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노래라고 흔히 말하지만, 시가 글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기 훨씬 전부터, 그러니까 시가 그저 노래일 때부터, 시 짓는 일이말에 매듭을 지어 붙이려는 기이한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것 같다. ‘‘라는 한자만 해도 그렇다. 왼쪽의 ‘말씀 언(言)‘은 예나지금이나 말이라는 뜻이지만, 오른쪽의 ‘절사(寺)는 원래 관청을가리키는 글자였다고 한다. 이 글자를 다시 분해하면 ‘선비 사(士)‘ 와 ‘마디 촌(寸)‘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글을 아는 사람들이 어떤 규칙에 따라 일을 하는 곳이 관청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詩‘는 여기에 말씀 언(言)이 하나 더 붙었으니, 글을 아는 사람들이 말에 매듭 - P136
을 붙이는 것이 바로 시라는 말이 될 법하다. 이런 옹색한 글자풀이를 하지 않더라도 노래에는 원래부터 가락과 장단이 있으니, 그노랫말에 매듭을 붙인다는 것이 놀라운 일일 수 없다. 시는 원래 노래이고, 결국 노래이지만, 그리고 그 가락과 장단은자연과 생명의 리듬을 어떤 상상력에 따라 다시 재현한 것이라고하지만, 자연이나 생명에는 우리가 노래에서 감지하는 것과 같은그런 확실한 매듭이 없다. 말하자면 노래의, 또는 시의 매듭은 자연과 생명 그대로의 매듭이 아니라, 거기에서 추상된 매듭이다. 추상은 물론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해에 관해 아는 것이 없지만, 태양이라고 하는 하나의 총체에서 그 둥근 형태,지상을 향해 끝없이 쏟아지는 그 밝은 빛과 뜨거운 열기, 그 밝은빛 속에 들어 있는 흑점 등등 이런 성질들을 추상해내고는, 해에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온갖 지식들이 그렇게 구성된다. 문명은 그 자체가 매듭이다. - P137
한 섬의 보리를 얻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직선의 밭고랑을 파야 하는가. 페이로더의그 유연한 운동 뒤에는 얼마나 많은 마디와 매듭이 있는가. 철이든다는 것은 철을 안다는 것이고, 철은 시간의 매듭이다. 그래서철이 든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매듭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나 이 추상의 매듭을 만들고 가정한다. 소리에 매듭을주어 악(樂)이라고 일컫고, 인간의 행동에 절도를 가정하며 예(禮)를강요한다. 이 매듭들의 그물망 위에서 질서 잡히고 평화로운 세계하나가 성립한다. 하늘은 그 매듭에 따라 비를 내리고 바람을 불어준다. 하늘은 만물을 생장시키고, 인간도 거기 함께 울력하여 제 삶을 도모한다. 세상은 얼마나 완벽한가. 노래는 얼마나 조화로운가. - P137
그러나 비는 항상 그 매듭에 맞춰 내리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항상 그 매듭과 조화를 이루며 부는 것이 아니다. 가뭄과 홍수가번갈아 찾아오고, 태풍은 삶의 뿌리를 뒤엎는다. 때로는 강이 마르고 땅이 갈라진다. 인간세계도 다르지 않다. 가뭄의 뒤 끝은 물론풍년에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예로도 다스릴 수 없는 무뢰배가 있으며, 전란은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매듭은 환상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그 매듭이 교란될 때마다, 저무정한 침묵의 세계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부딪치고 살아야 하는 생명의 본디 모습이 드러난다. 석굴암에 들어서면, 온화한 자태와 사려 깊은 얼굴로 의연하게 앉아 있는 대불을 먼저 볼 수 있지만, 그좌대에는 사지를 비틀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존재들이 새겨져 있다. 세상의 지혜 하나를 들어 올리는 일이 그렇게 처절하다는 말일까. 고통의 바다는 깊고 넓어서 고요하게 앉아 있는 부처가 마치 조각배처럼 보인다. - P138
위로 지혜를 구하고 밑으로 중생을 제도하는그 위의가 아무리 장엄해도 그것이 풍랑 치는 바다 위에 뜬 일엽편주의 사유에 불과하다고 하면 불경한 말이되겠지만, 몸의 욕구가맑은 지혜가 되기보다는 불투명한 파도가 되는 우리에게는 그것이또한 사실이다. 인간이 만든 매듭의 그물이 아무리 넓고 촘촘하다한들 내 몸도 세상도 그 매듭으로는 무엇 하나 감당할 수는 없는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매듭이 포기되지는 않는다. 매듭이 자기를 반성하는일은 드물다. 매듭은 매듭을 부른다. 실패한 매듭일수록 저 자신을존속시키기 위해 더 많은 매듭을 부르고, 다른 매듭과 끊어지지 않는 연결 고리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결국은 자연도 생명도 사람도 - P138
