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에,
백제에,
신동엽에,
가보지 못했다.
부여에게
백제에게
신동엽시인께
미안하다.
지난번 읽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ㅠ,ㅠ

부여 답사에서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정림사 오층석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림사탑은 멀리서 보면 아주 왜소해 보이지만 앞으로 다가갈수록 자못 웅장한 스케일도 느껴지고 저절로 멋지다는 탄성을 지르게 한다. 본래 회랑 안에 세워진 것이니 우리는 중문(中門)을 열고 들어온 위치에서 이 탑을 논해야 한다. 이 탑의 설계자가 요구하는 바로 그자리에서 볼 때 정림사탑은 우아한 아름다움의 한 표본이 되는 것이다.
완만한 체감률과 높직한 1층 탑신부는 우리에게 준수한 자태를 탐미케하며 부드러운 마감새는 그 고운 인상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헌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그러나 단정한 몸가짐에 어딘지 지적인 분위기, 절대로완력이나 난폭한 언행을 할 리 없는 착한 품성과 어진 눈빛, 조용한 걸음걸이에 따뜻한 눈인사를 보낼 것 같은 그런 인상의 석탑이다. 특히 아침 안개 속의 정림사탑은 엘리건트(elegant)하고, 노블(noble)하며, 그레이스풀(graceful)한 우아미의 화신이다.
만약에 안목 있는 미술사가에게 가장 백제적인 유물을 꼽으라고 주문한다면 서산 마애불,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산수문전(山水文塼) 등과 - P328

함께 이 정림사 오층석탑이 반드시 꼽힐 것이며, 나에게 말하라고 한다면 정림사 오층석탑이야말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다는 백제 미학의 상징적 유물이라고 답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100개의 유물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명작인 것이다. 이런 것을 일컬어 세속에서는
‘백고가 불여(不如)일부‘라고 했다. 풀이하면 ‘고고춤 백 번보다 부루스(블루스) 한 번이 더 낫다‘는 뜻인데, 정림사탑은 폐허의 왕도 부여의 ‘부루스‘이다.
정림사 오층석탑의 구조를 정확히 실측한 사람은 불국사와 석굴암을측량한 요네다 미요지이고, 그 구조의 미학과 양식적 전후관계를 밝힌분은 ‘조선탑파의 연구를 저술한 우현 고유섭 선생이다.
우현 선생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 양식인 익산 미륵사탑은 목조탑파를 충실히 모방한 것으로 다만 재료를 돌로 한 목탑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반하여 정림사탑은 이제 목조탑파의 모습에서 멀어져 석탑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획득하는 단계로 들어선 기념비적 유물로 평가하면서 이 탑의 특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P329

이 탑에 있어서 소재의 취급은 저 미륵사탑과는 판이하여 외용(外㈜)의 미는 소재 정리의 규율성과 더불어 율동의 미를 나타내고 (…)각층의 수축성과 더불어 아주 운문적인 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소재조합의 정제미뿐만 아니라 소재 자체의 세련미도 갖고 있어서 온갖능각(角)이 삭제되어 (・・・) 매우 온화한 평탄면을 갖고 있다. 더욱이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거의 완만하여 수평으로 뻗다가 전체 길이 10분의 1 되는 곳에서 약간의 반전을 나타내어 강력한 장력(張力)을 보이고 있다. 또 각 지붕돌 끝을 연결하는 이등변삼각형의 사선은약 81도를 이루어 일본 법륭사 오층탑과 거의 같다. 곧 안정도의 미 - P329

를 볼 수 있다.


우현 선생의 이런 분석은 결국 정림사탑에서 느끼는 그 미감의 동인(動因)을 잡아내는 작업으로서 한국미술사 연구에서 최초로, 모범적으로 보여준 양식사적 해석이었다.
석굴암을 측량하면서 통일신라 때 사용한 자가 곡척(尺, 30.3센티미터)이 아니라 당척(唐尺, 29.7센티미터)이었음을 밝힌 요네다는 백제 때 사용한 자는 곡이 아니라 고려척임을 또 밝혀냈다. 고려척은 고구려 척의 준말로 동위척(東魏尺)이라고도 하는데, 일본 법륭사(호류지)등 아스카 시대의 여러 건축에 사용되었고 신라의 황룡사, 익산의 미륵사 등도 고려척을 사용한 결과다. 1고려척은 약 1.158척(35.15센티미터)이다. - P331

고려적으로 측량한 결과, 요네다는 이 탑의 설계에서 기본 단위는7척에 있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1층 탑신 폭은 7척, 1층 총높이는7척, 기단의 높이는 7척의 반인 3.5척이고 기단 지대석(臺石) 폭은 7척의 1.5배인 10.5척이다. 그런 식으로 연관되는 수치를 요네다는 기하학적 도면으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요네다는 정림사탑의 아름다움의 요체가 체감률(遞減率)에 있는데 그것은 등비(等比) 급수 또는 등차( 체감이 아니라 기저부 크기의 기본 되는 길이에서 발전급수적하는 등적(割的) 구성으로 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 P331

나는 부여 답사에서 국립부여박물관을 들르지 않으면 백제 답사가아니라 부여 지방 풍광 기행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부여 답사의 핵심은어쩌면 이 박물관 관람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립부여박물관은종합박물관이 아니라 부여를 중심으로 한 백제 문화권 지방 박물관으로서 아주 특색 있게 꾸며져 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사라져버린 백제의유산을 땅속에서 찾아 다시 지상에 복원한 것이 국립부여박물관이다.
선사실에 들어가면 이 지역 청동기 문화의 큰 특징인 ‘송국리형 문화‘
가 출토지별, 종류별로 세심하게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 전시된 청동유물들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못지않은 양과 질을 보여준다.
역사실에 들어가면 고분 출토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백제의 큰 항아리를 보는 것은 정말로 큰 기쁨이다. 그렇게 부드러운 질감과 우아한 곡선의 항아리를 만든 사람은 백제인밖에 없다. 그리고 산수문전에 나타난 그 세련된 조형미는 여기서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한다.
산봉우리를 살짝 둥글리면서 윤곽선을 슬쩍 집어넣은 기교와 구름과 소나무를 문양으로 처리하면서도 생동감을 부여한 것은 거의 마술에 가 - P333

