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사랑은 항상 공포로 얼어붙는다. 여자는 모든 것을 원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이 소녀는 훌륭한 정신(강한 열정과 자존심과 재주)을 가지고 있다. 남자들은 그런 포로를 좋아한다. 마치 재갈을 물어뜯고 땅을 발로 치는 말을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력을 더 많이 행사할수록더 큰 승리감을 느낀다. 여자의 의지가 무슨 소용인가? 그녀가 애써도 얻을 수 없고, 그러면 더는 사랑받지 못한다. 여자를 만들었을 때 신은 잔인했다. [39장] - P853

엘리엇의 모든 소설은 디나의 권리를 증명한다. 사이어스 비드처럼 책임감 없는 아버지는 온갖 이유로 물 때문에 죽을까 봐두려워한다. 궨덜린의 남편은 ‘말을 다루는 것처럼 항해도 쉽게 잘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품고 바다로 나가지만, 그는 무엇 하나 잘해낼 수 없고 자신의 주제넘음 때문에 벌을 받는다. 『플로스강의 물방앗간』에서 엘리엇이 설명했듯, ‘자연은 겉으로는 활짝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자신을•숨기는 교묘한 솜씨가 있어서 작디작은 인간들이 자연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비밀리에 그들의 자신만만한 예견을 반박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1부 5장] 네메시스처럼 여기에서 - P854

여자 주인공은 남자에게 분노하지 않고, 증오를 자신에게 되돌려 자신을 벌한다. 그리하여 자기 비하를 통해 자신이 계속 받드는 남자보다 도덕적우월성을 얻는다는 점에서 자신의 분신과 구별된다. 이런 ‘체념의 천사‘들은 부분적으로 앞장에서 우리가 탐색했던 자기혐오를 보여주는 동시에 남성적 세계에서 여자가 처한 조건에 대한 엘리엇의 태도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엘리엇은 이 여성들을통해 마치 남성 사회의 불의가 어떻게 부패한 사회질서로 인해권리를 박탈당한 채 태어난 여자에게 특별한 힘과 미덕, 특히감정의 능력을 부여하는지 탐색하는 것 같다.
샬럿 브론테가 저항했던 모든 부정적 전형이 조지 엘리엇에의해 미덕으로 전환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브론테는 여자가 지적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저주하는 반면, 엘리엇 - P855

은 지적인 결핍이 초래할 무서운 결과는 인정하지만 이 결핍 덕분에 여자에게는 감정적인 삶이 더 풍부해진다고 암시한다. 브론테는 여자가 자기주장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반면, 엘리엇은 남성적 경쟁이 아닌 서로 돕는 동지애에기초한 고유한 여성 문화의 미덕을 극화한다. 브론테가 여성의 감금이 불러일으키는 숨 막히는 구속의 느낌을 극화한다면, 엘리엇은 「미들마치」의 마지막에 인용한 던의 말마따나 자신의 사랑으로 ‘어디에든 작은 방‘을 만들 수 있는 여성의 창의성을 칭송한다. [83장] 브론테는 남자들이 소유한 권위 있는 자유를 부러워하는 반면, 엘리엇은 그 권위 때문에 사실상 남자들이 그들 자신의 육체적 심리적 진정성을 경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P856

『미들마치』에서 매우 흥미로운 에피소드 중 하나는 터티어스리드게이트가 지역사회에 입문하기 전에 경험한 연애 에피소드다. 파리에서 전류 실험을 하던 어느 날 밤, 그는 개구리들과 토끼들을 남겨두고 극장에 갔다. 멜로드라마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연인을 악당으로 오해해 칼로 찔러 죽이는 인물을 연기한 배우에게 매혹당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장면을 자신의 (이 불운한 인물로 분한) 실제 남편과 함께 연기했는데, ‘아내는 남편을 진짜로 찔렀고, 남편은 죽음이 명한 바에 따라 쓰러졌다. [15장] 젊은 리드게이트는 이를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라 확신하고배우 마담 로리에게 청혼한다. 마담 로리는 처음에는 ‘정말 발이 미끄러졌다‘고 은밀하게 말한다.  - P857

