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1980년대는 문학의 입장에서 매우 행복한 시대였다. 한 작가가 쓰는 한 줄의 글은 그를 감옥에 들어가게 할 수도 있었고 그의 손톱을 뽑게 할 수도 있었으며, 때로는 그의 목숨을 위협했다. 이 정황은 물론 처참한 것이었지만, 작가는 자신의 글이 그가 내내 희망하던 세계의 건설에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이바지하고있으며, 인간의 미래를 위한 기획에 벌써 깊숙이 개입하고 있음을거기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고 그는 헛일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비단 민중과 민족의 기치 아래 전선을 형성했던 작가들에게만 해당되는말은 아니다. 순수주의자라고 지칭되었건 모더니스트라고 분류되었건 간에 문학 그 자체의 가치를 받들었던 작가들도 역사에 대해 - P214
서뿐만 아니라 역사를 초월한 근본적이고 가장 과격한 반항자들이라고 자신들을 규정할 때, 자신들의 글쓰기에 대한 이 가치부여의원기를 바로 이 거친 현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는 없었기때문이다. 또한 이는 작가들과 시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인 감시자이고 또한 모든 사람이 그감시의 잠재적인 희생자인 정황에서, 한 시민이 소설 한 권을 사고시집 한 권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아직 이르지 못한 사회와 경험하지 못한 행복에 대한 신조의 표명이었으며, 누군가 제 손톱을 뽑으려 할 때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일이기도했다. 작가와 독자의 유대는 강했고, 글쓰기와 독서 상호간의 기대지평은 그만큼 넓었다. - P215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러나라고 말하자) 감춰진 것이건 비어 있는 것이건, 인간 의식이 책임져야 할 몫인 1인치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해체론자들의 전망에 따르면 주체가 소멸됨으로써 비어 있는 이 자리는 타자의 자리이며, 무의식의 자리이며, 기호 대신 말의 자리이며, 제도 대신 자연의 자리이며, 문화적으로주변인의 자리이며, 정치경제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자리이다. 물 - P220
론 이것은 그 논자들의 주장일뿐 실제상황은 아니다. 실제로 그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를 해체한다고 말하는 그 해체의 주체들이다. 이 해체 작업이 벌써 어떻게 거대한 장치가 되고, 얼마나견고한 제도의 성이 되어 있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벌써 관행태가 되어 있다. (문학이 허위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바로 이 관행태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문제는 바르트가 아니라 바르트 이후의 바르트들이며, 푸코가 아니라 푸코 이후의 푸코들이며, 데리다가 아니라 데리다 이후의 데리다들이다. 이 ‘이후의 들‘들은인간의 분별력에 대한 신뢰를 비웃는 신자유주의적 기술파시즘과공고하게 결속되어, 날마다 이미지-환상을 생산하고, 모든 인간적시간을 토막냄으로써 과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끊어놓는다. - P221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떤 반해체의 작업을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저 해체의 작업과 제도 속에서 그 최초의 의도와 이후의 장치들을 구분해내는 일로부터 우선 시작할 것이다. 관행의피안을 상정한다는 것, 그것은 문학이 늘 하던 일이다. 이 일은 매우 느리게 진행될 것이고, 독서 대중의 시선을 끌기도 어려울 것이다. 문학은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타자가 될 것이다. 그 성찰과 반성의 노력으로 모든 속도와 맹목의 제동장치로 기능한다는 것, 그것은 문학이 늘 하던 일이다. 이 기술파시즘의 시대에, 이 이미지-환상의 시대에, 문학은 늘 하던 일을 영예 없이 그렇게 계속함으로써자기 존립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 P221
나는 시들어 떨어진 꽃에서 어느 아기 어머니를 보았다. 그 꺼칠한 길에 이상한 해무리가 떠 있었다.
몸은 괴로움을 영양화하는 공장이었으나 분명한 생각의 경치이며 실은 비를 맞고 있었다, 책임 없는 아름다움을 누구나 감상하듯이. - P225
힘드는 목숨일 바에야 흠 없는 말씀은 자동기가 낳은 상품 정도라고나 할까. 다리 밑에서 더러운 사람들은 정을 나눈다.
