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고전이 진부할 것이라 지레짐작합니다. 그러나그렇지 않습니다. 오래 살아남은 고전은 처음부터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웠는데 지금 읽어도 새롭게 다가옵니다.다시말해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쓰인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전이라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지나도 낡거나 진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들은 살아남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후대로 전승되었을 겁니다. - P16

그러나 망켈처럼 범죄소설의 정의를 폭넓게 보고자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살인이 일어나고, 수사가 시작되고, 범인을 찾아내는 모든 이야기가 범죄소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숙부의 사악한 범죄를 추적하는 햄릿도 그런 의미에서는 탐정이 됩니다.
망켈은 『메데이아를 예로 들었지만, 많은 이가 범죄소설의 기원으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거론합니다. 데이비드 미킥스 같은 비평가는 소포클레스의 이 희곡은 독특하고 아주 아이러니한 탐정소설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는 노련한 탐정으로 자처하며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뒤를 밟고, 그 결과 자신의 몰락에 일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탐정이 수사를 하다보니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일종의 탐정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이디푸스 왕』 역시 읽지 않았으면서도 그 내용을 다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명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을뿐 아니라 이야기의 줄거리도 여러 경로로 접한 바 있었으니까요. - P20

비극의 주인공들은 항상 너무 늦은 순간에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곤 하지만, 저는 독서를 통해 커다란 위험 없이 무지와 오만을 발견하곤했습니다. 특히 고전이란, 이탈로 칼비노의 정의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읽지 않았으면서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제 오만은 오이디푸스의 자신감을 닮았습니다.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겁니다.
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 - P29

다.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됩니다.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비평가해럴드 블룸은「교양인의 책 읽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 P31

그렇다면 『돈키호테』와 『마담 보바리』는 소설이나 이야기의위험을 경고하는 작품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뇌과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뇌는 현실과 환상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떤 현실은 아련한 꿈처럼 기억되고, 어떤 이야기는 마치 직접 겪은 일처럼 생생하기만 합니다. 이야기와 비슷한 것으로는 꿈이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야기와 다릅니다. 어제 꾼 꿈을오늘 정확히 이어서 꾸지는 못하니까요. 그런데 소설은 꿈만큼이나 생생한데 계속 이어집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마루에서 책을 읽고있었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어떤 책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는 그 책의 내용에 흠뻑 빠져있었습니다. 고아가 된 아이가 온갖 시련을 겪고 있었을 수도 있고, - P64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이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책을 펼치면 순식간에 ‘지금, 여기‘와는전혀 다른 세계로 휙 빨려들어간다는 게 마치 무슨 마법처럼느껴져서 신기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 어머니가제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저는 그 흥미로운 세계로 들려오는현실 세계의 목소리, 즉 우리 어머니의 목소리가 굉장히 낯설고 불쾌하게 느껴졌고, 내 소중한 개인적 세계가 침해받는 것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덮고 일어나 어머니에게 다가갔습니다. 어머니는 채소나 두부 같은 것을 사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놀라웠던것은 어머니는 제가 방금 전까지 겪은 일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 P65

제가 어떤 세계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격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저는 그냥 누워서 소설책을 보며 뒹굴거리는 아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가게에 가서 식재료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읽던 그 책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접어두었던 책장을 펼치자마자 저는 콩나물과 두부의 세계에서 바로 그 이상한 세계로 점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잊고 정신없이 책을 읽기시작했습니다. 그 순간의 저는 프랑스의 작가인 다니엘페나크가 소설처럼』에서 제시한 이른바 또다른 방식의 ‘보바리즘‘을 - P65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쥘 드 고티에의 보바리슴이 에마의 증상에 착목했다면 다니엘 페나크의 보바리슴은 독자의 정신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보바리습이란 " ‘오로지 감각만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충족감‘에 다름아니다. 즉 상상이 극에 달해 온 신경이 떨려오고 심장이 달아오르며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출되는 가운데 주인공의 세계에 완전 동화되어, 어처구니없게도 대뇌마저 (잠시나마) 일상과 소설의 세계를 혼동하기에 이르는"현상, 즉 소설을 읽는 독자가 겪는 정신적 변화를말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의 제가 겪은 일은 그러니까 저 혼자만의 독특한 경험이 아니라 에마 보바리 이후로 수많은 독자들이 경험한 일의 재현이었던 것입니다. - P66

