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현기영은 「순이 삼촌」 한편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움직일 수 없는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장편소설 『제주도우다』를 펴냄으로써 마침내이것이 4·3의 진실이고 이것이 어처구니없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순박하기그지없는 민초들이 겪은 아픔과 슬픔이고 이것이 제주의 현대사임을 증언하는우뚝한 거봉(巨峯)으로 불쑥 솟아올랐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읽는 내내 숨이 뜨거워지면서 거장의 숨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분명 소설을읽고 있음에도 눈앞에 스크린이 펼쳐진 것처럼 생생한 영상이 떠오른다.
그러나 압도적인 역사의 장면을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동시에그 역사를 만들어내는 수많은 개인들의 삶과 목소리와 내면을 담아내는섬세하고 인간적인 시선은 오히려 영상의 한계를 넘어선다. 4·3을 이토록장대하면서도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것이다. 정치권력에 의해 노골적인 역사 부정과 기만과 왜곡이 자행되는 오늘, 현기영의 ‘제주도우다』는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거대한 진실의 암각화를새겨놓았다. 

이창동 영화감독

사람보다 더 잔인한 동물이 있을까? 없다. 이 질문과 답에 이의를 제기할 수없도록 만드는 고통스러운 역사 제주 4·3. 너무나도 아프기에 마주하기 두려운역사. 
그러나 이 책은 내 안의 아픈 역사 역시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역사라고 조곤조곤 알려주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마침내, 남도 북도 아닌 ‘제주도‘가 보인다. 

최태성 역사 강사, 작가

무엇보다 감동적인 장면은 귀향민들이 배에서 막 내렸을 때였다. 고향 땅을 오래 떠나 있던 그들은 너나 할것 없이 털썩 무릎을 꿇고 엎드려 흙냄새를 맡았다. 아예큰대자로 몸을 던지거나 두 팔로 땅바닥을 안는 시늉을하기도 했다. 고향의 바다냄새, 그 달콤한 갯비린내가, 향긋한 건초 냄새가, 우람한 팽나무와 검디검은 현무암이, 그리고 어머니 한라산이 그들을 고향으로 이끌었던것이다. 떠난 자들이 꿈에도 그리는 한라산, 떠났던 자들이 반드시 돌아오는 곳, 그들은 이 땅은 바로 나 자신이다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겹겹이둘러싸인 그들이 사뭇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 P295

남조선으로 가겠느냐고. 허 참! 북조선, 남조선이라니, 난생처음 듣는 말 아니우꽈? 그래서 물어십주. 거 무슨말이냐고, 북조선은 뭐고 남조선은 뭐냐고하니까 삼팔선이 그어졌다는 거라예. 허, 그것참!"
"그래서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해십주, ‘우린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고, 제주도로 가겠다!‘ 하고."
통쾌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자 마중 나왔던 사람들이 감격해서 환성을 질렀다.
"맞아, 맞아, 우린 북조선도 남조선도 아니고 제주도란 말이여!"
"하하하, 우린 북도 아니고 남도 아니고, 제주도다!" - P296

재갈 물랐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진 통쾌한 언어들, 그 언어들이 잠들어 있던 그들의 정신을 후려갈겼던 것이다. 지난날 자신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초라하고 비굴한 존재었는지 그제야 절절하게 깨달았다. 그 언어들이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노예의 비굴과 치욕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듯했다. 무병을 앓던 자가 내림굿을 받은 것처럼 그들은 생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고, 모호하던 것들이명백해지고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한꺼번에 깨달아진듯이 느꼈다. 그들은 환호했고, 그 열광 속에서 고동치는자신의 핏줄을, 자신의 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땅임에도 살얼음 밟듯 살금살금 다니던 지난 세월을 벗어나이제는 발을 구르며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그것은 지금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존재감이었다.
‘청년의 시대‘라고 했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다.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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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릇을 하고 있었다. 마을에 할당된 공출량 중에 제일 많은 양을 살기가 좀 나은 편인 그가 맡아주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고마워했다. 그는 서른마리 넘게 말을 키웠는데, 그 때문에 마당이 다른 집보다 두배나 넓고 마구간도 남쪽 울담을 전부 차지할 정도로 컸다. 그많던말이지금은 강제공에 빼앗겨 열다섯마리만 남았다. 열두마리는 징용당한 청년들과 함께 홋카이도 탄광과 규슈탄광에 끌려가 있었고, 나머지 세마리는 한라산 아래 부대오름의 진지동굴 파는 현장에서 청년들이 곡괭이로파낸 흙과 돌을 날랐다. 급박해진 정세에 따라 진지동굴작업을 단기간에 끝내야 했으므로 사람과 말이 함께 채찍을 맞으면서 혹독한 노동에 허덕였다.  - P213

