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전까지 아직 몇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발치


이를 빼고 치과를 나서니 스산한 바람이 분다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걸 그동안 몰랐다
아니 통증을 전하는 방식으로 여러 차례
알려왔으나 애써 무시하며 지냈다
이런 일 여러번 겪어본 아내는
바람이 사소하게 불어도 흔들릴 풍치의 나날과
둘 다 연금도 퇴직금도 없이 견뎌야 할 불안한
노후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허전해지는 삶의 한 모서리 사리물고
초가을에서 깊은 가을로 돌아오는 길
옹송그리며 서 있는 과꽃 몇송이가 보인다
이파리 몇개는 벌레 먹고 군데군데 구멍이 났는데도
자줏빛 꽃 곱게 피우고 있는 게 예쁘다

겨울비


아침부터 겨울비 내리고 바람 스산한 날이었다
술자리에 안경을 놓고 가셨던 선생님이
안경을 찾으러 나오셨다가
생태찌개 잘하는 곳으로 가자고 하셨다
선생님은 색 바랜 연두색 양산을 들고 계셨고내 우산은 손잡이가 녹슬어 잘 펴지지 않았다손에 잡히는 것마다 낡고 녹슨 게 많았다
그래도 선생님은 옛날이 좋았다고 하셨다
툭하면 끌려가 얻어맞기도 했지만
그땐 이렇게 찢기고 갈라지지 않았다고 하셨다
가장 큰 목소릴 내던 이가
제일 먼저 배신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
철창 안에서도 두려움만 있는 게 아니라
담요에 엉긴 핏자국보다 끈끈한 어떤 게 있었다고 하셨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겁이 많은 선생님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보다 중도가 좋다고 하시면서
안경을 안 쓰면 자꾸 눈물이 난다고 하시면서낮부터 ‘처음처럼‘만 두 병 세 병 비우셨다

왼쪽에서 보면 가운데 있는 이를
오른쪽에서 보고는 왼쪽에 있다고 몰아붙이는 세월이
다시 오고 추적추적 겨울비는 내리는데
선생님 옛날이야기를 머리만 남은 생태도
우리도 입을 벌리고 웃으며 듣고 있었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옛날은 없는데
주말에는 눈까지 내려 온 나라 얼어붙는다고 하는데

은은함에 대하여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강물도 저녁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우리의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 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

한 송이 꽃


이른 봄에 핀
한 송이 꽃은
하나의 물음표다

당신도 이렇게
피어 있느냐고
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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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즈 레버토프가 열기로 가득한 교육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시 낭송을 위해 블루밍턴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수정/개정의 도취라고 묘사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것은 지금은 너무 쉽게 폐기해버리는 1970년대의 많은 초기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처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었고, 문학적인 것이개인적이었고, 성적인 것이 텍스트적이었고, 페미니스트는 속죄하는 존재였고 기타 등등! (그것들은 진정 계시였고) 이런 계시들을 냉소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로고스 중심적인 권위를 몇및 이론가들이 말했던 ‘기원의 순간‘ 탓으로 잘못 돌리는 위험을 무릅쓴다 해도 인정해야 한다. 그때 그곳에 있었다는 건 축복이었다고. 그리고 나는 그 축복 중 일부가 마치 맛있는 후식처럼 우리와 함께 개종의 여정을 떠났던 최초의 학생들에게 나눠지기를 희망한다. 수전이 언급한 ‘눈맞춤‘은 분명 전기 충격처럼 짜릿했고, 우리 사이를 지나간 계시와도 같은 이해의 네트워크 자체였다. 그것은 아마 레버토프가 마음속에서」를 썼을때,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
이라는 데 우리 모두가 동의했다는 의미다. 말하는 사람을 결코믿지 마라. 페미니스트의 분석을 믿어라.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 P33