가을 나무는 어느 아버지, 나는 감동을 받았다. 나라 없는 포로의 행렬이 다시 떠난 뒤에도....... - P226
「어느 날」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품위 있는 말과 자연스런 리듬, 잘 만들어진 은유와 지혜로운 결구는 아무리 고통스런 삶이라도하나의 풍경으로 보이게 하겠지만, 이 흠 없는 말씀이 "다리 밑에서" 나누는 "더러운 사람들의 정만 하겠는가. "나라 없는 포로의 행렬은 바람에 불려가는 낙엽들이겠지만, 또한 만물의 아버지인 시인이 안아 들여 합당한 표현을 만들어주어야 할 타자들이기도 하다. 주지주의와는 관계없이, 선비였던 구용 시인은 시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산문시들을 빌려 언어적 측면에서건 사상적 측면에서건 온갖 모색을 다 하면서도, 정작 운문의 형태를 갖춘시에서는 가능한 한 온건하게 말하려고 애쓴다. 식민지 시대에 뒤 - P226
이어 전란을 겪었던 나라에서 아버지 되기의 책임이 그렇게 막중했던 것이다. 구용 시인이 이 시를 쓴 것은 1966년이자 내 나이 스물한 살 때의 일이다. 나는 아버지가 아니었으며, 언젠가는 아버지가 되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어느 날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가 하릴없이 누워 있는 나에게 말했다. "남섭아, 바늘에 실 좀 끼워다오." 남섭은 내 이름이 아니다. 당시의 내나이가 되기 전에 비참한 정황에서 죽었던, 어머니의 동생이자 내외삼촌의 이름이다. 깊은 슬픔을 밑에 깔고 어머니가 누리는 잔잔한 평화 속에서 죽은 삼촌과 내가 뒤섞이는 이 인접성, 나는 그것을 어머니의 환유라고 부른다. 어머니는 어느 날 아버지 대신 나를 부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순수하고 완벽해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환유는 결여된은유다. 어머니의 결여와 세상의 결여가 내 결여 속에 들어옴으로써 나는 아버지가 된다. 어디엔가 정신적인 우주가 있다면 그것이발휘될 수 있는 터전은 나의 결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 P227
한용운이 『님의 침묵을 쓸 때, 그에게는 분명히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이 있었으며 높은 지혜의 체득을 향한 한 선사의 희구가 있었다. 시집에서 줄곧 님을 그리워하는 한 여자의 목소리를 빌리고있던 그에게 또한 한 연인의 열정이 없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님의 침묵의 ‘작가적 의도‘에 관해 말하려 한다면 이 염원과 희구와열정의 어느 한쪽도 제쳐놓을 수 없다. 시인이 애국시를 쓰려 했을 때도 그는 여전히 연인이었으며, 오도시를 쓰는 선사로서도 민 - P231
족의 암담한 현실에서 초탈할 수 없었으며, 연애시의 어조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그는 무애의 정신적 경지를 구하는 수도자로 남아 있었다. 시인이 무엇을 의도했건, 이 마음속의 다른 힘들이 끼어 들어와 『님의 침묵』을 그 의도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 시집에는 타고르의 독서에서 얻은 새로운 시에 대한 개념이 있고, 불경의 강설을 통해 익숙해진 문체가있으며, 근대문물에 대한 시인 나름의 이해가 있으며, 당시의 우리말이 놓인 형편이 있고, 시인이 염두에 둔 독자들의 정신상태가 있다. 이 모든 사정은, 저 염원과 희구와 열망과 함께, 시인의 의도가 ‘님의 침묵』이라는 또 하나의 의도로 ‘생산되는 조건이었다. 어떤냉정한 작가도 이 사정과 힘들이 자기 작품에 개입하는 양과 방법과 계기를 완전히 결정하거나 조절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근면한 연구자도 이 조건들이 작품의 여러 층위에서 맺고 있는 관계를 밑바닥까지 파헤치기는 어렵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복잡성이론들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문학으로 실천된 복잡성이다. - P232
님의 침묵』은 우리 문학에 가르쳐주는 것이 많다. 식민지 치하에서 주눅 든 우리말의 정서적 역량을 높인 이 시집은 음울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서도 준동하는 정신의 한 활기를 늘 다시 증명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기획한 최초의 의도에 방향이 다른 여러 의지와 힘들이 개입하여 그 의도 이상의 의도를 만들어낸 과정자체가 우리 문학으로서는 어디에 비할 데 없이 중요한 경험이다. 『님의 침묵』은 여러 관점에서 늘 새롭게 해석되고 있지만, 그 해석들은 따로 놀지 않고 서로 엇물리거나 감싼다. 이 점은 만해가 독립운동가로도 선사로도 연인으로도 한 인간의 성의를 다함으로써, - P232