다 없어지고 매듭만 남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매듭은 자연과 사물을 간명하게 보려는 방법이었는데, 거꾸로 매듭이 모든 것을 가리는 형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듭을 이겨내기 위한답시고 더 촘촘한 매듭을 만든다. 옛날 태권브이 같은 로봇 영화에서 로봇의 횡포를 막기 위해 더 큰 로봇을 만드는 어리석음과 다를 것이 없다. 쾌적한 장식으로서의 말을 넘어서는 시, 노래를 넘어서는 음악은 매듭 밖에서 매듭을 바라본다. 말과 소리의 매듭이 아무리 아름다운 비단을 짜더라도 시와 음악은 그 비단 자락을 흔드는 바람처럼 지나간다. 말과 노래의 매듭이 낭랑하게 울릴 때, 그 영롱한 음조는 시인이 꿈꾸던 것을 단지 암시할 뿐이다. 인간의 매듭이 애초에 기획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할 세계, 그 음조의 순간에 얼핏 본세계는 육체와 함께 지상의 모든 제약을 벗어버릴 때만, 이를테면죽음 뒤에서만 보게 될 어떤 빛과 같다. - P139
아름다운 유리구슬에 잠시 정신을 빼앗겼으나 그것이 제 꿈의 빛과 같은 것이 아님을 알고이내 싫증을 내며 구슬을 댓돌에 내던지는 아이처럼 시인은 매듭을 만드는 순간 그 매듭을 쓸어버린다. 시인이 쓰는 시는 그가 얼핏 보았던 저 빛에 대한 한 차례의 기념일 뿐이다. 그는 매듭을 만들면서 매듭을 파괴한다. 그는 매듭을 딛고 매듭 밖으로 나가려 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능한 것은 또 하나의 매듭을 만드는 일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래서 시는, 좋은 시일수록, 실패담의 형식을 지닐수밖에 없을 것이다. - P139
김수영은 어느 평문에서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시인을 특별히 치켜세우는 말도 아니고 비평가를 폄하하는 말도 아니다. 현실이 아무리 지리멸렬해도 그 속에서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지극히 사소한 움직임에서도 변화의 모든 기미를 알아내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노력하고 있는 사람만이 그와 동일한 노력에 대한 감수성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시인은 이 현실 속에 다른 현실을 언어로 만들어낼 뿐아니라 그 현실을 스스로 체험한다. 비평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도 그것이다. - P141
비유, 은유, 상징, 이미지, 운율, 선율, 시는 이런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은유나 선율이 곧 시를 만들지는 않는다. 비유를 비유라고 말하고 이미지를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시가 이미 만들어진 다음의 일, 어쩌면 그 힘을 거의 잃었을 때의 일이다. 시인이 시를 쓸 때 그는 자기 언어를 은유나 상징으로 보지 않는다. 그가 보는 것은 현실이며 그는 그 현실을 산다. 이를테면 이성복은 남해 금산」의 첫대목에서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그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라고 읊는다. 이 시구를 다음과 같은 말로 풀어놓으면 아마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겠다. ‘사랑하던 한 여자를 잃고 내 마음은 돌처럼 굳어졌다. 그 여자는 돌이 된내 가슴속에 박혀 있었다.‘ 이 두 말은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그질이 다르고 기운이 다르다. 풀어놓은 글에서 ‘돌처럼 굳어졌다‘거나 ‘그 여자가 굳어진 내 가슴에 박혀 있었다‘는 말은 절망과 불모의 상처를 표현하는 수사적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 P142
반면에 이성복의 돌은 현실의 돌이다. 그는 이 시를 쓰면서 정말로 돌속에 묻혀있는 여자를 보고 있으며, 자신이 그 돌 속에 진정으로 들어갔다고생각한다. 풀어놓은 말은 절망과 불모에 대한 낡은 수사법 하나를제시하지만, 이성복의 시는 절망과 불모 그 자체인 바윗덩이 하나를 우리 앞에 세워놓는다. **비평가의 말도 마찬가지다. 풀어놓은 말의 수준에서이 시를 이해하는 비평가의 말과 시의 수준에서 이 시를 이해하는 비평가의말은 다를 것이다. 전자는 이 시의 시상을 일반적 감정의 하나로환원시킬 것이며 그 수사에 이미 알려진 이름을 붙일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돌이 하나의 감정으로 되는, 또는 감정이 하나의 돌로 - P142