많은 이민자들처럼 두 어머니에게도 비밀이 있었다. 수전과나는 가끔 그 의미를 해독해보려고 애썼다. 우리는 여성의 텍스트에 지워진 흔적으로 남아 있는 서브텍스트를 읽으면서, 어떤 의미에서 물에 잠겨 있는 어머니 삶의 플롯을 해독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또 우리는 자신들을이민자 내지 어쨌거나 탐험가 (여성문학이라는 새롭게 떠오르는아틀란티스, 여성의 상상력이 만든 여성의 땅 herland의 지도를만들어보려고 애쓰는 지리학자)로 다시 상상하곤 했다. 분명그런 우쭐한 생각만으로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는 없었다. 특히잉크와 종이로 이루어진 현실의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겁할만한 현실에 맞닥뜨리자, 완성된 타이핑 원고는 상자 두 개를묵직하게 채웠고, 끝도 없는 주석과 악몽같이 복잡한 찾아보기,
표지 문안, 표지 사진이 필요했다. - P38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쓰는 동안 느꼈던 즐거움의 일부는 분명 세대 간 경쟁을우리의 관대한 고결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늘날 말하는 ‘역사적 위치‘라는 행운에서 온 것이다. 우리가 만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함께 작업했을 때는 페미니즘 비평이 존재하지 않아서 학계의 페미니스트 선구자 역시 없었으니 말이다. 우리가느끼는 의기양양함은 기원의 순간에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비롯한다.
분명 그런 흥분이 비평가들을 북돋우어 아프리카계 미국인연구나 게이 레즈비언 연구 같은 다른 정치화된 연구 분야를 개척하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 결과 그들의 계승자들이 그 분야의 변화를 향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비평에서 우리의 계승자들도 그렇게 하기를 희망한다.  - P68

가끔씩 우리는 공격을받아 신경이 곤두서고 때로는 재순환되는 이론들이 만들어내는 혼란스럽거나 엘리트주의적인 전문용어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논쟁이 (이전보다 더 싸우기 좋아하지만, 더 사람들로 붐비며, 흡수력이 더 강하고, 더 노골적으로 모험적인) 페미니즘 비평의 생명력을 압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원의 순간에 대한 향수는 불가피하겠지만, 기원의 복잡성을 단순화하거나 현재의 순간에 자족하기 위해, (더 나쁘게는) 현재의 순간에서 이탈하기 위해 그것을 악용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어느 정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성 문제는 학계 안이나밖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여자들의 성취가 통상적으로 야기하는 반발을 감안하면, 그런 향수는 페미니스트 후계자들을 - P68

축소된 미래에 집어넣을 위험이 있으며, 그런 미래는 앞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할 중요한 지적 노동에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의 후계자나 우리의 모사자가 아니라 우리의 동맹자인 젊은페미니스트들은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벅찬 임무에 직면해 있는데, 1970년대에 족적을 남긴 우리가 그들과 함께 그 임무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 일어나는 냉소주의에도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서 우리가 느끼는 ‘강렬한 즐거움‘은 (19세기와 그 이후」에서 예이츠가 의지한) ‘위대한 노래‘,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우리가의지한 노래와 책들이(오스틴과 브론테 자매, 메리 셸리와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조지 엘리엇과 에밀리 디킨슨의 현명하고 박식한 서정주의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 그 노래들이우리 중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던 운율로 울리리라는 것을 확신시켜준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년이 된 스물한 번째생일에 맞추어 예일대학 출판사에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재출간한 것이 특히 기쁘다.
(2000) - P69

펜은 음경의 은유일까? 제러드 맨리 홉킨스는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1886년 친구 R. W. 딕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홉킨스는 자기 시론의 중요한 특징을 고백했다. 예술가가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자질은 대가다운 기술이다. 이 기술은 남자에게 타고난 재능이랄 수 있어서 이 특징이 특히 남자와 여자를구분해준다. 운문으로든 다른 어떤 형식으로든 종이 위에 생각을 낳는 것은 남자다.‘ 이에 덧붙여 홉킨스는 ‘좀 더 깊이 들어가자면 내가 말하는 ‘대가다움‘이란 놀랍게도 정신이 아니라 대가의 자질을 지닌 삶의 성숙기다. 창조적 재능은 남성의 자질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비유적으로물론이요, 실제로도 문학적 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펜은 어떤 의미에서 (비유적 의미 이상으로) 음경이다. - P74

괴짜에다 유명하진 않았지만, 홉킨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남성으로서 핵심 개념을 말하고 있다. 물론 신이 세상을만든 아버지이듯 작가는 자기 텍스트의 ‘아버지‘라는 가부장적사고는 서구 문학 세계 전반에 퍼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듯이 이 은유는 작가, 신, 가부장이라는말과 동일시되는 ‘저자‘라는 단어에 내재되어 있다. ‘저자‘라는단어에 대한 사이드의 세심한 고찰은 이 논의와 관련해 상당히많은 내용을 요약하고 있기에 여기에 전부 인용할 가치가 있다. - P74

