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화‘ 내지 ‘제국주의적 지배‘의 문제는 단순히 정치/경제적 차원의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직접적 권력 대립의 문제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은 식민지 지배가 장기화되면서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식민 지배가장기화되자 민족주의자들은 의식의 차원, 또는 언어의 차원이 중요함을 알게 되고 민족주의자들은 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식민화된 역사를 가진 많은 사회가 독립을 이룬 후에도 여전히 ‘서양의 지배체제‘ 속에 머물고 있음을 보면서 그 동안의 제국주의적 지배가 가져다 준
‘선물‘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타자화‘ / 의식의 식민화/식민적 주체에 대한 논의를 가장 선동적이고 설득력 있게 펴나간 파농의 기념비적 책을 통해 이 문제가 어떤 언어로 구사되어 왔는지 살펴보자.
파농은 식민지 땅에서 태어난 지식인으로 타자화된 자신의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 대표적 민족 해방 운동가 중 한 사람이다. 1925년에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에서 태어난, 알제리인 정신과 의사이며 알제리 민족 해방전선의 주도자 격인 프란츠 파농은 프랑스에 유학한 지식인으로 싸르트르에 심취해 청년기를 보낸 전형적 식민지 엘리트이기도 하다. 의사로서 정신질환을 분석하다가, 그는 환자들 속에서 자기 땅에서 소외되어 버린, 자아상실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일반적인 식민지 주민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과정을 통해 그는 알제리 해방 투쟁에 적극 참여하게 되고 그 투쟁에 앞장섰다가 1961년 서른 일곱의 나이에 ‘혁명 전사‘로 사망한다. 파농의 대표적인 책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은 알제리의 식민 종주국이었던 프랑스에서1961년에 출간되어 지성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지금도 탈식민 담론을 논하는 서구 지성계와 제3세계 지성계 전반에 대표적인 교재로 읽히고 있다. - P77

파농은 극도의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이러한 제국주의 역사를 끝내야 된다고 믿었으며, 동시에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어려움은 바로 이미 너무나 타자화되어 버린 민족주의적 엘리트들의 당혹함 속에 집약되어 있다.


"식민지의 민족주의 정당들이 민족 독립의 명분으로 민중을 동원하는 순간, 식민지 지식인들은 갑자기 그들을 조국으로부터 소외시킨 이 모든 교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버린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버리는 것은 그것을 버린다고 선언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문화 매체를 통해 서구 문명에 흡수되어 들어갔고 유럽 문화가 그의 신체의 일부가 될 만큼 동화되었던, 다시 말하면 자신의 문화를 다른 문화로 대체했던 지식인은 그가 본연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현재 취하고자 하는 문화적 모델이 너무나 허약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 그는 빨리 백인 문화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느낀다. 그는 다른 곳에서 혹은 어느 곳에서라도 그의 문화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낀다." - P81

파농은 ‘식민화된 주체‘를 어떻게 벗어 던질까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을 한 사람이었고, 그의 고민과 방황과 좌절은 지금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그 숙제는 실은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로 지금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구체적인 ‘적‘을 앞에 놓고 저항하고 괴로와하면서 자신의 상태가 비정상적임을 알 수 있었던 구식민지적 상황에 비해, 그래서 늘 긴장과 경계심을 품고 해방된 조국에 대한 꿈이라도 꿀 수 있어서 파농처럼 자신있게 글을 쓸 수 있었던 당시에 비해, 겉으로의 독립이 보장된 지금의 상황은 혼란스럽다. 대다수 사람들은 정치적 독립을 이룬 것에 만족하며 스스로 ‘탈식민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세계화의 시대에 그런 과제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비정상 상태‘에 있음을 잊어버리게 하는 상태에 살고 있는 것이다. 식민 모국의 얼굴들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경계심을 잃게 되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혹에 보다 쉽게 무너진다. - P82

밀즈가 이 글을 쓸 당시 그는 물론 소련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쿠바를 보다 잘 이해해야 한다는 동기로 작용을 했을것이다. 어쨌든지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또 제3세계의 물적, 정신적 기반이 나아지면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격이 일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변화는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3세계 안에서 지속적인 싸움이 치뤄진 노력들이 들어간, ‘정확히‘ 그 노력만큼의 성과이다. 실상 콜럼부스의후예들은 아직 그렇게 힘이 빠져 있지 않다. 그들은 여전히 세계의 금융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의 선조가 세계 곳곳에 철도를 깔았듯이, 지금 컴퓨터 통신망을 까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정보화 사회를 준비하며 새로운지도를 그리고 있는 이들의 핵심부는 아직도 백인들이다. 좌표를 상실했다면서 가볍게 날아오르고 싶어하는 탈근대론자들은 서구 학문의 한 지류에지나지 않으며, 서구의 학문적 중심은 아직도 무겁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 가고 있다. - P90

서양은 에피스테메*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혼란을 말한다.
이 혼란은 이해되지 않는 수준의 질서인가
혼란 그 자체인가?


* 에피스테메는 미셸 푸코가 부각시킨 말로서주어진 시대의 앎의 기본 단위를 말한다.
그것은 인식을 위한 기본 전제와 삶을 구성해 가는 기본 개념과 전략들을 포함한다. - P93

지금의 ‘국제화‘도 그렇다. 우리는 지금 ‘국제화‘만 하는 것이아니고 ‘세계화‘도 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단순히 개별 국가간의 상호 작용을 활성화하는 ‘국제화‘가 아니라 지구촌의 위기를극복해 가기 위해 새로운 차원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도 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구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16세기부터 진행된 자본주의화는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제 그것이 현실로 눈앞에 나타났다. 이제우리는 냉철한 계산으로 국제 협상 테이블에 앉아 국가의 이익을지키기 위한 ‘국제 경쟁력‘을 과시해야 하지만, 또한 그 협상 테이블에서 ‘세계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의미의
‘서구화‘가 아닌 ‘세계화‘ 시대의 철학으로 대화를 할 수 있어야한다.
게다가 이제 협상 테이블에서만 역사가 이루어지는 시대는 지났다. 미디어 시대에 이미지 광고가 중요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들간의 교류이다. 이제 사람들은 비행기를, 버스 타듯이 타고 다닌다. 그리고 전화를 통해, 팩스를 통해, 전자 우편(E-mail)을 통해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눈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과 제대로 만나가는 것 역시 ‘세계화‘를 향한 준비 작업에 포함된다.  - P103