자기 자신을 그 의지와 힘들이 서로 북돋으며 성장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음을 또한 증명한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의 이 성의는 그가 자신의 작품에 최초에부여하려 했던 의도의 성의와 다른 것이 아니다. 작품이 항상 그최초의 의도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작품이 발휘하는 힘은 그 최초의 성의로 환원된다. 어떤 변주에 따라, 높은 지혜에의 희구가 되고 좋은 세상을 향한 비원이 되고 순결한 사랑의 열정이 되는 이 절대적인 성의의 기운은 ‘님의 침묵』의 페이지 하나하나를 꿰뚫는다. 성의는 끊이지 않으나 그것이 어디에 닿을지는알기 어렵다. 거기에 닿는 길은 멀고도 멀지만, 거기서 만나려 했던 것을 이름 짓고 그려내는 일이 또 어렵다. 마음은 그 어려움만큼 깊어진다. - P233
절대라는 말은 인간의 정신으로 온전하게 상상할 수 없으며, 인간의 인식으로 파악할 수 없고,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현상과 존재를 단순하게 표현하기 위해 끌어 붙이는 말이지만, 그 현상이나 존재 자체는 모든 복잡성 이론의 시발점이 된다. 어느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 그 ‘어느 것‘에해당하는 것을 모두 열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짐작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어느 것들‘은 ‘어떤 것‘을 무한하게 나타내고 무한하게 가린다. 그래서 짐작할 수 없었던 ‘어느 것‘ 하나가 모든 논리를 공론으로 돌리고 모든 계산을 무위에 빠지게 한다. 바라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저 거룩한 님 앞에서 만해의 이별은 ‘어느 것들‘ 의 조건이 다 파악되지 않는 자리에서 그리운 ‘어떤 것‘을 말하고 - P241
내다보는 알레고리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을 무한하게 드러내면서 가리는 ‘어느 것들‘이 차례차례 그리고 동시에 들어오는 괄호다. 이 괄호는, 절대라는 말이 그렇듯이, 정신의 자유로움과 감정의섬세함과 감각의 깊이를 촉구하는 명령과 다른 것이 아니다. 만해는 님과 이별의 개념으로 서투르지만 서투름을 늘 다시 원통하게여기는 말로 끝없이 쓰이게 될끝없이 저 괄호를 메우게 될 시를 지시한다. - P242
자연에 대한 언급이 없는 소월의 시는 거의 없다. 『진달래꽃‘에서는 시구 몇 개만 건너면 자연을 만나게 되고, 또 그 자연이 시의 음조 속에 끼어들거나 젖어드는 방식은 적절하다기보다 차라리 감쪽같아서 특별히 ‘자연‘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늘 거기있는 길섶의 풀잎처럼 지나쳐버릴 정도다. 그에게서 자연이 주제인지 배경인지를 따지는 일이 그만큼 부질없기도 하다. 그의 정한은 자연과 구별되지 않으며, 하나하나의 감정은 자연에서부터 배어 나와 다시 자연 속으로 스며든다. - P243
문법이 깊이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소원은 늘 자연을 말했지만 자연으로 풍경을 만들지는 않았다. 어느 이론가가 말한 것처럼 현대 의식은 풍경의 발견 이후에만 있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이 환경 속에 확산되면서, 또는 환경이 정신속에 삼투하면서, 자아가 자연을 통해 생각하고, 자연이 자아를 대신해서 생각하는 것도 현대적 지각의 하나이다. 우리가 현대 예술의 가장 고양된 열정을 믿는다면 그 지각이야말로 본질적으로 현대적이다. 김소월의 자연은 민요적 자연이 아니다. - P252
김기림에게바치는 짧은 인사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진정한 비극은 부끄러운 일과도 마찬가지로 영예롭게 여겨질 일까지도 자주 죄가 된다는 데 있을것이다. 믿고 살아온 정신의 터전이 비웃음거리가 되고, 그렇다고새로운 터전을 제 의지로 일궈낼 수도 없는 사정에서는, 순박한 삶작은 몽매함의 표현이 되고, 고매한 이상의 추구조차도 도피의 혐의를 벗기 어렵다. 명랑한 활기도 제 처지를 망각한 사람의 경박함으로 치부되기 십상이지만, 저와 제 주변을 황폐하게 하는 우울한 정신으로 제사지를 절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절이 불리할수록 어떤 단안이 필요하고, 어떤 방식으로건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 P253
