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울프는우리에게 ‘연기하는 여자는 춤추는 개를 생각나게 한다‘고 말한 엘리자베스 시대의 배우-연출가 닉 그린을 상기시킨다. 분명 여자가 글을 쓴다는 것은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예의 닉 그린은 (울프의 이야기는 그렇게 계속된다) 기꺼이 주디스 셰익스피어를 성 - P918

적으로 이용하려 들었을 것이다. 울프는 닉 그린이 ‘그녀를 측은하게 여겼다‘고 건조하게 말한다. ‘디스는 자신이 [그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게 되었고 (‘여자의 몸에 사로잡혀 엉켜 있는시인의 가슴속 열기와 폭력성을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요?) 어느 겨울밤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녀는 지금은 버스 정류장이 된 엘리판트앤드캐슬 지역 외곽 어느 교차로에 묻혀 있습니다.‘ 문학적 유혹과 배반을 다룬 이 작은 소품에서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 문제에 대한 확장된 사색을 촉발시킨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와 관련이 있으면서도 똑같지는 않은 문제를 규정한다. 울프가 지적했듯, 그리고 우리의 연구를 통해 보아왔듯, 영국에는 (배럿 브라우닝의 말을 빌리자면 ‘많은 학식있는 여자들, 독자뿐만 아니라 학술 언어를 사용하는 저자들‘이 있다.‘ - P919

더 구체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문학사가는 많은 뛰어난 여성 산문 작가들(에세이스트, 일기 저자, 저널리스트, 편지저자, 특히 소설가)의 업적을 기록했다. 사실상 애프라 벤을 시작으로 패니 버니, 앤 래드클리프, 마리아 에지워스, 제인 오스틴과 함께 성장해온 영국 소설은 상당 부분 여성의 발명품인 것처럼 보인다. 오스틴은 『노생거 사원』에서 이 지점을 확실하게 암시한다. 비록 울프는 ‘새커리와 디킨스와 발자크‘가 대표하는묵직한 남성 전통에서 여성이 배제된 현실을 애도하긴 했지만, 마치 그들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페미니스트 묵주의 구슬들인양 ‘자매 소설가들‘의 이름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배럿 브라우닝이 슬프게 질문했듯 ‘여성 시인은 어디 있는가‘, 주디스 셰 - P919

익스피어들은 어디 있는가? ‘여전히 거부되는 표현 수단은 시라고 울프 자신은 슬프게 말한다. 울프가 표현한 한 가지 희망은 주디스 셰익스피어를 대체한 상상의 현대 소설가 메리 카마이클을 두고 한 ‘100년 후에는 [...] 시인이 될 것‘이라는 말뿐이다.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쓴 해는 1928년이었다. 그때는 이미 많은 여성 시인들, 또는 적어도 시를 썼던 많은 여성이 있었다.
울프 자신은 앤 핀치와 마거릿 캐번디시의 생애를 추적했고, 브론테 자매들의 ‘야생적인 시‘를 찬양했으며,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이야기시 『오로라 리에는 어떤 산문과도 견줄 수없는 시적 덕목이 있음을 관찰했다. 나아가 울프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복잡한 노래」에 대해 거의 경외심에 가까운 찬사를 보냈다.  - P920

그렇다면 울프는 왜 여성의 시가 본질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까? 왜 울프는 주디스 셰익스피어가 ‘사로잡혀 엉켜 있고 거부되며‘ 숨이 막혀 스스로 매장되거나 아직 태어나지않았다고 느끼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닉 그린에서 존 크로랜섬과 R. P. 블랙머에 이르는) 남성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배럿브라우닝, 로세티, 에밀리 디킨슨 (울프가 디킨슨의 시를 읽었기를 바라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같은 여자들의 시에 반응한방식을 매우 간략하게 살펴봄으로써 찾아나갈 수 있다.
1959년에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을 소개하면서 제임스 리•브스는 울프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여성이 쓴 시에 많은 남자 문인들이 보인 지배적인 태도를 ‘한 친구‘의 말을 인용하며 보여준다. ‘아주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겠지만, 그 역시 문 - P920

학비평가인 친구는 여성 시인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울프가 ‘남성적‘이라고 칭한 관점에서 보면서정시의 본질 자체가 여성성의 본질이나 특성과 내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남성 우월주의자‘ 독자와 비평가도 같은 지적을 했다. 예를 들면 시인 시어도어 레트키는 그의 친구(가끔은 연인)인 루이스 보건의 작품을 호의적으로 논평하는 가운데, ‘여자가 쓴 시에 가장 자주 퍼부어지는 비난‘에 대해상세하게 말했다. 그는 객관적인 척하며 말하기 시작하지만 스스로 그런 비난을 퍼붓고 있다는 것이 이내 분명해진다. - P921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울프는 현대의 런던은 과학기술의매연과 가부장적 고함 소리와 함께 이 상상의 여성 시인이 묻혀 있는 냉혹한 교차로 위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런 이미지의 섬뜩한 잔인함을 강화시키려는 듯이 울프는 이렇게 덧붙인다. 역사를 읽거나 잡담을 나눌 때, 우리는 마녀와 마술을 부리는 현명한 여자에 대해 듣게 되는데, 그때마다 ‘나는재능이 주는 고통 때문에 미쳐서 황무지에 머리를 부딪쳐 부수어버렸거나, 도로 근처에서 비참히 흐느끼는 [...] 억압된 시인을 [...] 추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문학적] 충동은 시에 대한 것‘이고 ‘노래의 우두머리는 여성 시인‘이었지만, 영국과 미국의 여성 문인들은 울프가 주디스 셰익스피어에게 부여했던 바로 그 광기가 두려웠기에 최근까지 일반적으로 시보다 - P925