식민지적 발전을 한 사회가 갖는 공통점, 뒤죽박죽의 상태, 일관성 있는 스타일과는 무관한 절충주의와 혼돈의 상태. 식민주의적근대화를 거친 사회들은 대개가 이런 모습을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근대화의 특징이라고 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간격이 좁혀질 줄 모르는 상태, 임시 땜질로 모든 일을 처리하며, ‘폰즈통에 김치‘를 담아 도시락 반찬을 싸가고, 화장실의휴지가 식탁 위에 올라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느끼지 않는 상태가 바로 식민주의적 근대화를 한 사회의 그림이다.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무엇이 되어도 좋고 아무곳에 있어도 되는 절충주의는 대단한 적응력과 흡수력을 가지지만 새로운 스타일의 문화를 만들어가지 못한다.
뒤죽박죽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감당하지 못할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이 뒤죽박죽이 된 자신의 삶을 추스려 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는 자생적 근대화를 해나간 서구에 비해 더욱 통제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서 살아왔으면서 통제 가능한 상황에 곧 들어가리라는 꿈을 끝없이 꾸어 왔다. 이당치도 않은 낙관주의는 또 어디서 온 것일까? 이 낙관주의와 지속되는 혼란 사이에는 분명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을 것이다. - P105

우리가 곧 질서정연한 상태로 들어가리라는 터무니없는 낙관론/어쩌면 우리는 이 혼란 상황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될지 모른다. 다시말해서 서구인들이 쓴 같은 언어와 스타일로 역사를 쓸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고, 만성화된 혼란/ 위기 상태를 이론화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생존이 어려웠고 공동체적 언어를 잃어버린 혼란기, 또는 전쟁터였던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활용한 생존 전략이 있었을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회 과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개념들과는거리가 먼 단어로 풀어지리라는 것이다. 자생적 산업화를 이루어내지 못한 사회일수록 합법적 공간보다 비합법적인 공간이 넓고 힘이 있으리라는 점에 우선 착안해 보자. 그러한 사회일수록 ‘법‘이라든가 ‘공공‘이라는 것은 ‘공동체적 선‘을 위해 존재하기보다 지배층의 이익이 위협당할 때 그 위험물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전락한다. 따라서 이런 사회의 시민은 법을 준수하는 것이 자신에게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법은 지키라고있는 것이 아니라 빠져 나가기 위해 있는 그물망일 뿐이다. - P112

곧 국가 공동체나 그 외 가족 단위를 넘어서는 공공적 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진 사람들이 가족주의적 이익에 눈이 멀어 버릴 때이다. 혈연 중심적 가족주의는 산업 사회의 하나의 구성원리가 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총괄하는 원리가 될 수는 없다. 지금과 같은 많은 모순과 부조리와 부패는 이 점에서 혼돈을 일으키고있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가 근대화 과정에서도 개인주의화하지않고 집단적 원리를 지녀 왔음을 다행스럽다고 말한다. 최근 들어신보수주의적 경향이 강해지면서 그 수가 더 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자. 우리 사회가 집단주의 사회인가? ‘피난민‘과 ‘거간꾼‘들이 주도해 간 근대사와 70년대 이후 더욱 박차를 가한 ‘생산력 위주‘의 경제 발전이 도달한 곳은 실은 극도로 파편화된 개인들이 득실거리는 사회가 아닌가? 우리가 말하는 개인주의가 서양에서말하는 개인주의와는 다른, 개인의 파편화 내지 ‘흐트러진 개인‘들을 지칭하듯, 우리가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집단주의 역시 사회학 개론서에서 읽은 그런 공동체와는 다른 것 아닐까? - P116

극도로 파편화된 개인들이 가족 단위로 ‘똘똘‘ 뭉쳐서 제각각 살길을 찾아 살아가는 것을 집단주의라 부르겠다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다. 또 논리가 부족할 때 언론인과 정치가들이 걸핏하면 입에 담는 ‘국민적 정서‘라는 단어에서, 80년대 ‘운동권‘ 집단에서중요하게 여겼던 ‘의리‘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뒤르껭이 말하는
‘기계적 결속‘의 사회를 연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의 집단은배타성과 획일성, 그리고 감정적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봉건적 공동체‘도, ‘근대적 공동체‘도 아닌 집단이다.
이때의 집단은 ‘한통속‘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라는 테두리를두껍고 단단하게 치고 마치 우리 단독 주택의 담처럼 높게그 안에 사는 사람들끼리만 서로를 귀엽게 봐주는 원리이다. 그 집단을 지배하는 감수성은 ‘내 품‘에 들어왔으니까 어쩔 수 없이 보아주고, 미워도 받아들이고 참아 주는 감수성이다. 그 집단의 언어는 배타적이고 감정적이다. 떼거리를 쓰면 통하고, 억지를 부리면이긴다.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그래서 스스 - P116

로의 마음을 표현하고 서로의 언어를 조율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사 소통 회로는 늘 일방적이다. 이러한 일방통행적 의사 소통 구도에서는 물론 힘있는 자가 이기게 되어 있다.
가족의 언어는 아주 강력하게 우리의 일상적 삶을 지배해 왔으며, 그 언어를 견제할 다른 언어가 미약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그 언어와 감수성은 공적인 영역에까지 침투하여 가족 단위를 넘어선 관계에 지배적 효과를 낸다. 사실상 우리 사회는 서구처럼 ‘도구적 합리화‘가 지나쳐서 생활 세계가 식민화된 사회가 아니다. 우리의 근대사는 ‘합리성‘이 빠진 ‘도구화‘의 근대사였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단주의만이 활개친 역사였다. 그런 수단주의적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가 이렇게 ‘활기차게‘ 살아온 것은 바로이 배타적인 가족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달라져야 할 것 같다. 더 이상의 ‘도구화‘도, 더 이상의 ‘더러운 정‘도 참기 어렵다는 아우성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P117

원리의 실천과 일제 시대 민족주의자들이 더듬던 언어를 다시 꺼내.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근대적 노동관은 어떤 것이며, 신분제는 왜 타파되어야 하는가? 근대적 사회로의 이행을 어렵게 하는 주술적 사고란 무엇이며 농경적 공동체가 깨진 상태에서, 도시화된 사회에서개인은 어떻게 일하고 먹고 또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가? 시민적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근대 사회에서의 가족은 무엇 때문에 있어야 하는가?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서, 또한 우리는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세계 규모의 자본주의 시장은 점점 더 확대되고 수천 개의 위성/유선 텔레비전 채널이 시간과 공간, 언어와 역사, 그리고 현존하는 매체의 경계를 허물며 온갖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 기존의 경제와 문화와 정치 사이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우리 것‘과 ‘그들의 것‘을구분해 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여기서 혼성 모방을 하는 나는 누구인가? 완전한 자주 독립의 상태라는 것을 상정하는 것이 주체적으로 역사를 써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아니라면 적절한 의존의 상태라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적절한 ‘열림과 닫힘‘의묘를 살린 상태란 또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 P125