식민지의 모더니스트는 기선이면서 동시에 세관이다. 바다와 나비」를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 P260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이 작품을 두고 ‘순진무구하고 철없는 지식인‘이니 ‘냉혹한 현실‘이니 하는 말은 사실 부질없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좌절감‘이란 말도 따지고보면 부질없다. 문학적 모험이건 다른 모험이건 모험가는 순진하거나 철이 없어서 모험하는 것이다. 누가 콜럼버스에게 대서양의 넓이를 일러주었는가, 모험가에게 그가 헤쳐가려는 바다의 수심은 아무도 "일러준 일이 없는 깊이가 아니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깊이일 뿐이다. 흰나비는 바다를 "청무우밭인가" 여겼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찾아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낯익은 세계를 찾아갔던 것이다. 비극은 거기 있다. - P261
식민지적 자기 검열의 가장 큰 비극은 거기, 자기가 알지 못하는 해답을 다른 어떤 사람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물론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는 말은 그가 공주는 아니라는 말도 된다. 시인은 자신의 실패를 엄살 섞어서 말하지만, 이 엄살에는 나도 할 만큼은 했다는속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엄살 위에 청백이 선명하게 대조되는그림 하나를 보여준다. 이 아름답고 처절한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자기 뒤에 다른 어떤 사람이 이 실패를 두려워 말고 저 난바다로나아가기를 바란다. 우리가 알려고 애쓰는 것을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벌써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우리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김기림의 도움이 크다. 우리는 김기림에게 고개 숙여 절하며 그를 위로할 수 있다. - P261
윤동주는 난해한 시인이 아니다. 그는 모국어를 늘 순탄하게 운용하고, 그때에나 지금에나 이 나라 사람들을 충동하여 시를 쓰고 싶게 만드는 다정하고도 날카로운 정서를 손에 잡힐 듯이 구체적으로 노래하였다. 기독교적 주제의 시들이 전통적 한국 정서와 약간의 거리를 지닌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이들 시 역시 종교적 성향이 다르고 성서적 지식이 빈약한 독자들에게도 인간과 세계에대한 실존적 고뇌라는 보편적 측면에서 접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를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그의 좋은 시-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수록된 대부분의 시들과 다른 여러 편의 시들이 여기 해당한다―에는 거기 표현된 생각과 마음의 상태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상당 - P284
한 성찰을 요청하는 시구들이 늘 하나씩 들어 있다. 이 강연은 이들 시구를 다시 상기하고, 가능한 한 그것들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이다. 윤동주는 시에서 자주 하나의 모순을 돌출해내고 대개의 경우그 모순으로 시의 결구를 삼는다. 그의 시에서 시적 서정이 예민하게 드러나는 것도 이때이다. 이 모순은 논리적 서투름이나 비약의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한 정신이 논리의 경계에까지 철저하게 추론을 이끌어나간 끝에 더 이상의 진전이 불가능한 궁지에 이르러, 그 논리체계 자체를 다시 검토하여 그 논리의 피안을 바라보는 사고의 결과이다. - P285