여기에서 자아는 처녀 페이지라는 ‘순수한 공간‘에 팬이라는 음경을 대면서 끝없이 소진된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대대로 시인들은 자신의 관계를묘사할 때 가부장적 ‘가족 로맨스‘에서 유래한 어휘를 사용해왔다. 해럴드 블룸이 지적했듯이, ‘호메로스의 아들들로부터 벤존슨의 아들들에 이르기까지 시적 영향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차원에서 묘사되어왔다. 문학사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격렬한투쟁은 ‘강력한 대립자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투쟁, 교차로에서부딪친 라이우스와 오이디푸스의 싸움‘이었다.  - P78

펀치가 (빈정대는 어조이기는 하지만) 절망적인 심정으로 남성의 요구와 의도를 수용한다는 사실은 문화적 구속의 강압적 힘과 더불어 그 힘을 구현한 문학작품의 강압적 힘까지 뚜렷이드러내준다. 왜냐하면 학식 있는 여성들은 ‘멍청해지라고 요구받고 그렇게 키워진‘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배우기 때문이다. 리오 베르사니가 말하듯, ‘글은 단순히 정체성 묘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정체성, 나아가 육체적 정체성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 우리는 문학에 몰입함으로써 일어나는 일종의 존재의 용해, 혹은 적어도 존재의 유연성을 고려해야 한다. ‘한 세기 반 전에 제인 오스틴은 『설득에서 앤 엘리엇과 대화하는 하빌 대령을 통해 비슷한 이야 - P85

기를 했다. 여성의 변덕에 대해서 논쟁하던 중 앤의 불같은 반밖에 부딪히자 대령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역사가 당신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이야기, 산문, 운문 전부가요. [・・・] 나는 순식간에 내 의견을 지지해주는 인용문을 쉰 개는 댈 수 있습니다.
여성의 변덕에 대해 말하지 않은 책은 내 평생 본 적이 없답니다. (2부 11장) 이 말에 앤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펜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고 대꾸한다. 하빌의 말과 관련해서 보면 그녀의 대꾸는 여성이 저자의 권위로부터 배제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남성의 권위에 종속되어왔음을 (그리고 권위의 대상이 되어왔음을 암시한다. 초서의 ‘교활한 바스 여장부‘를 따라 앤은
‘누가 사자를 그렸는가, 도대체 그자가 누구인지 나에게 말해달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이솝 우화』에서 사람이 사자를 죽이는 그림을 보여주자 사자는 누가 그 그림을 그렸는지 묻는다.
만약 사자가 그렸다면 그 반대를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바스여장부처럼 앤도 문학적 권위와 가부장적 권위를 혼동하는 우리 문화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저 수사학적 질문에 답한다. - P86

오스틴의 소설에 나오는 앤 엘리엇과 하빌 대령의 논쟁도 이와 관련이 있다. 두 인물이 벌이는 논쟁의 핵심이 여성의 ‘변덕‘
이라는 것, 그러니까 여성이 작가/소유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거나 고정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는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 작가들자신이 ‘괴물 같은‘ 자율성을 지닌 여성 인물을 만들어냈으면서도 작가/소유자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꾸짖는 것은 문학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여성 입장에서 보면 ‘변덕‘은 고무적인성격이자 덕성이다. (이중성을 수반하긴 해도) 변덕은 여성이그 자신을 인격으로 창조할 능력, 더 나아가 거울/텍스트 반대쪽에 갇혀 있는 여성에게 다가가 그녀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줄 능력까지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 P94

다시 말해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 기술은 천사의 특성이자, 좀더 세속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숙녀에게 적절한 행위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최고의 교사인 세라 엘리스 부인은 1844년에 여성의 도덕과 예의범절에 대해 말하기를, 숙녀는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는 존경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여성은 ‘집 안의 다른 어떤 사람보다 일에 적게 참여하니‘ 올바른 여성이라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여성은 자신의 노력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말없이 헌신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악마를 피하듯 피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존 러스킨은 1865년에 여성의 ‘힘은 지배를 위한 것도 전쟁을 위한 것도 아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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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가는 높은 산을 오르면서 더욱 경험이 풍부하고 강해집니다. 때로 극심한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다시 산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들이 풍부한 경험을 쌓고 강해지기 위해 산에 가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들은 산에서 겪는경험을 사랑할 뿐입니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왜 산을 오르느냐는 질문에 "거기 산이 있으니까"로 답했는데요. 이 단순한답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은 그것이 산에 오르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 때문일 겁니다. 산 자체가 목적이고, 거기서 겪는 경험, 자아의 변화는 그들에게는 부수적인 결과에 불과할 겁니다.
소설가니까,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제 답도 힐러리 경만큼 단순합니다. - P139

