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영화과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2001년 제6회 <씨네21> 영화평론상을 받았고, 2006년 제3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에서 순간을 믿어요>로 시나리오 시놉시스 부문을 수상했다. <인간적으로 정이 안가는 인간> <너의 의미> 등 다수의 단편영화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첫 장편소설 《아몬드 제1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두 번째 장편소설 《서른의 반격>으로 제5회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내가 아는 건 그 정도다. 그전에 벌어진 피, 광장, 투쟁의 흔적은 사진과 다큐에서나 본 겪지 못한 옛날 얘기일 뿐이다. 세상은 몇 발자국앞으로 나아갔지만 그 몇 발자국이 전부인 것 같다. 여전히 부당함이 우위를 점령하고 있고 당연히 보통 사람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대신 대세에 머리를 조아려 수긍하면서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나는 남들과 달리 몹시 특별한 사람이라고, 그러니 제발 나를 좀 주목해달라고 온몸으로 외쳐야 하는 세상이 왔다. 나는 하필이면 이 시대에청춘의 끝자락을 맞이한 숱한 여럿 중 하나이다.
물론 내게도 시작이 있었다. 대부분의 탄생이 그러하듯, 내 삶의 시작도 누군가에겐 두고두고 얘기하는 특별한 추억이다. 내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엄마는 전국이 호돌이 마크로 도배되고 굴렁쇠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던 더웠던 여름날을 이야기하곤 했다. 개발도상국에서 펼쳐진 올림픽에 세계의 관심이 쏠렸고 전국의 국민들은, 여덟 살아이가 굴렁쇠를 구르며 드넓은 운동장을 과연 실수 없이 가로지를 수있을 것인지를 두 주먹을 꽉 쥔 채 지켜봤다. - P8

학창 시절 내내 그런 일들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가나다가 ABC로 바뀌는 정도의 변화가 있었을 뿐, 주변엔 어디에나 지혜가 산적해 있었다. 중학교 때인가는 심지어 한 반에 지혜가 다섯 명이었던 적도 있는데,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큰 지혜, 작은 지혜, 하얀 지혜, 까만 지혜, 통통한 지혜 등, 이름보다 형용사가 구분의 기준이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참 색깔이 없는 ‘작은 지혜‘였는데 특별히 내가작아서라기보단, 큰 지혜가 월등히 컸고 그에 비해 나는 덜 컸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전국의 지혜들은 역시 전국에 만만찮게 포진해 있는 민지, 은지, 은정, 혜진이 들과, 양념처럼 한 반에 한 명쯤은 포진한 보람, 아름, 슬기 들과 어울려 무럭무럭 커갔다.
- P12

복사기가 뿜어내는 금빛 섬광이 뺨 위를 스쳐지나갈 때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말들이 토해져나온다. 예술가를 혐오했던 플라톤과 미적지근하게 인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앤디 워홀의 통조림과 메릴린 먼로의 사진도 흘러나온다. 유일무이한 오리지널이냐 복제와 레디메이드의 미학이냐. 예술의 본질에 대한 강의인가보다. 예술이창조냐 모방이나, 예술의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따위의 대학 교양수업으로 들었던 강의와 커리큘럼이 비슷하다. 사람들은 무슨 목적으로 이걸 들으러 오는 걸까. 이런 지식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창문 바로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뻗어 있는데 아직 잎이 돋지 않아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나무의 종류가 아니라 사무실 안에서 외부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가 바로 여기라는 점이다.  - P15

다시 복사를 시작한다. 이곳에서 나의 역할은 어느 정도일까. 복사기토너? 나사 정도의 부품? 문득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딱 봐도, 성실하고 야무져 보이는 여대생이다. 면접장소가 어디냐고 조심조심 토끼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예의 바르게 묻는다. 나는손끝으로 면접 장소를 가리켰다. 총총걸음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싱그럽다. 아까 본 이력서 속 경력이 떠오른다. 여기서 일하기에 너무 모자람이 없는 이력이다.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 하나의 모자람이 되어 그녀는 이곳에서 일하지 못할 것이다. - P36

어쨌든 금요일이다. 그럭저럭 일을 마치고 프로모션으로 구백 원에, 판매 중인 마트 캔맥주를 몇 개 사서 집으로 들어왔다. 오층짜리 빌라의 오 층에 있는 쾌적하고 아담한 내 방 이라고 원주에 계신 부모님은 알고 계신다. 대학 때만 해도 실제 그런 집에 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를 상징하듯 점점 층수가 낮아지더니 어느덧 반지하다. 그래도 손바닥만 한 고시텔은 아니라는 점과, 그나마 아직은 지상과 지하에 걸쳐 있다는 게 희망이라면 희망일까. 부모님은 딸기 농장일을 하시느라 바쁘신 데다 서울에 거의 올라오시지 않는다. 가끔은 엄마가 갑자기 찾아오는 상상도 하지만 다행히 아직 상상은 현실이 된적이 없다.
- P36

