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속에서


빛 안에 어둠이 있었네
불을 끄자
어둠이 그 모습을 드러냈네
집은 조용했고
바람이 불었으며
세상 밖에 나앉아나는 쓸쓸했네

흔적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벗어놓은 그림자만 남아 있다
저승으로 거처를 옮기신 지 2년인데
서울특별시 강서구청장이 보낸
체납주민세 납부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화곡동 어디 자식들 몰래 살아 계신가 싶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가을날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달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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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낸 이후 십삼 년이 지났다.
힘겹게 다시 한 권의 시집을 묶으며 무언가 한마디 없을수 없겠는데, 의외로 담담해진다. 문득 밤낚시를 드리우던 기억이 난다. 가슴이 철렁하도록 찌가 한 번 솟구쳐오르기를 기다리다가 날이 샜다. 생각하건대 내가 시를 써온 일이 이와 같았다. 작은 움직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고 그것이 커다란 감동으로 다시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욕심이었다. 80년대의 처음부터 너무 큰 충격을 받아왔던 탓일까.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되었고, 감각의 촉수는 그만큼 무뎌져 있었다. 살아오면서 모서리가닳고 뻔뻔스러워진 탓도 없지 않으리라. 입술을 깨물면서나는 다시 시의 날을 버린다. 일상을 그냥 일상으로 치부해버리는 한 거기에 시는 없다. 일상 속에서 심상치 않은인생의 기미를 발견해내는 일이야말로 지금 나에게 맡겨진 몫이 아닐까 싶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외친다. 나의목소리가 귓전을 때리지 않고 당신들의 당신들의 당신들의 가슴을 울리기를 기대하면서.

1991년 3월정희성

그리움 가는 길 어디메쯤


오월 어느날 그 길가
설운 세상 살던 사람 쓰러져
아지랑이 펴오르고
이상도 해라
웬일로 눈시울 붉은
꽃잎 하나 지고 있다
나의 사람아
그리움 가는 길 어디메쯤
더러는 피어 있는
진달래도 있어
피맺힌 너의 넋을 만나도 보리

4월 북한산에 올라


지나간 사월을 그리워 말자
사월이 가면 오월이 오는 법
황사 휘몰아치는 산정에 서서
보라, 때가 되면 모진 바람 속에서도
진달래 흐드러져 피지 않더냐
사일구는 사월에 오지 않아도
이 땅의 오월에 다시 찾아오고
눈물 어룽진 남녘 땅에
봄이 오는 소리 들리지 않더냐
그러나 이제는 냉정해지자
피 흘려 쓰러진 벗들 앞에서
속절없는 다짐을 하지는 말아야지
흙바람을 맞으며
아아 성난 불의 마음으로
가슴 깊이 응어리진 얼음의 마음으로
사월은 사월에 오지 않아도
한겨울 눈 속에 꽃맹아리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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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청 명


황하도 맑아진다는 청명날
강머리에 나가 술을 마신다
봄도 오면 무엇하리
온 나라 저무느니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
머리칼 날려 강변에 서면
저물어 깊어가는 강물 위엔
아련하여라 술취한 눈에도
물 머금어 일렁이는 불빛

우리들의 그리움은


우리들의 믿음은
전쟁이 지나간 수수밭
죽은 내 형제의 머리맡에
미군이 벗어놓은
군화 속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소망은
끝끝내 결재되지 않을
보수정당의 서류함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사랑은
알 수 없는 기도와
못다 한 노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들의 울음은
이 봄에 생생하게 피어날
보리밭에 있고

시퍼렇게 시퍼렇게
물어뜯긴 선창과
파리하게 떨고 있는 공장의
캄캄한 불빛 속에 있어

우리들의 사랑은 다시금
순환하는 계절의 저 눈밭에
봄이 와서 붉게 피어날 진달래와
참호 속에 얼어붙은 젊은 기침과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에 싹터

그리움은 이다지도
시퍼렇게 멍든 풀잎으로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수런대는가

오오 민주주의여

용산시장에서
어느 여성근로자의 일기


공장은 문을 닫았다
가진 것이라곤 노동밖에 없는 우리
꼬쟁이의 모가지는 열두 개
상처마다 옹근 매듭 아리고 쓰리어라
눈물 고인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모두들 열심히 살아가자며
용산시장 골목길을 빠져나가네
어디서들 이렇게 흘러왔는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등을 떠밀고
떠밀리며 듣는 저 아우성과
발끝마다 질척이는 비릿한 냄새
철교 위를 지나는 기차소리는
멀고 먼 고향길을 달려가는가
용산시장의 공기는 끈끈하여
차마 우리의 발길을 붙드는구나
노동밖에는 팔 것이 없는 우리
꼬쟁이의 모가지는 열두 개