"거기 소설이 있으니까" 읽는 것입니다. 40년 넘게 소설을 읽어오면서 제 자아의 많은 부분이 해체되고 재구성되었겠고, 타인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겠고, 저 자신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만 애초에 그런 목적을 위해 소설을 집어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 근육량을 늘리고 건강해지기위해 헬스클럽에 가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자‘고 결심하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습니다. 소설은 소설이 가진 매력 때문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과 싸우며 읽어나가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 P140

독서의 목적따위는 그에 비하면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서의 목적 같은 것으로 설명해버리기에는 소설을 읽으며 독자가겪는 경험의 깊이와 폭이 너무 넓고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개개의 독자가 특정한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변화를 겪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소설을 하나의 도구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설이라는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한때 인간은 자연이 합목적적으로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태양은 식물을 성장시키기 위해 아침마다 떠오르는 것이고 과일은 따먹으라고 있는 것이고 사슴은 - P140

잡아먹히라고 들판을 뛰어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인간중심주의는 끝없이 붕괴되어왔습니다.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온갖 동물이 인간에게 잡아먹히도록 창조된 것도 아니었으며, 인간과 원숭이는 별반 차이가 없는 종이었습니다. 자연이 인간의 필요를 위해 창조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소설도 인간의 어떤 필요를 위해 쓰이고 읽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 않아도 산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어떤 소설은 우리가 읽든 말든 저 어딘가에 엄연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소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접근하고, 그것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고,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어떤 분명한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 변할 뿐입니다. 강연 초반에 인용했던 오르한 파묵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서 오늘의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소설은 두번째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 P141

도서관이 우주라는 말은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주 안의 사물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 즉 거시 세계를 구성하는 중력과 미시 세계를 구성하는 전자기력, 그리고 극미 세계를 구성하는강력과 약력이 없다면 우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힘들은 우주 안의 모든 존재가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면서서로 영향을 주고받도록 만듭니다. 책의 우주도 이와 비슷합니다. 책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개개의 책은 다른 책이 가진 여러 힘의 작용 속에서 탄생하고, 그후로는 다른 책에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도서관은 영향을 주고받는 정도가큰 책들끼리 분류하여 모아놓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분야의 책들이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받을 테니까 서양 철학 책은 서양철학 책끼리, 프랑스 소설은 프랑스 소설끼리 모아놓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분류가 다른 책들 사이에 힘의 작용이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대체로 약할 뿐입니다. - P183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특히나 이런 작업, ‘정전 다시 쓰기‘가많았습니다. 이렇게 대놓고 ‘다시 쓰기‘를 표방하든 그렇지 않든, 여전히 전 세계의 작가들이 무언가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보르헤스의 ‘도서관‘, 책의 우주는 점점 더커져갑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땅을 사서 집을 짓는 것과는좀 다릅니다. 소설 쓰기란 남의 것을 잠깐 빌려왔다가 그것을다시 책의 우주에 되돌려주는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소설을 읽는 것은 바로 이 광대한 책의 우주를 탐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처럼 하나의책을 통해 그 우주에 들어갑니다. 책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문이자 다른 책으로 연결해주는 징검다리입니다. 소설과 소설,
이야기와 이야기, 책과 책 사이의 연결을 찾아내는 것은 독자로서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야기에 흠뻑 빠 - P208

져들면서도, 그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의 연결점을 찾아나가고,
그런 경험을 쌓아나가면서,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소설과 소설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독자는 자기만의 책의 우주, 그 지도를 조금씩 완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섯 날에 걸쳐 그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을 함께 탐색해보았습니다. 호메로스와 소포클레스로부터 시작해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 미즈무라 미나에나 존 쿳시의 작업까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훌륭한 작가들이지만 책의 우주는 이보다 훨씬 더 광대하다는 것, 우리의 유한한 삶보다 오래 영속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로부터 시작해 연결점들을 찾아내고, 더 근사한 별자리를 발견하면서 책의우주를 확장해갈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 P209

사실 독자로 산다는 것에 현실적 보상 같은 것은 없을지도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짧은 생물학적 생애를 넘어 영원히존재하는 우주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 잠시나마 그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가장 큰 보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별들이 수백 수천 년 전에보내온 빛이 이제야 우리의 망막에 와닿듯이 책 역시 시공을초월해 우리에게 도달하고 영향을 미칩니다. 밀란 쿤데라의 통찰처럼, 비록 우리 현대인의 시야가 마치 요제프 K의 그것처럼좁아져 있고 모두가 세속적 이해와 단기적 전망으로 아웅다웅 - P209