400년 전 세계 전 지역에 물건을 운반할 항구를 만들고 철도를 깔았듯이 지금 그들은 금융망과 정보망을 앞장서서 깔고 있다.
위성 방송을 주도하고 있으며 금융 관리도 여전히 그들 손에 들어있다. 문화적 원리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콜럼부스의 후예답게 그들은 낯선 곳을 그냥 두지 못한다. 개척자와 탐험가의 후예답게, 발명가들의 후예답게, 탄광을 세우고 철도를 깐 목수들의 후예답게 그들은 원활한 자본의 유통과 정보 교류망을 깔기 위한 새 지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유색 인종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콜럼부스를 만들어 낸 그들 문화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세계의 주도적 원리는 아직도 서구가 주도해 온 근대적 원리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달라질 수 있으며 달라져야 한다는 사람들이 동서양 모두에서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달라졌다. - P126

파시즘이 대두하던 당시 아랍계이주 노동자와 게르만계 노동자는 왜 그렇게 철천지 원수처럼 서로를 노려보며 죽여야 했을까? 국내 생산직 노동자와 방글라데쉬에서 온 이민 노동자 사이에는 아직도 공통의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지않은 것은 왤까?
우리는 그 동안 자신을 이미 규정된 기존의 범주 안에서만 보았고, 자신이 가진 것에 악착스럽게 매달려 왔다. 조금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며, 또한 못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확인해 왔다. 남자란 것에 매달려 여자란 존재를 무시해 왔고 대학을 간 것에 매달려 대학을 못간 사람을 무시해 왔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로와해 왔다. 우리는 늘상 이상적 ‘주체‘에 비해 ‘결핍‘ 된 존재로서의 자신을 보아왔고, 그 상대적 결핍을 보완하기 위해 더욱 나쁜 상황의 사람들을 눌러왔다.
‘중심‘에 의해 규정된 자기 정체성의 허구를 알게 된 소수민식민지 주민, 백인주의 사회의 흑인, 남성 중심 사회의 여성, 국가중심주의 사회의 이주 노동자, 연장자 지배 사회의 청년 등 - 들은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겠다고 나설 것이고, 이런 와중에서 ‘중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될 것이다.
- P128

‘중심‘에 의해 규정된 자기 정체성의 허구를 알게 된 소수민ㅡ식민지 주민, 백인주의 사회의 흑인, 남성 중심 사회의 여성, 국가중심주의 사회의 이주 노동자, 연장자 지배 사회의 청년 등 ㅡ 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겠다고 나설 것이고, 이런 와중에서 ‘중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기존의 범주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를 규정해 갈 준비를 해야 한다. 다시 한국민으로 돌아오더라도 한국의 범주를 일단 떠나서 자신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자. 한국은 내게 무엇이며, 중산층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가족은 또 내게 무엇인가? 우리는 왜 그 범주에 집착해 왔는가? 지금 말하고 있는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 그때 여러 개의 ‘나‘, 여러 개의 ‘우리‘가 있지 않은가? 각자 선 자리를 돌아보자. 그리고 기존의 틀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일을 그치고 내가 만들어 가고 싶은 세상에 맞는 정체성을 찾아내 가보자. 나는 남한에 사는 ‘국민‘이며, ‘민족주의자‘이며, ‘중산층‘이며, ‘엘리트‘로 살아 왔다. 또한 나는 ‘여성‘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언어를 잃어 온 ‘식민지 주민‘으로서 살아 왔 - P128

다. 또한 나는 나 자신을 ‘지구상의 위기를 염려하는 세계의 양심있는 주민‘으로 규정짓고 싶어하고, 내가 살고 있는 ‘신촌을 가꾸는지역 주민‘으로서의 존재를 강조하고 싶어한다.
대안적 근대성을 추구하는 마당에서 우리는 ‘결핍‘으로서의 정체성 속에 갇히기보다는 새로운 문화/관계 / 공간을 만들어 가는
‘개성‘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자신이 선 자리, 주변이자 경계점인 그곳을 창조적 지점으로 삼아 간다. 더 이상 자신을 주어진 체제 속의 이분법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다양한 사회 모순이 자신의 일상적 삶 속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면서 이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임을 알아 간다. ‘주체‘는 매우 전략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다.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 곧 정치적인 행위이며 사회 운동이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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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유행옷처럼 멋스럽게 걸칠 줄 아는 나는
파우스트를 멋드러지게 패러디를 해낸 움베르트 에코를 읽으며
여든살이 넘어서도 참신한 글을 써내는
레비스트로스와 갈브레이스에 관한 외신 기사를 읽으며
부러움에 젖는다.

스승이 없는 나는
문서가 소멸되는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역사를 쓸 계획이 없어서
구태여 기억을 할 필요가 없는 사회에 살면서 홀가분해 한다.

순발력 있는 나는
표방 가치와 실천 가치의 괴리를
갈등으로 느끼지 않으며
두 개의 언어를 가지고
두 개의 삶의 공간을 적절히 넘나들며
가끔씩 쓸쓸해 할 뿐이다.

