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전까지 아직 몇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발치


이를 빼고 치과를 나서니 스산한 바람이 분다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걸 그동안 몰랐다
아니 통증을 전하는 방식으로 여러 차례
알려왔으나 애써 무시하며 지냈다
이런 일 여러번 겪어본 아내는
바람이 사소하게 불어도 흔들릴 풍치의 나날과
둘 다 연금도 퇴직금도 없이 견뎌야 할 불안한
노후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허전해지는 삶의 한 모서리 사리물고
초가을에서 깊은 가을로 돌아오는 길
옹송그리며 서 있는 과꽃 몇송이가 보인다
이파리 몇개는 벌레 먹고 군데군데 구멍이 났는데도
자줏빛 꽃 곱게 피우고 있는 게 예쁘다

겨울비


아침부터 겨울비 내리고 바람 스산한 날이었다
술자리에 안경을 놓고 가셨던 선생님이
안경을 찾으러 나오셨다가
생태찌개 잘하는 곳으로 가자고 하셨다
선생님은 색 바랜 연두색 양산을 들고 계셨고내 우산은 손잡이가 녹슬어 잘 펴지지 않았다손에 잡히는 것마다 낡고 녹슨 게 많았다
그래도 선생님은 옛날이 좋았다고 하셨다
툭하면 끌려가 얻어맞기도 했지만
그땐 이렇게 찢기고 갈라지지 않았다고 하셨다
가장 큰 목소릴 내던 이가
제일 먼저 배신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
철창 안에서도 두려움만 있는 게 아니라
담요에 엉긴 핏자국보다 끈끈한 어떤 게 있었다고 하셨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겁이 많은 선생님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보다 중도가 좋다고 하시면서
안경을 안 쓰면 자꾸 눈물이 난다고 하시면서낮부터 ‘처음처럼‘만 두 병 세 병 비우셨다

왼쪽에서 보면 가운데 있는 이를
오른쪽에서 보고는 왼쪽에 있다고 몰아붙이는 세월이
다시 오고 추적추적 겨울비는 내리는데
선생님 옛날이야기를 머리만 남은 생태도
우리도 입을 벌리고 웃으며 듣고 있었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옛날은 없는데
주말에는 눈까지 내려 온 나라 얼어붙는다고 하는데

은은함에 대하여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강물도 저녁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우리의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 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

한 송이 꽃


이른 봄에 핀
한 송이 꽃은
하나의 물음표다

당신도 이렇게
피어 있느냐고
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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