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는 「오게 될 책(Leive a remi)의 첫머리에서 소설과는 다른 이야기(rcuit)‘의 특징적 요소로 미지 세계와의 만남을 설명하는 가운데, 사이레네스의 노래와 율리시스에 대해 길게 서술하고 있지만, 모비 딕을 쫓았던 에이허브 선장에 대해서도 짧지만 결정적인 몇문장을 쓴다. 저 치명적인 미지의 매혹 앞에서 두 사람의 태도와운명이 다르다. 율리시스는 낯선 힘 앞에서 냉정한 계산으로 대처하여 현실세계와 상상세계 사이의 경계와 간극을 유지하였지만, 에이허브는 현실의 경계 너머 바닥없는 이미지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졌다. 신화 속의 모험가는 노래의 시련을 이기고 이전의 자신을 다시 회복한 반면 복수심에 가득 찬 외다리 선장이이한 운명은 세계가 없는 공간에서 일어난 존재의 변모였다. 여기 - P462
까지가 『모비 딕(Moby Dick)』과 에이허브 선장에 대한 블랑쇼의 언급이지만,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 끝을 잡고 생각을 연장하다 보면문학의 현대성에 대한 개념 하나를 얻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호메로스나 그의 서사시를 처음 읽는 독자들에게 세계는 무한하게 넓은 것이었다. 율리시스는 새로운 바다와 뭍으로 그의 여행을 끝없이 연장할 수 있었다. 그에게도 미지의 세계는 현실의 경계밖에 있으나, 또한 그것은 모든 길목에서 그를 노리고 있다. 그 세계를 차례로 만나고 그 시련을 차례로 이겨내기 위해, 그 세계들의무한함과 아울러 그 깊이를 말하기 위해 율리시스는 그때마다 일상의 세계로 되돌아와야 하며, 이 점에서 그의 귀환은 낯선 세계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그것과의 만남에 그 일부분이 된다. 여전히답사해야 할 미지의 세계가 남아 있다는 것을 증명해줄 것은 그 세계를 만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로서의 그의 건재와 귀환밖에 없다. - P463
멜빌과 에이허브의 사정은 이와 다르다. 『모비 딕』이 발표되던19세기 중반은 발견해야 할 땅이 모두 발견된 다음이었고, 누군가가 설령 새로운 나라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보들레르가 그의 악의꽃의 마지막 시 여행 (Le voyage)」에서 말하게 되는 것처럼, "단조롭고 초라한 이 세계‘의 연장인 그곳에서도 "오늘, 어제, 내일 언제까지나 바로 "우리들의 이미지" "권태의 사막 하나"와 "공포의오아시스 하나"를 볼 수 있을 뿐임이 이미 알려진 시기였다. 멜빌에게는 그 매혹적인 미지와의 관계에서 단 한 번의 만남이 있을 뿐이며, 이 만남도 그의 투신으로만 이루어진다. 미지가 거기 있다는것을 증명해줄 것은 그의 결정적인 선택과 그 믿음에 대한 완전한헌신뿐이다. 그래서 에이허브의 투신은 문학에서 상상의 지리학이 - P463
자기 변모의 생리학으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시기를 표현한다. 벌써 현대인으로서 에이허브는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존재의 변모로만 미지와 관계하며, 미지를 만나며, 미지를 거기 있게 한다. 말하자면 에이허브는 매혹의 노래 그 자체가 되는데, 이는 보들레르가 예의 시의 끝에서 "지옥이건 천당이건" 가리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아" 심연의 밑바닥에, 다시 말해 죽음 속에 잠기고 싶다고 외치게 되는 정황과 상통한다. 이 죽음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없다면필경 제한될 인자들로 구성될 이 삶에 지속과 확대가 가능한 상상력이 없으며, 따라서 문학이 없다. 이때 죽음은 물론 하나의 상징이다. 그것은 존재 위상의 선택에 그 결연함을 뜻할 것이며, 하나의 만남을 전후하여 완전하게 달라질 존재의 매혹과 불안을 시사할 것이다. 존재의 변모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추어진 존재를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따져서말하더라도 사정은 여전하다. - P464
문인수의 문학적 초상을 그리는 일은 쉽지 않다. 그의 문단 생활은오래되었고 꾸준하게 좋은 시들을 발표하였지만, 몇 년 전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하기 전까지는 ‘발굴되지 않은 시인‘의 처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의 시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 이상의 진지한 비평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월평이나 계절에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름 있는 시집 시리즈의 편집자들이 그에게 번호를 내주기 위해 서두르는 기색은 물론 없었다. 