그래서 창세의 외삼촌은 부대오름의 진지동굴과 와흘 마을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말들이 과로로 쓰러지지 않도록 방목중인 다른 말들을 이끌고 가서 교대해주곤 했다. 말은 일단 과로로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수가 많았다.
외갓집에 간 이튿날 창세는 노역으로 골병든 말 두마리가 외삼촌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망가진 몰골이 너무도 애처로웠다. 혹사당한 끝에 빈사상태에 이른말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먹지 못해 골병든 사람들 얘기를 하면서 외삼촌의 구둣솔처럼 짙고 억센 눈썹이 분노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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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세살 동갑내기 단짝친구인 정두길과 부대림은이른 아침에 연대 밑 바닷가에서 만나 바닷바람을 쐬곤했다. 식민지 청년의 울울한 가슴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바다밖에 없다는 듯이 그들은 거의 매일 일출을 보러새벽 바다로 갔다. 어둠에서 깨어나 붉은 노을을 날개처럼 펼치면서 솟아오르는 태양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었다. 거침없이 쑥쑥 솟는 태양을 보고 있으면 이 고난의세월도 언젠가는 끝나고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은 생각이들었다. 시를 좋아하는 두길은 그런 마음을 잘 나타낸 시를 어떤 번역시집에서 발견하여 읊어주었다. 영국 시인하우스먼의 시였다. - P115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6월 초보리 베기 철이 왔다. 그야말로 죽은 송장까지도, 부엌의 부지깽이까지도일을 돕겠다고 꿈지럭거려야 할 정도로 일손이 바쁠 때였다. 보리가 익어 쓰러지기 전에 수확해야 하므로 진뜨르 노역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일시 중단이아니라 완전 중단이었다.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다.
떼까지 입히다가 중단된 활주로 공사는 비행기 한대 앉아보지 못한 채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다.  - P130

일요일 오후는 창세에게 아주 귀한 시간이었다. 일요일에는 오전에만 들녘에 나가 송진 채취 일을 하고 정오이후에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오후 시간이 주는조그만 행복, 창세에게 그것은 바다였다. 바다에는 고픈배를 다소라도 달래줄 물고기와 소라, 게, 보말들이 있었고, 짙푸른 바다와 작열하는 태양, 시원한 물속과 뜨거운 햇볕 속에서 느끼는 벗은 살과 뼈의 행복이 있었다. - P131

어느 일요일 오후, 모처럼 찾아온 휴식의 시간. 모처럼바람이 없어 주위는 고요하다. 바람이 많은 고장이라 잠시라도 바람이 자면 주위의 정적이 낯설게 느껴진다. 정적 속에서 타타타타 어머니의 미싱 바늘 박는 소리가 도드라지고, 멀리 떠났던 파도소리도 다시 들려오고, 바다냄새도 짙게 맡아진다. 정적 속에서는 사람 부르는 소리또한 멀리 가고 크게 들린다. 햇빛이 짜랑짜랑한 한낮, 골목길을 걸어오면서 어깨가 넓고 몸통이 굵어 ‘왕돌‘이 별명인 행필이 창세를 소리쳐 부른다. "야, 눈큰볼락, 왕눈아, 바당에 고기 쏘러 가자!" - P131

‘학자 나무‘라고 불리는 그 회화나무는 조천리 김해김씨의 먼 조상이 육지로부터 들여와 심은 것인데, 그 덕분인지 구한말에 그 문중에서 학자와 벼슬아치가 여럿나왔다. 그래서 그 나무는 한때 번성했던 그 문중의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물은 구한말의 그들이 아니라 일제와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그들의 자식, 손자 들이다. 특히 김명식, 김문준, 김시범,
김시용 같은 청년 지식분자들은 거의 절대적 흠모의 대상이다. 대의를 위해 몸 바친다는 것, 목숨 바쳐 싸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가혹한 탄압에 몸도정신도 무너지고 집안도 몰락하고 말았는데...... - P138