윤동주는 자신의 심정에 진실하였고, 배움에 진실하였으며, 자신의 시대 앞에서 진실하였다. 이 진실의 끝에서 그는 한 세계 안에서 다른 세계가 열리는 아이러니를 발견하였으며, 그 모순의 순간을 정성스럽게 구조화하였다. 그가 시에서 넓고 깊은 지식을 나열한 것도 아니고, 시구와 시어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계산하여 쓴것도 아니지만, 그의 시에서 뛰어난 지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진실의 끝에 이르려는 이 노력이 자주 생생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진실의 끝에서 하나의 모순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 모순을자기 사고의 터전으로 삼는다는 것은 주어진 진실을 자유롭게 비평하고, 그 진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검토를 실천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윤동주는 식민지 시대에 이 자유 비평과 자기검토의 힘으로 거의 유일하게 변증법적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있는 성장과 발전의 시를 썼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한때 세력을떨쳤던 지성주의 내지 주지주의의 시들이 공소함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은 윤동주의 시를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한 데도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 P295
김수영의 시어를 그의 현실 인식과 결부시키는 일은 새삼스럽지만 그만큼 정당하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으로서 김수영이 현실에 천착하였다는 말은 부족하다. 그는 현실만 보았고, 그것도 매우좁은 현실에만 천착했다. 그는 단 한 편의 여행시도 쓰지 않았으며, 자연 경관에 관한 길고 깊은 관상보다 그에게 더 낯선 것은 없다. 그의 시는 종로를 비롯한 서울 거리와 그 외곽 동네들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는 양계장을 경영하였지만 그것은 가내공업이나진배없었고, 곁들여 채마밭을 일구기도 하였지만 거기에 지속적인정성을 바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자연을 농사꾼이 바라보듯, 다시 말해서 그의 시대에 이 땅의 거의 모든 사람이 바라보듯, 바라 - P299
보지 않는다. 「거대한 뿌리가 증언하듯 그의 마음속에도 전통의깊은 뿌리가 분명하게 존재하였지만, 자신이 체험한 현실을 그 정서의 전통에 끌어다 붙이는 일은 그에게 금지된 것이나 같았다. 자연에 대한 감정은 어디서나 민족 감정과 엇물려 있기 마련인데, 그렇기에 더욱 이 감정은 「병풍」에서 말하듯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인 "설움"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에게 땅에 떨어진 눈은 겨울 산촌의 아늑한 풍경과 연결되지 않았고, 봄에 돋는 새싹은친구의 사무실이 사무실인 것만큼만 새싹이었다. 그는 눈과 새싹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았고, 처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처럼 눈이라고, 새싹이라고 말했다. - P300
시가 현실을 발견한다는 말은 현실이 지니고 있는 시적 힘을 발견한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다. 이는 용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이해와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할 수 없이 메마른 현실에서어떻게 준동하는 힘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힘이 거기 있기나 한 것일까, 있다 한들 거기서 어떤 감동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현대시인‘으로서 첨단의 노래" (서시」)를 부르려 한사람이 풀어야 할 숙제였다. 김수영과 같은 시대에 그림을 그렸던박수근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현실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이해하는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박수근도 전후 독재치하의 가난한 현실에 밀착하여, 근근하게 살아가는 농민과 소상인들의 삶을 그렸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 화가의 음울하면서도 아늑한 회색 톤과 양식화된 기하학적 선은 보는 눈을 매혹시켜, 현실을 세월의 먼지 속에 가려진 먼 옛날의 풍경처럼 바라보게 한다. 현실은 예술적 기억술의 세계로 바뀐다. 같은 시대와 그 이후까지, - P301