이 남자들을 통해 엘리엇은 안정된 기원, 끝, 정체성의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는 이 남자들과 그들의 프로젝트 때문만이 아니라 확대해서 그녀 자신의 텍스트 때문이기도하다. 엘리엇은 양식에 대한 강박증과 그로 인한 강제에 관심을기울였다. 마치 이 모든 미들마치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을 말하기라도 하는 양,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 향수를 주제로 쓴 시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상실했다.‘ ‘글쓰기가 분명한 / 이 사물에접근할 수 있는 열쇠를!‘ 하고 외친다. ‘이 혼란, 이 광대함, 이흩어짐을 알아내고 결합시킬‘ 무엇인가가 틀림없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실하거나 숨겨진 열쇠를 찾는 이 탐색은 성과•없이 실패로 끝나버릴 운명이다. 다이앤 와코스키는 「태양」이라는 시에서 ‘어떤 새가 그 노래를 부르는가/키, 키‘라고 익살스럽게 묻는다. ‘열쇠들로 만들어진 한 마리의 새‘뿐이다.  - P874

사실상 엘리엇은 소설가 자신이 묘사한 궁극적 감금, 자아의감방 속에 갇힌 감금에서 탈출하면서 확장되는 여자 주인공 생애의 비전을 여자들 사이의 디나와 헤티, 루시와 매기, 에스더와 트랜섬 부인, 로몰라와 테사, 미라와 궨덜린 사이의) 호의적공감 행위와 매번 연결시킨다.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하는 「백설 공주」의 미친 여왕처럼 헤티와 트랜섬 부인, 테사, 궨덜린은 거울 앞에서 자신만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다. 창을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디나, 에스더, 로몰라, 미라는 창가에서 바느질하는 착한 여왕을 닮았다. 예를 들면 트랜섬 부인은거울에서 노파인 자신을 보지만, 에스더는 블라인드를 걷어올리고 ‘희미한 달빛이 있는 잿빛 하늘, 영원히 흐르고 있는 강줄기들, 나무들이 흔들리며 휘어지는 모습을 보기 좋아한다.‘ 그녀가 얻은 것은 ‘세상의 광대함‘에 대한 인식이다. [49장] - P885

많은 비평가들은 「미들마치가 사회를 서로 다르지만 서로 관련된 삶들로 짜인 직물로 묘사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예를 들면 이 마을의 역사는 도시적인 마을과 시골 교구 사이에 만들어진 ‘새로운 연결의 실‘이라는 측면으로 묘사된다. [11장] 반면시골 생활의 개인 관계들은 일종의 실로 꼬아 만든 듯한 창조물이 된다. 화자는 ‘이 대부분의 내면의 삶이란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갖고 있다고 믿는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그•의견들로 짠 천이 파멸의 위협을 받을 때까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64장]46 다만 이보다 덜 명확한 것은 연결의실을 바느질하는 것이 여자들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구성하는 의견의 천을 짜는 사람들도 여자들이라는 점이다. - P892

명상적이며 철학적이고, 유머러스하며 동정적이고, 도덕적이며 과학적인 화자는 그녀 자신을 우리 문화의 일반적인 분류를 훌쩍 넘어 젠더 구분을 초월하는 존재로 제시한다. 엘리엇은 지식을 추구하고 ‘남자의 머리와 여자의 가슴을 결합시키는전통적으로 남성적인 임무를 여자의 방식으로 수행하면서, 젠더에 기초한 범주들을 부적절하게 만든다. 엘리엇의 목소리는서로 반대되는 관점을 공감하는 듯한 태도로 말하기 때문에, 그목소리는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쓸 때조차 일시적이고 잠정적이기 때문에, 이 화자는 믿을 만한 ‘우리‘, 즉 사람과 사물 사이의 복잡한 친족 관계뿐만 아니라 의미의 미확정성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의 한계와 문화의 정의를 뛰어넘어 획득한 이런 성취는 관습적인 역할을 강요당하는 여성 인물들의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화자는 엉켜 있는실타래를 객관적으로 풀어내는 인물로 그녀/그 자신을 제시하고 있지만, 결국 애초에 그런 플롯을 짜놓은 사람은 작가다. - P895

남성의 권위는 글쓰기(캐저반의 열쇠, ‘글로 쓸 만한 일을 하고, 내가 한 일을 스스로 쓰겠다‘는 리드게이트의 결심 [45장], 페더스톤의 유언장, 브룩의 신문, 프레드의 차용증서들, 가스씨의 서명, 그리고 벌스트로드의 보증서)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미들마치에서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여자인 가스 부인이 ‘자기 성에 가혹한 편‘이라는 것은 놀랍지않다. 가스 부인에 따르면 여성은 예속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스 부인은 딸 레티에게 오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레티는 이야기 속의 영웅 킨키나투스가 될 수없지만, 아들은 영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메리 가스는 마침내 책을 한 권 쓰는데 그것은 프레드의 업적이 된다. 그가 ‘고대인들이 공부했던 대학을 다녔기 때문‘이다. [종장] 이는 농작물과 소 사료에 대한 프레드의 책이 메리의 책으로 간주되는 것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  - P907