는 소설 쓰기를 선호했다. 울프는 마거릿 캐번디시와 동시대인인 한 사람의 말을 인용했다. ‘이 불쌍한 여자가 약간 혼란에 빠졌음이 분명하다. 감히 책을, 그것도 운문으로 쓰려는 것만큼어리석은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설사 내가 2주 동안이나 잠을못 잤더라도 그런 생각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여성 소설가는 미친 여자의 분신이나 다른 악마적인 분신에 대•해 쓰면서 작가가 되는 일에 대한 불안을 피하거나 쫓아내는 반면, 여성 시인은 문자 그대로 미친 여자가 되거나 악마적인 역할을 맡아야 하고, 전통과 장르, 사회와 예술의 교차로에서 한없이 극적으로 죽어야 하는 것이다. - P926

우리는 모든 비평의 유파들이 부유하며 둘러싸고 있는 이 논징적 주제를 남김없이 규명하는 척해서는 안 되며, 소설 쓰기와시 쓰기 사이에는 많은 장르적 차이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와 같은 차이는 울프의 구별이 옳았고, 억압된 (혹은 억압되지 않은 여성 시인의 광기에 대한 그녀의 결론도 옳았음을 입증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소설 쓰기라는 직업이 대개 (블랙머에게는 실례지만) 빵 굽기나 뜨개질같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항상 상업적인 가치가 있었는데, 즐거움을 준다는 점에서기능적이며 공리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시는 (바이런이나 스콧의 이야기시를 제외하고) 전통적으로 돈의 가치와 거리가 멀었다. 그 이유를 우리는 계속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샬럿 브론테 - P926

가 보낸 시를 받고 로버트 사우디가 했던 다음과 같은 유명한답변은 의미심장하다. ‘문학이란 여자가 할 일이 될 수 없으며되어서도 안 됩니다.‘ 분명 이 계관시인은 증권거래소와 그럼스트리트(런던의 삼류 작가들의 거주 지구)라는 세속적인 의미가 아니라 예수가 ‘나는 나의 아버지 일을 해야 한다‘고 했던 그고결한 의미의 직업을 가리켰다. 한편 여성에게 문학이 장려되지는 않았음에도 절박한 상황 속에서 펜으로 먹고살아야 했던여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재능이 덜한 여자들이 가정교사로 세상에 뛰어들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19세기 현상이었다. 재능 있는 가난한 여자는 소설을 써서 사실상 자신은 물론 아마도 굶주리는 그녀의 가족 전부를 먹여 살려야 했을 것이다. - P927

울프가 보여주었듯 소설 쓰기는 단지 ‘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학적이기보다 상업적이고, 성스럽다기보다 실용적이기 때문에 여성의 직업으로 더 적절하다고 여겨졌다. 20세기까지 물질적 사회적 ‘리얼리티‘를 추종하는 장르였던 소설은귀족주의적 교육 대신에 있는 그대로 기록할 것을 빈번하게 요구한다. 반면 알렉산더 포프는 야심 있는 비평가와 (은연중에)시인에게 ‘옛 규칙을 정당하게 존경하는 것을 [...] 배우라. /자연을 본받는 것은 곧 옛 규칙을 본받는 것‘이라고 훈계하면서, ‘자연과 호메로스는 똑같다‘고 말한다. 불같은 우상 파괴주의자인 퍼시 비시 셸리도 묵묵히 따르는 것이 의무인 양 아이스킬로스와 다른 그리스 ‘대가‘들을 열심히 번역했다. 서구 사회가 정의한 대로 서정 시인은 미학적 모델이 있어야 하며, 어떤 의미에서 문학 형식에 걸맞은 심원한 언어를 말해야 한다. 그(또는그녀)는 자연과 사회의 현상을 단순히 기록하거나 묘사해서는 - P928

안 된다. 시에서 자연은 전통으로(즉 ‘옛 법칙‘의 교육으로) 매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울프가(그리고 밀턴의 딸들이)낙담하며 배웠듯 그리스 로마의 전통 고전(서구의 문학, 역사,
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플라톤적 본질)은 ‘남성의 학문 영역‘을 이룬다. 따라서 그 영역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여자들에게 언제나 닫혀 있었다. 울프는 언젠가 그리스어에 대한‘우리의‘ 무지 때문에 여자들은 ‘어떤 남학생 반에 들어가더라도 꼴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모든 주요 여성 시인 중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이 ‘고전‘을 (병약함 때문에 격리되어 일상적 즐거움을 희생했기 때문에) 진지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셸리처럼 브라우닝도 아이스킬로스의 『포박된 프로메테우스』를 번역했고, 더 나아가 브라우닝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의 기독교적인 시인들에 대한 연구 성과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고전학자로서 브라우닝의 능력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고전 작가‘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이그 당시 거의 주목받지 못했고 우리 시대에 와서는 거의 다 잊혔다는 것이다. - P929