박수근의 회화에서 사물의 형태를 정돈하고 평면화하는 기하학적 선, 혹은 김현승의 시에서 사물을 결정화(化)하는 이미지를김수영에게서는 그 순결한 말이 대신한다. 김수영만큼 관념적인시, 정확히 말해서 관념을 설파하고 관념 아래 숨는 시를 증오했던사람도 드물다. 만들어진 관념을 사물에 들씌우는 일은 사물을 모욕하는 일이며, 현실에서 돋아나는 새로운 생각의 싹을 막아버리는 포기 행위의 일종이다. 정서의 안일한 장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념을 앞세우는 일이 없는 김수영의 언어는 그 의미를 바로 그 자리에서 손색없이 드러내는 그 성질에 의하여 벌써 어떤 사물, 어떤 현상을 절대적으로 지시하는 관념어의 가치와 자격을 얻는다. - P303
필연성의 고리에 붙잡히지 않는다. 길들여진 언어의 정서적 후원도, 명쾌한 이론의 안전한 권력도 바라지 않았던 김수영은 현실의언어로 현실을 진솔하면서도 절박하게 그리는 가운데 다른 삶을전망하고 끌어당기는 알레고리를 바로 이 삶에서 발견하였다. 그는 현실을 사는 것으로 다른 삶을 실천하였으며, 이 삶의 그림으로현실의 밖을 그렸다. 그는 현실을 직설하였지만, 그가 맨땅에 내던진 말에는 심정의 특별한 깊이가 아닌 것이 없고, 위대한 용기가아닌 것이 없고, 영원한 활력이 아닌 것이 없다. 진정한 초월이 거기 있으며, 김수영의 진정한 현대성이 거기 있다. - P310
김수영은 우리 시에 용기를 주었다. 그는 시에 시적으로 된 말을모은 것이 아니라 모든 말이 시적 힘을 지니도록 시를 썼으며, 이점에서 그는 자유시의 이상을 실천했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시적인 말과 일반적인 말의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 일상의 대화와 나날의 일기, 신문기사와 술자리의 흥분된 토론에서 거두어들인 것같은 시의 말들은 하나같이 사물의 속내를 짚어 그것과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감정이 맺는 관계를 예민하게 드러내고, 어떤 의문을, 어떤 욕망을, 어떤 성찰을, 어떤 전망을 거기서 솟아오르게 함으로써 유례없이 강력한 시정을 형성했다. 그에게 시는 소란한 현실 위에 걸리게 될 예쁘고 평화로운 액자도 아니었고, 삶의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찾아가는 망명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을현실로 발견하는 일이자 그것을 정신화하는 일이었고, 현실의 확장이자 그 전복이었다. 현실을 시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시를 추출하고, 현실을 시로 끌어올리는 이 능력은 곧바로 우리 문학에서 모더니즘과 사실주의를 연결시키는 힘이 되었다. - P310
김수영은 우리 시에서 지적인 것의 개념과 용도를 바꾸었다. 그는 알려진 지식체계의 진실성을 다시 한 번 증명하기 위해 또 하나의 실험 데이터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 않았다. 한 번 사물 앞에서 놀라고, 그 놀라움을 저지혜의 말로 위무하는 절차, 다시 말해서 발견과 정돈의 기승전결은 그의 시에 없다. 마찬가지로평론가가 알아서 말하게 될 것을 미리 써놓는 식의 암묵적 공모의시 쓰기가 그에게 용서될 수는 없었다. 김수영이 말하는 ‘온몸으로시 쓰기‘의 본뜻도 거기 있다. 지식체계에 복무하기를 거부하고 탈주의 모험을 감행하는 그의 시가 말끔하고 지적으로 숙련된 외관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 현대시의 한쪽을 오랫동안지배해온 지성주의 현대파들은 시 속에 혼란의 장소인 몸의 노출을 바라지 않았다. - P311
김수영이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모험을 모험의 지식으로 뒤쫓는 모험가들, 저 아류 모험가들의 안전한 모험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인들은 한때 자신들을 ‘미래‘라고 부르려하였다. 미래파라는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편하지만 그 말이 빈말은 아니다. 시가 미래를 전망하는 지점은 현실이 은유적 힘을 얻는알레고리적 계기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쩌면, 김수영이 보기에는 "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에 미쳐 날뛰는 날에 사는 것이겠지만 여전히 "도시의 피로"에서 배운다. 그들은 현실이 가볍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말로 현실을 움직일 수 있다고믿는다. 그것은 김수영의 능력이었으며, 시의 능력이다. - P314