아주 짧은 순간 동안, 그 안에 무언가를 해결해야 한다는, 그러니까내 인생의 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를 한입 머금고 목구멍 저아래에서부터 스며나오는 불안과 섞어 삼켜버린다. 연예인이자신의 사업 실패와 바가지 긁는 마누라 얘기를 털어놓으며 눈물 섞인웃음을 선사한다. 창밖으론 점점 화려해져가는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있겠지. 어딘가 높은 곳에 사는 누군가의 눈엔 분명 그런 그림이 보일거다. 각자의 창으로 보이는 장면이 조금씩 다른 것뿐.
시계를 보려고 휴대폰을 들자 검은 액정에 내 얼굴이 비친다. 발그레한 얼굴과 풀린 눈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 웃음은 뇌를 춤추게 한단다.
가짜 웃음이든 진짜 웃음이든 일단 웃기만 하면 뇌는 도파민이니 뭐니하는 좋은 호르몬들을 생산한단다. 생전 만나볼 일 없는 연예인의 사생활이 나를 웃게 한다.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으니 조금쯤은, 적어도하루쯤은 다시 버틸 수 있을 거다. - P37

나는 그의 미련함이 반갑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은 적당히 일을 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분수에 맞게 주어진 시간과 급여에 맞게.
그러므로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는 비정규직인 우리에게 일이라는 건꼼수, 눈치, 요령의 삼 요소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최소한의 노동이라야만 한다. 그래야 헤프게 이용당하지 않고, 당연한 듯 착취당하지 않고, 적당히 치고 빠질 수 있다. 계속 못하다가 갑자기 잘하면 칭찬을 받지만 계속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본전도 못 뽑고 신랄히 욕만 먹는다. 아슬아슬 선을 지키는 수준에서 일하고, 할 수 있는 일도 가끔은 못하는 척 피해 가고, 귀찮더라도 가끔 핀잔을 듣는 상황을 만들어 상사를 우쭐하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 당신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그럭저럭 보통은 해. 가끔 덤벙대기도 하지만 발전 가능성은 있어‘ 정도면충분하다. 그게 자신을 지키며 일하는 방법이다. 특히 대단한 보람이나연봉,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먼 일일수록.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너무 닳고 닳은 인간인 걸까. 아니면 꿈이 없는 사람인 걸까. - P43

김 부장의 사직은 내게 커다란 혼란이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는 내가아니라 김 부장이 느껴야 마땅했다. 그의 인사평가에 그 쪽지가 보탬이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모르긴 해도 규옥조차 그런 생각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이면에는, 그 반동으로 이익을 누린 사람이 나라는 죄책감이숨어 있었다. 다시는 그를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만이 그 죄책감의면죄부였다.
대개의 인간관계가 그렇게 시간 속에 희석된다. 그러나 드물게는 영영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누군가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그랬다. 그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과거의 수치심을 복기시켰다. 내게 분노와 절망을 가르쳐준, 희미해진 기억 속의 아픈 존재가 - P147

그들은 공식적인 인터뷰를하거나 신상을 전면에 공개하는 대신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남겼다. 앵커가 조용히 그것을 읽었다.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우리는 나이 들어서 오늘을 기억할 겁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우리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여전히 비판할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앵커가 수수께끼 같은 말이라며 마지막 두 문장을 읽어나갔다.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가 당신에게 어떤 권위를 부여할지 모르겠지만 잊지 마십시오. 의자는 의자일 뿐입니다."
마지막 문구가 익숙한 메아리처럼 귀를 울렸다. 나만 아는 비밀스런암호가 낯선 곳에서 전송되고 있었다. - P228

연달아 취업에 실패하던 시절, 정말 여기만은 내 자리일 거라고 생각했던 면접을 망치고 나오던 날, 날이 참 밝았었다. 어딜 올려다봐도 뿌연 대기에 가려 해도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눈이 부셔 눈을 뜨기조차힘든 날이었다. 거기다 비 온 흔적도 없는데 바닥은 시야 끝까지 다 젖어 있어 몹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무거운 마음을 실어 터벅터벅 걷는데 갑자기 발밑에 무지개가 떠서걸음을 멈췄다. 어디선가 흘러온 기름이 작은 물웅덩이에 고여 찬란한무지개띠를 만들어낸 거였다. 그런데 모양이며 색이 어찌나 선명한지,
진짜 무지개보다 더 진짜 같았다. 그 묘한 아름다움이 생경해서 기름띠가 물 위에 자리 잡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꼭 비온뒤 청명한 하늘에 뜨는 무지개만 아름다운 건 아니구나. 아무런 사건도등장인물도 없는 그날의 기름 무지개가 내 인생에서 꼽는 몇 장면 중 하나란 건 참 아이러니하다. - P232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 P232