앞서 살펴보았듯 시에 나타나는 직접적이고 자주 고백하는 ‘나‘는 여성으로 하여금 실제 삶의 불안이나 적대감을 재연하게 만들지만, 소설에서 여성은 정확하게 바로 그 불안이나 적대감을 피하거나 쫓아내기 때문이다. 언젠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말했듯 소설이 일종의 구조화된 백일몽이라면, 서정시는 키츠의 말마따나 ‘아담의 꿈- 그가 깨어나 그 꿈이 진실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의 ‘나‘가 ‘가정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위험한 분장의 강렬함때문에 자신의 은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고, 자신의 주제를 스스로 재연하게 할 것이다. 던이 실제로 관 안에서 잠을잤듯이 에밀리 디킨슨도 실제로 20년 동안 흰옷만 입었고, 실비아 플라스와 앤 섹스턴은 스스로를 가스로 질식시켰다. 그와같은 은유의 강렬함 때문에 울프는 주디스 셰익스피어가 ‘여성의 몸에 사로잡혀 엉켜 있는 시인의 가슴속 열기와 폭력성을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요?) 『자기만의 방』의 중심에 있는 문학의 교차로에서 죽은 채 누워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녀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많은여성 시인이 그녀의 불안한 정신을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 P932

디킨슨에게 아무도 아닌 존재의 문학적 결과는 사실상 그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 그것은 가끔 기이할 정도로 어린아이 같은 자아상부터 크기에 대한 고통스러우리만큼 왜곡된 감각, 영원히 괴롭히는 허기,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혼란까지 포괄한다. 더욱이 아무도 아닌 존재는 세속적인 결과를 가져왔기에 궁극적으로 이결과는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분명 아무도 아닌 존재는 시를 출판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 때문에, 디킨슨은 ‘출판이란 인간의 정신을 경매에 넘기는 것‘이라고 합리화하면서 출판을 고집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중부정은 의미심장하다. 다중부정이 이시인 주위에 사회적 문법의 무시무시한 벽을 둘러친 듯 보이기때문이다. 1866년경 디킨슨이 자신의 여생을 그녀의 ‘가장 작은 방‘에서 자신과 바깥의 금단 세계 사이에 ‘문을 조금만 열어둔 채‘ 보내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 벽은 거의 완벽하게 밀폐되었다. - P943

그럼에도 디킨슨의 시를 썼던 고통스러운 아무도 아닌 존재와 휘트먼의 시를 썼던 ‘거칠고 뚱뚱하고 관능적인‘ 유명 인사 사이의 차이는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많은 비평가들은 디킨슨의 은둔이 그녀의 시에 유익했으므로 시인에게도 유익했을것이라고 말했다(우리가 인용했던 코디의 문단은 이 견해를 대표한다). 문학에서 ‘만일‘ 게임은 (만일 키츠가 더 오래 살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셰익스피어가 젊어서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디킨슨이 세상에 ‘더 잘 적응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반적으로 쓸모있는 것은 아니지만, 디킨슨의소외와 문학적 실패가 필연적으로 이로웠다는 결론은 얼마 후아무도 아닌 존재로서의 그녀 자신의 고된 즐거움이라기보다 오히려 일종의 합리화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디킨슨이 유별나게억압적인 환경에서 얼마나 빛나는 시를 썼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녀가 만일 휘트먼의 자유와 ‘남성적인‘ 확신을 가졌더라면 무엇을 했을 것인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세티가 자신의 예술적 자긍심을 사악한 ‘허영심‘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면 어떤 종류의 시를 썼을지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디킨슨은 자신이 아무도 아닌 존재인 것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다른 어떤 사람보다 주디스 셰익스피어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디킨슨이 자신을 대단한 인물로만들었다면 그 인물은 바로 주디스 셰익스피어였을 것이다. - P946

20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이처럼 등을 두드리는 듯한 친밀성과 이 친밀성의 정신분석학적 호색성은 관행이 되었고, 이런 관행은 휠씬 더 널리 퍼졌기 때문에 여성 시인을 틀림없이 훨씬 더 우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최근까지 에밀리 디킨슨은 어디에선가 ‘에밀리‘였고,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은 누군가에게 ‘브라우닝 부인‘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이 두 형식 모두 이름을 불리는사람이 이례적인 상황에 있음을 강조한다. 둘 다 여자임을 강조한다기보다 숙녀임을 말하자면 여성 시인의 사회적 의존성, 결혼의 결과로 얻게 된 지위나 상처받기 쉬운 ‘처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 P954

여성 작가의 이름 문제가 여전히 지속된다는 사실은 여자들이 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문제뿐만아니라, 그들이 어머니들로부터 물려받은 위험한 시를 보존하지 못한다는 문제도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울프는 생명력있는 여성 전통의 부족함이 주디스 셰익스피어와 그녀의 시적후손들이 처한 핵심 문제라고 보았으며, 그것은 시인만큼 그렇게 심각한 어려움은 아니었겠지만, 어느 정도는 여성 소설가에게도 문제였다. 한편 여자들은 가장 열렬하게 서로 업적을 인정•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디킨슨이 일생 동안 만났던 독자들 중에오로지 헬렌 헌트 잭슨만이 디킨슨을 완전히 지지했고, 은둔하고 있는 자신의 친구에게 ‘너는 위대한 시인이야. 네가 살아 있는 날까지 소리 높여 노래하지 않는다면 그건 잘못이야‘ 하는믿음을 주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는, 디킨슨 시의 사후 - P954

출판을 둘러싸고 어처구니없이 얽혀 일어난 음모(소송, 해적판,전기, 반전기)는 매우 상징적이다. 그 격렬한 ‘집안 전쟁‘은(리처드 시월이 쓴 두 권짜리 디킨슨 전기의 반 권 분량은 디킨슨의 시를 장악하기 위한 이들의 싸움에 할애되었다) 본질적으로 여자들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투사들은 디킨슨 세대의 여자인 동생 비니와 올케 수가 아니라 후손들이었다. 즉 오스틴의 젊은 연인 마벨 루미스 토드, 그녀의 딸 밀리센트 토드 빙엄, 수 길버트 디킨슨의딸 마사 디킨슨 비앙키였다. 이들 사이의 적대감에 대한 시월의설명을 읽으면 놀라서 멍해질 것이다. 루스 밀러가 말했듯이, ‘이들 젊은 여자들이 그들의 어머니들을 위해 에밀리 디킨슨의시를 가지고 싸움을 계속할수록 더 절망적인 혼돈에 빠지는 상황은 참으로 이상하다. ‘ - P955

