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비극,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답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2023년초여름
현기영

"죽을 목숨이 어쩌다 살아나긴 했지만, 산 게 산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몫까지 내가 살아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살았주. 그렇게 열심히 살젠 노력했어도 이 세상을 절반밖에못 산 것 같아. 절반을 4·3에 묶여딴세상에 살았고, 말도 절반밖에 하지 못하는 반벙어리로 살았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거기에 가 있었어. 아방아, 물론 너를 낳아 키우고 손주들 보는 재미가 있기는 했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그 슬픔이 있었다. 그렇게 평생을 견디면서 살아왔는디, 작년부터 자주 악몽을 꾸게됐잖여. 그놈들이 자꾸 꿈에 나타낭 총검으로 가슴팍을팍팍 찌르는 거라. 내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다시 죽이겠다는 거라. 아이고, 죽이려면 그때 죽이지 왜 - P19

살려두었는가 말이여. 죽지 못해 살아 있는 것이 죄란 말인가. 나쁜 놈들!"
노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이상 그 사건의기억을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한 듯했다. 그런노인을 돕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의그 어두운 기억을 입 밖으로 시원하게 토로하도록 도와야 했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무섭다고 도리질이었다. - P20

그렇게 여러날에 걸쳐 간청한 끝에 노인은 마침내 닫혔던 입을 열었다. 벽장 서랍 속에서 만년필을 꺼내 보이면서 그가 말했다. 양미간이 좁아져 깊은 골이 파이면서 표정이 침통해졌다.
"이 만년필은 말이다, 소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초등학교인데, 그때 담임이었던 정두길 선생이 쓰던 만년필이라. 그해 겨울 선생은 한라산 깊은 눈 속으로 사라져부렀주. 행방불명되기 직전에 이 만년필을 나한테 주멍말했어. ‘창세야, 너 작가가 되고 싶댄주이? 부디 넌 죽지 말앙 꼭 살아남으라이. 살아남아서 이 만년필로 좋은글을 써라이. 나도 좋은 글 쓰고 싶었지만, 이젠 허사가되고 말았구나.‘ 그게 마지막이었어."할아버지는 꺼질듯이 한숨을 내쉬더니 다음 순간 눈을 부릅뜨고 목청을 높였다. - P24

낮은 말소리와 함께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주름살을 타고 두 뺨에 번졌다. 소리 없는 눈물, 애간장이다 녹은 눈물, 바위가 흘리는 것처럼 고통도 슬픔도 보여주지 않는 눈물이었다. 흐르는 눈물과 함께 노인의 몸속에 갇혀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반짝거리면서 줄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노인은 이야기를 시작하자 갑자기 기운이 나는 듯 얼굴빛이 밝아졌다. 칠십여년 세월에도 노인은 당시의 일들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으려고 애썼고 많이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세세한 기억들까지 새록새록 떠올라 스스로도 놀랍다고 말했다. 냄새, 소리, 색깔 등 감각적인 것도 기억해냈고 그때 느꼈던 감정도 - P25

사람은 그 산천을 닮는다고 했거니와, 그들을 가난하게 만든 화산섬의 척박한 풍토는 그들의 심성을 거칠게만들기도 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에 익숙해 있던 그들은 자신이 키우는 소나 말처럼 말이 없으면서도 깊고굳센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땅 도처에 해묵은 팽나무들이 많은데, 그곳 사람들의 생리가 바위틈에 억세게뿌리를 내린 채 버티고 서서 사나운 강풍을 견뎌내는 그나무들을 닮았다. 게다가 그곳 선비들 중 상당수는 유배객과 망명객의 후손이었으니, 그들의 핏속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분노의 씨앗이 감춰져 있기도 했을 것이다. 출륙 금지에 의한 이백년간의 유폐생활이 그러한 심성을 더욱 조장했을 것이다. 그 선비들은 교활을 싫어하고 단순명료를 좋아해서 어떤 일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받아들이고 목숨까지 바치기도 했다. 관권의 침학을 더이상 견딜 수 없어 민란이 일어났을 때, 몸 바쳐그 무리를 이끈 장두(狀頭)들이 바로 그들 중에서 나왔다.  - P45

안창세는 황국 소년 아베 마코토가 되어버렸다. 총동원령 속에 그나마 남아 있던 공동체의 가치들은 가차 없이 박살 났다. 인간을 위한 사상은깡그리 그 불길 속에 던져졌다. 야학도, 노동운동도, 신문도 말살되고 마침내 조선 글과 조선말까지 폐지되었다. 신문과 책을 찍어내던 한글 활자는 납으로 녹여져 전쟁 물품이 되어 사라졌다.
도내 지식인층에서 협력자와 전향자가 적잖게 발생했다. 민간 도처에 빈틈없이 깔린 밀정들이 눈을 밝히고 있었고, 이름이 알려진 투사들은 싹쓸이당하여 투옥되거나 아니면 검거를 피해 지하에 숨어야 했다. 역향이란 별명을 가진 조천리에 대한 탄압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심했다. - P64

식민지 제주도, 온 섬이 무거운 침묵으로 덮여 있었다.
대낮에도 캄캄한 어둠이었다. 일제와 싸우던 헌헌장부들은 육지와 일본의 감옥에 갇혀 점점 쇠약해지고, 썩어가고, 옥사했다. 인간뿐만 아니라 산천초목의 모든 풍경이 절망과 허무에 잠긴 듯했다. 교통과 통신의 삼엄한 통제로 섬 밖의 소식은 민간에 미치지 못했고, 강제노동 동원으로 도내의 마을과 마을 간 소통도 거의 두절되다시피 했다. 이 마을 저 마을 장꾼들이 모여들어 소식을 물어나르던 조천리의 오일장도 물자 부족으로 흐지부지되어버린 상태였다. 눈 캄캄, 귀 캄캄, 암흑의 세상이었다. - P86

