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점에서 사인회를 할 때마다 독자들 한명 한명에게 물어봅니다. 무슨 일을 하시나요? 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어떤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지, 어떤 꿈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그들은 대부분 학생이거나, 알바생이거나, 비정규직이거나, 아니면 취업준비생입니다. 번듯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참 드물어진다는 것을 책을 새로 낼 때마다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그들의 삶에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이들에게 내가 20대에 했던 것처럼 과감한 결단을 내려라, 예술에 투신하라, 인생을 걸어라, 이렇게 충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고 묻는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 P22

인간은 타인의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진화과정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혼자 판단하려 한다면 너무 힘들고 피곤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로 뛰어간다면 이유가 있으리라 믿고 일단 같이 뛰어가면 편합니다. 저쪽에 뭔가 무서운 것이 있거나 아니면 이쪽에 뭔가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뛰는 것이겠죠.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 때 많은 사람들은 충분히 대피할 시간이 있었지만 소방관이 오기를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고는 자기 사무실에 머물렀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지요.
대구 지하철 참사 때도 연기가 전동차 안에 자욱할 때까지 대부분 동요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기관사가 방송으로 곧 열차가 출발할 거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사망했습니다. - P25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저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새로 나온 사진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카메라로 더 멋진 사진을 찍는 삶입니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는 삶이 아니라 휴대폰을 잠시 끄고 글을 쓰는 데서 얻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의 대부분은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유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오래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술과 관련되었다는 겁니다.  - P28

육체의 근육이 발달한 사람은 같은 양의 음식을 먹어도 기초대사량이 높아 살이 잘 찌지 않는다고 하지요. 감성 근육이 발달한 사람 역시 더 많은 것을 느끼면서도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잘 느끼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자기 느낌을 가진 사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와인을 전문적으로 테이스팅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별점을 보고 와인을 고를까요? 평생 음악을 사랑하고 들어온 사람들이 남의평가만 듣고 콘서트 티켓을 살까요? 저만 해도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살 때 독자 서평이나 리뷰를 전혀 보지 않습니다. 한 작가가 저에게 한 번이라도 깊은 즐거움을 주었다면 그 즐거움은 제 정신과 육체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 작가가 새 작품을 냈다면 일단 사보는 겁니다. 만약그 작품에 실망했다면 그것 역시 고스란히 남습니다. 자신만의 느낌의 데이터베이스가 충분한 사람은 타인의 의견에 쉽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 P34

글은 한 글자씩 씁니다. 제아무리 빠른 사람도 글자 열 개를 한꺼번에 뿌릴 수 없습니다. 한 글자씩 한 글자씩 써야 단어가 만들어지고 이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됩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이 차례대로 쌓여야 글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는데요. 이렇게 써나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변화가 생기고 이게 축적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트라우마나 어두운 감정은, 숨어 있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막상 커튼을 젖히면 의외로 별 볼일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한 글자 한 글자 언어화하는 동안 우리는 - P58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것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언어는 논리의산물이어서 제아무리 복잡한 심경도 언어 고유의 논리에 따라,
즉 말이 되도록 적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좀더 강해지고 마음속의 어둠과 그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힘을 잃습니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가 가진 자기해방의 힘입니다. 우리내면의 두려움과 편견, 나약함과 비겁과 맞서는 힘이 거기에서나옵니다. - P59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에게 허용된 최후의 자유이며,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마지막 권리입니다.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세상의 폭력에 맞설 내적인 힘을 기르게 되고 자신의 내면도지시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도 뭔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없어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는 직장이나 학교, 혹은 가정에서 비인간적인대우나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겪었거나 현재도 겪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한계에 부딪쳤을 때 글쓰기라는 최후의 수단에 의존한 것은 여러분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닙니다. 그런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일단 첫 문장을 적으십시오. 어쩌면 그게모든 것을 바꿔놓을지도 모릅니다. - P60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내 생애에 우주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을느낀다. 저와 소설의 관계도 그와 비슷한 것 같아요. 전 세계의소설에 역사가 있잖아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소설들이 있고, 제가 쓰는 건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죠. 앞으로 남은 생애 안에 제가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밤하늘의 어떤 흔적도 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 세계의 일부라는 것, 내가 그작가들 중 한 명이라는 것, 그게 어떤 기쁨을 줄 때가 있어요.
내가 그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라는 사실이 말이에요. 소설의세계는 너무 거대해서 저는 어떤 파문도 일으키지 못할 거예요. 그게 기쁠 때가 있어요. 광대무변한 이 우주와 나. - P90