검은 현무암의 해변에서 바위를 달군 열기가 해풍에밀려오는데, 그 속에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실려 있다. 해초를 햇볕에 말릴 때 생기는 요오드 냄새는 갯냄새 중에가장 향기롭다. 기포 구멍이 숭숭 뚫린 널찍한 현무암 암반과 풀밭에 해녀들이 채취한 미역과 감태가 널려 햇볕에 꾸들꾸들 말라간다. 달구어진 바위와 돌이 창세의 맨발바닥을 뜨겁게 지져댄다. 뜨거운 줄도 모르고 바위에찰싹 붙어 뻗어 있는 흰 돌찔레(돌가시나무)꽃이 신기하다.
현무암 지대가 끝나고 모래 둔덕이 나타난다. 그 위로 순비기나무들이 뱀떼처럼 얽히고설켜 기어가고 있다 - P170

문득 눈앞에 사방이 탁 트인 푸른공간이 펼쳐진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만들어내는 광활한 공간이다. 비상경계령이 삼엄하게 내려진 바다는 잠수기선과 화물을나르는 10톤짜리 조그만 발동선 하나와 감물 들인 갈색돛을 세운 돛단배 하나만 가까이에 보일 뿐 휑하니 비어 있다. 그러나 바닷속에는 귀신고래보다 더 크다는 미군 잠수함들이 잠행하고 있고, 먼 수평선 위 뭉게구름 속에는 구라망 전투기들이 숨어 있고, 더 높은 구름 속에는 B29가 숨어 있다. 그래서 육지 바다에 진출하는 해녀들의 원정 물질이 몇달째 끊겼고, 앞바다의 물질도 멀리나가지 못하고 해변 가까운 데서 한다. 그것도 돈이 되는소라, 전복은 잠수기를 사용하는 잠수부들이 싹쓸이해버리고 해녀들은 공출용감태채취에 내몰려 그것들을캘 여유도 없다. - P171

숨이 참을 수 없이 가빠졌다. 아뿔싸! 자칫숨이 막혀 죽을 판, 손목에 감은 끈을 풀어 전복에 물린빗창을 내버린 채 황망히 물 위로 떠올랐다. 떠오르다가더이상 숨을 참지 못해 울컥 물을 삼키고 말았다. 그와동시에 물안경에 틈이 벌어져 물이 왈칵 들어오고 머릿수건이 벗겨졌다. 허파가 찢어지는 듯, 눈알이 튀어나오는 듯한 고통! 허겁지겁 솟구쳐올라 수면을 터뜨리는 순간, 손을 뻗어 간신히 테왁을 붙잡고 그 옆의 듬북떼 위에 널브러졌다. 눈앞 풍경이 벌겋게 변하면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정신은 금방 돌아왔다. 아득히 멀어져가던 정신이 다시 돌아오는 그사이에 노란 놋잔 한개가 번쩍거리며 나타났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만옥은 테왁을 그러안고 두려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숨을 몰아쉬었다. 물 아래 들어가서 너무 욕심을 부리면 죽을 수도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P175

대공습에 공장이 여지없이 파괴되어 일자리가 사라지고 자칫 폭탄에 맞아 죽을지 모르게 되자 죽어도 고향에서 죽자 하여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고향의 흙냄새를어서 맡고 싶어 갈급증이 난 그들은 서둘러 상륙했으나땅에 발을 딛자마자 땅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것 같아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렸고, 그것을 본 아이들이 재미있다고 깔깔 웃어댔다. 휘청거리던 그들이 털썩 무릎을 꿇고 엎드려 흙냄새를 맡았다. 아예 맨땅에 몸을 던져흙에 얼굴을 비비면서 냄새를 맡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흐르는 눈물로 번들거렸다. 고향의 흙냄새였다. 키우던 말과 소가 아무리 멀고 낯선 곳에 홀로 남겨져도, 그게 깜깜한 밤중일지라도 태어난 외양간을 찾아오는 것이 본능이듯이, 머나먼 객지의 그들 역시 고향의 흙냄새에 이끌렸던 것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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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비극,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답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2023년초여름
현기영

"죽을 목숨이 어쩌다 살아나긴 했지만, 산 게 산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몫까지 내가 살아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살았주. 그렇게 열심히 살젠 노력했어도 이 세상을 절반밖에못 산 것 같아. 절반을 4·3에 묶여딴세상에 살았고, 말도 절반밖에 하지 못하는 반벙어리로 살았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거기에 가 있었어. 아방아, 물론 너를 낳아 키우고 손주들 보는 재미가 있기는 했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그 슬픔이 있었다. 그렇게 평생을 견디면서 살아왔는디, 작년부터 자주 악몽을 꾸게됐잖여. 그놈들이 자꾸 꿈에 나타낭 총검으로 가슴팍을팍팍 찌르는 거라. 내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다시 죽이겠다는 거라. 아이고, 죽이려면 그때 죽이지 왜 - P19