이문숙은 좋은 시인이다. 과장하지 않고도 아주 좋은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는 시에 깊은 관심을 지닌 사람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을까. 필경 그 이유는 그가 지닌 삶의 태도와 관련이 있을 터인데, 이 말은 그가 자신을 널리 알리는 데에 서툴렀다거나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알려지지 않음은 오히려 그의 선택이다. 이문숙은 마치 세상의 다른 모든 일을제쳐두고 시 쓰기를 선택하듯이 이 알려지지 않음을 선택했다. 고통 속에 잊힌 사람으로서의 그 조건이 없다면 아마 그의 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문숙의 이 선택은 그의 시에 관해 말을 하려는 사람의 태도까지 규정한다. 알려지지 않으려는 그의 시에는 당연히 날카로운 방법도 우쭐거리는 주제도 없다. - P428
이영광은 유비적으로 사고하는 시인이다. 그는 세상의 사물이 제마음의 한 표정이거나 제가 지녀야 할 심정의 지표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물의 본질과 제 본성을 함께 보고 싶어 한다. 이는 그가 견고한 삶을 처음부터 원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며, 그 견고함을 쉽게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다른 여러 젊은 시인들이나 인문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해답이 늘 뒤로 연기되는 일을 하고 있는 그에게 삶의 단단함을 확인해줄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확실한 근거와 연결되어 있고제 입에서 나오는 낱말 하나하나가 풍요로운 의미에 닿아 있기를바라지만, 그의 작업과 생존 자체가 불확실한 토대 위에 얹혀 있어, 견고한 의지를 소외시킬 뿐만 아니라 자주 그 진실성을 의심하 - P450
게 한다. 삶이 중간지대에서 서성이고 있다는 것은 최초의 순결한의지가 죄와 부정으로 왜곡되어 제 길을 올곧게 짚어가지 않았거나, 최소한 자신과 세상에 바쳐야 할 성의가 여전히 부족함을 어쩔수 없이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운명 의식 같은 것이 생겨나는것도 아마 이때일 것이다. 그것은 있는 것이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가 아니라, 있는 것이 왜 하필 그 자리에 있는가를 묻게 되면서 시작될 터이다. 한 인간의 유비적 사고는 그에게 불확실한 것들 너머에서 확실한 것을 엿보게 하고, 그의 신산한 삶을 어떤 거룩하거나 순결한뜻에 연결시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본성을 왜곡과 부정으로부터 복성시키는 계기를 담고 있다. 그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유비적 사고가 사람을 항상행복하게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 때가 더 많다. - P451
시 쓰기에도 독서의 시 쓰기가 있고 해석의 시 쓰기가있다. 어떤 시인은 제 말의 끝에 이르러서야 제가 무슨 말을 하고있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게 된다. 다른 시인은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나 말할 것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연출하며 말한다. 이영광은 지긋지긋한 슬픔」의 어느 대목에서 "나는 닐니리 통합으로 시를 훔쳤다"고 문득 고백한다. 훔쳤다는 말이야 빈말이겠지만, "닐니리 통밥"에는 내용이 없지 않다. 동밥은 연출하는 시 쓰기의 존재방식이다. 명민한 그는 어쩌면 유비적 사고에 천착할 때부터 그 파산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알고도 모르는 척 찾아 헤매었던 것이 바닥을 드러냈다고 해서 시가 바닥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는 이제 아는 것이 없는 자로 현실 앞에 서게 될 것이며, 현실을 소박하고 용감하게 말하는가운데, 무엇을 유비한다는 생각도 없이, 무엇을 유비할 겨를도 없이, 전혀 다른 수준의 유비에 도달하기도할 것이다. 시는 아는 것을 상징하지 않는다. 상징은 모르는 것에 대한 말이다. 이 말을 사족으로 붙인다.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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