다른 어떤 혼돈만큼이나 그런 혼돈은
‘주디스 셰익스피어‘가 직면했고 또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징후로 보인다. 시를 교육하지 않은 곳에 시의 전통은 없으며, 전통이 없는 곳에는 보존을 위해 따라야 할 명확한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울프는 모든 지적인 젊은 여자들이 주디스 셰익스피어의 부활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울프는 주디스 셰익스피어의 화신이 한 명 나타났을 때, 그 여자 후손들이 분열과 분노때문에 가부장적 사회가 늘 여자들 사이에 놓아두었던 것과 똑같은 낡은 칼로 서로를 내리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할 만큼 충분히 냉소적이지도 못했고 비탄에 잠기지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 시인의 시체-작품은 피범벅이 되어 주목받지도 못한 채 교차로가 아니라 모퉁이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 P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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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임에는 다양한 인생관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만큼 갈등도 적지 않다. ‘다름‘을 죽이지 않기로 한 만큼 ‘다름‘을 어떻게 소화해 낼 것인가로 계속 고민을 해왔다. 우리는 애초부터 ‘따로또 같이‘의 원리로 일을 해오고 있지만 획일주의 문화에 길들여진우리는 종종 마냥 엉긴다. 취지에 동의하여 만난 우리들이지만 남자와 여자 사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 결혼 제도에 들어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 봉건적 감성을 가진 사람과 근대적 감성을 가진 사람 사이, 성욕이 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 이성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과 동성을 더 좋아하는 사람 사이, 창작하는 이들과 비평가 기질의 사람들 사이, 맏딸과 둘째딸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한 예를 들어 보자. 자유 분방한 편인 나는 우리 모임이 ‘모범생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답답해 할 때가 많다. 좀더 과감하게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못된 짓‘을 벌여야 할 때도, 온순한 맏딸의 선을 넘지 못하고 만다. 그럴 때면 나는편지를 쓰기도 한다. - P208

맏딸로 태어난 그대들에게

불행한 시대에
맏딸로 태어나
집안의 기둥으로 살았던 그대
근엄한 꼬마 엄마, 정숙한 자매여
그대의 엄함과 숙함에
축복 있으라.

그러나
모범생 그대는
자동 반사 인형처럼
질서를 잡아야 하는 인간
휴강 못하는 충실함에
그릇 채우기에 바쁜 그대 뒤를 - P208

가부장의 미소가 따라다닌다.

‘질서‘에 틈새를 낼
기발한 전략은
정적 속에, 공상 속에서 나온다.
빈 곳에서 온다.
하릴없이 떠다니는 방랑길에서
게릴라 전략이,
시가,
아 많은 것들은 빈둥거리는 사이에 온다.

우리 시대의 음모는
우리를 바쁘게 하는 것
의무감에 시달리는 그대여
우리로 하여금 놀게 하라
그대
‘큰자아‘이기를
‘큰타자‘이기를
이제 그만 포기하라. (1991년 4월) - P209

나는 이런 식의 쪽지를 써서라도 내 마음을 전한다. 사실 나는착실한 맏딸을 매우 사랑한다. 그리고 그 착실함 때문에 일이 잘되어 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겁없이 일을 벌이는 것도 그들이받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모임이 좀 처지는 기분이 들면 그들을 탓한다. 식민지적 상황에서는 ‘중심‘에서멀어질수록 자기 분열의 정도가 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한다면서 그들을 나무라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할 말을 하였으면 한다.
사실 이 모임을 통해 우리가 실험해 온 것은 어떤 내용이 아니라방식일지 모른다. 우리는 ‘획일적 통제‘와 ‘권위주의‘ 없이 일을해내고자 한다. 우리 주변에 가득한 ‘형식적 민주주의‘와 집단주의는 너무나 지겹다. 자율성 없이 남에게 복종하는 것과, 자율성을 부 - P209

르짖으며 폐쇄적 회로에 빠져 있는 것과, 자율성을 토대로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 이 세 가지는 분명 다르다. 많은 이들에게 아직도
‘자율‘은 외국에서 들어온 단어에 불과하다.
80년대에는 이 모임 외에도 많은 여성 운동을 하는 모임들이 만들어졌었다. ‘기층 여성‘을 위한 운동이 많았으며 "계급 모순과 성모순 중 어느 것이 더 기본 모순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일도 많았다. 나는 ‘자신이 선 자리‘에 대한 충분한 성찰을 하지 않는 운동가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특히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일상과 동떨어진 ‘외부‘에서 찾으려는 운동가나 운동 이론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80년대에는 모든 여성 단체들이 모여 회합을가지곤 했는데, 그런 모임에 갔다오면 나는 무척 침울해지곤 했다. - P210

사회 운동이란 역사성을 되찾는 작업이며, 일상성 속에서 개인을역사와 연결시켜 내는 것이다. 목소리를 통일하기보다 우선 목소리를 살려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다름‘을 성급하게 없애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이다. 다중적 모순을 다루는 사회 운동이란 그 여러 모순을 다 짜맞추어 넣은 훌륭한 이론을 가져야 가능한 운동이 아니다. 실은 그런 이론이란 있을 수 없다.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각자가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풀어 가는 식의 사회 운동을 통해서만이 다중적 모순이 풀리게 된다.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인간적 사회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각자가 가진 자질과 정서와 의사소통 방식의 특성을 살려 내면서 협력해 가는 것, 정말 안될까? 우리는 남북한 통일을 바라보면서 역시 걱정을 한다. 상대방의 ‘다름‘
을 포용해 내기를 이렇게도 싫어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통일이되었다고 할 때 또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까? <또 하나의 문화>에서는 그런 상황이 올 것이 염려스러워서 올해 ‘통일된 땅에서 더불어 사는 연습‘ 모임이 뜬다. - P211