시인들이나 비평가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이따금 그의 이름이 나오게 되면 그의 무슨 시를 읽었다든지 그것이 어떻게 아름다웠다든지 하는 말들이곧바로 뒤따르기는 했지만, 늘 이야기는 그 정도에서 그치고 화제는 다른 곳으로 굴러가곤 했다. - P477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풍경을 향해 다가가는 듯하지만 거기에 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는 사람처럼 허랑하게물러난다. 그는 그 자리에 있지 않다. 다른 곳을 더 그리워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그럴듯하지 않다. 어디서나 허랑하게 물러나는 그는 ‘한 풍경‘이 아니라 ‘풍경‘에 실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자리를 옮기는 것은 그 자리가 실망스러워서라기보다 거기서 시시한 것만을 발견해야 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건 마음을 다져서건 특별한 것을 발견해내려는 사람은벌써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만든 사람이거나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일 터인데, 그에게서 자기 존재를 규정하는 일은 이렇게 어설픈 풍경 보기와 함께 항상 뒷날로 연기된다. 그는 나그네다. 지금 있는 그 자리를 지키지 않거나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무엇이 될 수도 없고 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 P478
이경림은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재능이 있다. 일상의 작은 하소연에 그칠 듯이 시작되는 이야기는 곧바로 한역사의 어두운 밑바닥으로 내려가고, 간장처럼 진한 감정의 장대비 속을 헤매다가, 새벽꿈의 언저리만큼 몽롱한 곳에서 기억과 현실이 반죽된 작은보따리 하나를 들고 나온다. 좌중에는 회색 농담을 바탕으로 타다남은 장작불을 그린 것 같은 그림 한 장이 펼쳐지고, 사람들은 벌써 취해서 자기 앞의 술잔을 들어 홀짝거린다. 이야기의 주제가 다양한 것은 아니다. 비참했던 가족사, 그 중심에는 사회주의 운동가이기도 했고 한학자이기도 했고 재가승이기도했던 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짧은 대학생활과 한 남자의 얼굴, 모진 가난 속에서 끝내 얻어내지 못한 학위기처럼 그 얼굴도 끝내 지 - P487
워지지 않는다. 끝으로 모래밭같이 막막한 결혼 생활, 덤덤하나 착하고 너그러울 것이 분명한 남편이 늘 희생자의 자리에 서 있지만, 이 불행은 이경림 특수의 불행이 아니라 누구도 감당해주지 못할힘과 재능의 그것이다. 이 개인사적 불행 위에는 이 땅에서 우거진이런저런 정서적 역사의 불행이 겹쳐 있다. 따져서 듣다 보면, 주제는 늘 변함이 없는데, 이야기의 세부는 적게도 변하고 많게도 변한다. 그래서 반쯤은 사실 같고 반쯤은 소설 같다. 소설의 개입으로 왜곡된 현실일 것도 같고, 현실의 억압으로 완성되지 못할 소설일 것 같기도 하다. 조금 거친 말이 되겠지만, 이 문학적 개입의 확장력과 현실적 억압의 응축력에서 그 정수를 간추리면 이경림의시가 된다. - P488
시적 취향과 시적 감수성은 같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 취향이오로지 ‘좋은 취향‘을 말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좋은 취향을갖는다는 것은 모름지기 어떤 구심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세상의 중심에 설치된 옥좌를 향해 조공을 올림으로써 그 분별력을인정받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화이론을 내세운 문화적 이상을 믿고 재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늘 평가가 뒤따른다. 아니 평가가 앞선다고 해야 더 정확한 말이다. 이미 평가를 받은 것의 외부에 설 수 있는 미적 취향은 없다. ‘좋은 취향‘은 그 평가의역사를 이해하고 그 역사와 자신의 형성사를 동일시할 수 있는 능력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적 감수성은 중심을 모른다. "그것은 몸의 불편함이거나 쾌적함이며, 몸의 무거움이거나 가벼움 - P518
이다. 그것은 화(華)의 유토피아에 가려진 현실의 이(夷)에 들리는능력이며, 말과 이미지들의 통일된 권력 아래에서 존재들의 불화와 지리멸렬함을 깨닫고, 그 세련되지 못한 힘을 다시 파악하는 능력이다. 시적 감수성은 그 또한 역사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신은 역사를 모른다. 그것은 하나의 사태를 역사 속에서 추수하고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태의 원점으로 몸을 끌고 내려가 그기원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하나의 ‘정신‘을 창출하는 능력이다. 감수성은 항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 P519
