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즈 레버토프가 열기로 가득한 교육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시 낭송을 위해 블루밍턴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수정/개정의 도취라고 묘사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것은 지금은 너무 쉽게 폐기해버리는 1970년대의 많은 초기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처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었고, 문학적인 것이개인적이었고, 성적인 것이 텍스트적이었고, 페미니스트는 속죄하는 존재였고 기타 등등! (그것들은 진정 계시였고) 이런 계시들을 냉소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로고스 중심적인 권위를 몇및 이론가들이 말했던 ‘기원의 순간‘ 탓으로 잘못 돌리는 위험을 무릅쓴다 해도 인정해야 한다. 그때 그곳에 있었다는 건 축복이었다고. 그리고 나는 그 축복 중 일부가 마치 맛있는 후식처럼 우리와 함께 개종의 여정을 떠났던 최초의 학생들에게 나눠지기를 희망한다. 수전이 언급한 ‘눈맞춤‘은 분명 전기 충격처럼 짜릿했고, 우리 사이를 지나간 계시와도 같은 이해의 네트워크 자체였다. 그것은 아마 레버토프가 마음속에서」를 썼을때,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
이라는 데 우리 모두가 동의했다는 의미다. 말하는 사람을 결코믿지 마라. 페미니스트의 분석을 믿어라.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 P33

많은 이민자들처럼 두 어머니에게도 비밀이 있었다. 수전과나는 가끔 그 의미를 해독해보려고 애썼다. 우리는 여성의 텍스트에 지워진 흔적으로 남아 있는 서브텍스트를 읽으면서, 어떤 의미에서 물에 잠겨 있는 어머니 삶의 플롯을 해독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또 우리는 자신들을이민자 내지 어쨌거나 탐험가 (여성문학이라는 새롭게 떠오르는아틀란티스, 여성의 상상력이 만든 여성의 땅 herland의 지도를만들어보려고 애쓰는 지리학자)로 다시 상상하곤 했다. 분명그런 우쭐한 생각만으로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는 없었다. 특히잉크와 종이로 이루어진 현실의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겁할만한 현실에 맞닥뜨리자, 완성된 타이핑 원고는 상자 두 개를묵직하게 채웠고, 끝도 없는 주석과 악몽같이 복잡한 찾아보기,
표지 문안, 표지 사진이 필요했다. - P38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쓰는 동안 느꼈던 즐거움의 일부는 분명 세대 간 경쟁을우리의 관대한 고결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늘날 말하는 ‘역사적 위치‘라는 행운에서 온 것이다. 우리가 만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함께 작업했을 때는 페미니즘 비평이 존재하지 않아서 학계의 페미니스트 선구자 역시 없었으니 말이다. 우리가느끼는 의기양양함은 기원의 순간에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비롯한다.
분명 그런 흥분이 비평가들을 북돋우어 아프리카계 미국인연구나 게이 레즈비언 연구 같은 다른 정치화된 연구 분야를 개척하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 결과 그들의 계승자들이 그 분야의 변화를 향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비평에서 우리의 계승자들도 그렇게 하기를 희망한다.  - P68

가끔씩 우리는 공격을받아 신경이 곤두서고 때로는 재순환되는 이론들이 만들어내는 혼란스럽거나 엘리트주의적인 전문용어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논쟁이 (이전보다 더 싸우기 좋아하지만, 더 사람들로 붐비며, 흡수력이 더 강하고, 더 노골적으로 모험적인) 페미니즘 비평의 생명력을 압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원의 순간에 대한 향수는 불가피하겠지만, 기원의 복잡성을 단순화하거나 현재의 순간에 자족하기 위해, (더 나쁘게는) 현재의 순간에서 이탈하기 위해 그것을 악용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어느 정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성 문제는 학계 안이나밖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여자들의 성취가 통상적으로 야기하는 반발을 감안하면, 그런 향수는 페미니스트 후계자들을 - P68

축소된 미래에 집어넣을 위험이 있으며, 그런 미래는 앞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할 중요한 지적 노동에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의 후계자나 우리의 모사자가 아니라 우리의 동맹자인 젊은페미니스트들은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벅찬 임무에 직면해 있는데, 1970년대에 족적을 남긴 우리가 그들과 함께 그 임무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 일어나는 냉소주의에도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서 우리가 느끼는 ‘강렬한 즐거움‘은 (19세기와 그 이후」에서 예이츠가 의지한) ‘위대한 노래‘,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우리가의지한 노래와 책들이(오스틴과 브론테 자매, 메리 셸리와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조지 엘리엇과 에밀리 디킨슨의 현명하고 박식한 서정주의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 그 노래들이우리 중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던 운율로 울리리라는 것을 확신시켜준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년이 된 스물한 번째생일에 맞추어 예일대학 출판사에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재출간한 것이 특히 기쁘다.
(2000) - P69