하며 살아가고, 세계가 돈키호테와 같은 모험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에게는 이 좁은 전망을 극적으로 확장해줄 마법의 문이 있습니다. 바로 ‘이야기의 바다‘로 뛰어들어 ‘책의 우주‘와 접속하는 것입니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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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고전이 진부할 것이라 지레짐작합니다. 그러나그렇지 않습니다. 오래 살아남은 고전은 처음부터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웠는데 지금 읽어도 새롭게 다가옵니다.다시말해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쓰인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전이라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지나도 낡거나 진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들은 살아남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후대로 전승되었을 겁니다. - P16

그러나 망켈처럼 범죄소설의 정의를 폭넓게 보고자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살인이 일어나고, 수사가 시작되고, 범인을 찾아내는 모든 이야기가 범죄소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숙부의 사악한 범죄를 추적하는 햄릿도 그런 의미에서는 탐정이 됩니다.
망켈은 『메데이아를 예로 들었지만, 많은 이가 범죄소설의 기원으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거론합니다. 데이비드 미킥스 같은 비평가는 소포클레스의 이 희곡은 독특하고 아주 아이러니한 탐정소설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는 노련한 탐정으로 자처하며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뒤를 밟고, 그 결과 자신의 몰락에 일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탐정이 수사를 하다보니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일종의 탐정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이디푸스 왕』 역시 읽지 않았으면서도 그 내용을 다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명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을뿐 아니라 이야기의 줄거리도 여러 경로로 접한 바 있었으니까요. - P20

비극의 주인공들은 항상 너무 늦은 순간에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곤 하지만, 저는 독서를 통해 커다란 위험 없이 무지와 오만을 발견하곤했습니다. 특히 고전이란, 이탈로 칼비노의 정의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읽지 않았으면서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제 오만은 오이디푸스의 자신감을 닮았습니다.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겁니다.
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 - P29

다.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됩니다.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비평가해럴드 블룸은「교양인의 책 읽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 P31

그렇다면 『돈키호테』와 『마담 보바리』는 소설이나 이야기의위험을 경고하는 작품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뇌과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뇌는 현실과 환상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떤 현실은 아련한 꿈처럼 기억되고, 어떤 이야기는 마치 직접 겪은 일처럼 생생하기만 합니다. 이야기와 비슷한 것으로는 꿈이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야기와 다릅니다. 어제 꾼 꿈을오늘 정확히 이어서 꾸지는 못하니까요. 그런데 소설은 꿈만큼이나 생생한데 계속 이어집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마루에서 책을 읽고있었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어떤 책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는 그 책의 내용에 흠뻑 빠져있었습니다. 고아가 된 아이가 온갖 시련을 겪고 있었을 수도 있고, - P64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이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책을 펼치면 순식간에 ‘지금, 여기‘와는전혀 다른 세계로 휙 빨려들어간다는 게 마치 무슨 마법처럼느껴져서 신기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 어머니가제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저는 그 흥미로운 세계로 들려오는현실 세계의 목소리, 즉 우리 어머니의 목소리가 굉장히 낯설고 불쾌하게 느껴졌고, 내 소중한 개인적 세계가 침해받는 것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덮고 일어나 어머니에게 다가갔습니다. 어머니는 채소나 두부 같은 것을 사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놀라웠던것은 어머니는 제가 방금 전까지 겪은 일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 P65

제가 어떤 세계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격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저는 그냥 누워서 소설책을 보며 뒹굴거리는 아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가게에 가서 식재료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읽던 그 책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접어두었던 책장을 펼치자마자 저는 콩나물과 두부의 세계에서 바로 그 이상한 세계로 점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잊고 정신없이 책을 읽기시작했습니다. 그 순간의 저는 프랑스의 작가인 다니엘페나크가 소설처럼』에서 제시한 이른바 또다른 방식의 ‘보바리즘‘을 - P65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쥘 드 고티에의 보바리슴이 에마의 증상에 착목했다면 다니엘 페나크의 보바리슴은 독자의 정신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보바리습이란 " ‘오로지 감각만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충족감‘에 다름아니다. 즉 상상이 극에 달해 온 신경이 떨려오고 심장이 달아오르며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출되는 가운데 주인공의 세계에 완전 동화되어, 어처구니없게도 대뇌마저 (잠시나마) 일상과 소설의 세계를 혼동하기에 이르는"현상, 즉 소설을 읽는 독자가 겪는 정신적 변화를말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의 제가 겪은 일은 그러니까 저 혼자만의 독특한 경험이 아니라 에마 보바리 이후로 수많은 독자들이 경험한 일의 재현이었던 것입니다. - P66

