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영화과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2001년 제6회 <씨네21> 영화평론상을 받았고, 2006년 제3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에서 순간을 믿어요>로 시나리오 시놉시스 부문을 수상했다. <인간적으로 정이 안가는 인간> <너의 의미> 등 다수의 단편영화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첫 장편소설 《아몬드 제1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두 번째 장편소설 《서른의 반격>으로 제5회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내가 아는 건 그 정도다. 그전에 벌어진 피, 광장, 투쟁의 흔적은 사진과 다큐에서나 본 겪지 못한 옛날 얘기일 뿐이다. 세상은 몇 발자국앞으로 나아갔지만 그 몇 발자국이 전부인 것 같다. 여전히 부당함이 우위를 점령하고 있고 당연히 보통 사람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대신 대세에 머리를 조아려 수긍하면서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나는 남들과 달리 몹시 특별한 사람이라고, 그러니 제발 나를 좀 주목해달라고 온몸으로 외쳐야 하는 세상이 왔다. 나는 하필이면 이 시대에청춘의 끝자락을 맞이한 숱한 여럿 중 하나이다.
물론 내게도 시작이 있었다. 대부분의 탄생이 그러하듯, 내 삶의 시작도 누군가에겐 두고두고 얘기하는 특별한 추억이다. 내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엄마는 전국이 호돌이 마크로 도배되고 굴렁쇠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던 더웠던 여름날을 이야기하곤 했다. 개발도상국에서 펼쳐진 올림픽에 세계의 관심이 쏠렸고 전국의 국민들은, 여덟 살아이가 굴렁쇠를 구르며 드넓은 운동장을 과연 실수 없이 가로지를 수있을 것인지를 두 주먹을 꽉 쥔 채 지켜봤다. - P8

학창 시절 내내 그런 일들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가나다가 ABC로 바뀌는 정도의 변화가 있었을 뿐, 주변엔 어디에나 지혜가 산적해 있었다. 중학교 때인가는 심지어 한 반에 지혜가 다섯 명이었던 적도 있는데,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큰 지혜, 작은 지혜, 하얀 지혜, 까만 지혜, 통통한 지혜 등, 이름보다 형용사가 구분의 기준이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참 색깔이 없는 ‘작은 지혜‘였는데 특별히 내가작아서라기보단, 큰 지혜가 월등히 컸고 그에 비해 나는 덜 컸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전국의 지혜들은 역시 전국에 만만찮게 포진해 있는 민지, 은지, 은정, 혜진이 들과, 양념처럼 한 반에 한 명쯤은 포진한 보람, 아름, 슬기 들과 어울려 무럭무럭 커갔다.
- P12

복사기가 뿜어내는 금빛 섬광이 뺨 위를 스쳐지나갈 때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말들이 토해져나온다. 예술가를 혐오했던 플라톤과 미적지근하게 인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앤디 워홀의 통조림과 메릴린 먼로의 사진도 흘러나온다. 유일무이한 오리지널이냐 복제와 레디메이드의 미학이냐. 예술의 본질에 대한 강의인가보다. 예술이창조냐 모방이나, 예술의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따위의 대학 교양수업으로 들었던 강의와 커리큘럼이 비슷하다. 사람들은 무슨 목적으로 이걸 들으러 오는 걸까. 이런 지식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창문 바로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뻗어 있는데 아직 잎이 돋지 않아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나무의 종류가 아니라 사무실 안에서 외부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가 바로 여기라는 점이다.  - P15

다시 복사를 시작한다. 이곳에서 나의 역할은 어느 정도일까. 복사기토너? 나사 정도의 부품? 문득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딱 봐도, 성실하고 야무져 보이는 여대생이다. 면접장소가 어디냐고 조심조심 토끼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예의 바르게 묻는다. 나는손끝으로 면접 장소를 가리켰다. 총총걸음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싱그럽다. 아까 본 이력서 속 경력이 떠오른다. 여기서 일하기에 너무 모자람이 없는 이력이다.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 하나의 모자람이 되어 그녀는 이곳에서 일하지 못할 것이다. - P36

어쨌든 금요일이다. 그럭저럭 일을 마치고 프로모션으로 구백 원에, 판매 중인 마트 캔맥주를 몇 개 사서 집으로 들어왔다. 오층짜리 빌라의 오 층에 있는 쾌적하고 아담한 내 방 이라고 원주에 계신 부모님은 알고 계신다. 대학 때만 해도 실제 그런 집에 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를 상징하듯 점점 층수가 낮아지더니 어느덧 반지하다. 그래도 손바닥만 한 고시텔은 아니라는 점과, 그나마 아직은 지상과 지하에 걸쳐 있다는 게 희망이라면 희망일까. 부모님은 딸기 농장일을 하시느라 바쁘신 데다 서울에 거의 올라오시지 않는다. 가끔은 엄마가 갑자기 찾아오는 상상도 하지만 다행히 아직 상상은 현실이 된적이 없다.
- P36