살려두었는가 말이여. 죽지 못해 살아 있는 것이 죄란 말인가. 나쁜 놈들!"
노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이상 그 사건의기억을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한 듯했다. 그런노인을 돕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의그 어두운 기억을 입 밖으로 시원하게 토로하도록 도와야 했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무섭다고 도리질이었다. - P20

그렇게 여러날에 걸쳐 간청한 끝에 노인은 마침내 닫혔던 입을 열었다. 벽장 서랍 속에서 만년필을 꺼내 보이면서 그가 말했다. 양미간이 좁아져 깊은 골이 파이면서 표정이 침통해졌다.
"이 만년필은 말이다, 소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초등학교인데, 그때 담임이었던 정두길 선생이 쓰던 만년필이라. 그해 겨울 선생은 한라산 깊은 눈 속으로 사라져부렀주. 행방불명되기 직전에 이 만년필을 나한테 주멍말했어. ‘창세야, 너 작가가 되고 싶댄주이? 부디 넌 죽지 말앙 꼭 살아남으라이. 살아남아서 이 만년필로 좋은글을 써라이. 나도 좋은 글 쓰고 싶었지만, 이젠 허사가되고 말았구나.‘ 그게 마지막이었어."할아버지는 꺼질듯이 한숨을 내쉬더니 다음 순간 눈을 부릅뜨고 목청을 높였다. - P24

낮은 말소리와 함께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주름살을 타고 두 뺨에 번졌다. 소리 없는 눈물, 애간장이다 녹은 눈물, 바위가 흘리는 것처럼 고통도 슬픔도 보여주지 않는 눈물이었다. 흐르는 눈물과 함께 노인의 몸속에 갇혀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반짝거리면서 줄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노인은 이야기를 시작하자 갑자기 기운이 나는 듯 얼굴빛이 밝아졌다. 칠십여년 세월에도 노인은 당시의 일들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으려고 애썼고 많이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세세한 기억들까지 새록새록 떠올라 스스로도 놀랍다고 말했다. 냄새, 소리, 색깔 등 감각적인 것도 기억해냈고 그때 느꼈던 감정도 - P25

사람은 그 산천을 닮는다고 했거니와, 그들을 가난하게 만든 화산섬의 척박한 풍토는 그들의 심성을 거칠게만들기도 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에 익숙해 있던 그들은 자신이 키우는 소나 말처럼 말이 없으면서도 깊고굳센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땅 도처에 해묵은 팽나무들이 많은데, 그곳 사람들의 생리가 바위틈에 억세게뿌리를 내린 채 버티고 서서 사나운 강풍을 견뎌내는 그나무들을 닮았다. 게다가 그곳 선비들 중 상당수는 유배객과 망명객의 후손이었으니, 그들의 핏속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분노의 씨앗이 감춰져 있기도 했을 것이다. 출륙 금지에 의한 이백년간의 유폐생활이 그러한 심성을 더욱 조장했을 것이다. 그 선비들은 교활을 싫어하고 단순명료를 좋아해서 어떤 일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받아들이고 목숨까지 바치기도 했다. 관권의 침학을 더이상 견딜 수 없어 민란이 일어났을 때, 몸 바쳐그 무리를 이끈 장두(狀頭)들이 바로 그들 중에서 나왔다.  - P45

안창세는 황국 소년 아베 마코토가 되어버렸다. 총동원령 속에 그나마 남아 있던 공동체의 가치들은 가차 없이 박살 났다. 인간을 위한 사상은깡그리 그 불길 속에 던져졌다. 야학도, 노동운동도, 신문도 말살되고 마침내 조선 글과 조선말까지 폐지되었다. 신문과 책을 찍어내던 한글 활자는 납으로 녹여져 전쟁 물품이 되어 사라졌다.
도내 지식인층에서 협력자와 전향자가 적잖게 발생했다. 민간 도처에 빈틈없이 깔린 밀정들이 눈을 밝히고 있었고, 이름이 알려진 투사들은 싹쓸이당하여 투옥되거나 아니면 검거를 피해 지하에 숨어야 했다. 역향이란 별명을 가진 조천리에 대한 탄압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심했다. - P64