펜은 음경의 은유일까? 제러드 맨리 홉킨스는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1886년 친구 R. W. 딕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홉킨스는 자기 시론의 중요한 특징을 고백했다. 예술가가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자질은 대가다운 기술이다. 이 기술은 남자에게 타고난 재능이랄 수 있어서 이 특징이 특히 남자와 여자를구분해준다. 운문으로든 다른 어떤 형식으로든 종이 위에 생각을 낳는 것은 남자다.‘ 이에 덧붙여 홉킨스는 ‘좀 더 깊이 들어가자면 내가 말하는 ‘대가다움‘이란 놀랍게도 정신이 아니라 대가의 자질을 지닌 삶의 성숙기다. 창조적 재능은 남성의 자질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비유적으로물론이요, 실제로도 문학적 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펜은 어떤 의미에서 (비유적 의미 이상으로) 음경이다. - P74

괴짜에다 유명하진 않았지만, 홉킨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남성으로서 핵심 개념을 말하고 있다. 물론 신이 세상을만든 아버지이듯 작가는 자기 텍스트의 ‘아버지‘라는 가부장적사고는 서구 문학 세계 전반에 퍼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듯이 이 은유는 작가, 신, 가부장이라는말과 동일시되는 ‘저자‘라는 단어에 내재되어 있다. ‘저자‘라는단어에 대한 사이드의 세심한 고찰은 이 논의와 관련해 상당히많은 내용을 요약하고 있기에 여기에 전부 인용할 가치가 있다. - P74

여기에서 자아는 처녀 페이지라는 ‘순수한 공간‘에 팬이라는 음경을 대면서 끝없이 소진된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대대로 시인들은 자신의 관계를묘사할 때 가부장적 ‘가족 로맨스‘에서 유래한 어휘를 사용해왔다. 해럴드 블룸이 지적했듯이, ‘호메로스의 아들들로부터 벤존슨의 아들들에 이르기까지 시적 영향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차원에서 묘사되어왔다. 문학사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격렬한투쟁은 ‘강력한 대립자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투쟁, 교차로에서부딪친 라이우스와 오이디푸스의 싸움‘이었다.  - P78

펀치가 (빈정대는 어조이기는 하지만) 절망적인 심정으로 남성의 요구와 의도를 수용한다는 사실은 문화적 구속의 강압적 힘과 더불어 그 힘을 구현한 문학작품의 강압적 힘까지 뚜렷이드러내준다. 왜냐하면 학식 있는 여성들은 ‘멍청해지라고 요구받고 그렇게 키워진‘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배우기 때문이다. 리오 베르사니가 말하듯, ‘글은 단순히 정체성 묘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정체성, 나아가 육체적 정체성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 우리는 문학에 몰입함으로써 일어나는 일종의 존재의 용해, 혹은 적어도 존재의 유연성을 고려해야 한다. ‘한 세기 반 전에 제인 오스틴은 『설득에서 앤 엘리엇과 대화하는 하빌 대령을 통해 비슷한 이야 - P85

기를 했다. 여성의 변덕에 대해서 논쟁하던 중 앤의 불같은 반밖에 부딪히자 대령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역사가 당신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이야기, 산문, 운문 전부가요. [・・・] 나는 순식간에 내 의견을 지지해주는 인용문을 쉰 개는 댈 수 있습니다.
여성의 변덕에 대해 말하지 않은 책은 내 평생 본 적이 없답니다. (2부 11장) 이 말에 앤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펜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고 대꾸한다. 하빌의 말과 관련해서 보면 그녀의 대꾸는 여성이 저자의 권위로부터 배제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남성의 권위에 종속되어왔음을 (그리고 권위의 대상이 되어왔음을 암시한다. 초서의 ‘교활한 바스 여장부‘를 따라 앤은
‘누가 사자를 그렸는가, 도대체 그자가 누구인지 나에게 말해달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이솝 우화』에서 사람이 사자를 죽이는 그림을 보여주자 사자는 누가 그 그림을 그렸는지 묻는다.
만약 사자가 그렸다면 그 반대를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바스여장부처럼 앤도 문학적 권위와 가부장적 권위를 혼동하는 우리 문화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저 수사학적 질문에 답한다. - P86

오스틴의 소설에 나오는 앤 엘리엇과 하빌 대령의 논쟁도 이와 관련이 있다. 두 인물이 벌이는 논쟁의 핵심이 여성의 ‘변덕‘
이라는 것, 그러니까 여성이 작가/소유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거나 고정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는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 작가들자신이 ‘괴물 같은‘ 자율성을 지닌 여성 인물을 만들어냈으면서도 작가/소유자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꾸짖는 것은 문학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여성 입장에서 보면 ‘변덕‘은 고무적인성격이자 덕성이다. (이중성을 수반하긴 해도) 변덕은 여성이그 자신을 인격으로 창조할 능력, 더 나아가 거울/텍스트 반대쪽에 갇혀 있는 여성에게 다가가 그녀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줄 능력까지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 P94

다시 말해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 기술은 천사의 특성이자, 좀더 세속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숙녀에게 적절한 행위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최고의 교사인 세라 엘리스 부인은 1844년에 여성의 도덕과 예의범절에 대해 말하기를, 숙녀는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는 존경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여성은 ‘집 안의 다른 어떤 사람보다 일에 적게 참여하니‘ 올바른 여성이라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여성은 자신의 노력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말없이 헌신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악마를 피하듯 피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존 러스킨은 1865년에 여성의 ‘힘은 지배를 위한 것도 전쟁을 위한 것도 아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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