저마다 자기들의 상품을 놓고
내일을 향해 외쳐대는 아우성이
어쩌면 재미있는 노래일 수 있으련만
삶이란 역시 힘겨운 것일까
노동판에서 돌아와 지게를 받치고
국수그릇 앞에 쭈그려 앉은
저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이제
어디다 대고 무릎을 꿇어야 하나
처음엔 쳐다보기도 싫던 그 모습
어느덧 아버지의 얼굴로 떠오르며
모두들 그렇게 꺾여서는 안되느니
힘을 합쳐 열심히들 살아가라고
당부하면서 눈물 속에 흐려지면서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붉은 꽃


어디쯤일까 어디쯤일까
그리움 가는 길에 발돋움하고
누구를 향한 마음에
이렇게 몸부림쳐 붉은 꽃일까
먼발치로 사라지는 세월을 두고
한세상 마당귀에 불을 지르네

눈 덮인 산길에서


눈이 내리네
바람 맞서 울고 섰는 나무들이
눈에 덮이네
그대와 걷던 산길
북한산 기슭의 그 외딴 숫막
함께 앉던 그 자리에도
눈이 내려 쌓이네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와도
굳은 맹세 변함 없건만
괴로워라 지금 여기 없는 그대를 위해
나는 술잔을 채울 뿐
눈이 오는 날은
울고 싶어라
그러나 기약한 그날은 갑자기
눈처럼 오는 법이 없기에
빛나는 아침을 위해
나는 녹슨 칼날을 닦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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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서산에 한껏 해가 기우니
흐르는 물은 흐르게 두고
그대만 남아서 무슨 물그늘처럼
상기 내 눈을 지나니
울 때는 맨살로 울며
넋놓아 흐르니
여울에 잠긴 달 가득히
그대 여흰 얼굴을 이루고
저마다 빛 슬픈 여울이 희고 흰
이 산천을 하나로 적시듯

사월에


보이지 않는 것은 죽음만이 아니다
굳이 돌에 새긴  그 시절의 무덤을 홀로지키고 있는 것은 석탑(石塔)뿐
이 땅의 정처없는 넋이
다만 풀 가운데 누워풀로서 자라게 한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룬 것은 없고
죽은 자가 또다시 무엇을 이루겠느냐
봄이 오면 속절없이 찾는 자 하나를 젖은 눈물에 다시 젖게 하려느냐
사월이여

숲속에 서서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때
나는 숲을 찾는다
숲에 가서
나무와 풀잎의 말을 듣는다
무언가 수런대는 그들의 목소리를 알 수 없어도
나는 그들의 은유(隱喩)를 이해할 것 같다.
이슬 속에 지는 달과
그들의 신화를,
이슬 속에 뜨는 해와
그들의 역사를,
그들의 신선한 의인법을 나는 알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기에,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울면서 두려워하면서 한없이
한없이 여기 서 있다
우리들의 운명을 이끄는
뜨겁고 눈물겨운 은유를 찾아
여기 숲속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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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序


문학동네의 권유로 시집 『답청』을 재출간하게 되었다.
이 시집은 원래 1974년 샘터사에서 자비출판 형식으로 간행되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시의 독자가 흔치 않았던 터라 천 부를 인쇄하고 바로 해판해버렸는데 20여 년이 지난지금에 와서는 희귀본 행세를 하니 감회가 새롭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함께 『70년대」 동인 활동을 하던 김형영 시인의 주선으로 만들게 된 나의 첫시집은 이종상 화백의 좋은 그림 덕분에 겉모양새는 그럴듯했으나 내용적으로는 책꼴을 제대로 갖추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보통의 시집들이 머리말이나 뒷말, 발문이나 해설, 사진과 약력 따위를곁들여 독자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이해도 돕도록 되어 있는점에 비추어보면 그 시집은 무례하기 그지없는 터였다.
어차피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을 애송이 시인의 시집에 그런 치레를 한들 무엇하랴 하는 생각이었고 또 시의 질로 한몫 하면 됐지 남의 눈치를 보아서 무엇하랴 싶은 오기도 없

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다시 내는 이번 시집에는책의 체재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고 해서 재출간의 소회를 몇 자 쓸 수밖에 없게 되어 저간의 사정을 여기에 덧붙여 꼴을 갖춘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옛날의 부끄러운 모습을 들추어내는 게 나로서는 못난 얼굴에 분칠을 하는것 같아 여간 민망한 게 아니나 그래도 그걸 보고 싶어하는짓궂은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못난 구석을 마냥 숨길수만은 없는 터이다.
1978년에 두번째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내면서 모자란 자리를 『답청』에서 몇 편 뽑아 채우기도 했거니와 그 시가 내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해서 내 글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보는 이들이 살펴 읽으시기를 바랄 뿐이다.


1997년 6월정희성

얼은 강을 건너며


얼음을 깬다
강에는 얼은 물
깰수록 청청한
소리가 난다
강이여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물은 남몰래 소리를 이루었나
이 강을 이루는 물소리가
겨울에 죽은 땅의 목청을 트고
이 나라의 어린 아희들아
물은 또한 이 땅의 풀잎에도 운다
얼음을 깬다
얼음을 꺼서 물을 마신다
우리가 스스로 흐르는 강을 이루고
물이 제 소리를 이룰 때까지
아희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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