그후로도 저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독서를 통해 셀 수 없이 많은 인물을 만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도시를 여행했으며, 평생 한 번도 겪어볼 일이 없는 사건들에 연루되었습니다. 그 기억과 경험은 고스란히 제 안에 남아 있고 그 세계는 제가 직접 경험한 현실보다 훨씬 더 크고 풍부합니다. 이 세계가 모두 가짜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책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저라는 인간의 정신 안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유일무이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환상에 빠져 현실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 P66

요? 인간이 그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현실에 너무 집착해 자기 내면의 정신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는 아닐까요?
돈키호테』와 『마담 보바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때문에 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미치광이 돈키호테와 광기 어린 사랑으로 자신을 망쳐버린 에마 보바리는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그들에게서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야기 속의 세계가 계속되기를 바라고,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우리가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물들에 매료되고 자기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며 그들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우리의 의식에 침투해 우리의 일부를 돈키호테와 에마 보바리로 바꾸어놓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읽은 소설은 우리가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한번 읽어버린 소설은 더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 P67

우리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소박하게 또는 성찰하면서 의도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작업입니다.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두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소설에는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부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요? 소설을 만드는 모든 것이 그 재료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중심부는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따라 좇아간 소설의 표면과는 멀리 떨어진 배후 너머에 있어서 보이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거의 계속 움직여서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 중심부의 징후는 사방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설의 모든세부 사항, 즉 거대한 풍경의 표면에서 마주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설을 - P83

읽을 때면 마치 풍경을 걸어가며 모든 잎사귀를, 모든 부러진 가지를 어떤 신호처럼 여기고 의심하며 주의깊게 살피는사냥꾼처럼 행동합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난 모든 새로운 단어, 사물, 캐릭터, 주인공, 대화, 묘사, 세부 사항, 소설의 언어적·형식적 특징, 이야기의 예상 밖 진행 등이 표면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암시한다고 느끼면서 읽어나갑니다.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고 믿으면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세부 사항이 중요할 수 있고, 소설 표면에 있는 모든 것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소설은 죄책감과 피해망상 그리고 불안감을 향해 열려 있는 서사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심오한 감정 또는 어떤 삼차원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도 이 감춰진 중심부의 존재 때문입니다.
- P86

소설을 서사시, 중세의 메스네비, 장시 그리고 전통적인모험소설과 구분짓는 것은 바로 이 중심부입니다. 물론 소설은 등장인물이 더 복잡하다는 점에서도 다릅니다. 소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파고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은 배후 어딘가에 중심부가 있고, 우리가그것을 찾길 희망하며 소설을 읽기 때문에 힘을 발휘합니다.
소설이 우리에게 삶의 평범한 세부 사항, 환상, 일상의 습관과 사물을 보여줄수록, 우리는 호기심을 갖고 경탄에 사로잡 - P86

히 읽어나가게 됩니다. 이것들이 배후에 숨어 있는 어떤 의미, 어떤 의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대하고 광활한 풍경 속 모든 세부적인 것들, 모든 잎사귀와 꽃이관심을 끌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뒤에 의미가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이라고만 번역되어 있지만 여기서 파묵이 지칭한 것은 돈키호테』 이후의 현대소설입니다. 그는 ‘소설‘을 서사시나 모험소설과 구분해 쓰고 있습니다)에 감춰진 중심부가 있고, 바로 그것 때문에 독자는 소설 속의 모든 요소를 마치 주의깊은 사냥꾼처럼 살피게 된다는 파묵의 견해는 탁월합니다. 현실의 자연은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강가의 오리나무와 버드나무는 그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의 눈을 통해 보여진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독자는 그뒤에 의미가 감춰져 있다고 믿기 때문에 허투루 보아 넘기지 않습니다. - P87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업들은 우리를 소비자라 부릅니다. 구글 같은 기업은 우리를 빅데이터의 한 점으로 봅니다. 정당은 우리를 유권자로 여깁니다. 우리의 개성은 몰각되고 행위만이 의미 있습니다. 우리가 더이상 물건을 사지 않고, 인터넷에 접속하지도 않으며,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나만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 P104

현실의 우주가 빛나는 별과 행성, 블랙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크레페케이크를 닮은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 P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