아주 짧은 순간 동안, 그 안에 무언가를 해결해야 한다는, 그러니까내 인생의 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를 한입 머금고 목구멍 저아래에서부터 스며나오는 불안과 섞어 삼켜버린다. 연예인이자신의 사업 실패와 바가지 긁는 마누라 얘기를 털어놓으며 눈물 섞인웃음을 선사한다. 창밖으론 점점 화려해져가는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있겠지. 어딘가 높은 곳에 사는 누군가의 눈엔 분명 그런 그림이 보일거다. 각자의 창으로 보이는 장면이 조금씩 다른 것뿐.
시계를 보려고 휴대폰을 들자 검은 액정에 내 얼굴이 비친다. 발그레한 얼굴과 풀린 눈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 웃음은 뇌를 춤추게 한단다.
가짜 웃음이든 진짜 웃음이든 일단 웃기만 하면 뇌는 도파민이니 뭐니하는 좋은 호르몬들을 생산한단다. 생전 만나볼 일 없는 연예인의 사생활이 나를 웃게 한다.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으니 조금쯤은, 적어도하루쯤은 다시 버틸 수 있을 거다. - P37

나는 그의 미련함이 반갑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은 적당히 일을 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분수에 맞게 주어진 시간과 급여에 맞게.
그러므로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는 비정규직인 우리에게 일이라는 건꼼수, 눈치, 요령의 삼 요소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최소한의 노동이라야만 한다. 그래야 헤프게 이용당하지 않고, 당연한 듯 착취당하지 않고, 적당히 치고 빠질 수 있다. 계속 못하다가 갑자기 잘하면 칭찬을 받지만 계속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본전도 못 뽑고 신랄히 욕만 먹는다. 아슬아슬 선을 지키는 수준에서 일하고, 할 수 있는 일도 가끔은 못하는 척 피해 가고, 귀찮더라도 가끔 핀잔을 듣는 상황을 만들어 상사를 우쭐하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 당신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그럭저럭 보통은 해. 가끔 덤벙대기도 하지만 발전 가능성은 있어‘ 정도면충분하다. 그게 자신을 지키며 일하는 방법이다. 특히 대단한 보람이나연봉,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먼 일일수록.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너무 닳고 닳은 인간인 걸까. 아니면 꿈이 없는 사람인 걸까. - P43

김 부장의 사직은 내게 커다란 혼란이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는 내가아니라 김 부장이 느껴야 마땅했다. 그의 인사평가에 그 쪽지가 보탬이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모르긴 해도 규옥조차 그런 생각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이면에는, 그 반동으로 이익을 누린 사람이 나라는 죄책감이숨어 있었다. 다시는 그를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만이 그 죄책감의면죄부였다.
대개의 인간관계가 그렇게 시간 속에 희석된다. 그러나 드물게는 영영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누군가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그랬다. 그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과거의 수치심을 복기시켰다. 내게 분노와 절망을 가르쳐준, 희미해진 기억 속의 아픈 존재가 - P147

그들은 공식적인 인터뷰를하거나 신상을 전면에 공개하는 대신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남겼다. 앵커가 조용히 그것을 읽었다.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우리는 나이 들어서 오늘을 기억할 겁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우리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여전히 비판할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앵커가 수수께끼 같은 말이라며 마지막 두 문장을 읽어나갔다.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가 당신에게 어떤 권위를 부여할지 모르겠지만 잊지 마십시오. 의자는 의자일 뿐입니다."
마지막 문구가 익숙한 메아리처럼 귀를 울렸다. 나만 아는 비밀스런암호가 낯선 곳에서 전송되고 있었다. - P228

연달아 취업에 실패하던 시절, 정말 여기만은 내 자리일 거라고 생각했던 면접을 망치고 나오던 날, 날이 참 밝았었다. 어딜 올려다봐도 뿌연 대기에 가려 해도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눈이 부셔 눈을 뜨기조차힘든 날이었다. 거기다 비 온 흔적도 없는데 바닥은 시야 끝까지 다 젖어 있어 몹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무거운 마음을 실어 터벅터벅 걷는데 갑자기 발밑에 무지개가 떠서걸음을 멈췄다. 어디선가 흘러온 기름이 작은 물웅덩이에 고여 찬란한무지개띠를 만들어낸 거였다. 그런데 모양이며 색이 어찌나 선명한지,
진짜 무지개보다 더 진짜 같았다. 그 묘한 아름다움이 생경해서 기름띠가 물 위에 자리 잡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꼭 비온뒤 청명한 하늘에 뜨는 무지개만 아름다운 건 아니구나. 아무런 사건도등장인물도 없는 그날의 기름 무지개가 내 인생에서 꼽는 몇 장면 중 하나란 건 참 아이러니하다. - P232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 P232

하지만 내가 진짜 나아가고 싶었던 곳까지는 결코 도달할 수가 없었다. 거의 다 왔다 싶으면 갑자기 거대한산이 나타났고 기를 써서 그 산을 넘었더니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는어이없는 여정이었다. 그간 쌓아온 노력이나 나만의 색깔 같은 건 비웃듯 획 내동댕이쳐져서 처음부터, 완전한 0에서, 아무런 힌트도 없이, 그저 다시 시작하라는 못하겠으면 그만두라는 지령이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지곤 했다. 그 지령은 늘 내가 만나볼 수도 없는 누군가에 의해서결정됐다. 그러니까 결국 세상이 내게 내린 명령이었다.
나는 그들을 동정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름 모를 평가자들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었던 귀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거라고 하하하. 하고 위악을 떨며 허세를 부리고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용을 썼다. 굳이 말하자면 그게 내 나름의 반격이었다. 그러나 내가 허세 어린 동정론을 펴든 지쳐서 울든 세상은 내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기도 했다. 이상에 도달하는 건 어려운 것이고, 반복된 실패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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