되는 특별한 순간을 여러 일반적 감정 위로 들어 올릴 것이며 현실을 창조하는 말의 힘을 자신의 언어체험으로 이해하려고 애쓸 것이다. 시가 비평에 영합할 때 대중에 영합하는 것 못지않게 위험하다. 시인이 시를 쓰면서 비평가가 자기시에 대해하게 될 말을 미리계산하는 방식의 시 쓰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거기에는 유행하는주제가 있으며,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은유와 상징이 있다. 앞뒤를분란하게 꿰맞추는 지적 구조가 있고, 한쪽 눈을 깜박거리며 언어를 약간 비틀어놓는 득의의 순간이 있다. 이때 시속의 사물들은, 허영쟁이 까마귀와 간교한 여우가 등장하는 이솝 우화처럼, 제각기 어떤 관념을 떠맡고 있다. 그 관념은 우주를 끌어안을 만큼 큰것일수록 더 좋다. 또한 거기에는 미시령 꼭대기에서 그넷줄을 놓아버리고 동해 푸른 물에 빠져든다는 식의 유아적 상상력이 있다. - P143
시인은 항상 순진무구하다. 그는 모든 사물에서 생의 이치를 보며,그 이치를 경구로 다듬는다. 그에게는 자연과 생명의 이치를 말하는 사물이 있을 뿐 정작 사물은 없다. 따라서 자연도 생명도 없다. 시가 비평에 영합하는 이유는 시인의 타락에 있기보다 비평의 무능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비평가가 어디선가 보고 외워둔 말들을 풀어놓기 좋은 시, 자신의 명민함을 스스로 확인하기 좋을 것처럼 보이는 시, 그래서 결국은 어떤 시론으로 환언하기에 편안한시만을 주목할 때, 시가 알려진 주제와 어법, 벌써 질서 잡힌 형식의 상징과 은유, 낯익은 이미지의 순열조합에 갇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평가에게 적절한 미끼를 주는 시와 그 미끼를 물고거창한 시론을 설파하는 비평의 관계는 짜고 치는 고스톱과 다를 바가 없다. - P143
시가 모험이라면 비평도 모험이다. 비평은 시와 더불어 안온하지만 비열한 이 삶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내디디려고 애써야 한다. 김수영은 「절망」이라고 이름 붙은 수 편의 시 가운데 하나에서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것처럼"이라고 썼다. 이 시구는 아름답다. 낱말과 선율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분석하기 좋게 짜맞춘 지적 구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암담함을 말하면서 암담한현실을 충전된 언어로 들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충전된 언어에서 발휘되는 힘이 바로 현실 위에 떠오르는 또 하나의 현실이며,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라고 말할 때의 그 딴 곳의 바람에 해당한다. 비평은 시와 더불어 그 힘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 P144
문학적 글쓰기는 그 구체적 개별성을 통해 복잡한 사회적 구조를압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구조를 새롭게 바라보는 법과 새로운 구조를 발견하는 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문학적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것이기도 하며, 문학이 주어진 이론으로 환원될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기도 하다. 비평도 과학적 분석처럼 "하나의 구조와 하나의 이야기"를 고생스럽게 펼치고 전개하지만, 저자신이 허물어질 지점에서 그렇게 한다. 제비평의 위상을 묻는 질문은 종종 비평이 그 권력과 지도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한다. 비평은 지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지도는 비평가가 작가에게 ‘당신이라면 저 형언할 수 없는 것‘ 앞에 설 수 있다고 말하는 데서 그쳐야 할 것 같다. - P150
모국어의 위반은 외국어의 위반이며, 모국어의 타자는 외국어의 타자이다. 그래서 적어도 문학의 관점에서 세계화는 바로 이 타자들의 세계화이다. 문학적 세계화의 주체는 바로 이 어두운 희망들의 몫이다. 문학이 어떤 진보의 도구라면 이 진보성은 오히려 진보라고 헛되게 이름 붙여진 것들의 맹목적 속도를 저 지체하는 타자들의 발목 잡기로 제어하는 데 있다. 세계화 시대에도 문학은 늘하던 일을 계속할 것인데, 다만 내향적 행복이고 절망이었던 것, 외로운 자아들의 편안함이었던 것을 다른 세상의 낯섦과 교환하는일에 좀더 역점이 주어질 것이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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