이런 땅에서
반역을 도모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 P15

"번역이란 정보의 대중화, 민중화, 즉 민주화를 뜻한다.…… 칸트의 번역은 우리말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칸트 철학에 같이 참여할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칸트의 저작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않은 상황에서 칸트에 대하여 강의한다는 것은 칸트를 독점한 자가 그러한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칸트를 강요하는 일방적 부과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해방 후 오늘날까지 우리 학계를 지배해 온 주입식 교육의 정체다. 정보가 민주화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정보를 독점한 자만이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칸트를 알고싶으면 나만큼 독일어를 마스터해라. 나는 이 무기를 얻기 위해 독일에서 십년이나 배를 굶주렸는데 너희들이 감히 칸트 운운해? 시건방이런 상황에서는 수강자가 강의자의 칸트에 대한 이해의 타당성을 확인할 길이 없다. 강의자만이 절대적 권위를 가질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토론은 부재하며 상호간의 자극, 발전이 없게 되고, 따라서 그러한 학계는 정체되고 마는 것이다." - P17

어쨌든지 우리의 인문학은 여기까지 왔다. 어디까지? 소수의 번역 전문가 집단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많은 수의 지식인들이 들러붙어 "그 문장이, 또는 그 이론이 진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왈가왈부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여기까지. ‘말‘ 없이 사는 괴로움으로 각자의 밀실에서 슬퍼 눈물을 흘리며 자폐증에 걸리는 여기까지.
베버를, 맑스를, 데리다를 그의 시대적 고민을 통해 이해한다는것은 중요하다. 위대한 사상가를 많이, 올바르게 읽는 작업은 물론중요하다. 그리고 남의 연구 작업을 총정리하는 것에 일생을 보내는 학자들도 물론 필요하다. 문제는 그러한 논의가 우리 지식인들의 논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다. 자기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풀어 낼 틀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의 외국 이론 읽기는 위험하다. 일상적 삶을 무시함으로 평면적 분석만 하게 되고, 자체 내 토론과 합의의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 결론을 외국 이론가의 권위에 기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허망한 느낌 속에서 서로를 원망하며 살게 된다. - P18

각론은 없는데 총론만 되풀이 외치는 구호적인 사회, 거창한 이론과 전문 용어는 누구보다 잘 외우고 있으면서 막상 자신의 이야기는 할 줄 모르는 이들이 큰 목소리를 내는 세상, ‘지식 수입상‘이성업 중인 사회에서는 특권층으로서의 엘리트나, 책 속에 빠져서 소일하는 ‘학자‘는 있을지 몰라도 지식인이 나오기는 힘들다.
그러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없는가? 아니면 자기 이야기들은 전혀 하지 않고 사는가? 실은 우리처럼 자기 이야기를 많이하는 이들도 드물 것이다.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우리는매우 활발하게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런 이야기의 극단적인 장면은 여자 동창생들이 모인 계모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자기 이야기‘를 하기에 바쁘다. 여성학자 구훈모 씨의 말처럼 계모임에 가면 30대에는 ‘남편 자랑‘을 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40대가 되면 ‘남편 욕‘을 하느라 신명이 나고, 50대가 되면 대학에간 ‘아이들 욕‘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이들은 삶과 분리된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은 너무 직설적이고 감정적이어서 자기 성찰적인 지혜로 이어지기에 거리가 있다. 이야기가 아니라 푸념이고 넋두리고 아우성이다.  - P25

다시 글을 읽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로 돌아와 보자. 자기 분열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괴로와하지도 않는 우리의 모습을들여다보자. 식민지적 학문 세계에 안주하고, 식민지적 생활을 누리면서 더 이상 갈등을 느끼지 않게 된 우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학문적 용어가 삶과는 전혀 유리된 것이어도 무리없이 그것을 재생산해 내는 일을 계속하지는 않는가? "자기 삶을 들여다보지 않아도되는 인문학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자기 성찰을 위한 언어가 없는 것은 얼마나 편한가? 이 복잡한 세상을 어떻게 다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단 말인가? 기계적으로 사는 것이 편하다"라면서 때로 우리는 행복해 하기까지 한다. 그런 와중에 ‘인식‘과 삶을 일치시켜 가려는 사람들은 돌팔매를 맞고 죽어 가거나 숨을 쉬지 못해 이 땅을 떠나거나, 타협한다. 타협한 이들은 자신이 포기한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모두 다같이 타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거대한 압력 집단이 되어 타인의 삶을 짓누른다. 말은 계속 겉돌고,
삶은 헛돈다. - P28

내가 우리 사회의 식민지성과 내 속의 식민지성을 인식하기까지에는 사실상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 의식은 민족 문제에 대한 자각에서 싹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싹튼 것이다.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나는 소수의 ‘중심‘에 있는 남성들이 자신의 한정된 경험을 토대로 ‘모든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처방‘을 제시하며, 주변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여성들이 주변화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주변화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 삶을 자신의 욕구에 맞추어 변화시켜가게 하는 언어의 부재와 맞닿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민족 문제와 여성 문제를 풀어 가는 방법론은, 그러므로 같은 것이며, ‘지식인‘의 범주에 드는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작업은 바로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언어를 되찾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임을 깨달은 것도 이러한 여성 ‘주체‘로 서가는 인식의 과정에서이다. - P31

탈식민화를 원하는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거울을 들이대고 스스로를 비추어 본다. 외면하고 싶지만 들여다본다. 그리고 서로에게기대면서 새롭게 태어난다. 체험이 담긴 언어, 기억을 나누기, 이런일을 착수하자고 나는 마지막 장에서 독자를 ‘꼬시고 있다.‘
본문에서 계속 강조해 온 역사성의 깊이와 끊임없이 적극적으로재구성해 나가야 할 ‘주체‘에 대한 감을 잡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탈식민화의 가능성을 보이는 영화 <서편제>에 관한 비평문을부록으로 싣는다. 민족주의 담론은 이제 더 이상 권위주의적이어서도, 본질주의적이어서도 안된다. 서로 다른 전제를 가진 집단들이공존하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그려 가는 것, 공존하는 법을터득해 가는 것, 소외의 상태를 벗어나 다들 스스로 자기 말을 하면서 즐거워지는 것, 이런 것들이 실은 탈식민화를, ‘지방‘과 ‘중앙‘의 알력을, 남녀 사이의 갈등과 계급 갈등을, 그리고 세대 사이의 ‘분단‘과 지역 ‘분단‘과 남북 ‘분단‘의 문제를 풀어 가는 지름길이다.  - P37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름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네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갑부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돌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 P38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젓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P39

학생들은 일제 시대에 교육을 받은 교사를 경멸하며 더욱 미국식 지식을 선호했으나 또한 이미 구조화된 학교의 일본식 권위주의체제에 길들여졌다. 결과적으로 이 교육은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많은 이상적인 엘리트들을 길러 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열심히 미국 영어를 배웠고, 헐리우드 영화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공산주의에대한 체질적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엘리트들은 미국을 ‘해방을 가져다 준 은인의 나라‘로 간주하여 열렬한 충성을 바쳤고, 마침 그 나라가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였기 때문에 엘리트 층의 상당수가 그 나라에 유학을 갔다가 이민으로 눌러 앉아 버리는 사태를 낳았다. 엘리트 층이 대거 이민을 간 현상에서 우리는 그 동안의 근대사가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는 지식인 집단을 만들어 내는 데 실패했음을 여실히 보게 된다.
물론 그 동안의 역사가 망명을 강요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이북에서 월남한 이들이 남한의 터주 대감들의 등쌀에 삶의 뿌리를 내리기 어려웠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변명을 하기보다 그 동안 묻어 두었던 상처를 꺼내서 치유해 가고자 하므로 생각을 멈추지 않고 이어가 보자. - P72