「진짜 유령 이야기」장에서 ‘하얀 수의를 입은 키가 큰 모습의 캐시는 오래된 저택을 활주하듯 돌아다니며 잠긴 문과 통로로 출입한다. 캐시는 자신의 고통을 참아내느라 쪼그라들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죽어버린 자아의 유령이며 리그리의 학대로 살해당한 자이다. 동시에 하얀 옷을 입은 이 흑인 여자는 스토가 묘사한 저항할 수 없는 가부장적 노예 경제에 의해노예화된 모든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를 보여준다. 리그리는 캐시의 ‘유령‘을 보고 자기 ‘어머니의 수의‘로 착각하는데, 그것은 옳다. 베일을 쓴 이 여자는 리그리 자신이 거부했던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권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살해하는 죄를 짓고 병들어 죽어가는 리그리는 끝까지 그죽음의 천사를 잊을 수 없다. ‘그가 죽어갈 때, 그 침대맡에는단호하고 하얀 옷을 입은 냉혹한 형상이 ‘오라! 오라! 오라!‘고말하며 서 있었다.‘ 흰옷을 입은 이 여자, 흔적 없는 아내를 통해 스토도 조지 엘리엇의 파괴의 천사가 자아 분노와 체념의 엉킨 실을 조명한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샬럿 브론테의 영혼이불러주고 자신은 그저 받아 적기만 했다는 스토의 주장도 진실임을 증언한다. - P913

당신 여자의 머리칼은, 나의 누이여, 온통 헝클어진 채,
고통 속에서 산발된 힘을 물에 띄우며,
당신 남자의 이름에 반박하는.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내가 쓴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검토해보니 […]16세기에는 위대한 재능을 타고난 여자라면 누구라도 틀림없이 미치고 말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자신의 재능을 시를 통해 발현하고자 했던, 소질이 뛰어난 소녀가 너무 심한 방해와 좌절 앞에서[..] 건강을 잃고 미쳐버렸으리라고 확신하는 데는 심리학의 도움을받을 필요도 없다.
-버지니아 울프

영국에는 학식 있는 여자들이 많았다. [...] 그러나 여성 시인은 어디있는가? […] 나는 여자 조상을 찾아 온갖 곳을 뒤졌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만일 디킨슨 부인이 따뜻하고 다정했다면 [...] 에밀리 디킨슨은 아마 어린 시절에 그녀와 동일시해서 가정적이 되어 인습적 여자 역할을 택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교회의 신도로서 공동체의 일에 적극적이었을 것이며, 결혼해 아이를 가졌을 것이다. 물론 창조의 잠재력은 여전히 있었겠지만, 그것을 그녀가 발견할 수 있었을까? 고통과 외로움으로 생기는 글쓰기의 동기를 도대체 어떤 동기가 대체할 수있었을까?
- 존 코디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 중반부에서 ‘여자 몸에 사로잡혀 엉켜 있는 시인의 가슴속 열기와 폭력성을 누가 가늠할 수있을까요?" 하고 역설한다. 울프는 상상 속 인물이지만 여성 시인의 전형인 ‘주디스 셰익스피어‘, 위대한 남성 시인의 뛰어난 ‘재능 있는 여동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울프는 자신의 오빠 윌(윌리엄 셰익스피어)처럼 주디스도 시인-극작가가 되기 위해 런던으로 도망쳤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울타리에 에워싸여 울고 있는 새도 그녀보다 더 음악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윌과 달리 주디스는, 극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유일한 미래는 섹슈얼리티의 착취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울프는우리에게 ‘연기하는 여자는 춤추는 개를 생각나게 한다‘고 말한 엘리자베스 시대의 배우-연출가 닉 그린을 상기시킨다. 분명 여자가 글을 쓴다는 것은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예의 닉 그린은 (울프의 이야기는 그렇게 계속된다) 기꺼이 주디스 셰익스피어를 성 - P918