그후로도 저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독서를 통해 셀 수 없이 많은 인물을 만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도시를 여행했으며, 평생 한 번도 겪어볼 일이 없는 사건들에 연루되었습니다. 그 기억과 경험은 고스란히 제 안에 남아 있고 그 세계는 제가 직접 경험한 현실보다 훨씬 더 크고 풍부합니다. 이 세계가 모두 가짜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책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저라는 인간의 정신 안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유일무이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환상에 빠져 현실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 P66

요? 인간이 그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현실에 너무 집착해 자기 내면의 정신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는 아닐까요?
돈키호테』와 『마담 보바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때문에 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미치광이 돈키호테와 광기 어린 사랑으로 자신을 망쳐버린 에마 보바리는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그들에게서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야기 속의 세계가 계속되기를 바라고,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우리가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물들에 매료되고 자기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며 그들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우리의 의식에 침투해 우리의 일부를 돈키호테와 에마 보바리로 바꾸어놓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읽은 소설은 우리가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한번 읽어버린 소설은 더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 P67

우리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소박하게 또는 성찰하면서 의도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작업입니다.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두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소설에는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부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요? 소설을 만드는 모든 것이 그 재료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중심부는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따라 좇아간 소설의 표면과는 멀리 떨어진 배후 너머에 있어서 보이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거의 계속 움직여서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 중심부의 징후는 사방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설의 모든세부 사항, 즉 거대한 풍경의 표면에서 마주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설을 - P83

읽을 때면 마치 풍경을 걸어가며 모든 잎사귀를, 모든 부러진 가지를 어떤 신호처럼 여기고 의심하며 주의깊게 살피는사냥꾼처럼 행동합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난 모든 새로운 단어, 사물, 캐릭터, 주인공, 대화, 묘사, 세부 사항, 소설의 언어적·형식적 특징, 이야기의 예상 밖 진행 등이 표면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암시한다고 느끼면서 읽어나갑니다.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고 믿으면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세부 사항이 중요할 수 있고, 소설 표면에 있는 모든 것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소설은 죄책감과 피해망상 그리고 불안감을 향해 열려 있는 서사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심오한 감정 또는 어떤 삼차원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도 이 감춰진 중심부의 존재 때문입니다.
- P86

소설을 서사시, 중세의 메스네비, 장시 그리고 전통적인모험소설과 구분짓는 것은 바로 이 중심부입니다. 물론 소설은 등장인물이 더 복잡하다는 점에서도 다릅니다. 소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파고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은 배후 어딘가에 중심부가 있고, 우리가그것을 찾길 희망하며 소설을 읽기 때문에 힘을 발휘합니다.
소설이 우리에게 삶의 평범한 세부 사항, 환상, 일상의 습관과 사물을 보여줄수록, 우리는 호기심을 갖고 경탄에 사로잡 - P86

히 읽어나가게 됩니다. 이것들이 배후에 숨어 있는 어떤 의미, 어떤 의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대하고 광활한 풍경 속 모든 세부적인 것들, 모든 잎사귀와 꽃이관심을 끌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뒤에 의미가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이라고만 번역되어 있지만 여기서 파묵이 지칭한 것은 돈키호테』 이후의 현대소설입니다. 그는 ‘소설‘을 서사시나 모험소설과 구분해 쓰고 있습니다)에 감춰진 중심부가 있고, 바로 그것 때문에 독자는 소설 속의 모든 요소를 마치 주의깊은 사냥꾼처럼 살피게 된다는 파묵의 견해는 탁월합니다. 현실의 자연은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강가의 오리나무와 버드나무는 그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의 눈을 통해 보여진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독자는 그뒤에 의미가 감춰져 있다고 믿기 때문에 허투루 보아 넘기지 않습니다. - P87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업들은 우리를 소비자라 부릅니다. 구글 같은 기업은 우리를 빅데이터의 한 점으로 봅니다. 정당은 우리를 유권자로 여깁니다. 우리의 개성은 몰각되고 행위만이 의미 있습니다. 우리가 더이상 물건을 사지 않고, 인터넷에 접속하지도 않으며,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나만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 P104

현실의 우주가 빛나는 별과 행성, 블랙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크레페케이크를 닮은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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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점에서 사인회를 할 때마다 독자들 한명 한명에게 물어봅니다. 무슨 일을 하시나요? 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어떤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지, 어떤 꿈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그들은 대부분 학생이거나, 알바생이거나, 비정규직이거나, 아니면 취업준비생입니다. 번듯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참 드물어진다는 것을 책을 새로 낼 때마다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그들의 삶에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이들에게 내가 20대에 했던 것처럼 과감한 결단을 내려라, 예술에 투신하라, 인생을 걸어라, 이렇게 충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고 묻는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 P22