하지만 내가 진짜 나아가고 싶었던 곳까지는 결코 도달할 수가 없었다. 거의 다 왔다 싶으면 갑자기 거대한산이 나타났고 기를 써서 그 산을 넘었더니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는어이없는 여정이었다. 그간 쌓아온 노력이나 나만의 색깔 같은 건 비웃듯 획 내동댕이쳐져서 처음부터, 완전한 0에서, 아무런 힌트도 없이, 그저 다시 시작하라는 못하겠으면 그만두라는 지령이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지곤 했다. 그 지령은 늘 내가 만나볼 수도 없는 누군가에 의해서결정됐다. 그러니까 결국 세상이 내게 내린 명령이었다.
나는 그들을 동정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름 모를 평가자들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었던 귀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거라고 하하하. 하고 위악을 떨며 허세를 부리고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용을 썼다. 굳이 말하자면 그게 내 나름의 반격이었다. 그러나 내가 허세 어린 동정론을 펴든 지쳐서 울든 세상은 내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기도 했다. 이상에 도달하는 건 어려운 것이고, 반복된 실패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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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전까지 아직 몇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발치


이를 빼고 치과를 나서니 스산한 바람이 분다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걸 그동안 몰랐다
아니 통증을 전하는 방식으로 여러 차례
알려왔으나 애써 무시하며 지냈다
이런 일 여러번 겪어본 아내는
바람이 사소하게 불어도 흔들릴 풍치의 나날과
둘 다 연금도 퇴직금도 없이 견뎌야 할 불안한
노후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허전해지는 삶의 한 모서리 사리물고
초가을에서 깊은 가을로 돌아오는 길
옹송그리며 서 있는 과꽃 몇송이가 보인다
이파리 몇개는 벌레 먹고 군데군데 구멍이 났는데도
자줏빛 꽃 곱게 피우고 있는 게 예쁘다

겨울비


아침부터 겨울비 내리고 바람 스산한 날이었다
술자리에 안경을 놓고 가셨던 선생님이
안경을 찾으러 나오셨다가
생태찌개 잘하는 곳으로 가자고 하셨다
선생님은 색 바랜 연두색 양산을 들고 계셨고내 우산은 손잡이가 녹슬어 잘 펴지지 않았다손에 잡히는 것마다 낡고 녹슨 게 많았다
그래도 선생님은 옛날이 좋았다고 하셨다
툭하면 끌려가 얻어맞기도 했지만
그땐 이렇게 찢기고 갈라지지 않았다고 하셨다
가장 큰 목소릴 내던 이가
제일 먼저 배신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
철창 안에서도 두려움만 있는 게 아니라
담요에 엉긴 핏자국보다 끈끈한 어떤 게 있었다고 하셨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겁이 많은 선생님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보다 중도가 좋다고 하시면서
안경을 안 쓰면 자꾸 눈물이 난다고 하시면서낮부터 ‘처음처럼‘만 두 병 세 병 비우셨다

왼쪽에서 보면 가운데 있는 이를
오른쪽에서 보고는 왼쪽에 있다고 몰아붙이는 세월이
다시 오고 추적추적 겨울비는 내리는데
선생님 옛날이야기를 머리만 남은 생태도
우리도 입을 벌리고 웃으며 듣고 있었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옛날은 없는데
주말에는 눈까지 내려 온 나라 얼어붙는다고 하는데

은은함에 대하여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강물도 저녁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우리의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 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

한 송이 꽃


이른 봄에 핀
한 송이 꽃은
하나의 물음표다

당신도 이렇게
피어 있느냐고
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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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즈 레버토프가 열기로 가득한 교육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시 낭송을 위해 블루밍턴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수정/개정의 도취라고 묘사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것은 지금은 너무 쉽게 폐기해버리는 1970년대의 많은 초기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처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었고, 문학적인 것이개인적이었고, 성적인 것이 텍스트적이었고, 페미니스트는 속죄하는 존재였고 기타 등등! (그것들은 진정 계시였고) 이런 계시들을 냉소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로고스 중심적인 권위를 몇및 이론가들이 말했던 ‘기원의 순간‘ 탓으로 잘못 돌리는 위험을 무릅쓴다 해도 인정해야 한다. 그때 그곳에 있었다는 건 축복이었다고. 그리고 나는 그 축복 중 일부가 마치 맛있는 후식처럼 우리와 함께 개종의 여정을 떠났던 최초의 학생들에게 나눠지기를 희망한다. 수전이 언급한 ‘눈맞춤‘은 분명 전기 충격처럼 짜릿했고, 우리 사이를 지나간 계시와도 같은 이해의 네트워크 자체였다. 그것은 아마 레버토프가 마음속에서」를 썼을때,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
이라는 데 우리 모두가 동의했다는 의미다. 말하는 사람을 결코믿지 마라. 페미니스트의 분석을 믿어라.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 P33