적으로 이용하려 들었을 것이다. 울프는 닉 그린이 ‘그녀를 측은하게 여겼다‘고 건조하게 말한다. ‘디스는 자신이 [그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게 되었고 (‘여자의 몸에 사로잡혀 엉켜 있는시인의 가슴속 열기와 폭력성을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요?) 어느 겨울밤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녀는 지금은 버스 정류장이 된 엘리판트앤드캐슬 지역 외곽 어느 교차로에 묻혀 있습니다.‘ 문학적 유혹과 배반을 다룬 이 작은 소품에서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 문제에 대한 확장된 사색을 촉발시킨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와 관련이 있으면서도 똑같지는 않은 문제를 규정한다. 울프가 지적했듯, 그리고 우리의 연구를 통해 보아왔듯, 영국에는 (배럿 브라우닝의 말을 빌리자면 ‘많은 학식있는 여자들, 독자뿐만 아니라 학술 언어를 사용하는 저자들‘이 있다.‘ - P919

더 구체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문학사가는 많은 뛰어난 여성 산문 작가들(에세이스트, 일기 저자, 저널리스트, 편지저자, 특히 소설가)의 업적을 기록했다. 사실상 애프라 벤을 시작으로 패니 버니, 앤 래드클리프, 마리아 에지워스, 제인 오스틴과 함께 성장해온 영국 소설은 상당 부분 여성의 발명품인 것처럼 보인다. 오스틴은 『노생거 사원』에서 이 지점을 확실하게 암시한다. 비록 울프는 ‘새커리와 디킨스와 발자크‘가 대표하는묵직한 남성 전통에서 여성이 배제된 현실을 애도하긴 했지만, 마치 그들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페미니스트 묵주의 구슬들인양 ‘자매 소설가들‘의 이름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배럿 브라우닝이 슬프게 질문했듯 ‘여성 시인은 어디 있는가‘, 주디스 셰 - P919

익스피어들은 어디 있는가? ‘여전히 거부되는 표현 수단은 시라고 울프 자신은 슬프게 말한다. 울프가 표현한 한 가지 희망은 주디스 셰익스피어를 대체한 상상의 현대 소설가 메리 카마이클을 두고 한 ‘100년 후에는 [...] 시인이 될 것‘이라는 말뿐이다.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쓴 해는 1928년이었다. 그때는 이미 많은 여성 시인들, 또는 적어도 시를 썼던 많은 여성이 있었다.
울프 자신은 앤 핀치와 마거릿 캐번디시의 생애를 추적했고, 브론테 자매들의 ‘야생적인 시‘를 찬양했으며,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이야기시 『오로라 리에는 어떤 산문과도 견줄 수없는 시적 덕목이 있음을 관찰했다. 나아가 울프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복잡한 노래」에 대해 거의 경외심에 가까운 찬사를 보냈다.  - P920

그렇다면 울프는 왜 여성의 시가 본질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까? 왜 울프는 주디스 셰익스피어가 ‘사로잡혀 엉켜 있고 거부되며‘ 숨이 막혀 스스로 매장되거나 아직 태어나지않았다고 느끼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닉 그린에서 존 크로랜섬과 R. P. 블랙머에 이르는) 남성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배럿브라우닝, 로세티, 에밀리 디킨슨 (울프가 디킨슨의 시를 읽었기를 바라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같은 여자들의 시에 반응한방식을 매우 간략하게 살펴봄으로써 찾아나갈 수 있다.
1959년에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을 소개하면서 제임스 리•브스는 울프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여성이 쓴 시에 많은 남자 문인들이 보인 지배적인 태도를 ‘한 친구‘의 말을 인용하며 보여준다. ‘아주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겠지만, 그 역시 문 - P920