지금까지 나는 여성들이 지닌 주변성에 대해서만 언급을 하였지만, 이제는 ‘주변적‘이었던 남성은 물론 가장 ‘중심부‘에 있다고 여겨 온 남성들도 자신들의 삶을 둘러보면 그러한 지점을 쉽게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런 박탈감을 약간이나마 느꼈다면, 그것은 적어도 내가 지배 담론을 넘어서서 그것에 틈새를 내는 데 성공을 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인데, 이렇게 ‘중심‘과 ‘주변‘의 자리는 생각보다 쉽게 바뀔 수 있다. 최근 한 프랑스 소설가는 서양에 사는 남성들이 주변부로서 배회하는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 글을 읽어 보자.

"나는 오랫동안 여성이란 존재는 절대적인 미스테리라고 생각해 왔다. 지금은..... 남자로서의 내가 그렇다. 나는 여성이 어디에 소용이되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남성은 정확히 어디에 소용이 된단 말인 - P212

가? ‘나는 남자다‘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은 ‘검은 대륙‘이었고 아무도 남성에 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부계 사회가 출현한 이후 남성은 언제나 스스로를 특권을 누려 마땅한 인간으로 정의해 왔다. ‘남성성‘은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남성은 여성과 대비하여 늘 존귀하고 자연스러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지금, 비추어볼 거울을 잃은 남성들은 검은 대륙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남성의 방황은, 백인 문명의 방황과 함께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는 표현이 실감난다. - P213

그는 다른 사람들이 벽이나 산과 마주치는 곳에서 하나의 길을 본다어디에서나 길을 보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교차로에 서 있다.
다음 순간이 무엇을 가져다 줄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현존하는 것을 파편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파편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파편을 통해 이어지는 길을 위해서다.

지식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론이라는 것도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나는 본질주의적 경험주의자로서의 입장을 말하고 있지 않다. 즉흥적인 경험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가 임신과 출산의 고통스런 경험은 여자를 성숙시킨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실제로 똑같은 출산의 고통을 겪더라도 원초적인 비명을 지르다가 까무라칠 즈음에 아기를 낳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산고 속에서 삶의 근원과 만나고 태어날 아기를 위해 한층 성숙해지는 사람도 있다. 이런 차이는 바로 경험 주체자의 관점과 기억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 P213

여기서 경험이란 경험 주체자가 가진 시선과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성찰적 경험을 뜻한다. 역사란 그러한 자기 성찰적 경험을 쓰는 일이다. 경험 주체자의 적극적 기억 행위, 또는 서사 행위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또 경험되는 글쓰기 과정이 곧 역사 쓰기인 것이다. 역사는 곧 기억이며, 그 기억은 주체자에 의해 선택된다. 우리 머리 속에는 항상 어떤 과거의 기억이 잠재되어 있고, 그것은 결정적인 계기를 통해 분출되어 나오면서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고, 또 역사를 만들어 간다.
나는 내가 왈가닥인 외할머니를 닮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자라서 그 할머니를 닮았다고 주장하는 여자들이 우리 집안에 꽤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자신이 선택한 기억을 이용하여 스스로에게 자유로운 삶의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있었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적극적으로 기억하기, 이것은 타자화된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과정에서 하는 행위이다. - P215

여성 운동을 하면서 나는 나의 ‘다름‘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나의 ‘거침 없음‘이 좀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감대를 이루어 가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여성적‘이지 못한, ‘거침 없는 양성성‘이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 보았고 그러던 중에 우리 집안에 있었던 두 여자의 ‘반역적행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집안에서 ‘변종‘들이 많이나온 것은 바로 그들의 ‘반역적 행위‘와 관계가 깊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 P215

내 기억에는 활달하고 주체적인 여성상은 있어도 손상된 자의식을 가진 여성의 모습은 별로 없다. 아마도 ‘선천적으로‘ 지워버렸을 것이다. 나의 정서는 많은 부분 이 두 할머니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으며, 보수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그들의 혁신성을 더욱 잘 기억해 두려고 한다.
내가 이 두 할머니 이야기를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선각자적 잘남‘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적 위치를 바꾸어 간 결단의면에서이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과부‘라는 범주에 드는 경험속에서, 또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조건 속에서 그들은 무언가 ‘부당하다‘고 느꼈을 것이고, 그들은 그냥 그 자리에 머물면서 박탈감을계속 느끼기보다는 자신의 그 자리를 새롭게 규정함으로 바꾸어 갈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주어진 상황에 그대로 적응하지 않았으며, ‘주변의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자했다. 근대사에는 그들과 같은 결단을 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고, 바로 그런 사람들의 결단에 의해 우리 사회는 그 나름대로 근대성을 담아 내게 되었을 것이다. - P217