그 전해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강제징용당해 홋카이도나 규슈 탄광으로 끌려가더니, 이번에는 스무살짜리 어린 청년들이 인도차이나반도와 남태평양 등지의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동원되었다. 강제징집 1기였다. 사람들은 갑자생은 무조건 전쟁터로 끌려가니 그들에게 인생을 묻지 말라고들 했다. 그래서 가혹한 운명의그들에게 붙여진 별칭이 ‘묻지 마라, 갑자생‘이었다. 조천리 갑자생 청년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렵에병사로, 노무자와 공장 노동자로 징집되어 일본에 간 제주 청년들의 수는 무려 삼만명에 달했다.
그해, 정신대에 끌려갈까 두려웠던 따알리아는 간호학교에 다니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 P87

그것이 ‘여자 공출‘ 혹은 ‘처녀 공출‘이었다. 해녀가대부분인 어촌 처녀들은 화약 원료인 감태를 채취해야해서 정신대에 동원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들리는 소문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병의 예방접종을 해야 한다고 속여 여자들을 몰아다 차에 태워 납치한다고 했다. 성산포단추 공장 여공 열댓명이 그렇게 당했단다. 여자 사냥꾼들은 트럭을 타고 일주도로를 따라 제주 해변을 돌면서사냥한다고, 어느 마을에서는 바다에서 작업 중인 해녀들을 동력선을 타고 접근한 놈들이 물 위의 오리떼 포획하듯 납치해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 P88

패색이 짙어진 일본군은 제주도를 최후 거점으로 삼았다. 섬 전체를 요새화하는 대규모 작업이 벌어졌다. 제주섬 전체를 하나의 항공모함으로 만들겠다고, 결코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 불침항모(不沈航母)로 만들고야말겠다고 일본군은 말했다. 다이너마이트 폭발음과 야포의 포격 연습 폭발음이 날마다 지축을 흔들면서 산야의 태곳적 고요를 여지없이 깨뜨렸다. 제주 땅 곳곳이 파이고 뚫리고 찢기면서 능욕을 당하기 시작했다.
그해 스무살이 된 을축생들 중 해군에 징집되어 남태평양으로 떠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청년들 이만명가량이 관동군의 병사와 노무자가 되어 한라산과 그아래 오름들로 끌려갔다. 병사도 노무자와 마찬가지로 - P90

가혹한 노역에 시달렸다. 한라산 둘레를 두르는 군용도로를 만들고, 수많은 오름들의 정상에는 토치카를, 밑에는 진지 동굴을 파고, 읍내 정뜨르와 모슬포의 알뜨르,
조천면의 진뜨르 세곳에는 군용 비행장을 건설했다. 조천면 산간지대의 부대오름, 검은오름, 바매기오름 등에도 진지 동굴 공사가 한창이었다. 조천리의 이웃 마을 함덕리에는 해군 일개 대대 삼백명이 배치되었고, 근처 바닷가 오름인 서우봉에는 진지 동굴을 뚫는 공사가 벌어졌다. 조천리 남정네들은 주로 진뜨르 비행장과 서우봉진지 동굴 작업에 동원되었다. - P91

견디기 어려운 중노동이었다. 연속된 노동으로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은 잠깐 쉬는 사이에도 눈이 붙은 듯감겨 떠지지 않았다. 그렇게 노역은 혹독한데 먹을 것은부족하여 형편없이 살이 깎여나가니, 그야말로 바늘같이 여윈 몸에 태산 같은 짐을 진 꼴이었다. 체질이 약골인 사람들 중에는 과로사로 죽는 이들도 생겼는데, 죽지않으려고 일부러 곡괭이로 제 발등을 찍어 후송되기도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머나먼 남양군도나 홋카이도 탄광, 규슈 탄광에 끌려가지 않은 것만을 다행으로 여겼다.
장차 제주 땅이 무서운 전쟁터로 돌변해 목숨을 잃더라도 뼈는 고향 땅에 묻힐 수 있을 테니까. - P91

찔레꽃이 하얗게 피고 보리밭의 낟알이 굵어져 그 속의 즙액이 달콤해진 계절이다. 자리돔이 살찌고 알이 배어 맛있을 때이지만 강제공과 비행장 공사에 휘몰린촌민들에게는 마을 앞바다의 자리돔밭에 테우(뗏목)를띄울 겨를이 없다. 길 양쪽에 펼쳐진 보리밭이 누르스름하게 물들어간다. 보리밭 위를 나는 작은 벌레들을 쫓아제비들이 가로세로로 엇갈려 난다. 검은 밭담 안에 가득실린 보리가 해풍에 물결치면서 출렁거리다가, 바람이거세지면 갑자기 허공으로 날아오를 듯이 급히 앞으로치달린다. 보리 익는 구수한 냄새가 물큰물큰 바람에 실려오는데, 그 냄새는 충분히 먹지 못하는 창세에게는 지나친 것이어서 메스꺼움이 일어난다. 보리밭 밭담 위에 얼크러진 흰 찔레꽃 향기도 견딜 수 없이 독하여 어질중이 날 지경이다. 집집마다 점심을 굶고 있다. 굶주림 때문에 그 많던 찔레순이 식용으로 다 꺾여 남아나는 것이 없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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