학비평가인 친구는 여성 시인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울프가 ‘남성적‘이라고 칭한 관점에서 보면서정시의 본질 자체가 여성성의 본질이나 특성과 내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남성 우월주의자‘ 독자와 비평가도 같은 지적을 했다. 예를 들면 시인 시어도어 레트키는 그의 친구(가끔은 연인)인 루이스 보건의 작품을 호의적으로 논평하는 가운데, ‘여자가 쓴 시에 가장 자주 퍼부어지는 비난‘에 대해상세하게 말했다. 그는 객관적인 척하며 말하기 시작하지만 스스로 그런 비난을 퍼붓고 있다는 것이 이내 분명해진다. - P921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울프는 현대의 런던은 과학기술의매연과 가부장적 고함 소리와 함께 이 상상의 여성 시인이 묻혀 있는 냉혹한 교차로 위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런 이미지의 섬뜩한 잔인함을 강화시키려는 듯이 울프는 이렇게 덧붙인다. 역사를 읽거나 잡담을 나눌 때, 우리는 마녀와 마술을 부리는 현명한 여자에 대해 듣게 되는데, 그때마다 ‘나는재능이 주는 고통 때문에 미쳐서 황무지에 머리를 부딪쳐 부수어버렸거나, 도로 근처에서 비참히 흐느끼는 [...] 억압된 시인을 [...] 추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문학적] 충동은 시에 대한 것‘이고 ‘노래의 우두머리는 여성 시인‘이었지만, 영국과 미국의 여성 문인들은 울프가 주디스 셰익스피어에게 부여했던 바로 그 광기가 두려웠기에 최근까지 일반적으로 시보다 - P925

는 소설 쓰기를 선호했다. 울프는 마거릿 캐번디시와 동시대인인 한 사람의 말을 인용했다. ‘이 불쌍한 여자가 약간 혼란에 빠졌음이 분명하다. 감히 책을, 그것도 운문으로 쓰려는 것만큼어리석은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설사 내가 2주 동안이나 잠을못 잤더라도 그런 생각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여성 소설가는 미친 여자의 분신이나 다른 악마적인 분신에 대•해 쓰면서 작가가 되는 일에 대한 불안을 피하거나 쫓아내는 반면, 여성 시인은 문자 그대로 미친 여자가 되거나 악마적인 역할을 맡아야 하고, 전통과 장르, 사회와 예술의 교차로에서 한없이 극적으로 죽어야 하는 것이다. - P926

우리는 모든 비평의 유파들이 부유하며 둘러싸고 있는 이 논징적 주제를 남김없이 규명하는 척해서는 안 되며, 소설 쓰기와시 쓰기 사이에는 많은 장르적 차이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와 같은 차이는 울프의 구별이 옳았고, 억압된 (혹은 억압되지 않은 여성 시인의 광기에 대한 그녀의 결론도 옳았음을 입증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소설 쓰기라는 직업이 대개 (블랙머에게는 실례지만) 빵 굽기나 뜨개질같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항상 상업적인 가치가 있었는데, 즐거움을 준다는 점에서기능적이며 공리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시는 (바이런이나 스콧의 이야기시를 제외하고) 전통적으로 돈의 가치와 거리가 멀었다. 그 이유를 우리는 계속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샬럿 브론테 - P926

가 보낸 시를 받고 로버트 사우디가 했던 다음과 같은 유명한답변은 의미심장하다. ‘문학이란 여자가 할 일이 될 수 없으며되어서도 안 됩니다.‘ 분명 이 계관시인은 증권거래소와 그럼스트리트(런던의 삼류 작가들의 거주 지구)라는 세속적인 의미가 아니라 예수가 ‘나는 나의 아버지 일을 해야 한다‘고 했던 그고결한 의미의 직업을 가리켰다. 한편 여성에게 문학이 장려되지는 않았음에도 절박한 상황 속에서 펜으로 먹고살아야 했던여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재능이 덜한 여자들이 가정교사로 세상에 뛰어들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19세기 현상이었다. 재능 있는 가난한 여자는 소설을 써서 사실상 자신은 물론 아마도 굶주리는 그녀의 가족 전부를 먹여 살려야 했을 것이다. - P927

울프가 보여주었듯 소설 쓰기는 단지 ‘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학적이기보다 상업적이고, 성스럽다기보다 실용적이기 때문에 여성의 직업으로 더 적절하다고 여겨졌다. 20세기까지 물질적 사회적 ‘리얼리티‘를 추종하는 장르였던 소설은귀족주의적 교육 대신에 있는 그대로 기록할 것을 빈번하게 요구한다. 반면 알렉산더 포프는 야심 있는 비평가와 (은연중에)시인에게 ‘옛 규칙을 정당하게 존경하는 것을 [...] 배우라. /자연을 본받는 것은 곧 옛 규칙을 본받는 것‘이라고 훈계하면서, ‘자연과 호메로스는 똑같다‘고 말한다. 불같은 우상 파괴주의자인 퍼시 비시 셸리도 묵묵히 따르는 것이 의무인 양 아이스킬로스와 다른 그리스 ‘대가‘들을 열심히 번역했다. 서구 사회가 정의한 대로 서정 시인은 미학적 모델이 있어야 하며, 어떤 의미에서 문학 형식에 걸맞은 심원한 언어를 말해야 한다. 그(또는그녀)는 자연과 사회의 현상을 단순히 기록하거나 묘사해서는 - P928