나는 내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삶을 통해서 자신이 선 자리에서지혜/지식을 만들어 가는 삶을 알아 왔다. 그들의 힘은 그들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 데서부터 나온다. 나라가 주권을잃은 상태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은 기성 체제에 편입되는 것을의도적으로 거부했고, 기성 문화와 거리를 둠으로써 그것이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권위를 거부할 수 있었다. 자신의 ‘주변성‘을 피해의식이나 열등의식으로 여기지 않았으므로 일제 치하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고, 남의 모습을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거나 선망과 질투로 괴로와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식민지 시대에도 식민지성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주변성‘에 대한 자의식은 여러 차원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나의 할머니처럼 과부가 되었다거나, 아들을 못 낳는다는 점에서주변화되었음을 느낄 수 있고, 전통적인 신분제 사회에서는 ‘상놈‘
이라든가, 서자의 자손이라든가, ‘바닷가 마을‘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현대 사회에서는 경제적으로 빈곤하다는 이유만으로 수시로 - P217

주변화된 존재임을 느끼게 된다. 그런 공식적 범주화가 아니더라도나는 내 ‘섬세하고 고지식한‘ 할아버지가 자신의 그러한 성격 때문에 자신이 ‘주변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을 것이라는생각을 한다. 어떤 명백한 박탈적 조건이 있어야 주변성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소수의 ‘무딘‘ 사람을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 도중에 자신이 주변화되었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관점 내지 시각이며, 그들이 선택한 준거 집단일 것이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실천을 해야 하는 짐"이라고배웠지만 그의 삶을 통해 그것이 꼭 짐만이 아니고 기쁨이며 자유로움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에 비해서 ‘너무나 많이 배운 ‘아버지는 중심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 힘들게 삶의 무게를 지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중심성을 중시했다. 외아들로서, 남자로서, ‘양반‘으로서, 고향 마을의 유일한 일본 유학생으로서, 또그 이후의 여러 가지 ‘화려한‘ 유학 생활과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항상 ‘중심‘ 가까이에서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한다. 아버지는 내게 아주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지금도 나는 곧잘 아버지를 거울 삼아 나를 비춰 보곤 하는데, 나는 요즘 부쩍 그를 통해 ‘중심‘의 시선에 집착하는 것의 문제점을 본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해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당신의 완벽주의적 성격과도 관계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또한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오는 것임을 안다. - P218

한참 후 세월이 흘렀고, 전혜린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그가 서른을 갓 넘은 나이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단순히 애를 낳고 남자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여자로서의 조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죽은 것은 그가 감히 식민지 주민이면서, 삶을 이야기하는 ‘언어‘를 가질 꿈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통일 있는 내용을 생활 속에 담고 싶고 그 내용으로 내 전 영혼이 뒤흔들리는 그런 방식 속에 살고 싶다면 과대망상적일까?"
여자지만, 식민지 주민이지만, 감히 언어를 갖고자 했던 전혜린을 여성의 언어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다시 기억해 내기로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된 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일고 있는 중심에 들고자 하는 집착이 가져오는 불행과 악순환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여자로 태어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게되었다. 억압당하는 여자로서의 자의식은 여성만이 아닌 다른 많은 주변화된 집단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그들이 받는 억압에 대해 민감해지며, 동시에 나 자신이 보수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혜택 받은 계층에 속함으로써 범하게 될 횡포에 대해서도 감시하게 된다. - P219

자기가 자기를 보기 어렵듯이 ‘중심‘에서는 ‘중심‘을 보기 힘들다. 더구나 자신이 가진 ‘중심‘에 매달려서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시선에는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없다. ‘주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만보인다. 그러나 일단 그 자리를 인정하면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가난한‘ 자리가 시선의 변화에 따라 매우 풍성한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않고는 실은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
자신의 ‘자리‘를 전체 속에서 확인하고 그 자리를 더 이상 ‘주변‘으로만 규정하지 않기로 한 주변인들은 자신의 경험과 시각을 아주 새롭게 재구성하는 일에 단호하게 착수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변신은 아래와 같은 상황을 통해 그려볼 수 있다. 항상 ‘중심부‘인 남편이 자신의 생일을 기억해 주는지 잊어버렸는지에 따라 자신의 존재 가치를 가늠하던 여성이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생일상을 차리게 된다. 이 행위는 자신이 이제 더 이상 남편의 사랑과 관심의 정도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바로 자신으로부터 삶을 시작하겠다는 단호한 선언이다. - P220