취향은 공시적으로도 통시적으로도 늘 든든한 토대와 배경에 의지하지만, 감수성은 그 지위와 실천이 불확실하고 불안하다. 취향으로 시를 읽는 자들은 제가 읽는 것을 ‘시‘라는 말로벌써 반 너머 이해하며, 취향으로 시를 쓰는 자들에게서는 ‘시‘라는 말이 벌써 반쯤 시를 써준다. 감수성은 의지할 토대가 없다. 그것은 시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어낸다. 랭보가 어디선가 "거지처럼 대리석 둑길을 달려갔다"고 했던 말은 빈말이 아니다. 문화가아니라 제 생명을 수단으로 삼아 시 쓰는 자는 따라서 이렇게 묻지않을 수 없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것이 시인가? 사람과 교섭하는 방법에서, 말을 다루고 시를 쓰는 태도에서, 요란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한,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매혹적인김이듬이 데뷔작으로 들고 나온 것도 이 질문이었다. - P519
이 말들은사실에 부합하고 따라서 순결하지만, 사실을 말하나 숨기는 방식으로 말하기에 어지럽다. 이 어지러움이 김이듬에게는 일종의 정돈에 해당한다. 그것은 극단에 이르려는 표현을 복잡성의 형식으로 절제하고, 상처와 원한의 관계가 조정될 때까지 시간을 버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가 숨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릴 수 있는 독자에게는 이 어지러운 말만큼 잘 정돈된 말도 드물다. 이 어지러운 상태와 정돈 상태의 겹치기는 김이듬에게서 자주 시 쓰기에 비유되는 섹스의 체험과도 같다. 시 쓰기의 다른 이름인 김이듬의 섹스는, 쿤데라가 어디선가 말했던 것처럼, 육체가 속죄하는 순간에 해당한다. 그러나 쿤데라에게서 이 속죄는무겁고 늙어가는 육체의 그것이지만, 김이듬의 속죄는 공복감밖에가진 것이 없는 허기진 육체의 그것이다. 한쪽은 제 육체를 버리는것으로 끝나지만, 다른 한쪽은 제 육체가 이제부터 형성되기를 내내 기다려야 한다. 시의 감수성은 잘 살아가는 사람의 감수성이 아니라, 늘 지워졌다가 다시 회복되는 사람의 감수성이다. 김이듬의시적 운명도 재능도 거기 있다. - P526
「새떼를 베끼다』(문학과지성사, 2007)는 위선환의 세 번째 시집이다. 그가 눌러두었던 재능을 더 이상 눌러둘수없어 환갑이 다 된 나이로 뒤늦게 펜 끝을 다시 갈기 시작할 때, 도도한 필력은 금방 증명되었지만, 시단에 낮을 익히기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나이와 연조가 일치하지 않을 때 치러야 할 고통은 글 쓰는 사람들의 세계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스무 살은 서른 살을 예견하게 하고, 서른 살은 마흔 살을 설명해준다. 그 성장의 이력도 행적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게다가 이 불편함이 비단 사람들과의 관계에만 국한된다고 할 수도 없다. 뒤늦은 행보는 그의 글쓰기를 또한 제약하기 마련이다. 젊은 시인의 모색과 망설임은 그의 진지함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어디에 매혹됨 - P546
이 없이 귀가 순해져야 할 나이에 첫 시집을 꾸리는 시인에게는 길을 알고도 모르는 척 헤매야 할 시간도 기회도 없다. 그에게는 오직 착오 없는 이행만이 허용된다. 숙고된 생각과 확고한 방법이 벌써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그가 뒤늦게 글을 써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디에 들어서건, 들어선 자리에서 그는 옛날부터 거기 있었던 사람처럼 있어야 하며, 거기에 반드용 시 있어야 할 사람처럼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있었던 사람이나 있어야 할 사람이라는 말이 그 존재가 묻히거나 잊혀야 할 사람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옛날부터 거기에‘가 ‘새롭게거기에‘와 겹쳐야 하고, ‘반드시 거기에‘가 ‘자유롭게 거기에‘의 결과이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 터인데, 이는 벌써 글쓰기의 고전적 이상을 말하는 것이나 같다. - P547
위선환은 질서와 평화를 앞장세우지 않는다. 질서가, 또는 질서의 허상이 보일 때마다 그는 그것을 끌고 저열한 중력의 자리로 내려와 그 앞뒤를 살피고 그 위아래를 두드리고, 힘이 다할 때까지 학대하여, 질서가 질서인 것을 고백하게 한다. 그래서 위선환이 질서를 내다볼 때 그것은 명백하게 질서이다. 하늘이 파랗다고 말할 때 하늘은 파랗고, 별똥별이 떨어진다고 말할 때 별똥별은 떨어진다. 위선환의 시는 아름답다. 이 말은 그 아름다움이 믿을 만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고전주의는 아름다움과 진실이 같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나무다. 위선환의 시에서는 무질서의 진실이 질서의 아름다움과 함께 피어난다. - P556
송승환은 이지적이고 감정과 감각이 모두 섬세한 시인이지만, 몽환 속에서까지도 자기 검열이 그만큼 강한 시인이다. 그래서 그의시를 읽는 일은 즐거운 만큼 어렵다. 그의 생각을 짚기 위해서는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눈을 옆으로 한 번 돌리기만 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시의 크고 작은 매듭에서마다 번번이 시선의 방향과 초점을 다시 조정해야 하니 특별한 정력이 필요하고, "눈을 옆으로"가 말은 쉽지만 그 옆이라는 게 때로는 안에 있고 때로는 밖에 있다. 시선의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 하더라도, 또 남는 것은 송승환이 운용하는 말의 이상한 정교함이다. ‘나는 단지 내가 본 것을 그대로 기술할 뿐이다‘ - - P557