많은 이민자들처럼 두 어머니에게도 비밀이 있었다. 수전과나는 가끔 그 의미를 해독해보려고 애썼다. 우리는 여성의 텍스트에 지워진 흔적으로 남아 있는 서브텍스트를 읽으면서, 어떤 의미에서 물에 잠겨 있는 어머니 삶의 플롯을 해독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또 우리는 자신들을이민자 내지 어쨌거나 탐험가 (여성문학이라는 새롭게 떠오르는아틀란티스, 여성의 상상력이 만든 여성의 땅 herland의 지도를만들어보려고 애쓰는 지리학자)로 다시 상상하곤 했다. 분명그런 우쭐한 생각만으로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는 없었다. 특히잉크와 종이로 이루어진 현실의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겁할만한 현실에 맞닥뜨리자, 완성된 타이핑 원고는 상자 두 개를묵직하게 채웠고, 끝도 없는 주석과 악몽같이 복잡한 찾아보기,
표지 문안, 표지 사진이 필요했다. - P38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쓰는 동안 느꼈던 즐거움의 일부는 분명 세대 간 경쟁을우리의 관대한 고결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늘날 말하는 ‘역사적 위치‘라는 행운에서 온 것이다. 우리가 만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함께 작업했을 때는 페미니즘 비평이 존재하지 않아서 학계의 페미니스트 선구자 역시 없었으니 말이다. 우리가느끼는 의기양양함은 기원의 순간에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비롯한다.
분명 그런 흥분이 비평가들을 북돋우어 아프리카계 미국인연구나 게이 레즈비언 연구 같은 다른 정치화된 연구 분야를 개척하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 결과 그들의 계승자들이 그 분야의 변화를 향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비평에서 우리의 계승자들도 그렇게 하기를 희망한다.  - P68

가끔씩 우리는 공격을받아 신경이 곤두서고 때로는 재순환되는 이론들이 만들어내는 혼란스럽거나 엘리트주의적인 전문용어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논쟁이 (이전보다 더 싸우기 좋아하지만, 더 사람들로 붐비며, 흡수력이 더 강하고, 더 노골적으로 모험적인) 페미니즘 비평의 생명력을 압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원의 순간에 대한 향수는 불가피하겠지만, 기원의 복잡성을 단순화하거나 현재의 순간에 자족하기 위해, (더 나쁘게는) 현재의 순간에서 이탈하기 위해 그것을 악용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어느 정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성 문제는 학계 안이나밖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여자들의 성취가 통상적으로 야기하는 반발을 감안하면, 그런 향수는 페미니스트 후계자들을 - P68

축소된 미래에 집어넣을 위험이 있으며, 그런 미래는 앞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할 중요한 지적 노동에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의 후계자나 우리의 모사자가 아니라 우리의 동맹자인 젊은페미니스트들은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벅찬 임무에 직면해 있는데, 1970년대에 족적을 남긴 우리가 그들과 함께 그 임무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 일어나는 냉소주의에도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서 우리가 느끼는 ‘강렬한 즐거움‘은 (19세기와 그 이후」에서 예이츠가 의지한) ‘위대한 노래‘,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우리가의지한 노래와 책들이(오스틴과 브론테 자매, 메리 셸리와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조지 엘리엇과 에밀리 디킨슨의 현명하고 박식한 서정주의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 그 노래들이우리 중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던 운율로 울리리라는 것을 확신시켜준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년이 된 스물한 번째생일에 맞추어 예일대학 출판사에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재출간한 것이 특히 기쁘다.
(2000) - P69

펜은 음경의 은유일까? 제러드 맨리 홉킨스는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1886년 친구 R. W. 딕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홉킨스는 자기 시론의 중요한 특징을 고백했다. 예술가가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자질은 대가다운 기술이다. 이 기술은 남자에게 타고난 재능이랄 수 있어서 이 특징이 특히 남자와 여자를구분해준다. 운문으로든 다른 어떤 형식으로든 종이 위에 생각을 낳는 것은 남자다.‘ 이에 덧붙여 홉킨스는 ‘좀 더 깊이 들어가자면 내가 말하는 ‘대가다움‘이란 놀랍게도 정신이 아니라 대가의 자질을 지닌 삶의 성숙기다. 창조적 재능은 남성의 자질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비유적으로물론이요, 실제로도 문학적 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펜은 어떤 의미에서 (비유적 의미 이상으로) 음경이다. - P74