식민지 제주도, 온 섬이 무거운 침묵으로 덮여 있었다.
대낮에도 캄캄한 어둠이었다. 일제와 싸우던 헌헌장부들은 육지와 일본의 감옥에 갇혀 점점 쇠약해지고, 썩어가고, 옥사했다. 인간뿐만 아니라 산천초목의 모든 풍경이 절망과 허무에 잠긴 듯했다. 교통과 통신의 삼엄한 통제로 섬 밖의 소식은 민간에 미치지 못했고, 강제노동 동원으로 도내의 마을과 마을 간 소통도 거의 두절되다시피 했다. 이 마을 저 마을 장꾼들이 모여들어 소식을 물어나르던 조천리의 오일장도 물자 부족으로 흐지부지되어버린 상태였다. 눈 캄캄, 귀 캄캄, 암흑의 세상이었다. - P86

그 전해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강제징용당해 홋카이도나 규슈 탄광으로 끌려가더니, 이번에는 스무살짜리 어린 청년들이 인도차이나반도와 남태평양 등지의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동원되었다. 강제징집 1기였다. 사람들은 갑자생은 무조건 전쟁터로 끌려가니 그들에게 인생을 묻지 말라고들 했다. 그래서 가혹한 운명의그들에게 붙여진 별칭이 ‘묻지 마라, 갑자생‘이었다. 조천리 갑자생 청년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렵에병사로, 노무자와 공장 노동자로 징집되어 일본에 간 제주 청년들의 수는 무려 삼만명에 달했다.
그해, 정신대에 끌려갈까 두려웠던 따알리아는 간호학교에 다니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 P87

그것이 ‘여자 공출‘ 혹은 ‘처녀 공출‘이었다. 해녀가대부분인 어촌 처녀들은 화약 원료인 감태를 채취해야해서 정신대에 동원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들리는 소문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병의 예방접종을 해야 한다고 속여 여자들을 몰아다 차에 태워 납치한다고 했다. 성산포단추 공장 여공 열댓명이 그렇게 당했단다. 여자 사냥꾼들은 트럭을 타고 일주도로를 따라 제주 해변을 돌면서사냥한다고, 어느 마을에서는 바다에서 작업 중인 해녀들을 동력선을 타고 접근한 놈들이 물 위의 오리떼 포획하듯 납치해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 P88

패색이 짙어진 일본군은 제주도를 최후 거점으로 삼았다. 섬 전체를 요새화하는 대규모 작업이 벌어졌다. 제주섬 전체를 하나의 항공모함으로 만들겠다고, 결코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 불침항모(不沈航母)로 만들고야말겠다고 일본군은 말했다. 다이너마이트 폭발음과 야포의 포격 연습 폭발음이 날마다 지축을 흔들면서 산야의 태곳적 고요를 여지없이 깨뜨렸다. 제주 땅 곳곳이 파이고 뚫리고 찢기면서 능욕을 당하기 시작했다.
그해 스무살이 된 을축생들 중 해군에 징집되어 남태평양으로 떠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청년들 이만명가량이 관동군의 병사와 노무자가 되어 한라산과 그아래 오름들로 끌려갔다. 병사도 노무자와 마찬가지로 - P90

가혹한 노역에 시달렸다. 한라산 둘레를 두르는 군용도로를 만들고, 수많은 오름들의 정상에는 토치카를, 밑에는 진지 동굴을 파고, 읍내 정뜨르와 모슬포의 알뜨르,
조천면의 진뜨르 세곳에는 군용 비행장을 건설했다. 조천면 산간지대의 부대오름, 검은오름, 바매기오름 등에도 진지 동굴 공사가 한창이었다. 조천리의 이웃 마을 함덕리에는 해군 일개 대대 삼백명이 배치되었고, 근처 바닷가 오름인 서우봉에는 진지 동굴을 뚫는 공사가 벌어졌다. 조천리 남정네들은 주로 진뜨르 비행장과 서우봉진지 동굴 작업에 동원되었다. - P91