인간은 타인의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진화과정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혼자 판단하려 한다면 너무 힘들고 피곤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로 뛰어간다면 이유가 있으리라 믿고 일단 같이 뛰어가면 편합니다. 저쪽에 뭔가 무서운 것이 있거나 아니면 이쪽에 뭔가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뛰는 것이겠죠.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 때 많은 사람들은 충분히 대피할 시간이 있었지만 소방관이 오기를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고는 자기 사무실에 머물렀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지요.
대구 지하철 참사 때도 연기가 전동차 안에 자욱할 때까지 대부분 동요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기관사가 방송으로 곧 열차가 출발할 거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사망했습니다. - P25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저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새로 나온 사진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카메라로 더 멋진 사진을 찍는 삶입니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는 삶이 아니라 휴대폰을 잠시 끄고 글을 쓰는 데서 얻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의 대부분은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유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오래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술과 관련되었다는 겁니다.  - P28

육체의 근육이 발달한 사람은 같은 양의 음식을 먹어도 기초대사량이 높아 살이 잘 찌지 않는다고 하지요. 감성 근육이 발달한 사람 역시 더 많은 것을 느끼면서도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잘 느끼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자기 느낌을 가진 사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와인을 전문적으로 테이스팅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별점을 보고 와인을 고를까요? 평생 음악을 사랑하고 들어온 사람들이 남의평가만 듣고 콘서트 티켓을 살까요? 저만 해도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살 때 독자 서평이나 리뷰를 전혀 보지 않습니다. 한 작가가 저에게 한 번이라도 깊은 즐거움을 주었다면 그 즐거움은 제 정신과 육체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 작가가 새 작품을 냈다면 일단 사보는 겁니다. 만약그 작품에 실망했다면 그것 역시 고스란히 남습니다. 자신만의 느낌의 데이터베이스가 충분한 사람은 타인의 의견에 쉽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 P34

글은 한 글자씩 씁니다. 제아무리 빠른 사람도 글자 열 개를 한꺼번에 뿌릴 수 없습니다. 한 글자씩 한 글자씩 써야 단어가 만들어지고 이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됩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이 차례대로 쌓여야 글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는데요. 이렇게 써나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변화가 생기고 이게 축적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트라우마나 어두운 감정은, 숨어 있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막상 커튼을 젖히면 의외로 별 볼일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한 글자 한 글자 언어화하는 동안 우리는 - P58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것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언어는 논리의산물이어서 제아무리 복잡한 심경도 언어 고유의 논리에 따라,
즉 말이 되도록 적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좀더 강해지고 마음속의 어둠과 그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힘을 잃습니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가 가진 자기해방의 힘입니다. 우리내면의 두려움과 편견, 나약함과 비겁과 맞서는 힘이 거기에서나옵니다. - P59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에게 허용된 최후의 자유이며,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마지막 권리입니다.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세상의 폭력에 맞설 내적인 힘을 기르게 되고 자신의 내면도지시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도 뭔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없어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는 직장이나 학교, 혹은 가정에서 비인간적인대우나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겪었거나 현재도 겪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한계에 부딪쳤을 때 글쓰기라는 최후의 수단에 의존한 것은 여러분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닙니다. 그런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일단 첫 문장을 적으십시오. 어쩌면 그게모든 것을 바꿔놓을지도 모릅니다. - P60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내 생애에 우주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을느낀다. 저와 소설의 관계도 그와 비슷한 것 같아요. 전 세계의소설에 역사가 있잖아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소설들이 있고, 제가 쓰는 건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죠. 앞으로 남은 생애 안에 제가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밤하늘의 어떤 흔적도 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 세계의 일부라는 것, 내가 그작가들 중 한 명이라는 것, 그게 어떤 기쁨을 줄 때가 있어요.
내가 그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라는 사실이 말이에요. 소설의세계는 너무 거대해서 저는 어떤 파문도 일으키지 못할 거예요. 그게 기쁠 때가 있어요. 광대무변한 이 우주와 나. - P90

