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챙긴 시집은 아침달에서 나온 김소연 시인의 'i에게'다.

   아침달 시집에서는 심심찮게 그믐달을 만날 수 있어서 어디쯤에 달이 있나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각주라고 할까? 표식이 필요할 때 그믐달이 떠있다) 역시 'i에게'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시인의 말

 한 사람이 불면의 밤마다
 살아서 갈 수 있는 한쪽 끝을 향해
 피로를 모르며 걸어갈 때에

 한 사람은 이불을 껴안고 모로 누워 원없이
 한없이 숙면을 취했다.

 이 두 가지 일을 한 사람의 몸으로 동시에
 했던 시간이었다.

 2018년 칠월 김소연


다른 이야기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너는 매일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어떤 용기를 내어 서로 손을 잡았는지 손을 꼭 잡고 혹한의 공원에 앉아 밤을 지냈는지. 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되어서. 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 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귀여운 병아리들이 무서운 닭이 되어 제멋대로 마당을 뛰어다니다 도살되는 것처럼. 그날의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가 없어져버리는 게 좋았다.
먹다 남은 케이크처럼 바글대는 불개미처럼. 그날의 이야기가처음 만났던 날을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날이 아직도 혹한의 공원에 앉아 떨고 있을 것이 좋았다. 우리가그곳에서 손을 꼭 잡은 채로 영원히 살아갈 것이 좋았다. - P10

경배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좋아하는 친구가 베란다에서 키운 부추를 주어서
나란히 누운 부추를 찬물에 씻지
좋아하는 친구가 보내준 무쇠 프라이팬에 부추전을 부치지
젓가락을 들고 전을 먹는 동안에

나쁜 음악을 이제는 듣지 않아
나쁜 생각들을 완성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
부추를 먹는 동안엔 부추를 경배할 뿐

저편 유리창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너의 모습이 보였는데
왜 그렇게 맨날 억울한 얼굴이니

병이 멈추었니
비명이 사라졌니

나의 병으로 너의 병을 만들던 짓을 더 해주길 바라니
예의를 다해 평범해지는 일을 너는 경배하게 된 거니 - P12

참 독하다 참 무섭다 하면서
너를 번역해줄 일이 이제는 없겠다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애에 깨어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지
익숙해져버린 나를 적응하지 못한 채 절절매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전을 다 먹을 뿐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더 강하고 더 짙은 이 부추였을까
병이 멈추어버린 병은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할까

부추를 받고 귀여운 인형을 친구에게 건넸지무쇠 프라이팬을 받고 예쁜 그림책을 친구에게 건넸지 - P13

귀엽고 예쁘게
여리고 선량하게

혼자 있을 때마다 나쁜 것들만 떠올리는데
나쁜 짓은 더 이상하지 않아
가지런한 부추들
파릇한 부추들 - P14

i에게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지난겨울 죽은 나무를 버린 적이 있었다. 마른 뿌리를 흙에파묻고서 나무의 본분대로 세워두었는데, 지난겨울 그렇게 버려지면 좋았을 내가 남몰래 조금씩 미쳐갔다. 남몰래 조금만 미쳐보았다. 머리카락이 타오르는 걸 거울 속으로 지켜보았고 타오르는 소리를 조용히 음미했다. 마음에 들었다. 실컷 울 수도실컷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화사한 얼굴이 되었다. 끝까지 울어보았고 끝까지 웃어보았다. 너무 좋았다. 양지에 앉아 있었을때 웅크린 어느 젊은이에게 왜 너는 울지도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젊은이의 눈매에 이미 눈물이 맺혀 있더라. 그건분명 돌멩이였다. 우는 돌을 본 거야. 그는 외쳤어. 미칠 것 같다고! 외치는 돌을 본 거야. 그는 더 웅크렸고 웅크림으로 통째로집을 만들고 있었어. 그 속에 들어가 세세년년 살고 싶다면서.

요즘도 너는 너하고 서먹하게 지내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아직도 매일매일 일어나니. 아무에게도 악의를 드러내지 않은하루에 축복을 보내니. 누구에게도 선의를 표하지 않은 하루에경의를 보내니. 모르는 사건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의뢰를 받은듯한 기분으로 지금도 살고 있니. 아직도, 아직도 무서웠던 것을무서워하니. - P34

너는 어떠니. 도무지 시적인 데가 없다고 좌절을 하며 아직도 스타벅스에서 시를 쓰니. 너무 좋은 것은 너무 좋으니까 안된다며 여전히 피하고 지내니. 딸기를 먹으며 그 많은 딸기 씨가씹힐 때마다 고슴도치 새끼를 삼키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여전히 괴로워하니. 식물이 만드는 기척도 시끄럽다며 여전히 복도에서 화분을 기르고 있니. 쉬운 고백들을 참으려고 여전히 꿈속에서조차 이를 갈고 있니. 너는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마음에 든다고 말했었다. 나도 그때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들었다. 지난겨울 내가 내다버린 나무에서 연둣빛 잎이 나고연분홍 꽃이 피고 있는데 마음에 들 수밖에. 지난겨울 내가 만난젊은이가, 아니 돌멩이가, 지금 나랑 같이 살고 있다. 나도 그 옆에서 돌멩이가 되었다. 우는 돌멩이 옆에 웃는 돌멩이이거나 외치는 돌멩이 옆에 미친 돌멩이 같은. 그는 어떨 땐 울면서 외치면서 노래를 한다! 나는 눈을 감고 허밍을 넣지.

가끔 그럴 때가 있다. - P35

노는 동안

십일월에 오월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은 죄를 겨우 알 것 같은 나날이었지만
내 죄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나날이기도 했다

앤서니 퀸이 나오는 옛날 영화를 보았다
그 여자, 착한데…… 나쁘지?
응.
그래서 좋아.

심술궂은 비바람이
다 떨어뜨려서 밟으며 걸어갔다
샛노란 나뭇잎들을

잎은 뚫는 성질을 가졌다.
봄에 대한 잎의 입장은 그런 식으로 증명되었고
마룻바닥은 무릎을 받아주는 성질을 가졌다 기도에 대한
걸레질의 입장을 이런 식으로 증명하고 싶다

십일월에도 오월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나를 내가 지나치고 있었다 - P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