나는 이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지방에 있는 친구 교수가 한 말을 떠올린다. 지방 대학에 있는 많은 교수들이 언젠가 ‘서울‘로 갈 수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속에서 지낸다고 그는 말했다. 객관적으로 자신이 실력이 있고, 열심히 연구하려는 ‘야심 있는‘ 학자일수록 그런 경향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자신이 ‘중심부‘로 갈 희망이 없다고 느끼게 되는 날이 오는데, 이때 비로소 그의 눈에 지방에 있는 것들이 - 아마도 학생과 캠퍼스와 지역 정치의 장과 일상적 만남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이 사는 곳을 보지 않고 살았던 것이며, 그의 시선은온통 중앙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혹시 중앙에서 일어나고 있는흥미로운 사건에서 배제되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학문적 토론을 할 만한 대상이 없다는 것을 비판하면서 술을 마실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방과 ‘중앙‘의 차이가 그만큼 현격했으며, 이런 중앙 중심주의는 분명히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다. - P220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변성‘을 새로움을 만들어 가는 ‘거점‘으로 삼아 가는 것을 극도로 힘들게 해왔다.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모순을 외면하고 자신이 가진 미약한 ‘중심성‘에 매달리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아 왔다. 그래서 ‘주변화‘ 된다는 것에 대해 자동 반사적으로 거부 반응을 가진 사람들을 길러 내었다. ‘급진성‘을 싹이 채 트기 전에 죽여 버렸다. 탈식민화를해내려고 하는 마당에서 이제 우리는 ‘급진성‘을 배태해 낼 ‘주변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다져 가야 한다.
이제 각자가 기억하기, 자신의 역사성을 되찾아 보는 일이 남았다. 변혁을 지향하는 역사학에서 ‘구술사 방법론‘에 깊은 관심을기울여 온 것은 바로 ‘민중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역사는 기억 속에서나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탄 워첼 Nathan Wachtel은 구술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 곧 피지배자들의 세계를 구두 증언을 통해 망각으로부터 구해 내는 작업이다. 불평등은 죽음 후에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구술사의 목적 중에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대항 역사를 쓰는 것이며, 소수 민족, 여자, 노동자들인 ‘피정복자들‘이 기억하고 해석해 온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 P222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될 때 그는 자신을 밀실로 몰아넣는, 거대하고 다차원적인 억압 체제를 보기 시작하고, 자신이 선 자리에서 ‘주변성‘을 읽어 내면서 전체 역사를 새로 보게 될 것이다. 이 말은 그에게 또 다른 고문으로 다가가겠지만, ‘간주관성‘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은 나는 이 말을 해야겠다. 자신의 소외감, 그리고 자신이 목격한 ‘주변인이 당하는 억압‘에 대한 기억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 바로 탈식민화를 해가는 길이며 우리를 찾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으로 인해 슬픔을 가져야 했던 사람이 있었음을 잊지 않는이들에게 우리는 기대를 건다. 자신의 경험을 배반하지 않은 그들/우리로부터 ‘앎‘은 시작된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타자화된 모습을 찾아낸 이들은
이제 ‘기억‘을 해내려 한다.

소외된 노동을 하는 자로서,
어머니의 소외를 바라보고 자란 아들로서,
섬세한 감성을 가진 남자로서,
사회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천재성과 감수성을 지닌 이로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소외된 지역의 주민으로서, - P230

대학을 다니지 못한 사람으로서,
오랜 시간 강사 생활을 견뎌온 예비 교수들로서,
자기 표현을 억압당하고 있는 젊은이로서,
두어 개의 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당해온,
그러나 어느 하나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그 외 다른 많은 이유로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언뜻언뜻 묻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서,
기억을 더듬어 ‘주변인‘으로서의 경험을 찾아낸다.
그래서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주변인으로서의 시선‘으로 사회를 보는 훈련을 해간다.
‘부정을 통한 정체성‘이 아니라
‘긍정을 통한 정체성‘을 통해
삶을 만들어 간다.  - P231

우리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남의 언어로 남의 이야기만 해왔기 때문에 우리 이야기를 하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우리 이야기는 그만큼 보잘것없는 꼴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단편적이고 횡설 수설하는 헛소리처럼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움을 심는 세대‘는 그 보잘것없는 우리 이야기의 터에 씨를 심어가야 하지 않을까? 헛구역질이 아닌 입덧의 언어를!
일상적 상호 작용 속에서 자기의 욕망과 느낌에 대해 이야기하는것이 쓰잘데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 자기에게 맞는 진술의방식을 찾아내는 것,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 속에 있는 역사성을 감지하게 되는 것, 나는 이것이 바로 탈식민화의 과정이라고 말해 왔다. 조그만 말 한마디, 친구를 가지려는 노력이 모두 역사적과정이며 우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역사란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의 복합체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체험들에 대한 짙고 옅은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 관계가 피상적‘ 이라든가 ‘문화가 상투적‘이라든가 ‘역사가 단절되었다‘는 말은 곧 그 기억들에 문제가 생긴 것을 의미한다.  - P242

그 기억들이 끊기거나 엉겨 버릴때, 우리의 삶도 엉겨 버리고 삶의 지혜를 놓치고 만다. 역사는 우리의 기억을 조작하고 왜곡하는 어떤 힘에 대한 기록이면서 동시에우리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왜곡‘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제의 핵심은 직접적 권력을 가지지 않은 다수인 우리가 역사를 적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역사로 엮어 내는 데 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이 느끼는 ‘사소한‘ 것을 미처 ‘조리‘가 서지않더라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갈 때다. 지금은 무슨내용의 말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하는 것보다 그 동안 눌러 둔 말이 튀어오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표현을 ‘말대꾸‘라면서 ‘호통‘을 치던 봉건적 문화라든가, 자신의 개성을 끊임없이 ‘결핍‘으로 인식하게 해온 서열화된 획일주의 문화는 겁많고 상실감에 시달리는 무기력한 사람들을 낳았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분 - P242

위기를 만들었다. 이제 자주권을 찾고자 한다면, 과거의 상실을 애도하거나 한탄하는 의식을 멈추고 ‘파편화된 주체가 현존하는 삶의현장‘을 읽어 내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개인의 크고 작은 체험과기억이 담긴 이야기를 통해 집단적인 삶을 다시 써가는 것, 자신을치장해 온 허황된 의식들을 알아내고, 자신 속에서 나오는 일상을보지 않으려는 권력 의지를 따라가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이 사회에서 일상과 비일상성, 상식적 지식과 제도적 지식,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서의 균열과 괴리 속에서 자아 분열을 경험해 보지 않은 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 균열과 괴리를 조리 있게말해낼 이가 몇이나 있을까? 이야기는 이 균열과 괴리의 체험에서풀어진다.
우리가 쓰는 글은 각자가 가졌던 소외의 경험, 추방당한 느낌, 웬지 모를 불편함에서 시작한다. 그 지점에서 ‘중심‘이 무엇인지를묻고, 또 주변을 바라볼 거점을 마련한다. 자신이 선 자리가 어떤경계선, 또는 변경인지, 자신의 삶 속에서 긴장을 일으키는 부분이어디서 오는지를 성찰해 내면서, 역사 속의 자신과 만난다.  - P243