‘홍취(運)‘는 홍과 취미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는데, 그 말을 고쳐 쓸 수는 없을까. 바깥 사물에 늘 쉽게 재미를 붙여 눈여겨보고거기서 일어나는 감정을 어떤 리듬에 따라 오래도록 생기 있게 유지하는 마음의 능력이나 상태 같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흥취(興 ‘라는 말을 따로 만들어 쓸 수만 있다면, 이은봉의 시가 지닌 아름다움을 가장 적절하게 요약하는 말을 거기서 발견할 수도 있을것 같다. 내가 말하는 흥취가 도취와 다른 것은 그 취함의 깊이에서만은 아니다. 도취를 위해서는 어느 자리건 그 자리에 들어가야하며, 거기서는 감정이나 감각의 변덕이 추호도 용납되지 않는다. 변덕이 끼어드는 순간 도취는 깨진다. 흥취의 인간은 오히려 사물의 가장자리를 맴돌며 변덕을 그 취기의 리듬으로 삼아 제 흥취를 이어가고 또 다른 흥취를 만들어 낸다. - P566
이 흥취는 물론 황홀과 다르다. 황홀함을 느끼는 사람 앞에 사물은 균질적이다. 그에게는 껄끄러움도 끈적거림도 없다. 사물은 미묘하고 헤아리기 어려울 터인데, 사실은 헤아릴필요가 없다. 황홀함에 들기 위해 먼저 바쳐야하는 것은 분별의 관습이기 때문이다. 흥취한 인간에게는 껄끄러움과 끈적거림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정도가 어떠하건 그는 거기서 남다른 생기를 느낀다. 그는 어디까지나 분별하는 인간이지만 그가 만나는 같은 것과 다른 것들 사이에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고통스럽게 똑같은 생명의 기운이 흘러간다. 이은봉의 시에는 이 흥취가 있다. - P567
정재학의 시에 관해 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초현실성을 거론해야 한다. 자주 산문시의 형식을 지니는 정재학의 시는 그만큼자주 하나 이상의 이야기를 끌어안고 있거나 그 이야기를 물고 시작하지만, 그 시말을 종잡기는 어렵다. 사건에는 인과적 추이라고불러야 할 것이 없고, 있더라도 그것은 어떤 ‘뜻‘으로 환치되려 하지 않는다. 이미지들은 늘 갑작스러운데, 그것들이 당혹스러운 점은 그 돌발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외의 출현들이 누려야 할 공격성이나 환기성이 ‘거세‘되어 있다는 데 있다. 풀숲을헤쳐 가던 정찰병에게 갑자기 총을 겨누고 일어선 매복조들이 한번 희죽 웃고 사라져버린다면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매복과의 조우가 아니다. - P577
박철의 시를 읽으면 늘 어딘지 한구석이 조금 허전하다는 느낌을얻게 된다. 마무리가 서툴러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시편마다 정갈하고 되바라지지 않는 리듬으로 할 말을 다 한다. 시가모호해서는 더욱 아니다. 그는 평이하게 시를 쓰고 시구를 이어갈때 논리를 생략하거나 건너뛰는 법이 없다. 시어는 늘 순순해서 딱히 은유나 상징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 없다. 그는 참외를 참외라고쓰고 침대를 침대라고 쓴다. 말의 전의는 이를테면 항상 남편을 앞세우고 본인은 뒷자리에 서는 시인의 아내가 "세컨드"라는 이름을 얻는 정도에서 그친다. 은유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은어라고 불러야 할 것이 가끔 나오지만 그 말을 모른다 해도 시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크게 지장을 받지는 않는다. - P586
이문숙이 시에 쓰는 말은 잔잔하고 나직하다. 그의 시에는 강렬한 유혹도 기괴한 선동도 없다. 잔인한 결심도 환상적인 탈선도 없다. 시비를 걸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그는 말을 모나게 비틀지 않으며, 그 의미를 신비롭게 굴절시키지 않는다. 이문숙의 시에 어떤 ‘기교‘가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을 잠시 또는 영원히 묻어버리는 정도가 그 전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번의 양보도 없이, 어떤 영합이나 타협도 없이, 우쭐거림도 없이, 어쩌면 그래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이, 우리시대의 불행한 삶을 이만큼 깊은 눈으로그려낸 시집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시인은 이 말에 필경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정작 이문숙은 시쓰는 자신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 P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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