안 된다. 시에서 자연은 전통으로(즉 ‘옛 법칙‘의 교육으로) 매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울프가(그리고 밀턴의 딸들이)낙담하며 배웠듯 그리스 로마의 전통 고전(서구의 문학, 역사,
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플라톤적 본질)은 ‘남성의 학문 영역‘을 이룬다. 따라서 그 영역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여자들에게 언제나 닫혀 있었다. 울프는 언젠가 그리스어에 대한‘우리의‘ 무지 때문에 여자들은 ‘어떤 남학생 반에 들어가더라도 꼴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모든 주요 여성 시인 중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이 ‘고전‘을 (병약함 때문에 격리되어 일상적 즐거움을 희생했기 때문에) 진지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셸리처럼 브라우닝도 아이스킬로스의 『포박된 프로메테우스』를 번역했고, 더 나아가 브라우닝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의 기독교적인 시인들에 대한 연구 성과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고전학자로서 브라우닝의 능력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고전 작가‘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이그 당시 거의 주목받지 못했고 우리 시대에 와서는 거의 다 잊혔다는 것이다. - P929

앞서 살펴보았듯 시에 나타나는 직접적이고 자주 고백하는 ‘나‘는 여성으로 하여금 실제 삶의 불안이나 적대감을 재연하게 만들지만, 소설에서 여성은 정확하게 바로 그 불안이나 적대감을 피하거나 쫓아내기 때문이다. 언젠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말했듯 소설이 일종의 구조화된 백일몽이라면, 서정시는 키츠의 말마따나 ‘아담의 꿈- 그가 깨어나 그 꿈이 진실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의 ‘나‘가 ‘가정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위험한 분장의 강렬함때문에 자신의 은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고, 자신의 주제를 스스로 재연하게 할 것이다. 던이 실제로 관 안에서 잠을잤듯이 에밀리 디킨슨도 실제로 20년 동안 흰옷만 입었고, 실비아 플라스와 앤 섹스턴은 스스로를 가스로 질식시켰다. 그와같은 은유의 강렬함 때문에 울프는 주디스 셰익스피어가 ‘여성의 몸에 사로잡혀 엉켜 있는 시인의 가슴속 열기와 폭력성을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요?) 『자기만의 방』의 중심에 있는 문학의 교차로에서 죽은 채 누워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녀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많은여성 시인이 그녀의 불안한 정신을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 P932

디킨슨에게 아무도 아닌 존재의 문학적 결과는 사실상 그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 그것은 가끔 기이할 정도로 어린아이 같은 자아상부터 크기에 대한 고통스러우리만큼 왜곡된 감각, 영원히 괴롭히는 허기,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혼란까지 포괄한다. 더욱이 아무도 아닌 존재는 세속적인 결과를 가져왔기에 궁극적으로 이결과는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분명 아무도 아닌 존재는 시를 출판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 때문에, 디킨슨은 ‘출판이란 인간의 정신을 경매에 넘기는 것‘이라고 합리화하면서 출판을 고집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중부정은 의미심장하다. 다중부정이 이시인 주위에 사회적 문법의 무시무시한 벽을 둘러친 듯 보이기때문이다. 1866년경 디킨슨이 자신의 여생을 그녀의 ‘가장 작은 방‘에서 자신과 바깥의 금단 세계 사이에 ‘문을 조금만 열어둔 채‘ 보내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 벽은 거의 완벽하게 밀폐되었다. - P943