자신이 몸담아 온 사회의 삶을 걱정하고 이론화해 가는, 그리고 주도해 가는 엘리트 층은 실은 그리 쉽게 딴 사회에 가서 주저앉지못한다. 지식인 범주에 드는 사람은 삶을 살아가는 데 책임과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 애국심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자기를 위해서라도 이민을 가지는 않는다. ‘말‘을 포기하면서까지 자기 땅을 떠나서 살 생각을 좀체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언어란 그냥 의사 소통에 불편이 없이 말을 하는 능력을 뜻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과 아직 표출되지 않은 무의식까지도 표현해 낼 수 있는 언어 구사 능력 - P72

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서 말하는 지식인 사회의 ‘식민지성‘은 오히려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심어졌고 ‘기억 상실증‘은 더욱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실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족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민족주의 담론이 새롭게 일었는데, 이것은 ‘국풍‘ 등의 이벤트와 서울올림픽 등에서 꽃을 피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 대항 담론은 어떻게해서든 빈곤에서 벗어나 선진국 대열에 끼어들겠다는 경제 제일주의와 위계 서열적인 냉전 질서 속에 고스란히 편입된, 지배 담론의복제품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70년대 후반부터 반체제 운동권 안에서도 민족주의적 대항 담론이 형성된다. 학생 운동권과 민중 운동권은 ‘민중 문화‘를 부각시킴으로 새롭게 민족 주체성을 만들어 가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논의는 보다 포괄적인 삶의 성찰 작업으로 이어지지 못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통일‘이라는 과제를 절대 명제로 정해 버렸기때문일 것이다. - P73

창조적 오독이 아니라 입시를 위한 오독이, 문맥과는 관련없는 오독이 판을 친다. 그래서 ‘식민지성‘에 대한 논의는 지금 세대 청소년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하다. 입시 제도가 바뀌면 많은 것이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생각들을 할 뿐이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상태에서 청산 작업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일제 말기에 독립 운동 비밀 결사 조직인 ‘칠형제‘에 가담하여 목숨을 걸고 독립 운동의 연락 임무를 맡아 온 남동순 씨의 일생에 관한 글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해방 후에 얼마나 쉽게 친일 세력을 용서하고 함께 일하게 되는지를 보면서 정말 이해할 수 없어 했던 기억이 난다. 해방 후에 남씨는 ‘칠형제‘를 집요하게 추적하던 조선인 형사가 목숨을 구걸하러 나타나자 호통을 치다가 "그 사람 따지고 보면 친일파지만 그 당시에는 자식들하고 먹고 살려고 그런 일 안한 사람 거의 없었고 불쌍한 생각이 나서 육군 소령 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씨는 자신이 좌익으로 가야 할지 우익으로 가야 할지를 이 형사에게 묻기까지 한다. 이것을 행동 대원의 단순함에 기인하는 예외적 경우로 처리할 수 있을까? - P75

그런데 자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외국어는 잘할 수 있을까? 언어가 무엇인지 감이 없는 이들이나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제 국제화 시대에 들어섰으므로, 우리는 더욱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훈련을 시켜가야 한다. 그러면서 훌륭한 번역을 해내고, 훌륭한 동시 통역을 할 전문가들을 길러 내야 한다. 국민 대중이 외국인을 만나 일상적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국제화‘가 아니다. 외국에 내놓을 작품도 없으면서 번역만 한다고 세계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세계적‘이 되는 길이다.
우리에게 언어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역사는 있는가?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싶어하는가? 자기 생각을 드러내기 위한 언어를 우리는 진정 갖고 싶어하는가? 선배로서 역사의 무게를 덜어 주지도, 풀어 주지도 못하면서 계속 ‘쌓이게‘만 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런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단도 직입적으로 던져야 한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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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밖에서 훈련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실내 온도가 올라 담요도 그 무엇도 덮지 않았는데 몸에서땀이 난다. 더구나 기온과는 별개로 확실한 열원이 존재하여 더욱 땀을 부른다. 이사나는 그 열원을 물리치려고 손바닥을 뻗었는데 거꾸로 작고 뜨거운 손바닥에 그의 손바닥이 밀려났다. 진이 병에 걸렸다는 깨달음은 전기 충격처럼일순간 그의 잠을 싹 달아나게 만들었다. 진이 이사나가 건네는 말 혹은 손길을 거절하는 건 그 몸이 병에 걸려 괴로울때 말곤 없기 때문이다.
"진, 덥니? 아파? 진, 진, 어디 아픈거야?" 이사나가 안쓰러운 마음에 급박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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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 무렵에는 예를 들면 야생 동백꽃이 우거진 가운데 술에 취한 아이들처럼, 꽤나 위험한 폭발력이 내재된 천진난만한 것들이 모여 피우는 소란과 종종 맞닥뜨렸다.
그럴 때 그는 나무의 대리인으로서 숨 막힐 정도로 얼굴을 새빨갛게 부풀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유혹적이고도 무서운 외출을 할 때마다, 싹을 틔우거나 틔우려는 여러 종류의 작은 가지를 꺾어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돌아와, 셸터 테이블에 흩뿌려놓았다. 처음에 그는 작은 나뭇가지를 관찰하며 싹 틔우는 힘,
싹 틔우는 의미를 새해에야말로 완벽하게 밝혀보리라 단단히 별렀다.  - P11

비록 싹이 나오기는 했어도 아직 발아할 징후가 없는 동안 나무의 혼은 밑동에 오므린 채 겨울잠을 자고 있다. 나무와 교감하길 늘 바라는 그는 그 견고한 동면에서 배우는것이 있었다. 겨울바람이 나무 우듬지로 불어대는 밤에도,
악몽 한 번 꾸지 않았다. 그러나 벌거숭이 나무가 움트기 시작하자마자 그는 온몸에 털이 솟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자신에게 위해危害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는 기분이기도 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서 발정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징조가 나타나서 그를 단호하게 몰아내고 말 것이라는 예감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같은 전환기에는 거울 속의, 전 육체·전 의식을 다하여 무엇인가를 향해 탐욕스럽게 열려 있는 스스로에게 질려, 수염을 자를 때도 손으로 더듬어가며 잘랐다. - P12