괴짜에다 유명하진 않았지만, 홉킨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남성으로서 핵심 개념을 말하고 있다. 물론 신이 세상을만든 아버지이듯 작가는 자기 텍스트의 ‘아버지‘라는 가부장적사고는 서구 문학 세계 전반에 퍼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듯이 이 은유는 작가, 신, 가부장이라는말과 동일시되는 ‘저자‘라는 단어에 내재되어 있다. ‘저자‘라는단어에 대한 사이드의 세심한 고찰은 이 논의와 관련해 상당히많은 내용을 요약하고 있기에 여기에 전부 인용할 가치가 있다. - P74

여기에서 자아는 처녀 페이지라는 ‘순수한 공간‘에 팬이라는 음경을 대면서 끝없이 소진된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대대로 시인들은 자신의 관계를묘사할 때 가부장적 ‘가족 로맨스‘에서 유래한 어휘를 사용해왔다. 해럴드 블룸이 지적했듯이, ‘호메로스의 아들들로부터 벤존슨의 아들들에 이르기까지 시적 영향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차원에서 묘사되어왔다. 문학사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격렬한투쟁은 ‘강력한 대립자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투쟁, 교차로에서부딪친 라이우스와 오이디푸스의 싸움‘이었다.  - P78

펀치가 (빈정대는 어조이기는 하지만) 절망적인 심정으로 남성의 요구와 의도를 수용한다는 사실은 문화적 구속의 강압적 힘과 더불어 그 힘을 구현한 문학작품의 강압적 힘까지 뚜렷이드러내준다. 왜냐하면 학식 있는 여성들은 ‘멍청해지라고 요구받고 그렇게 키워진‘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배우기 때문이다. 리오 베르사니가 말하듯, ‘글은 단순히 정체성 묘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정체성, 나아가 육체적 정체성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 우리는 문학에 몰입함으로써 일어나는 일종의 존재의 용해, 혹은 적어도 존재의 유연성을 고려해야 한다. ‘한 세기 반 전에 제인 오스틴은 『설득에서 앤 엘리엇과 대화하는 하빌 대령을 통해 비슷한 이야 - P85

기를 했다. 여성의 변덕에 대해서 논쟁하던 중 앤의 불같은 반밖에 부딪히자 대령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역사가 당신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이야기, 산문, 운문 전부가요. [・・・] 나는 순식간에 내 의견을 지지해주는 인용문을 쉰 개는 댈 수 있습니다.
여성의 변덕에 대해 말하지 않은 책은 내 평생 본 적이 없답니다. (2부 11장) 이 말에 앤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펜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고 대꾸한다. 하빌의 말과 관련해서 보면 그녀의 대꾸는 여성이 저자의 권위로부터 배제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남성의 권위에 종속되어왔음을 (그리고 권위의 대상이 되어왔음을 암시한다. 초서의 ‘교활한 바스 여장부‘를 따라 앤은
‘누가 사자를 그렸는가, 도대체 그자가 누구인지 나에게 말해달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이솝 우화』에서 사람이 사자를 죽이는 그림을 보여주자 사자는 누가 그 그림을 그렸는지 묻는다.
만약 사자가 그렸다면 그 반대를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바스여장부처럼 앤도 문학적 권위와 가부장적 권위를 혼동하는 우리 문화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저 수사학적 질문에 답한다. - P86

오스틴의 소설에 나오는 앤 엘리엇과 하빌 대령의 논쟁도 이와 관련이 있다. 두 인물이 벌이는 논쟁의 핵심이 여성의 ‘변덕‘
이라는 것, 그러니까 여성이 작가/소유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거나 고정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는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 작가들자신이 ‘괴물 같은‘ 자율성을 지닌 여성 인물을 만들어냈으면서도 작가/소유자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꾸짖는 것은 문학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여성 입장에서 보면 ‘변덕‘은 고무적인성격이자 덕성이다. (이중성을 수반하긴 해도) 변덕은 여성이그 자신을 인격으로 창조할 능력, 더 나아가 거울/텍스트 반대쪽에 갇혀 있는 여성에게 다가가 그녀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줄 능력까지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 P94

