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살 동갑내기 단짝친구인 정두길과 부대림은이른 아침에 연대 밑 바닷가에서 만나 바닷바람을 쐬곤했다. 식민지 청년의 울울한 가슴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바다밖에 없다는 듯이 그들은 거의 매일 일출을 보러새벽 바다로 갔다. 어둠에서 깨어나 붉은 노을을 날개처럼 펼치면서 솟아오르는 태양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었다. 거침없이 쑥쑥 솟는 태양을 보고 있으면 이 고난의세월도 언젠가는 끝나고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은 생각이들었다. 시를 좋아하는 두길은 그런 마음을 잘 나타낸 시를 어떤 번역시집에서 발견하여 읊어주었다. 영국 시인하우스먼의 시였다. - P115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6월 초보리 베기 철이 왔다. 그야말로 죽은 송장까지도, 부엌의 부지깽이까지도일을 돕겠다고 꿈지럭거려야 할 정도로 일손이 바쁠 때였다. 보리가 익어 쓰러지기 전에 수확해야 하므로 진뜨르 노역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일시 중단이아니라 완전 중단이었다.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다.
떼까지 입히다가 중단된 활주로 공사는 비행기 한대 앉아보지 못한 채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다.  - P130

일요일 오후는 창세에게 아주 귀한 시간이었다. 일요일에는 오전에만 들녘에 나가 송진 채취 일을 하고 정오이후에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오후 시간이 주는조그만 행복, 창세에게 그것은 바다였다. 바다에는 고픈배를 다소라도 달래줄 물고기와 소라, 게, 보말들이 있었고, 짙푸른 바다와 작열하는 태양, 시원한 물속과 뜨거운 햇볕 속에서 느끼는 벗은 살과 뼈의 행복이 있었다. - P131

어느 일요일 오후, 모처럼 찾아온 휴식의 시간. 모처럼바람이 없어 주위는 고요하다. 바람이 많은 고장이라 잠시라도 바람이 자면 주위의 정적이 낯설게 느껴진다. 정적 속에서 타타타타 어머니의 미싱 바늘 박는 소리가 도드라지고, 멀리 떠났던 파도소리도 다시 들려오고, 바다냄새도 짙게 맡아진다. 정적 속에서는 사람 부르는 소리또한 멀리 가고 크게 들린다. 햇빛이 짜랑짜랑한 한낮, 골목길을 걸어오면서 어깨가 넓고 몸통이 굵어 ‘왕돌‘이 별명인 행필이 창세를 소리쳐 부른다. "야, 눈큰볼락, 왕눈아, 바당에 고기 쏘러 가자!" - P131

‘학자 나무‘라고 불리는 그 회화나무는 조천리 김해김씨의 먼 조상이 육지로부터 들여와 심은 것인데, 그 덕분인지 구한말에 그 문중에서 학자와 벼슬아치가 여럿나왔다. 그래서 그 나무는 한때 번성했던 그 문중의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물은 구한말의 그들이 아니라 일제와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그들의 자식, 손자 들이다. 특히 김명식, 김문준, 김시범,
김시용 같은 청년 지식분자들은 거의 절대적 흠모의 대상이다. 대의를 위해 몸 바친다는 것, 목숨 바쳐 싸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가혹한 탄압에 몸도정신도 무너지고 집안도 몰락하고 말았는데...... - P138

검은 현무암의 해변에서 바위를 달군 열기가 해풍에밀려오는데, 그 속에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실려 있다. 해초를 햇볕에 말릴 때 생기는 요오드 냄새는 갯냄새 중에가장 향기롭다. 기포 구멍이 숭숭 뚫린 널찍한 현무암 암반과 풀밭에 해녀들이 채취한 미역과 감태가 널려 햇볕에 꾸들꾸들 말라간다. 달구어진 바위와 돌이 창세의 맨발바닥을 뜨겁게 지져댄다. 뜨거운 줄도 모르고 바위에찰싹 붙어 뻗어 있는 흰 돌찔레(돌가시나무)꽃이 신기하다.
현무암 지대가 끝나고 모래 둔덕이 나타난다. 그 위로 순비기나무들이 뱀떼처럼 얽히고설켜 기어가고 있다 - P170

문득 눈앞에 사방이 탁 트인 푸른공간이 펼쳐진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만들어내는 광활한 공간이다. 비상경계령이 삼엄하게 내려진 바다는 잠수기선과 화물을나르는 10톤짜리 조그만 발동선 하나와 감물 들인 갈색돛을 세운 돛단배 하나만 가까이에 보일 뿐 휑하니 비어 있다. 그러나 바닷속에는 귀신고래보다 더 크다는 미군 잠수함들이 잠행하고 있고, 먼 수평선 위 뭉게구름 속에는 구라망 전투기들이 숨어 있고, 더 높은 구름 속에는 B29가 숨어 있다. 그래서 육지 바다에 진출하는 해녀들의 원정 물질이 몇달째 끊겼고, 앞바다의 물질도 멀리나가지 못하고 해변 가까운 데서 한다. 그것도 돈이 되는소라, 전복은 잠수기를 사용하는 잠수부들이 싹쓸이해버리고 해녀들은 공출용감태채취에 내몰려 그것들을캘 여유도 없다. - P171

숨이 참을 수 없이 가빠졌다. 아뿔싸! 자칫숨이 막혀 죽을 판, 손목에 감은 끈을 풀어 전복에 물린빗창을 내버린 채 황망히 물 위로 떠올랐다. 떠오르다가더이상 숨을 참지 못해 울컥 물을 삼키고 말았다. 그와동시에 물안경에 틈이 벌어져 물이 왈칵 들어오고 머릿수건이 벗겨졌다. 허파가 찢어지는 듯, 눈알이 튀어나오는 듯한 고통! 허겁지겁 솟구쳐올라 수면을 터뜨리는 순간, 손을 뻗어 간신히 테왁을 붙잡고 그 옆의 듬북떼 위에 널브러졌다. 눈앞 풍경이 벌겋게 변하면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정신은 금방 돌아왔다. 아득히 멀어져가던 정신이 다시 돌아오는 그사이에 노란 놋잔 한개가 번쩍거리며 나타났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만옥은 테왁을 그러안고 두려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숨을 몰아쉬었다. 물 아래 들어가서 너무 욕심을 부리면 죽을 수도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P175

대공습에 공장이 여지없이 파괴되어 일자리가 사라지고 자칫 폭탄에 맞아 죽을지 모르게 되자 죽어도 고향에서 죽자 하여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고향의 흙냄새를어서 맡고 싶어 갈급증이 난 그들은 서둘러 상륙했으나땅에 발을 딛자마자 땅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것 같아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렸고, 그것을 본 아이들이 재미있다고 깔깔 웃어댔다. 휘청거리던 그들이 털썩 무릎을 꿇고 엎드려 흙냄새를 맡았다. 아예 맨땅에 몸을 던져흙에 얼굴을 비비면서 냄새를 맡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흐르는 눈물로 번들거렸다. 고향의 흙냄새였다. 키우던 말과 소가 아무리 멀고 낯선 곳에 홀로 남겨져도, 그게 깜깜한 밤중일지라도 태어난 외양간을 찾아오는 것이 본능이듯이, 머나먼 객지의 그들 역시 고향의 흙냄새에 이끌렸던 것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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