그렇게 이 지적장애아는 적어도 50종의 들새 소리를 식별할 수 있어 그 새들의 소리를 듣는 것에서 식욕에 필적하는 쾌락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기 내부의 울적함에 가로막혀, 두견새나 붉은배오색딱따구리, 쏙독새 소리처럼 특징적인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대부분 구별하지 못하는 이사나도 한없이 미세한 들새 소리와 그보다도 더 작은 아이의 소리를 매일 몇 시간 동안이나 온화한기쁨을 느끼며 들었다. - P14

"고래나무라!" 이사나는 감명을 받아 동요하며 날숨을 내듯 말했다. 고래나무, 입니다. 라는 진의 목소리가 뒤따르지 않는 것을 어딘가 불안하게 느끼면서.
그런 채로 이사나는 자기 눈앞에 실제로 보이는 것과는다른, 또 하나의 공간을 발견했다. 그것은 끝없이 넓게 펼쳐진 초원을 향해 선자 혹은 바다를 향해 선 자만이 경험할수 있는 광대한 공간으로서, 도시에 정주한 이래 잃어버렸으나 환영으로 재현된 그 공간을 가득 채우며 단 한 그루의나무가 만드는 거대한 숲, 즉 고래나무가 나타났다. 굵은 나 - P124

무줄기 위로 벼처럼 무성하게 뻗은 가지들에 작은 잎이 빽빽하고 방대하게 퍼져 있어,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흰수염고래와 같은 위용을 드러냈다. 거기다 무성한 이파리가 만들어내는 머리 부분에서 작고 검으며 영리해 보이는 눈이천진난만하게 미소 지었다. 그 고래나무 전체는 그리움 그자체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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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과 ‘랭킹‘은 평소 내가 사용하지 않는 말이므로, 이 글은 잠시 일탈이다. 지식인은 해체된 지 오래된 단어다. 임시 복원한다면, 자기 노동과 일상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있다. 통념적 의미로 그냥 쓴다면, 우리 사회에는 세 유형의 지식인이 있다. 지식이 없는 사람, 지식인이라고 주장하고 간주되는 사람, 서구 지식과 ‘지금, 여기‘의 경합을 쓰는 사람이다. 조혜정 ‘선생님‘은 세 번째에 속하는 극소수 중 한 사람이자, 그중에서도 선구자다.
종종 출판 단체나 신문사에서 ‘명저 50선‘이나 ‘주목받는 저술가‘ 같은 명단을 만드는데, 재고되어야 한다. 사회 각 분야는 다양하다. 보이지 않는 분야가 너무 많다. 레즈비언이나 장애인 관련 도서는 선정되기 힘들다. 하지만 만일 나더러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책 열 권을 선정하라면 아홉 권은 모두 이 책 다음이다.

정희진처럼 읽기 P- 231

나는 학생들이 자신의 입장 천명 식으로 생각을 정리하기보다 지금까지 교실에서 해온 논의와 연결하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개집단이 만들어내는 언설의 구조를 뚫어보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랐다. 감을 잡아내기 어려웠던 언설의 문제가 불꽃 튀는 현실로 나타난만큼, 텍스트의 당파성과 언설이 갖는 힘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있기를 바랐다. 더 나아가 그 ‘큰 목소리‘들이 실은 얼마나 미약하기에 손쉽게 매스컴에 의해 요리되어 버리는지, 그래서 통치자들이 얼마나 손쉽게 지식인들을 분열시키고 통치에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지를 알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동안 커온 지식인들이 지속적인 토론공동체적인 문화 그것이 가족문화이든 또래문화이든 운동권문화이든 간에 속에서 자라오지 못하였으므로 토론에 미숙할 수밖에없으며 그래서 필요 이상의 강한 어조와 독선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논리적‘, ‘현학적‘ 치장을 하게 된다는 것도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상대방의 말을 그 말하는 스타일이나 성격도 감안하며 본래 선한 의도로읽어내기보다 감정적으로, 또는 꼬투리만 잡는 식으로 읽는 경향이 강 - P120

한 지금의 지식인 사회의 극심한 당파성과 무성한 "토론 없는 토론들"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어쩌다 나온 선견지명도여지없이 사그러져 간다는 것도....
자신을 감춘 ‘이론적 책 읽기‘나 입장 천명에 급급한 ‘감정적 책 읽기‘를 하는 식자 사회는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이렇게 극단적 규범주의와 교조적 유물론자로 당파가 갈려 싸우기 시작한 것은? 물론 입장은 없이 극단적 명분론만 되뇌이던 때에비한다면 우리 지식인 사회는 근래에 들어서서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다. 대다수 지식인들이 자기가 선 자리를 점검해 보고 자신을 비추어볼 비판의 거점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분명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론적 토론은 그것이 삶을 읽어내는 데 도움이 되는 한 유용하다. 그런데 ‘내‘가 없는 토론에 익숙해진 지식인, 문화 읽기를 어려워하는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풍토에서 그런 생산적인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 P121

오늘이 통일신라의 종교에 대해서 배우는 날이라면 선생님은 먼저 신라의 종파에는 ‘5교 9산‘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중략) 첫머리 글자인
‘열, 계, 법, 화, 법‘을 따서 외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노트에 ‘열계법화법‘이라고 써놓고 맹렬하게 외우기 시작합니다. 선생님은 다시 열반종의 중심 사찰은 경복사 (중략) 우린 다시 사찰의 이름을 외우기 시작합니다. ‘경통분부금, 경통분부금, 경통......?
선생님은 또 고려시대의 구호시설에 대하여 외우라고 하십니다. ‘흑의상제헤대태, 흑의상제혜대태......
어느 땐 조선조의 사고(史庫)에 대해서 외웁니다.
‘춘충성전- 춘오태마- 춘오태정 - 소동서서‘ (중략)그런데 어느날 일제시대의 문학에 대해서 강의하시던 선생님은 이 세계의 모든 문학은 사조별로 ‘고낭사자상초‘, 즉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순으로 발전돼 온 것이라고 우리들에게 외워두면 도움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외우는 척하다가 나는 그즈음 동생에게서 빌려 읽던 ‘어린 왕자‘에 생각이 미쳐 ‘쌩떽쥐베리는 무슨 주의‘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런 건 몰라도 된다고, 자신이 모르는 것은 절대로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김혜순 1991, 《낮게 나는 새가 자세히 본다) 책나무 출판, 89-92쪽) - P162