자기 땅의 이방인으로서, 일상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변인으로서 자신이 선 자리를 주목하고 바꾸어 간다. 이때의 글쓰기는 삶을 읽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연속적인 작업 중 하나이다. 그것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며,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기억하기의 행위이다. 또한 그것은 익숙해진 억압을 낮설게 느끼는 동시에 새로운 ‘멍청함‘에 맞서 깨어 있기 위한 전략이다.
그 동안 가져온 문화적 전제를 최소화하고 현장을 들여다본다.
자신의 일상을 뒤집어 보고 낯설게 하면서, 또 낯을 익혀 간다. 바로 그 과정에서 ‘말‘이 생겨난다. 자신 속에 있는 이성과 감성과 의지를 동원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낸다. 감성을 희생하고 훌륭하게 살아 남을 지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종종 우리 사회에 학자가 적은 것은 젊었을 때 감성을 죽인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주변의 소리를 살려 내는 것, 전적으로 다르게 보는 법, 자신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새로운 글쓰기를 하는 이들이 해내야 할 어려운 - P243

부분이다.
훌륭한 저자는 그 자신이 뛰어나서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인, 소설가, 사회 이론 지망생들이 만들어 낸다. 각처에서 자기의삶을 이론화해 내고 표현하면서 건강하게 자신의 터를 일구는 많은사람들의 목소리가 실은 위대한 시인을, 소설가를, 사회 이론가를낳는다는 말이다. 자기를 알아 가는 글쓰기에서 텍스트의 생산자와소비자는 따로 있지 않다. 저자가 주체가 되고 독자들은 ‘바가지를긁는 마누라‘ 같은 주변적 위치에서 저자에게 ‘혐의‘를 부여하고불만을 터뜨리거나, 전면 거부할 여지만 주어진 일방 통행의 상황과는 매우 다른 상황에서 새로운 글쓰기가 이루어진다. 독자는 저자에게 ‘완벽한 텍스트‘를 요구하지 않으며 스스로 저자와 만나는지점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간다. 그는 매끄러운 논리와 통합된 자아관이 지배하는 담론에 틈새를 내고, 그 틈새로 ‘자기‘ 이야기를들이민다.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 P244

이때 우리에게 문체를 새롭게 개발해 내는 일이 중요해진다.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글투‘의 말을 좋아해왔다. 이제 탈식민화를 지향하면서 우리는 어느 때보다 ‘말투‘의글을 되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강한 주장의 ‘말하기‘보다 서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보여주기‘ 방식의 글쓰기가 어느 때보다 효과적인 글쓰기 방법이 아닐까? 강하고 직선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서부드러운 곡선을 그려 낼 수 있어야 하고, 같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나의 길이 아니라 많은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한다.
이제 예술적 표현과 글쓰기 기법을 혁명적으로 ‘해방‘시키는 일이 남아 있다. ‘언어‘의 중요성을 알되, 기존의 문체에 얽매이지 않는 것, 실험적 글쓰기를 할 필요가 있겠다는 것이다. 아방가르드적이건, 포스트 모던적이건, 불교적 생략법이건, 지금은 실험적 글쓰기 작업이 곳곳에서 이루어져야 할 때이다. 관습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는 서사 형식의 혁신과 눌러 둔 감수성으로 새로운의사 소통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때 저자는 "무엇을, 어떤 권위적 저자의 글에 이어서 글을 쓸 - P244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아직 말해지지 않고 있는가?"에 대해쓰게 된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지 집단이 필요하다.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소서사‘를 만들어 가는 언어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중간적 공동체가 없이 사적 자아를 노출하는것은 무모한 짓이다. 사소하다고 치부되어 온 이야기들이 중요한이야기임을 알게 되고, 그러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신이 나고 의미있게 되는 것은 그 새로운 ‘우리‘가 생겼을 때 가능하다.
근대의 모든 지식인들은 세계 어디에서건 데카르트와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어야만 했던 때가 있었다. 그 책이 지배하던 시대는명실공히 소수의 천재들의 독점 무대였다. 그러나 라디오가 나오면서 대중들도 ‘유식 ‘해지기 시작했고,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대중 사회가 출현한다. 이제 수백 개의 채널을 가진 위성 방송전파가 지구촌을 누비고, 유선 방송국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 속에 너나없이 빠져 버리고 말 시대가 올 것이다. 대면적 의사소통이 다시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은 탈식민화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포스트 모던적인 징후를 드러내는 이러한 시대적 맥락과도 관련을 가진다.  - P245

다행히 그런 거대한 위력을 가진 통신 기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대화적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이 시대의글쓰기는 시대가 그런 만큼 더욱 대면적 관계에서 멀리 떨어지지않은 대화적인 것이어야 한다. 경험을 나누는 이야기여야 한다. 이때의 이야기는 가슴을 차갑게 놓아 둔 채 읽는 글이 아니다. 삶에대한 감을 잡아 가는 이야기이며, 일상적 용어가 살려지는 글이며,
혼자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껴 가면서 삶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요약하기가 힘들다. 살아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인문 사회 과학에서 독창성이란 어떤 새로운 객관적인 사실을 알아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이가 자신의 삶 속에서절실하게 꺼낸 이야기가 듣는 이들의 삶 속에서 공명을 일으키는데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개인의 이야기를 의미 있는 이야기로받아들이는 공동체가 있기에 가능하다. 서로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상의 혁명이란 사람들이 관심을 나누고생각을 모아 언어화하는 작업이다. 결과와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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