다시 말해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 기술은 천사의 특성이자, 좀더 세속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숙녀에게 적절한 행위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최고의 교사인 세라 엘리스 부인은 1844년에 여성의 도덕과 예의범절에 대해 말하기를, 숙녀는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는 존경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여성은 ‘집 안의 다른 어떤 사람보다 일에 적게 참여하니‘ 올바른 여성이라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여성은 자신의 노력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말없이 헌신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악마를 피하듯 피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존 러스킨은 1865년에 여성의 ‘힘은 지배를 위한 것도 전쟁을 위한 것도 아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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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가는 높은 산을 오르면서 더욱 경험이 풍부하고 강해집니다. 때로 극심한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다시 산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들이 풍부한 경험을 쌓고 강해지기 위해 산에 가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들은 산에서 겪는경험을 사랑할 뿐입니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왜 산을 오르느냐는 질문에 "거기 산이 있으니까"로 답했는데요. 이 단순한답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은 그것이 산에 오르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 때문일 겁니다. 산 자체가 목적이고, 거기서 겪는 경험, 자아의 변화는 그들에게는 부수적인 결과에 불과할 겁니다.
소설가니까,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제 답도 힐러리 경만큼 단순합니다. - P139

"거기 소설이 있으니까" 읽는 것입니다. 40년 넘게 소설을 읽어오면서 제 자아의 많은 부분이 해체되고 재구성되었겠고, 타인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겠고, 저 자신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만 애초에 그런 목적을 위해 소설을 집어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 근육량을 늘리고 건강해지기위해 헬스클럽에 가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자‘고 결심하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습니다. 소설은 소설이 가진 매력 때문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과 싸우며 읽어나가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 P140

독서의 목적따위는 그에 비하면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서의 목적 같은 것으로 설명해버리기에는 소설을 읽으며 독자가겪는 경험의 깊이와 폭이 너무 넓고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개개의 독자가 특정한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변화를 겪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소설을 하나의 도구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설이라는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한때 인간은 자연이 합목적적으로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태양은 식물을 성장시키기 위해 아침마다 떠오르는 것이고 과일은 따먹으라고 있는 것이고 사슴은 - P140

잡아먹히라고 들판을 뛰어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인간중심주의는 끝없이 붕괴되어왔습니다.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온갖 동물이 인간에게 잡아먹히도록 창조된 것도 아니었으며, 인간과 원숭이는 별반 차이가 없는 종이었습니다. 자연이 인간의 필요를 위해 창조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소설도 인간의 어떤 필요를 위해 쓰이고 읽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 않아도 산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어떤 소설은 우리가 읽든 말든 저 어딘가에 엄연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소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접근하고, 그것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고,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어떤 분명한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 변할 뿐입니다. 강연 초반에 인용했던 오르한 파묵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서 오늘의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소설은 두번째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 P141

도서관이 우주라는 말은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주 안의 사물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 즉 거시 세계를 구성하는 중력과 미시 세계를 구성하는 전자기력, 그리고 극미 세계를 구성하는강력과 약력이 없다면 우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힘들은 우주 안의 모든 존재가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면서서로 영향을 주고받도록 만듭니다. 책의 우주도 이와 비슷합니다. 책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개개의 책은 다른 책이 가진 여러 힘의 작용 속에서 탄생하고, 그후로는 다른 책에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도서관은 영향을 주고받는 정도가큰 책들끼리 분류하여 모아놓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분야의 책들이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받을 테니까 서양 철학 책은 서양철학 책끼리, 프랑스 소설은 프랑스 소설끼리 모아놓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분류가 다른 책들 사이에 힘의 작용이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대체로 약할 뿐입니다. - P183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특히나 이런 작업, ‘정전 다시 쓰기‘가많았습니다. 이렇게 대놓고 ‘다시 쓰기‘를 표방하든 그렇지 않든, 여전히 전 세계의 작가들이 무언가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보르헤스의 ‘도서관‘, 책의 우주는 점점 더커져갑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땅을 사서 집을 짓는 것과는좀 다릅니다. 소설 쓰기란 남의 것을 잠깐 빌려왔다가 그것을다시 책의 우주에 되돌려주는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소설을 읽는 것은 바로 이 광대한 책의 우주를 탐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처럼 하나의책을 통해 그 우주에 들어갑니다. 책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문이자 다른 책으로 연결해주는 징검다리입니다. 소설과 소설,
이야기와 이야기, 책과 책 사이의 연결을 찾아내는 것은 독자로서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야기에 흠뻑 빠 - P208

져들면서도, 그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의 연결점을 찾아나가고,
그런 경험을 쌓아나가면서,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소설과 소설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독자는 자기만의 책의 우주, 그 지도를 조금씩 완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섯 날에 걸쳐 그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을 함께 탐색해보았습니다. 호메로스와 소포클레스로부터 시작해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 미즈무라 미나에나 존 쿳시의 작업까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훌륭한 작가들이지만 책의 우주는 이보다 훨씬 더 광대하다는 것, 우리의 유한한 삶보다 오래 영속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로부터 시작해 연결점들을 찾아내고, 더 근사한 별자리를 발견하면서 책의우주를 확장해갈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 P209