 다른 예를 들어보면 지방 국민학교 교사가 <우리 고장 이야기>라는 주제로 공부하는 시간에 그 고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아이들이 집에 가서 "우리 선생님은 공부는 가르치지 않고 이야기만 한다"고 일렀다는 것이다. 몇년 전에 나는 국민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 마지막부분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원고를 쓴 적이 있다. 반응을 보기 위해 국민학교 6학년 아이에게 읽혀본 적이 있는데 이 공부 잘하는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재미는 있지만 교과서는 될 수가 없겠어요. 어디다 밑줄을 쳐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이렇게 국민학교 고학년이면 벌써 입시 중독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현재와 같이 형편없는 수준의 사지택일형 시험공부만 하다보면 학생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교과서 안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현실과 관련이 없는, 외울 수 있는, 그러면서 점수 차이를 낼 수 있는 단편적 지식들"을 요약 정리하고 출제자가 기대하는 정답을 찾아내기에 급급해진다. - P164

달리 말해서 "문명의 4대 발상지는?" 하고 질문이 떨어지면 퀴즈의 답을 맞추듯 답을 재빨리 찾아내는 훈련을 누구 못지않게 받게 되며 이때 이들은 문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 본다든가 기준을 정한다는 것은 상상해 보지 못한다.
자연히 암기력에 바탕을 둔 기계적인 사고를 하게 될 뿐 다른 식의 사고, 곧 비유적인 사고라든가 독창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들은 커다란 틀 안에서 개념과 기준이 먼저 주어져야만 머리를 굴린다. 이 <문화이론> 수업이 괴로운 것은 개념 규정을 확실히 해주지도,
생각을 정리할 기준을 명확하게 주지도 않은 채 진행되기 때문이다.
정답을 잘 찍어내기 위해서는 변화무쌍한 실생활과 연결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시험을 잘보는 황금률 중에 하나다. 실생활과 관련시키다보면 헷갈리기 일쑤이고 그러면 틀리게 된다. 적당한 수준에서 머리를 - P164

굴려야 하며 너무 추상적으로나 너무 현실적으로 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공부‘를 위한 말과 생활을 위한 말은 일찍부터 분리되며, 삶과 따로 노는 지식이 ‘공식적‘ 지식으로 군림하게 된다. 학생들이 단편적 지식을 조립하는 기계적인 사고훈련만 받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이들은반복적 ‘공부‘ 과정에서 엄청난 ‘의지력‘과 참을성도 기르고 극심한 경쟁심도 갖추게 되며 자기 속의 소리를 듣기보다 항상 남(특히 입시출제자)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치를 보는 기술도 배운다. 이런 모든 능력은 거대규모의 생산공장에서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하는 산업 역군이가져야 할 가장 필요한 자질들인지도 모른다. 상관의 마음을 잘 읽어내고 경쟁심을 늦추지 않으며 시키는 일이 아무리 자기 마음에 들지않아도 기계적으로 꾸역꾸역 해내는 인내심을 가진 탈정치화된 인력양성의 차원에서 말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은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는
‘지식인‘과는 거리가 먼 단순 체제 인간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 P165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선택한 책을 그 책이 출현한 구체적역사성 속에서 읽어내는 일일 것이다. 저자가 뜻한 바를 ‘정확하게 읽어내기 위한 노력은 중요하다. 사실상 우리는 그 동안 외부에서 들여온 책을 쉽게 구입할 수도 없었고 또 정확하게 읽어낼 환경에 있지도 않았다. 비록 지적소유권 문제로 서구 사회에서는 우리를 ‘비신사적‘ 미개인으로 낙인을 찍었더라도 복사기 덕분에 우리는 이제 많은 책을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책벌레 같은 많은 서양 유학생출신 학자들 덕분에 그런 책들을 꽤 정확하게 읽어낼 수도 있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의 번역 수준을 생각하면 한심한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나 분명 진전은 보인다.
하여간 ‘정확하게‘ 읽어 내었다 해서 그것에서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학생들의 글 읽기에서 보았듯이 끊임없이 이론서를 읽고 그 개념들을 익히고 그것의 한계를 꼬집어 내고는 또 다른 책으로 전전할 수 있다. 그러나 책 읽기는 궁극적으로 창조적이어야 하고,
그래서 새로운 책 쓰기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책을 적극적이고 창조 - P183

적으로 ‘잘못 읽음‘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가는작업은 비판적 성찰을 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이 종말론적 시대에 ‘인간이 인간으로 남을 가능성‘을 확보해 가는 것과 직결된 행위이기도하다. 헤롤드 불룸은 "적 역사는 적 영향력이다"라면서 시인들이선배 시인들의 시를 誤讀함으로써 자신의 상상적 공간을 개척해 갔음을 드러낸 바 있다. 문학적 창작행위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새로운 생각은 ‘잘못 읽음‘의 결과일 것이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사회적 조건과 인지 양식에 따라 매우 달리 읽히게 마련이며 이달리 읽음을 제대로 해낼 때 ‘자기‘가 표현되고 새로운 문화가 탄생한다. - P184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세상을 바로 읽는다.
그렇다. 바로 읽는다.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총체적"으로 읽는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삶과 이어져 있는세상의 삶을 자세히 관찰하고 토론하며 보다 낫게 하는 식으로, 비판적이고실천적으로 읽는다는 말이다. - P186

스승이 없는 나는
식민지 지식인이다.
보편적 법칙에 ‘매달리는‘ 나는
식민지 지식인이다.
논문 끝에 붙은 참고서의 절반넘어가
꼬부랑 글자인 나는
식민지 지식인이다.
선배들의 눈치는 심하게 살피면서
학문적 노고는 간단히 무시해 버리는 나는
식민지 지식인이다.
만병통치약이 있다고 믿는 나는
식민지 지식인이다.
내 삶을 이론화하지 못하는 나는
식민지 지식인이다. - P187

서양인들이 새로운 시민사회 질서를 형성하고 효율적인 산업화를 해내기 위해서 보편성을 강조했다면 식민지에서는 식민종주국을따라가기 위해서 ‘보편성‘에 매달려 온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강조되는 보편성의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서양의 경우는 개인의의견이나 기존의 규범이 잘못될 수 있으며 따라서 보다 보편적인 법칙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존의 것을 의심해야 한다는 방법상의 보편성이 강조되었다면 우리의 경우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는 결과의 면에서 보편성이 부각되어 왔다. 식민지 사회에서는 이미 이론화된 것에 대해서는 감히 이의를 제기하기 않으며 그 이론의 법칙성을 ‘틀리지 않게‘ 읽어내는 면만 강조하였던 것이다. - P189

