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규의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는 매우 기이한 작업의 보고서이다. 누가 이 시집의 이곳저곳을 펼쳐 여남은 편의 시를 읽고나서, 우리 시대의 불행한 현실을 유려한 리듬과 아이러니 가득한문장으로 재치 있게 서술하였다고 그 주제와 특징을 정리한다면, 그 말이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게 읽든 천천히 읽는 중단하지 않고, 읽은 사람이라면, 그말로 설명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다. 김성규는 시집의 모든 시에서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우리 삶의 불행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만, 그 불행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다. 불행과 비극이 내내 반복되는 것은 그것들이 여기저기서 - P604
지리멸렬하게 나타나기 때문이 아니다. 불행과 비극의 표현은, 마찬가지로 그것들의 존재양태는, 확연하고 투철하다.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덧붙이는 법이 없는 이 불행의 시에서 그 고통과 참혹함이 언젠가는 끝나거나 완화되리라는 전망을 기대할 수 없는 것도당연하다. 감정이나 전망이 왜 거기 있어야 하는가. 사실을 말한다면, 불행이나 비극이라는 낱말 자체가 우리의 임시적이고 임의적인 ‘해석‘을 담은 어휘일 뿐으로, 김성규는 자신이 말하는 것에 그런 이름을 붙인 적이 없다. 우리가 불행이나 비극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에게 집과 나무가 거기 있는 것처럼 거기 있다. 퐁주 같은 시인이 ‘사물의 편에 서서‘ 사물들이 저 자신의 성질을 드러낼 수 있는 수사법을 발견하려 했던 것처럼, 김성규는 우리가 불행이라고부르는 것들의 편에 서서 그것들이 저 자신을 낱낱이 보고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에 대해 말한다. 아름다운 말로 노래하지 못할 나무나 집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못할 불행도 없다. 불행도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선율 높은 박자와 민첩하고 명민한 문장의 시를 얻을 권리가 있다. 김성규에게서는 불행이 행복과 대비되는 어떤 것이 아닐뿐더러, 행불행의 구분조차 없는 것 같다. - P605
너무 당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김혜수는 시를 참 잘 쓴다. 60편의시 가운데 귀빠진작품 하나없이 구절마다 눈길을 잡고, 읽는 사람을 이따금 앉았다 일어서게 하는 시집은 어느 시대에도 흔치 않다. ‘타고난 재주‘라는 말이 합당한데, 그보다는 옛날 할머니들의표현을 빌려 ‘그것 참 팔자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좋겠다. 팔자라는 말은 한 재능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그 재능이 이 배은망덕한 세상에서 겪어야 할 신산한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도 끌어안고있기 때문이다. 예(藝)를 늘 살()로 여겼던 노파들의 지혜를 증명하려는 듯이 김혜수는 과연 그 재능을 고통스럽게 사용한다. 시인자신의 삶을 포함한 우리 시대 사람들의 불행하고 황당한 삶을 낱낱이 들춰내는 일도 그렇고, 합당한 리듬으로 그 삶을 그려내어 조 - P613
용히 비평하는 일도 그렇지만, 먼저 그 삶이 불행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도 뛰어난 재능을 필요로 한다. 그의 시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문명비평이라는 말이 그럴듯한데, 정작 시를 읽다 보면 그런 말이 조금 허황하다는 생각도 든다. 길고 거대한 시선으로 이 삶을 거슬러 올라가 그 연원을 밝히고 그전망을 짚어내는 말들을 김혜수는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삶을 어떤 필연의 고리에 위치시켜제감정을 달래려는 사람이아니다. 문명 같은 말은 이데올로기를 불러오기 마련인데, 그는 어떤 종류의 것이건 이데올로기의 인간이 아니다. 누가 그에게 이론말하면 다소곳이 듣고는 있겠지만, 마음속으로는 반드시 그런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에게는 살아야 할 삶이 있고, 그것을 어떤 이론의 그물에 아무리 촘촘한 그물이라고 하더라도 떼어 맡기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에게서 그물은 늘 해체된다. - P614