견디기 어려운 중노동이었다. 연속된 노동으로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은 잠깐 쉬는 사이에도 눈이 붙은 듯감겨 떠지지 않았다. 그렇게 노역은 혹독한데 먹을 것은부족하여 형편없이 살이 깎여나가니, 그야말로 바늘같이 여윈 몸에 태산 같은 짐을 진 꼴이었다. 체질이 약골인 사람들 중에는 과로사로 죽는 이들도 생겼는데, 죽지않으려고 일부러 곡괭이로 제 발등을 찍어 후송되기도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머나먼 남양군도나 홋카이도 탄광, 규슈 탄광에 끌려가지 않은 것만을 다행으로 여겼다.
장차 제주 땅이 무서운 전쟁터로 돌변해 목숨을 잃더라도 뼈는 고향 땅에 묻힐 수 있을 테니까. - P91

찔레꽃이 하얗게 피고 보리밭의 낟알이 굵어져 그 속의 즙액이 달콤해진 계절이다. 자리돔이 살찌고 알이 배어 맛있을 때이지만 강제공과 비행장 공사에 휘몰린촌민들에게는 마을 앞바다의 자리돔밭에 테우(뗏목)를띄울 겨를이 없다. 길 양쪽에 펼쳐진 보리밭이 누르스름하게 물들어간다. 보리밭 위를 나는 작은 벌레들을 쫓아제비들이 가로세로로 엇갈려 난다. 검은 밭담 안에 가득실린 보리가 해풍에 물결치면서 출렁거리다가, 바람이거세지면 갑자기 허공으로 날아오를 듯이 급히 앞으로치달린다. 보리 익는 구수한 냄새가 물큰물큰 바람에 실려오는데, 그 냄새는 충분히 먹지 못하는 창세에게는 지나친 것이어서 메스꺼움이 일어난다. 보리밭 밭담 위에 얼크러진 흰 찔레꽃 향기도 견딜 수 없이 독하여 어질중이 날 지경이다. 집집마다 점심을 굶고 있다. 굶주림 때문에 그 많던 찔레순이 식용으로 다 꺾여 남아나는 것이 없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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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에,
백제에,
신동엽에,
가보지 못했다.
부여에게
백제에게
신동엽시인께
미안하다.
지난번 읽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ㅠ,ㅠ

부여 답사에서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정림사 오층석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림사탑은 멀리서 보면 아주 왜소해 보이지만 앞으로 다가갈수록 자못 웅장한 스케일도 느껴지고 저절로 멋지다는 탄성을 지르게 한다. 본래 회랑 안에 세워진 것이니 우리는 중문(中門)을 열고 들어온 위치에서 이 탑을 논해야 한다. 이 탑의 설계자가 요구하는 바로 그자리에서 볼 때 정림사탑은 우아한 아름다움의 한 표본이 되는 것이다.
완만한 체감률과 높직한 1층 탑신부는 우리에게 준수한 자태를 탐미케하며 부드러운 마감새는 그 고운 인상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헌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그러나 단정한 몸가짐에 어딘지 지적인 분위기, 절대로완력이나 난폭한 언행을 할 리 없는 착한 품성과 어진 눈빛, 조용한 걸음걸이에 따뜻한 눈인사를 보낼 것 같은 그런 인상의 석탑이다. 특히 아침 안개 속의 정림사탑은 엘리건트(elegant)하고, 노블(noble)하며, 그레이스풀(graceful)한 우아미의 화신이다.
만약에 안목 있는 미술사가에게 가장 백제적인 유물을 꼽으라고 주문한다면 서산 마애불,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산수문전(山水文塼) 등과 - P328

함께 이 정림사 오층석탑이 반드시 꼽힐 것이며, 나에게 말하라고 한다면 정림사 오층석탑이야말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다는 백제 미학의 상징적 유물이라고 답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100개의 유물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명작인 것이다. 이런 것을 일컬어 세속에서는
‘백고가 불여(不如)일부‘라고 했다. 풀이하면 ‘고고춤 백 번보다 부루스(블루스) 한 번이 더 낫다‘는 뜻인데, 정림사탑은 폐허의 왕도 부여의 ‘부루스‘이다.
정림사 오층석탑의 구조를 정확히 실측한 사람은 불국사와 석굴암을측량한 요네다 미요지이고, 그 구조의 미학과 양식적 전후관계를 밝힌분은 ‘조선탑파의 연구를 저술한 우현 고유섭 선생이다.
우현 선생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 양식인 익산 미륵사탑은 목조탑파를 충실히 모방한 것으로 다만 재료를 돌로 한 목탑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반하여 정림사탑은 이제 목조탑파의 모습에서 멀어져 석탑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획득하는 단계로 들어선 기념비적 유물로 평가하면서 이 탑의 특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P329