깝다. 사실상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백제의 미학을 단 하나의 유물로 표현해보라고 할 때 여기에 표를 던지는 분이 많다.
불교미술실에서 우리는 백제 불상만이 갖는 여러 표정을 만나게 된다. 삼불 선생이 주장한 백제의 미소를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된다. 군수리절터에서 나온 석조여래좌상을 보면 고개를 6시 5분으로 갸우뚱하게기울임으로써 그 친숙감이 절묘하게 살아나고 있다. 본래 좌상은 입상보다 권위적이기 쉽다. 그러나 약간 고개를 기울임으로써 근엄한 자세가 아니라 인간적 자태로 환원된 것이다. 이는 절대자의 친절성을 극대화하면서 그 인자한 모습을 담아내려는 조형 의지의 발로라 할 것이다.
또 규암리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을 보면 그 수려한 몸매와 맵시있는 몸가짐, 귀엽고 복스러운 얼굴에서 당대의 미인, 말하자면 ‘미스 백제‘를 보는 듯한 착각조차 일어난다. 뒷모습이 유난히 예쁜 이 보살상은 - P334

한때 일본에 약탈될 뻔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는데(이구열 한국문화재 수난사)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1997년 국보로승격되었다.
그리고 나는 구아리 유적에서 나온 나한상(羅漢像)의 강렬한 인상을잊지 못한다. 광대뼈와 골격이 또렷하여 그 표정이 확연히 살아 있는데이 나한의 얼굴에 서린 고뇌의 빛깔은 모든 인간이 이따금 드러내고 마는 인간 실존의 비극적 표정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불, 보살, 나한상이 모두소품인지라 그 감동의 폭이 작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런 분들의 아쉬움을 한번에 달래주는 유물이 청양 본의리에서 출토된 테 - P335

라코타 불상 좌대다. 저 큰 좌대에 앉아 있을 불상은 어떤 모습이겠으며, 저 맵시 있게 반전된 연꽃에 어울릴 옷주름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노라면 금세 보았던 백제의 불, 보살, 나한상들이 열 배, 스무 배 크기의영상으로 다가온다. 그런 가운데 백제의 숨결은 살아나고 백제의 미학은 고양된다.
그러나 꼭 크고 웅장해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가치관이 - P336

뿐만 아니라 거의 병적인 현상이다. ‘작은 것이 위대하다‘는 격언도 있다. 그것을 소중현대(小中現大)라 한다. 즉 ‘작은것 속에 큰 것이 다 들어가있다‘는 뜻이다. 이는 명나라의 문인화가인 동기창(昌)이 작은 화첩에 역대 명화대작들을 축소하여 복사하듯그려보고는 그 표장에 ‘소중현대‘라고 적어서 유명한 말이 되었는데, 나는 지금 우리야말로 소중현대의 철학을배워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백제의 유물들이 시범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에 감사하고 싶다. 요컨대 백제의 미학은 ‘검이불루 화이불치‘에 ‘소중현대‘를 합치면 제격을 갖추게 된다고 믿는다. - P337

나는 처음엔 신동엽 시 중에서 역사의식이 넘치는 껍데기는 가라」와「금강」을 좋아했고, 나중에는 현실성이 극대화된 「향아」 「종로 5가」를좋아했다. 그리고 지금은 「산에 언덕에」 같은 맑은 서정의 노래를 더 좋아한다. 신동엽의 「산에 언덕에」에는 짙은 그리움이 있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찾고 찾아야 할 그런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흐른다.
나는 우리나라 예술 속에서 그리움을 노래한 몇몇 대가를 알고 있다.
한 분은 김소월(金素月)이다. 그분의 시는 거의 다 그리움으로 가득하다는 느낌이다. 「초혼」 같은 시는 그리움에 지쳐 쓰러지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소월이 보여준 그리움이란 항시 이루어보지 못한 어떤 대상에 대한 애절한 동경의 그리움이었다.
이에 반하여 이중섭(李仲燮)의 그림은 잃어버린 행복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와 아들을 만나고 싶은 그리움의 감정을 황혼녘에 울부짖는 「소」 「달과 까마귀」 「손」에 실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겪는 그리움의 고통을 보편적 가치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고, 그래서 그의 그리움에서는 살점이 떨어지는 듯한 애절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김소월과 이중섭의 그리움에는 치열한 현실의식이나 역사인식이 들어 있지 않다. 역사의 아픔과 그 아픔을 넘어서는 희망까지를 말 - P338

하는 역사 앞에서의 그리움은 신동엽의 차지였다. 그의 <산에 언덕에>에는 그런 그리움의 감정이 남김없이 서려 있다. 지금도 백마강변 나성에 세워져 있는 신동엽 시비에는 이 <산에 언덕에>가 조용한 글씨체로잔잔하게 새겨져 있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 P339

(....)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런 그리움의 시인 신동엽, 부여에서 태어나서 숙명적으로 백제를 사랑하며 백제의 마음으로 살고 싶어했던 신동엽이 마음속에 그린 백제는 과연 어떤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회상의백제행‘의 마지막 여운으로 삼아도 좋지 않겠는가. 그의 장시 「금강」 제23장은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 P340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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