사실 독자로 산다는 것에 현실적 보상 같은 것은 없을지도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짧은 생물학적 생애를 넘어 영원히존재하는 우주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 잠시나마 그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가장 큰 보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별들이 수백 수천 년 전에보내온 빛이 이제야 우리의 망막에 와닿듯이 책 역시 시공을초월해 우리에게 도달하고 영향을 미칩니다. 밀란 쿤데라의 통찰처럼, 비록 우리 현대인의 시야가 마치 요제프 K의 그것처럼좁아져 있고 모두가 세속적 이해와 단기적 전망으로 아웅다웅 - P209

하며 살아가고, 세계가 돈키호테와 같은 모험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에게는 이 좁은 전망을 극적으로 확장해줄 마법의 문이 있습니다. 바로 ‘이야기의 바다‘로 뛰어들어 ‘책의 우주‘와 접속하는 것입니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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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고전이 진부할 것이라 지레짐작합니다. 그러나그렇지 않습니다. 오래 살아남은 고전은 처음부터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웠는데 지금 읽어도 새롭게 다가옵니다.다시말해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쓰인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전이라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지나도 낡거나 진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들은 살아남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후대로 전승되었을 겁니다. - P16

그러나 망켈처럼 범죄소설의 정의를 폭넓게 보고자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살인이 일어나고, 수사가 시작되고, 범인을 찾아내는 모든 이야기가 범죄소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숙부의 사악한 범죄를 추적하는 햄릿도 그런 의미에서는 탐정이 됩니다.
망켈은 『메데이아를 예로 들었지만, 많은 이가 범죄소설의 기원으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거론합니다. 데이비드 미킥스 같은 비평가는 소포클레스의 이 희곡은 독특하고 아주 아이러니한 탐정소설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는 노련한 탐정으로 자처하며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뒤를 밟고, 그 결과 자신의 몰락에 일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탐정이 수사를 하다보니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일종의 탐정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이디푸스 왕』 역시 읽지 않았으면서도 그 내용을 다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명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을뿐 아니라 이야기의 줄거리도 여러 경로로 접한 바 있었으니까요. - P20

비극의 주인공들은 항상 너무 늦은 순간에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곤 하지만, 저는 독서를 통해 커다란 위험 없이 무지와 오만을 발견하곤했습니다. 특히 고전이란, 이탈로 칼비노의 정의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읽지 않았으면서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제 오만은 오이디푸스의 자신감을 닮았습니다.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겁니다.
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 - P29

다.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됩니다.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비평가해럴드 블룸은「교양인의 책 읽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 P31

그렇다면 『돈키호테』와 『마담 보바리』는 소설이나 이야기의위험을 경고하는 작품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뇌과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뇌는 현실과 환상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떤 현실은 아련한 꿈처럼 기억되고, 어떤 이야기는 마치 직접 겪은 일처럼 생생하기만 합니다. 이야기와 비슷한 것으로는 꿈이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야기와 다릅니다. 어제 꾼 꿈을오늘 정확히 이어서 꾸지는 못하니까요. 그런데 소설은 꿈만큼이나 생생한데 계속 이어집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마루에서 책을 읽고있었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어떤 책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는 그 책의 내용에 흠뻑 빠져있었습니다. 고아가 된 아이가 온갖 시련을 겪고 있었을 수도 있고, - P64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이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책을 펼치면 순식간에 ‘지금, 여기‘와는전혀 다른 세계로 휙 빨려들어간다는 게 마치 무슨 마법처럼느껴져서 신기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 어머니가제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저는 그 흥미로운 세계로 들려오는현실 세계의 목소리, 즉 우리 어머니의 목소리가 굉장히 낯설고 불쾌하게 느껴졌고, 내 소중한 개인적 세계가 침해받는 것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덮고 일어나 어머니에게 다가갔습니다. 어머니는 채소나 두부 같은 것을 사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놀라웠던것은 어머니는 제가 방금 전까지 겪은 일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 P65

제가 어떤 세계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격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저는 그냥 누워서 소설책을 보며 뒹굴거리는 아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가게에 가서 식재료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읽던 그 책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접어두었던 책장을 펼치자마자 저는 콩나물과 두부의 세계에서 바로 그 이상한 세계로 점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잊고 정신없이 책을 읽기시작했습니다. 그 순간의 저는 프랑스의 작가인 다니엘페나크가 소설처럼』에서 제시한 이른바 또다른 방식의 ‘보바리즘‘을 - P65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쥘 드 고티에의 보바리슴이 에마의 증상에 착목했다면 다니엘 페나크의 보바리슴은 독자의 정신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보바리습이란 " ‘오로지 감각만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충족감‘에 다름아니다. 즉 상상이 극에 달해 온 신경이 떨려오고 심장이 달아오르며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출되는 가운데 주인공의 세계에 완전 동화되어, 어처구니없게도 대뇌마저 (잠시나마) 일상과 소설의 세계를 혼동하기에 이르는"현상, 즉 소설을 읽는 독자가 겪는 정신적 변화를말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의 제가 겪은 일은 그러니까 저 혼자만의 독특한 경험이 아니라 에마 보바리 이후로 수많은 독자들이 경험한 일의 재현이었던 것입니다. - P66