지난해 겨울, 대산문학상 시상식이 있던 날, 뒤풀이를 끝내고 포항으로 다시 내려가는 최승자를 배웅하며, 나는 그 가냘픈 어깨에 얹었던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허공에 뜬 가랑잎을 쥐는 것만 같아힘주어 붙잡을 수 없었다. 이 욕망의 거리에서, 아무것도 쌓아둔것이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 사람만이 마침내 그 슬픈어깨를 얻는다고 해야 할까. 끌어안기조차 어려운 이 어깨, 그러나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기대야 할 어깨가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승자가 써온 시와 살아온 삶은 널리 알려져있다. 자신의 존재가 잉여물이라고 늘 생각했던 그는 자아를 찾아서, 또는 그 잉여물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합당한 운명을 찾아서 긴 여행을 했다. 그는 너무 멀리 떠나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 P624
도 했다. 그가 겪은 정신적 위기는 개인적 위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시가 머지않아 감당해야 할 위기이기도 했다. 중년을넘긴 사람들에게라면 우리의 삶이 가장 불행했던 시기인 유신 시절부터 시를 써온 최승자가 섭생치료에서 점성술에 이르기까지 온갖 신비서들을 섭렵하고 거기 심취했던 것은 군사독재 권력이 막을 내리기 시작할 무렵부터였다. 불행 하나가 숨을 죽인 자리에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최승자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칠십 년대는 공포였고 팔십 년대는 치욕이었다"(세기말」, 『내 무덤 푸르고』). 그런데 1990년대와 2000년대는? 돌이켜보면 공포였고 치욕이었던 그 불행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불행을가리고 있는 이름 붙일 수 있는 불행이었을 뿐이었다. - P625
유령의 군대와 싸우는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들 자신이 벌써 유령이아닐까. 사실 우리의 삶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뿌리가 뽑혀 있었다. 뿌리 뽑힌 상태에서 뿌리뽑힌 제 처지를 의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불안은 수시로 찾아온다. 욕망이 이 불안을 가리었다. 살아왔던 길을 모두 폐지하고 널따랗게 새로 뚫린, 뚫렸다기보다 침범해 들어온 큰길을 향해 우리를 너나없이 달려가게 하는 이 욕망은실상 비어 있는 욕망이지만, 그 비어 있음을 가리기 위해서는 또다른 욕망이 필요했다. 욕망이 욕망을 물고 온다. 달려가는 사람들속에서 잠시 비켜섰을 때에야, 또는 더 이상 그 발걸음을 따라갔을수 없을 때에야, 문득 사람들은 뿌리도 없이 유령들과 싸우고 있는 제 처지를 곰곰이 생각한다. 최승자는 예의 내 무덤 푸르고』의「자본족」에서 "새들도 자본 자본하며울 날이 오리라"고 벌써 예언했다. 그날은 재빨리 찾아왔고, 여행하던 최승자는 바로 그런 날들의 한복판에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 P625
최승자의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2010)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제 욕망을 누르고만 그 시집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말이 줄어들었고, 문장이 짧고 단순해졌으며, 그 낯익은 독기가 확실하게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짧은 호흡을 타고, 독립성이 강하고 투명한 말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어서 명사문이 아닌 문장들도 명사문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최승자가 관념을 나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 관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구별이 없어진 어떤 체험이 있었다고 오히려 말해야 할 것이다. 그는사물들이 본디 모습을 되찾아 의미로 충만한 말들, 이제 더 이상기호가 아닌 말들이 그 의미와 온전하게 결합하는 자리에 들어서있었다. 물론 이 본디의 사물들 속에 아파트와 자동차를 비롯하여이 문명의 무서운 기계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폐허가 되어 무너져가는 모습으로 이따금 시에 나타났다. - P626