그럼에도 디킨슨의 시를 썼던 고통스러운 아무도 아닌 존재와 휘트먼의 시를 썼던 ‘거칠고 뚱뚱하고 관능적인‘ 유명 인사 사이의 차이는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많은 비평가들은 디킨슨의 은둔이 그녀의 시에 유익했으므로 시인에게도 유익했을것이라고 말했다(우리가 인용했던 코디의 문단은 이 견해를 대표한다). 문학에서 ‘만일‘ 게임은 (만일 키츠가 더 오래 살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셰익스피어가 젊어서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디킨슨이 세상에 ‘더 잘 적응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반적으로 쓸모있는 것은 아니지만, 디킨슨의소외와 문학적 실패가 필연적으로 이로웠다는 결론은 얼마 후아무도 아닌 존재로서의 그녀 자신의 고된 즐거움이라기보다 오히려 일종의 합리화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디킨슨이 유별나게억압적인 환경에서 얼마나 빛나는 시를 썼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녀가 만일 휘트먼의 자유와 ‘남성적인‘ 확신을 가졌더라면 무엇을 했을 것인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세티가 자신의 예술적 자긍심을 사악한 ‘허영심‘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면 어떤 종류의 시를 썼을지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디킨슨은 자신이 아무도 아닌 존재인 것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다른 어떤 사람보다 주디스 셰익스피어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디킨슨이 자신을 대단한 인물로만들었다면 그 인물은 바로 주디스 셰익스피어였을 것이다. - P946

20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이처럼 등을 두드리는 듯한 친밀성과 이 친밀성의 정신분석학적 호색성은 관행이 되었고, 이런 관행은 휠씬 더 널리 퍼졌기 때문에 여성 시인을 틀림없이 훨씬 더 우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최근까지 에밀리 디킨슨은 어디에선가 ‘에밀리‘였고,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은 누군가에게 ‘브라우닝 부인‘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이 두 형식 모두 이름을 불리는사람이 이례적인 상황에 있음을 강조한다. 둘 다 여자임을 강조한다기보다 숙녀임을 말하자면 여성 시인의 사회적 의존성, 결혼의 결과로 얻게 된 지위나 상처받기 쉬운 ‘처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 P954

여성 작가의 이름 문제가 여전히 지속된다는 사실은 여자들이 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문제뿐만아니라, 그들이 어머니들로부터 물려받은 위험한 시를 보존하지 못한다는 문제도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울프는 생명력있는 여성 전통의 부족함이 주디스 셰익스피어와 그녀의 시적후손들이 처한 핵심 문제라고 보았으며, 그것은 시인만큼 그렇게 심각한 어려움은 아니었겠지만, 어느 정도는 여성 소설가에게도 문제였다. 한편 여자들은 가장 열렬하게 서로 업적을 인정•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디킨슨이 일생 동안 만났던 독자들 중에오로지 헬렌 헌트 잭슨만이 디킨슨을 완전히 지지했고, 은둔하고 있는 자신의 친구에게 ‘너는 위대한 시인이야. 네가 살아 있는 날까지 소리 높여 노래하지 않는다면 그건 잘못이야‘ 하는믿음을 주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는, 디킨슨 시의 사후 - P954

출판을 둘러싸고 어처구니없이 얽혀 일어난 음모(소송, 해적판,전기, 반전기)는 매우 상징적이다. 그 격렬한 ‘집안 전쟁‘은(리처드 시월이 쓴 두 권짜리 디킨슨 전기의 반 권 분량은 디킨슨의 시를 장악하기 위한 이들의 싸움에 할애되었다) 본질적으로 여자들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투사들은 디킨슨 세대의 여자인 동생 비니와 올케 수가 아니라 후손들이었다. 즉 오스틴의 젊은 연인 마벨 루미스 토드, 그녀의 딸 밀리센트 토드 빙엄, 수 길버트 디킨슨의딸 마사 디킨슨 비앙키였다. 이들 사이의 적대감에 대한 시월의설명을 읽으면 놀라서 멍해질 것이다. 루스 밀러가 말했듯이, ‘이들 젊은 여자들이 그들의 어머니들을 위해 에밀리 디킨슨의시를 가지고 싸움을 계속할수록 더 절망적인 혼돈에 빠지는 상황은 참으로 이상하다. ‘ - P955

다른 어떤 혼돈만큼이나 그런 혼돈은
‘주디스 셰익스피어‘가 직면했고 또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징후로 보인다. 시를 교육하지 않은 곳에 시의 전통은 없으며, 전통이 없는 곳에는 보존을 위해 따라야 할 명확한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울프는 모든 지적인 젊은 여자들이 주디스 셰익스피어의 부활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울프는 주디스 셰익스피어의 화신이 한 명 나타났을 때, 그 여자 후손들이 분열과 분노때문에 가부장적 사회가 늘 여자들 사이에 놓아두었던 것과 똑같은 낡은 칼로 서로를 내리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할 만큼 충분히 냉소적이지도 못했고 비탄에 잠기지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 시인의 시체-작품은 피범벅이 되어 주목받지도 못한 채 교차로가 아니라 모퉁이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 P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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