이 탑에 있어서 소재의 취급은 저 미륵사탑과는 판이하여 외용(外㈜)의 미는 소재 정리의 규율성과 더불어 율동의 미를 나타내고 (…)각층의 수축성과 더불어 아주 운문적인 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소재조합의 정제미뿐만 아니라 소재 자체의 세련미도 갖고 있어서 온갖능각(角)이 삭제되어 (・・・) 매우 온화한 평탄면을 갖고 있다. 더욱이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거의 완만하여 수평으로 뻗다가 전체 길이 10분의 1 되는 곳에서 약간의 반전을 나타내어 강력한 장력(張力)을 보이고 있다. 또 각 지붕돌 끝을 연결하는 이등변삼각형의 사선은약 81도를 이루어 일본 법륭사 오층탑과 거의 같다. 곧 안정도의 미 - P329

를 볼 수 있다.


우현 선생의 이런 분석은 결국 정림사탑에서 느끼는 그 미감의 동인(動因)을 잡아내는 작업으로서 한국미술사 연구에서 최초로, 모범적으로 보여준 양식사적 해석이었다.
석굴암을 측량하면서 통일신라 때 사용한 자가 곡척(尺, 30.3센티미터)이 아니라 당척(唐尺, 29.7센티미터)이었음을 밝힌 요네다는 백제 때 사용한 자는 곡이 아니라 고려척임을 또 밝혀냈다. 고려척은 고구려 척의 준말로 동위척(東魏尺)이라고도 하는데, 일본 법륭사(호류지)등 아스카 시대의 여러 건축에 사용되었고 신라의 황룡사, 익산의 미륵사 등도 고려척을 사용한 결과다. 1고려척은 약 1.158척(35.15센티미터)이다. - P331

고려적으로 측량한 결과, 요네다는 이 탑의 설계에서 기본 단위는7척에 있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1층 탑신 폭은 7척, 1층 총높이는7척, 기단의 높이는 7척의 반인 3.5척이고 기단 지대석(臺石) 폭은 7척의 1.5배인 10.5척이다. 그런 식으로 연관되는 수치를 요네다는 기하학적 도면으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요네다는 정림사탑의 아름다움의 요체가 체감률(遞減率)에 있는데 그것은 등비(等比) 급수 또는 등차( 체감이 아니라 기저부 크기의 기본 되는 길이에서 발전급수적하는 등적(割的) 구성으로 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 P331

나는 부여 답사에서 국립부여박물관을 들르지 않으면 백제 답사가아니라 부여 지방 풍광 기행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부여 답사의 핵심은어쩌면 이 박물관 관람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립부여박물관은종합박물관이 아니라 부여를 중심으로 한 백제 문화권 지방 박물관으로서 아주 특색 있게 꾸며져 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사라져버린 백제의유산을 땅속에서 찾아 다시 지상에 복원한 것이 국립부여박물관이다.
선사실에 들어가면 이 지역 청동기 문화의 큰 특징인 ‘송국리형 문화‘
가 출토지별, 종류별로 세심하게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 전시된 청동유물들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못지않은 양과 질을 보여준다.
역사실에 들어가면 고분 출토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백제의 큰 항아리를 보는 것은 정말로 큰 기쁨이다. 그렇게 부드러운 질감과 우아한 곡선의 항아리를 만든 사람은 백제인밖에 없다. 그리고 산수문전에 나타난 그 세련된 조형미는 여기서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한다.
산봉우리를 살짝 둥글리면서 윤곽선을 슬쩍 집어넣은 기교와 구름과 소나무를 문양으로 처리하면서도 생동감을 부여한 것은 거의 마술에 가 - P333

깝다. 사실상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백제의 미학을 단 하나의 유물로 표현해보라고 할 때 여기에 표를 던지는 분이 많다.
불교미술실에서 우리는 백제 불상만이 갖는 여러 표정을 만나게 된다. 삼불 선생이 주장한 백제의 미소를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된다. 군수리절터에서 나온 석조여래좌상을 보면 고개를 6시 5분으로 갸우뚱하게기울임으로써 그 친숙감이 절묘하게 살아나고 있다. 본래 좌상은 입상보다 권위적이기 쉽다. 그러나 약간 고개를 기울임으로써 근엄한 자세가 아니라 인간적 자태로 환원된 것이다. 이는 절대자의 친절성을 극대화하면서 그 인자한 모습을 담아내려는 조형 의지의 발로라 할 것이다.
또 규암리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을 보면 그 수려한 몸매와 맵시있는 몸가짐, 귀엽고 복스러운 얼굴에서 당대의 미인, 말하자면 ‘미스 백제‘를 보는 듯한 착각조차 일어난다. 뒷모습이 유난히 예쁜 이 보살상은 - P334