시인은 이 경제학으로 많은 것을 본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전에 보지 않았던 풍경을 본다. 아침 햇살을, 냉랭하게 푸른 하늘을, 바다에 내리는 비를, "소보록 소보록 쌓여가는 눈", "만선의 ‘처럼펼쳐진 구름을, 아카시아 숲을, 지리산의 바람을, 그는 오직 바라본다. 그는 그 풍경을 그리스도라고도, 부처라고도 생각한다. 감각을절약해서 얻은 행복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최승자는 가장 가벼운 육체로, 가장 잘 활용된 감각으로, 인색하게 허락되는 언어로, 간명한 사상으로, 경제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사용되는 시적 선회로, 우리 시대에 가장 투명한 말의 거울을만들었다. 제 입김으로 거울을 흐려놓지 않으려면,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이 시집을 읽어야 한다. - P632
몸은 이 시대의 가장 끈질긴 강박증을 만들어내고 수렴하는 자리이다. 우리가 육체를 강철 같은 무기로 만들려고 결심하는 그 순간에 벌써 우리는 육체의 포로가 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육체는 단단한 것이어야 할 때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이 되고, 깊이 있는 것이어야 할 때 그 깊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다. 이생활 경험 위에 현대의 인문학적 담론이 겹친다. 몸은 엄연히 자아그 자체이지만 동시에 자아의 변두리를 구성하는 타자이다. 한 사람에게 제 육체보다 더 낯선 것은 없으며, 제 의지를 그보다 더 멀리 벗어나는 것도 없다. 어쩌면 현대시의 전통을 육체의 전통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상징파들이 세상을 파악하는 가장 날카롭고 정직한 수단으로 감각을 내세울 때 그것은 곧 우주의 작은모형인 육체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이 모형은 해석의 불빛이 닿을때까지 어둠 속에 감춰져 있을 뿐이다. - P644
시인들은 육체에 상처를 내고 절개하고 해체하여, 적어도 몸을 혹사하여, 쉽게 진리를 내놓으려 하지 않는 그 인색함에 보복하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을 말할 때 그 역시 몸에 대한 새로운 평가였다. 지성에 의해 억압된 것은 모두 몸속에 숨어 있다. 무의식은 무의식으로밖에 쓸 수없으며, 무의식을 쓴다는 것은 곧 몸으로 몸을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몸을 잡아먹는 이미지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뛰어난 브랜드였다. 쓰이는 몸이건 쓰는 몸이건, 몸이 없는 현대시는 없다. 이성복에게 몸은 우선 고통의 밑자리이다. 몸은 늘 고통에 처해 있을 뿐만 아니라, 받은 고통을 재생산하여 세상에 난폭하게 되돌린다. - P644
"요절할 수 없는 것들"은 제각각의 단위 생명을 범생명에 합류하고 있는 것들이다. 불타 사그라짐은 생명을 위해 분열된 생명을 부정하는 열정의 실현이다. 삼각형 산의 삼각받침대가 거르는술은 단위 생명의 힘들이 범생명으로 집중된 순간의 흥분이다. 이흥분으로 한 어깨는 다른 어깨를 받는다. 그러나 말들이 이렇게 해석된다고 해서 그 말들을 비유나 은유로 취급할 수는 없다. 비유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말이 입 없는 것들의 수준으로 잠수했을 때만얻어낼 수 있는 변주일 뿐이다. 이성복의 『아, 입이 없는 것들』은 『남해 금산』이후 그의 시집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시집이며, 우리 시대에 희귀하게 아름다운시집이다. - P648
신현정은 ‘자전거 도둑」(애지, 2005)을 출간하면서, 시인이 몸을 어디에 두어도 그 시는 살아 있다는 것을 넉넉히 증명했다. 천진하다고도 의뭉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런 시집이었다. 지나는 길에 만나의례적으로 악수를 하고 역시 의례적으로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누고헤어졌는데, 이튿날 아침, 잠이 깨면서, 아 그 말이 그 말이었구나! 화들짝 놀라게 되는 그런 경우에 빗대어야 할까. 그렇다고 시의 말에 무슨 함정이 숨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깊은 말과 그저 하는 말에구별이 없었을 뿐이다. 새 시집 『바보 사막(랜덤하우스코리아, 2008)도두 모습이다. 겉으로 보면 담담하고 산뜻하나, 그 속마음을 짚어보면처연하다. 달리 말한다면, 담담한 것도 그 처연함 위에서이고 산뜻한것도 그 처연함의 힘에 의해서이다. - P649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첫 시 「바보 사막은 당연히 서시의 구실을 하겠지만, 시집의 전체뿐만 아니라 한 생애의 전체를 요약하는 결어의 형식을 지니기도 한다. "오늘 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은 출발하기도 전에, 그 여행이 어떻게 진행되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또는 끝나지 않을 것인지, 미리 알고 있다. 사막 여행은 그 출발지도 경유지도 목적지도 모두 사막이다. 