그후로도 저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독서를 통해 셀 수 없이 많은 인물을 만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도시를 여행했으며, 평생 한 번도 겪어볼 일이 없는 사건들에 연루되었습니다. 그 기억과 경험은 고스란히 제 안에 남아 있고 그 세계는 제가 직접 경험한 현실보다 훨씬 더 크고 풍부합니다. 이 세계가 모두 가짜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책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저라는 인간의 정신 안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유일무이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환상에 빠져 현실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 P66

요? 인간이 그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현실에 너무 집착해 자기 내면의 정신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는 아닐까요?
돈키호테』와 『마담 보바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때문에 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미치광이 돈키호테와 광기 어린 사랑으로 자신을 망쳐버린 에마 보바리는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그들에게서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야기 속의 세계가 계속되기를 바라고,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우리가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물들에 매료되고 자기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며 그들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우리의 의식에 침투해 우리의 일부를 돈키호테와 에마 보바리로 바꾸어놓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읽은 소설은 우리가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한번 읽어버린 소설은 더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 P67

우리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소박하게 또는 성찰하면서 의도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작업입니다.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두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소설에는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부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요? 소설을 만드는 모든 것이 그 재료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중심부는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따라 좇아간 소설의 표면과는 멀리 떨어진 배후 너머에 있어서 보이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거의 계속 움직여서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 중심부의 징후는 사방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설의 모든세부 사항, 즉 거대한 풍경의 표면에서 마주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설을 - P83

읽을 때면 마치 풍경을 걸어가며 모든 잎사귀를, 모든 부러진 가지를 어떤 신호처럼 여기고 의심하며 주의깊게 살피는사냥꾼처럼 행동합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난 모든 새로운 단어, 사물, 캐릭터, 주인공, 대화, 묘사, 세부 사항, 소설의 언어적·형식적 특징, 이야기의 예상 밖 진행 등이 표면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암시한다고 느끼면서 읽어나갑니다.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고 믿으면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세부 사항이 중요할 수 있고, 소설 표면에 있는 모든 것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소설은 죄책감과 피해망상 그리고 불안감을 향해 열려 있는 서사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심오한 감정 또는 어떤 삼차원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도 이 감춰진 중심부의 존재 때문입니다.
- P86

소설을 서사시, 중세의 메스네비, 장시 그리고 전통적인모험소설과 구분짓는 것은 바로 이 중심부입니다. 물론 소설은 등장인물이 더 복잡하다는 점에서도 다릅니다. 소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파고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은 배후 어딘가에 중심부가 있고, 우리가그것을 찾길 희망하며 소설을 읽기 때문에 힘을 발휘합니다.
소설이 우리에게 삶의 평범한 세부 사항, 환상, 일상의 습관과 사물을 보여줄수록, 우리는 호기심을 갖고 경탄에 사로잡 - P86

히 읽어나가게 됩니다. 이것들이 배후에 숨어 있는 어떤 의미, 어떤 의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대하고 광활한 풍경 속 모든 세부적인 것들, 모든 잎사귀와 꽃이관심을 끌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뒤에 의미가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이라고만 번역되어 있지만 여기서 파묵이 지칭한 것은 돈키호테』 이후의 현대소설입니다. 그는 ‘소설‘을 서사시나 모험소설과 구분해 쓰고 있습니다)에 감춰진 중심부가 있고, 바로 그것 때문에 독자는 소설 속의 모든 요소를 마치 주의깊은 사냥꾼처럼 살피게 된다는 파묵의 견해는 탁월합니다. 현실의 자연은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강가의 오리나무와 버드나무는 그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의 눈을 통해 보여진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독자는 그뒤에 의미가 감춰져 있다고 믿기 때문에 허투루 보아 넘기지 않습니다. - P87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업들은 우리를 소비자라 부릅니다. 구글 같은 기업은 우리를 빅데이터의 한 점으로 봅니다. 정당은 우리를 유권자로 여깁니다. 우리의 개성은 몰각되고 행위만이 의미 있습니다. 우리가 더이상 물건을 사지 않고, 인터넷에 접속하지도 않으며,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나만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 P104

현실의 우주가 빛나는 별과 행성, 블랙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크레페케이크를 닮은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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