한때 일본에 약탈될 뻔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는데(이구열 한국문화재 수난사)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1997년 국보로승격되었다.
그리고 나는 구아리 유적에서 나온 나한상(羅漢像)의 강렬한 인상을잊지 못한다. 광대뼈와 골격이 또렷하여 그 표정이 확연히 살아 있는데이 나한의 얼굴에 서린 고뇌의 빛깔은 모든 인간이 이따금 드러내고 마는 인간 실존의 비극적 표정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불, 보살, 나한상이 모두소품인지라 그 감동의 폭이 작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런 분들의 아쉬움을 한번에 달래주는 유물이 청양 본의리에서 출토된 테 - P335

라코타 불상 좌대다. 저 큰 좌대에 앉아 있을 불상은 어떤 모습이겠으며, 저 맵시 있게 반전된 연꽃에 어울릴 옷주름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노라면 금세 보았던 백제의 불, 보살, 나한상들이 열 배, 스무 배 크기의영상으로 다가온다. 그런 가운데 백제의 숨결은 살아나고 백제의 미학은 고양된다.
그러나 꼭 크고 웅장해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가치관이 - P336

뿐만 아니라 거의 병적인 현상이다. ‘작은 것이 위대하다‘는 격언도 있다. 그것을 소중현대(小中現大)라 한다. 즉 ‘작은것 속에 큰 것이 다 들어가있다‘는 뜻이다. 이는 명나라의 문인화가인 동기창(昌)이 작은 화첩에 역대 명화대작들을 축소하여 복사하듯그려보고는 그 표장에 ‘소중현대‘라고 적어서 유명한 말이 되었는데, 나는 지금 우리야말로 소중현대의 철학을배워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백제의 유물들이 시범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에 감사하고 싶다. 요컨대 백제의 미학은 ‘검이불루 화이불치‘에 ‘소중현대‘를 합치면 제격을 갖추게 된다고 믿는다. - P337

나는 처음엔 신동엽 시 중에서 역사의식이 넘치는 껍데기는 가라」와「금강」을 좋아했고, 나중에는 현실성이 극대화된 「향아」 「종로 5가」를좋아했다. 그리고 지금은 「산에 언덕에」 같은 맑은 서정의 노래를 더 좋아한다. 신동엽의 「산에 언덕에」에는 짙은 그리움이 있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찾고 찾아야 할 그런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흐른다.
나는 우리나라 예술 속에서 그리움을 노래한 몇몇 대가를 알고 있다.
한 분은 김소월(金素月)이다. 그분의 시는 거의 다 그리움으로 가득하다는 느낌이다. 「초혼」 같은 시는 그리움에 지쳐 쓰러지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소월이 보여준 그리움이란 항시 이루어보지 못한 어떤 대상에 대한 애절한 동경의 그리움이었다.
이에 반하여 이중섭(李仲燮)의 그림은 잃어버린 행복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와 아들을 만나고 싶은 그리움의 감정을 황혼녘에 울부짖는 「소」 「달과 까마귀」 「손」에 실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겪는 그리움의 고통을 보편적 가치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고, 그래서 그의 그리움에서는 살점이 떨어지는 듯한 애절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김소월과 이중섭의 그리움에는 치열한 현실의식이나 역사인식이 들어 있지 않다. 역사의 아픔과 그 아픔을 넘어서는 희망까지를 말 - P338

하는 역사 앞에서의 그리움은 신동엽의 차지였다. 그의 <산에 언덕에>에는 그런 그리움의 감정이 남김없이 서려 있다. 지금도 백마강변 나성에 세워져 있는 신동엽 시비에는 이 <산에 언덕에>가 조용한 글씨체로잔잔하게 새겨져 있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 P339

(....)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런 그리움의 시인 신동엽, 부여에서 태어나서 숙명적으로 백제를 사랑하며 백제의 마음으로 살고 싶어했던 신동엽이 마음속에 그린 백제는 과연 어떤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회상의백제행‘의 마지막 여운으로 삼아도 좋지 않겠는가. 그의 장시 「금강」 제23장은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 P340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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