거기에 어떤 격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막을 가는 사람은 "해별 낙타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야 하고, 이 행렬에 "조금의 흐트러짐"이나순서의 뒤바뀜이 용납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모랫길을 밟는 일도 천지 운행의 지배 아래 그 율려를 체험하는 과정이지만, 그 체험이 지극히 작은 것이기에 사막을 가는 사람은 시작의 불모와 끝의 불모를 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이 여행이 삭막할 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 P650
사막을 가는 사람은 "난생처음 낙타를" 타보고, 허리에 찬 "가죽수통"과 "달무리 같은 크고 둥근 터번을" 뽐내기도 한다. 저 사막이 오래된 것처럼 낙타도 수통도 터번도 모두 낡은 것이겠지만, 이제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은 "난생처음"의 감각으로 그것들을 접수한다. 여행의 끝은 비극적이다. "사막 한가운데 이르러서/단검을 높이 쳐들어/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먹는다는 것이다." 낙타의 죽음이 여행자의 죽음으로 이어질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행자는 여행의 끝에, 또는 삶의 끝에 "굳기름"을 먹겠지만, 그러나 또한 "난생처음" 먹을 것이다. 어쩌면 이 ‘난생처음‘은 낡은 것들이 드리우는 낚싯바늘에 불과할지 모른다. - P650
그러나 낚싯바늘이 낚싯바늘인 것을 알고 무는 물고기는 없으나, 낚싯바늘이 낚싯바늘임을 모르고 무는 시인도 없다. 그 처연한 ‘희생‘이 바보들의 대물림 낙타에, 누군가 벌써 썼던 터번에, 또다시먹어야 하는 굳기름에 ‘난생처음‘의 이름표를 달아준다. 사는 일은누구에게나 자신이 책임지는 부분만 진정으로 그의 삶이며, 진정한 삶은 늘 난생처음의 삶이다. 지에세상에서 만나는 사물 하나하나에, 생애의 모퉁이길 하나하나에난생처음의 감각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은 또한 지극히 작은 것으로도 그 삶을 누릴 줄 안다. - P651
루쉰은 그의 단편소설 「고향」에서 수구주의자들이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터부의 자리에 인간의 가치가 들어서기를 희망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었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땅 위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보면 길이 만들어진다." 나는 육사가 「광야」를 쓸 때, 루쉰의 이 말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감히 믿는다. - P695
이 시를 시인이 처음 발표했던 것처럼 세로로 쓸 수 없는 것이유감이다. 세로로 썼을 때만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세모꼴들이 ‘물구나무‘를 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책장을 오른쪽으로 돌려놓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거꾸로 선 다섯 개의 삼각형, 또는다섯 그루의 나무를 볼 것이다. 이 나무들이 바로 물구나무‘이다. 마지막 연의 "식물채집"과 "하아얀 죄"는 수음에 대한 암시이다. 수음으로 채집한 이 식물들, 글자로 그린 이 다섯 그루의 나무들은이 시인이 자신의 시에 허락했던 물질의 총량이다. 조향은 초현실주의자일 수 없었다. 그의 시는 현실을 넘어가기는커녕 현실에도 - P800
미치지 못했다. 어떤 풍문에 의하면 6·25전쟁 때, 부산에서 넉넉하게 살고 있던 조향은 서울에서 피난해온 문인들을 박대했기 때문에 그 후 문단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결국 잊힌 시인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풍문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서 그의 인간관계만을볼 수는 없을 것이다. 피난 문인들은 그의 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그는 시에서처럼 현실에서도 현실을 외면했다. 그러나 나는 새삼스럽게 조향의 시나 그 시적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것은 아니다. 해방 이후 우리 시의 발전사라면 그것은 말에 사물과몸을 채워간 역사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는 것뿐이다. - P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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