그러나 틀리지 않게 읽는다는 것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서양이론가의 직속제자가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직속제자들은 각자의 일상적 체험과 마음 깊숙히 자리한 욕망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학문은 기존이론을 다르게 읽어냄으로 발전한다는 기본상식이 거부당한 풍토에서 지식인들이 건재할 수 있을까?
이러한 상황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지식인들의 심리적 측면은 내적억압에 대한 외면과 자기 분열, 급진적 보상주의와 무기력감을 둘 수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특성이 현재의 입시 위주 교육과 깊은 관련속에서 재생산되고 있음을 앞에서 보이고자 했는데 사실상 이는 입시•위주 교육의 후유증이기도 하지만 이 문제의 뿌리는 더 깊은 곳에서 찾아져야 한다. 지식이 겉도는 우리네 삶에 대한 역사적인 분석과 그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론적 논의가 더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P189

우리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지식의 불모지에서 살아왔고, 그래서우리들의 이야기는 그만큼 보잘것없는 꼴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아직은 단편적이고 횡설수설하는 헛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움을 심는 세대‘는 그 ‘보잘것없는 우리 이야기‘의 터에 씨를 심어가야 할거다. 그 속에 ‘발가벗은 임금님‘을 발가벗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고 서로를 감싸주는 이야기도 있으며 세대로 이어갈 지혜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창하고 화려하고 세련된 무수한 ‘겉도는 말‘에유혹 당하지 않도록 서로를 도와주면서 우리의 삶을 토론할 수 있는
‘말‘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자. 우리 삶 한가운데서 나오는 지식, 자신의 내면에서 삭혀서 나오는 글을 쓰자. 힘을 빼기보다 힘을 솟게 하는글, 만병통치약을 바라는 조급함 속에서 쓴 글이 아니라 ‘우리‘를 만들어가는 여유 속에 쓴 글, 생각을 풀어주고 마음을 풀어주는 그런 글을말이다. 겉도는 말을 쓰라고 부추기는 준거집단을 가졌다면 지금은 용기있게 그 물을 떠날 줄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삶을 헛돌게 하는 강의에 참을성을 잃고 교실을 스스럼없이 걸어나갈 수도 있어야 할거다. - P193

이렇게 이제껏 미화되어온 가부장적 현상의 밑바닥을 노골적으로 공론화함으로써 그는 많은 독자들을 분노하거나 감동케 만들었다. 그리고 독자들은 박완서의 책을 읽고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분쟁을 일으켜 왔다. 우리가 위의 비평에서 읽었던 내용도 실은 그 분쟁의 생생한 일부인 것이다. 바로 이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부분이 박완서가 작품을 통해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우리가 앞으로 주목해야 할 두번째 주제이다.
박완서는 여성 독자들에게 새로운 글 읽기 체험을 하게 하였다. 이제껏여성들은 아버지의 서재를 기웃거리는 즐거움, 남자들만이 할 수 있는 여유있는 방황과 방랑을 엿들으며 그것이 글 읽는 즐거움인 줄로만 알았다. 별로 재미없는 글도, 재미있는 척 읽어야 했으며 또 남성들의 글 쓰기 흉내를내거나 그들의 기호에 맞는 글을 쓰느라고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왔다. 이제 박완서는 여자들로 하여금 직접 길을 떠나고 또 방황하게 함으로써 그 길 떠남이 책 읽는 재미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또한 흉내내지 않는 글 쓰기의 맛을 보여주고 있다. 여자들로 하여금 서 있는 것, 글을 쓰는 것, 살아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진지한 토론을하게 하는 것이다. 한낱 사치였던 책 읽기가 이제 삶의 실천의 장으로 들어 - P252

왔다. 여자들의 안방을 사회와 연결시키고 여자들의 수다를 담론화한다. 여성들의 글 읽기와 글 쓰기의 정치성이 박완서의 작품을 통해, 그리고 그 작품에 관한 담론들을 통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 이야기꾼과 남성 이야기꾼이 즐겨 삼는 이야기의 주제, 등장인물의 성격, 이야기의 스타일이 다르고 또 똑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독자가남자인지 여자인지, 남성적인지, 여성적인지에 따라서 그 글 읽기가 상당히•달라진다는 점을 한번 더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회는 구태여 이런 전제에 구애받지 않고 책을 쓰고 또 읽게 되는 세상일 것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선 우리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가부장적인 전제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알아내야만 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자신이 자유롭게 떠놀던 물의 성격을 알아가는 것과 같아서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 결코 손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내야 한다. - P253

비평가는 책을 읽는 사람이며 그 행위는 일반 독자가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여러 번 이 글에서 말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비평가는 이야기꾼을 격려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의 작품세계의 의미를해독하는 데 좀더 많은 시간을 쓴다는 데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이 글을 쓰면서 성의 있는 독자이고자 노력을 했으나 여기에 언급한 모든 비평가들에게 당당할 수는 없다는 느낌이다. 언제쯤이나 ‘힘이 들어가지 않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경황없이 쓴, 무성의한 글, 그리고 독단적인 ‘죽임‘의 글을 읽어야 하는 괴로움에 더하여두어편의 비평문에 대해서는 ‘살려내기보다‘ 죽이는 일을 더 많이 하지 않았나 하는 찜찜함도 없지 않다. 끝마무리를 그나마 한 것은 ‘죽임‘의 비평을 ‘죽임‘으로써결국은 ‘살림‘의 글로 읽힐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여간 글은 한번 쓰면 글쓴이의 손을 떠나 공공적 재산이 되어버린다. 개개 이름이 무어 그리 중요할까? 내가 알아낸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작가를 통해 확 - P253

인할 의사가 애초부터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삶 읽기를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여기서 내가 한 책 읽기가 가장 옳은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 않다. 어차피 우리는 주관적 인식에 근거하여 글을 쓰며 그 생각의 옳고 그름은 작가가, 독자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어우러져 내는 담화 속에서 밝혀지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바로 그런 담화를 담아갈 열린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데 있다.
아니, 그냥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데 있다. 닫힌 것은 공동체가 아니니까....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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