사실 생각도 함부로 하면 안 되잖아요? 좀 무서운 생각을 하라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경험 다 있잖아요?
이렇듯 보통 사람들은 생각도 범위를 제한하면서 살고 있는데,
작가들은 보통 사람들을 대신해서 상상하고, 이상한 세계를 탐험하죠. 물론 여기서의 이상한 세계는 물리적인 세계가 아니라정신적인 세계예요. 『살인자의 기억법』같은 소설도 연쇄살인범의 내면이잖아요.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기도 싫어해요. 그런데 작가는 합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자는 어떤 존재인가를 상상하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거죠.
작가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요. 보통 사람들이 자기 상상력 안에 갇혀 있을 때 작가들은 더 멀리 나아가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감히 꿈꾸지 않는 것, 감히 경험하지 않는 것, 또는 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경험하고 그 경험을 사회로 가져오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가공해서 그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 P112

저는 제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직도 모국어를 다 마스터하지 못해서 열심히 수련중입니다. 그런데도 작가니까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요?‘ 하는 질문을 많이 받죠.
전업작가이고, 열 권이 넘는 소설을 썼으니까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글을 많이 쓴 것은 분명하겠죠. 글을 잘 쓰는 법에대해서 많은 분들이 물어보시는데, 저는 다른 사람의 글을 볼때는 단순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이야기가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에요.
어떤 글은 미사여구로 잘 꾸며져 있고 완벽한 구조를 가지고있지만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아요. 제가 군대생활을 헌병대수사과에서 했는데, 영창 수감자들의 일기를 매일 받아서 책으로 편집하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어떤 수감자들이 글을 잘 쓰는가 하면 중형을 받은 범죄자들이었어요. 군대에 와서 흉악한범죄를 저질러 중형에 처해진 수감자가 두 명 있었는데, 그들이 글을 제일 잘 썼어요. 다른 이들은 의무적으로 쓰라고 하니까 반성문처럼 썼는데, 그 두 사람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들은 각각 무기와 25년형을 구형받았거든요. 나중에 15년 - P120

5년으로 감형되긴 했지만 적어도 구형은 그렇게 받았어요. 그이 그린 구멍을 받고 돌아와서 쓴 글들이 있어요. 지금 스물두 살인데 빨라도 마흔 살이나 돼야 감옥을 나갈 수 있다는 자기 운명을 생각하고 쓴 거죠. 그 순간만큼은 자기 인생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직면해서 쓴 것이거든요. 이런 글들은 힘이 있고 진실해요. 그래서 저는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떤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기법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순간에인간이 고요하게 자기 서재, 아무도 침입해오지 않는 고요한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늘 힘이 있고 매력이 있어요. - P121

번역이 되어 외국에 소개된다는 건 한 편의 소설이 한 나라의 전화와 그 밖의 것들을 다 가지고 넘어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르게 상당히 깊이 있게 세계를이해하게 해줍니다. 그런 면에서는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는번역이 된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에요.
오르한 파묵이 이라크의 작가였다면 미국은 이라크를 쉽게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어요. 오르한 파묵은 이스탄불의 풍경을 소설을 통해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터키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삶을 그려냈어요. 이라크는 석유는 갖고 있지만 터키처럼 세계적인 레벨의 작가를 보유하고 있지 않아요. 그런 나라에는 마치 인간이 살고 있지 않는 것처럼,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어요. 사담 후세인이 지배하던 악의 제국처럼 느껴지는거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그 삶에 대해 우리가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반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 같은 작가가 있는 남미의 경우는 - P148

그 반대예요. 거기 사람들은 괜히 친구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곳에선 마술적인 일이 일어나고, 유쾌하고도 어딘가 신비롭고이상한 사건들이 태연하게 일어날 것 같아요. 그렇게 친숙한느낌을 주는 것이 책이 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외국의 독자들을 만난다는 건 정말 새로운 일이죠. - P149

번역의 역사는 오역의 역사예요. 그리고 오역이 좋은 결과를 빚은 적도 많아요.(웃음) 전 오역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단지 운이 좋기를 바라고 있어요. 제가 쓴 것보다 나아질수도 있잖아요.(웃음) 오역이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세계문학을 볼 수 없었을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면 정말 한심한 번역이 많거든요. 그래도 저는 그 작품들을 즐겼어요. 오역이라고 해도 도스토옙스키, 빅토르 위고작품에 실망하지 않았거든요. 번역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어요. 그다지 연연하지도 않아요. - P149

달은 무슨 인테리어 소품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떠서 광합성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희미한 태양광만 지구로 반사시키지만, 그럼에도 지구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조수간만의 차를 만들어내고 여성들의 생리주기도 조절합니다. 많은 생물들이 달의주기에 따라 이동하고 짝을 짓고 산란합니다. 소설도 그와 비슷하게 인간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소설이 그저 재미있어서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소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작용합니다. 그 작용을 우리가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못하고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소설의 가장 멋진 점아닐까요? 소설은 적어도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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