사실 생각도 함부로 하면 안 되잖아요? 좀 무서운 생각을 하라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경험 다 있잖아요?
이렇듯 보통 사람들은 생각도 범위를 제한하면서 살고 있는데,
작가들은 보통 사람들을 대신해서 상상하고, 이상한 세계를 탐험하죠. 물론 여기서의 이상한 세계는 물리적인 세계가 아니라정신적인 세계예요. 『살인자의 기억법』같은 소설도 연쇄살인범의 내면이잖아요.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기도 싫어해요. 그런데 작가는 합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자는 어떤 존재인가를 상상하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거죠.
작가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요. 보통 사람들이 자기 상상력 안에 갇혀 있을 때 작가들은 더 멀리 나아가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감히 꿈꾸지 않는 것, 감히 경험하지 않는 것, 또는 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경험하고 그 경험을 사회로 가져오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가공해서 그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 P112

저는 제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직도 모국어를 다 마스터하지 못해서 열심히 수련중입니다. 그런데도 작가니까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요?‘ 하는 질문을 많이 받죠.
전업작가이고, 열 권이 넘는 소설을 썼으니까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글을 많이 쓴 것은 분명하겠죠. 글을 잘 쓰는 법에대해서 많은 분들이 물어보시는데, 저는 다른 사람의 글을 볼때는 단순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이야기가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에요.
어떤 글은 미사여구로 잘 꾸며져 있고 완벽한 구조를 가지고있지만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아요. 제가 군대생활을 헌병대수사과에서 했는데, 영창 수감자들의 일기를 매일 받아서 책으로 편집하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어떤 수감자들이 글을 잘 쓰는가 하면 중형을 받은 범죄자들이었어요. 군대에 와서 흉악한범죄를 저질러 중형에 처해진 수감자가 두 명 있었는데, 그들이 글을 제일 잘 썼어요. 다른 이들은 의무적으로 쓰라고 하니까 반성문처럼 썼는데, 그 두 사람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들은 각각 무기와 25년형을 구형받았거든요. 나중에 15년 - P120

5년으로 감형되긴 했지만 적어도 구형은 그렇게 받았어요. 그이 그린 구멍을 받고 돌아와서 쓴 글들이 있어요. 지금 스물두 살인데 빨라도 마흔 살이나 돼야 감옥을 나갈 수 있다는 자기 운명을 생각하고 쓴 거죠. 그 순간만큼은 자기 인생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직면해서 쓴 것이거든요. 이런 글들은 힘이 있고 진실해요. 그래서 저는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떤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기법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순간에인간이 고요하게 자기 서재, 아무도 침입해오지 않는 고요한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늘 힘이 있고 매력이 있어요. - P121

번역이 되어 외국에 소개된다는 건 한 편의 소설이 한 나라의 전화와 그 밖의 것들을 다 가지고 넘어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르게 상당히 깊이 있게 세계를이해하게 해줍니다. 그런 면에서는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는번역이 된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에요.
오르한 파묵이 이라크의 작가였다면 미국은 이라크를 쉽게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어요. 오르한 파묵은 이스탄불의 풍경을 소설을 통해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터키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삶을 그려냈어요. 이라크는 석유는 갖고 있지만 터키처럼 세계적인 레벨의 작가를 보유하고 있지 않아요. 그런 나라에는 마치 인간이 살고 있지 않는 것처럼,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어요. 사담 후세인이 지배하던 악의 제국처럼 느껴지는거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그 삶에 대해 우리가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반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 같은 작가가 있는 남미의 경우는 - P148

그 반대예요. 거기 사람들은 괜히 친구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곳에선 마술적인 일이 일어나고, 유쾌하고도 어딘가 신비롭고이상한 사건들이 태연하게 일어날 것 같아요. 그렇게 친숙한느낌을 주는 것이 책이 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외국의 독자들을 만난다는 건 정말 새로운 일이죠. - P149

번역의 역사는 오역의 역사예요. 그리고 오역이 좋은 결과를 빚은 적도 많아요.(웃음) 전 오역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단지 운이 좋기를 바라고 있어요. 제가 쓴 것보다 나아질수도 있잖아요.(웃음) 오역이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세계문학을 볼 수 없었을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면 정말 한심한 번역이 많거든요. 그래도 저는 그 작품들을 즐겼어요. 오역이라고 해도 도스토옙스키, 빅토르 위고작품에 실망하지 않았거든요. 번역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어요. 그다지 연연하지도 않아요. - P149

달은 무슨 인테리어 소품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떠서 광합성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희미한 태양광만 지구로 반사시키지만, 그럼에도 지구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조수간만의 차를 만들어내고 여성들의 생리주기도 조절합니다. 많은 생물들이 달의주기에 따라 이동하고 짝을 짓고 산란합니다. 소설도 그와 비슷하게 인간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소설이 그저 재미있어서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소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작용합니다. 그 작용을 우리가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못하고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소설의 가장 멋진 점아닐까요? 소설은 적어도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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