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유행옷처럼 멋스럽게 걸칠 줄 아는 나는
파우스트를 멋드러지게 패러디를 해낸 움베르트 에코를 읽으며
여든살이 넘어서도 참신한 글을 써내는
레비스트로스와 갈브레이스에 관한 외신 기사를 읽으며
부러움에 젖는다.

스승이 없는 나는
문서가 소멸되는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역사를 쓸 계획이 없어서
구태여 기억을 할 필요가 없는 사회에 살면서 홀가분해 한다.

순발력 있는 나는
표방 가치와 실천 가치의 괴리를
갈등으로 느끼지 않으며
두 개의 언어를 가지고
두 개의 삶의 공간을 적절히 넘나들며
가끔씩 쓸쓸해 할 뿐이다.

이런 땅에서
반역을 도모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 P15

"번역이란 정보의 대중화, 민중화, 즉 민주화를 뜻한다.…… 칸트의 번역은 우리말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칸트 철학에 같이 참여할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칸트의 저작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않은 상황에서 칸트에 대하여 강의한다는 것은 칸트를 독점한 자가 그러한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칸트를 강요하는 일방적 부과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해방 후 오늘날까지 우리 학계를 지배해 온 주입식 교육의 정체다. 정보가 민주화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정보를 독점한 자만이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칸트를 알고싶으면 나만큼 독일어를 마스터해라. 나는 이 무기를 얻기 위해 독일에서 십년이나 배를 굶주렸는데 너희들이 감히 칸트 운운해? 시건방이런 상황에서는 수강자가 강의자의 칸트에 대한 이해의 타당성을 확인할 길이 없다. 강의자만이 절대적 권위를 가질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토론은 부재하며 상호간의 자극, 발전이 없게 되고, 따라서 그러한 학계는 정체되고 마는 것이다." - P17

어쨌든지 우리의 인문학은 여기까지 왔다. 어디까지? 소수의 번역 전문가 집단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많은 수의 지식인들이 들러붙어 "그 문장이, 또는 그 이론이 진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왈가왈부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여기까지. ‘말‘ 없이 사는 괴로움으로 각자의 밀실에서 슬퍼 눈물을 흘리며 자폐증에 걸리는 여기까지.
베버를, 맑스를, 데리다를 그의 시대적 고민을 통해 이해한다는것은 중요하다. 위대한 사상가를 많이, 올바르게 읽는 작업은 물론중요하다. 그리고 남의 연구 작업을 총정리하는 것에 일생을 보내는 학자들도 물론 필요하다. 문제는 그러한 논의가 우리 지식인들의 논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다. 자기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풀어 낼 틀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의 외국 이론 읽기는 위험하다. 일상적 삶을 무시함으로 평면적 분석만 하게 되고, 자체 내 토론과 합의의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 결론을 외국 이론가의 권위에 기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허망한 느낌 속에서 서로를 원망하며 살게 된다. - P18

각론은 없는데 총론만 되풀이 외치는 구호적인 사회, 거창한 이론과 전문 용어는 누구보다 잘 외우고 있으면서 막상 자신의 이야기는 할 줄 모르는 이들이 큰 목소리를 내는 세상, ‘지식 수입상‘이성업 중인 사회에서는 특권층으로서의 엘리트나, 책 속에 빠져서 소일하는 ‘학자‘는 있을지 몰라도 지식인이 나오기는 힘들다.
그러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없는가? 아니면 자기 이야기들은 전혀 하지 않고 사는가? 실은 우리처럼 자기 이야기를 많이하는 이들도 드물 것이다.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우리는매우 활발하게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런 이야기의 극단적인 장면은 여자 동창생들이 모인 계모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자기 이야기‘를 하기에 바쁘다. 여성학자 구훈모 씨의 말처럼 계모임에 가면 30대에는 ‘남편 자랑‘을 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40대가 되면 ‘남편 욕‘을 하느라 신명이 나고, 50대가 되면 대학에간 ‘아이들 욕‘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이들은 삶과 분리된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은 너무 직설적이고 감정적이어서 자기 성찰적인 지혜로 이어지기에 거리가 있다. 이야기가 아니라 푸념이고 넋두리고 아우성이다.  - P25

다시 글을 읽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로 돌아와 보자. 자기 분열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괴로와하지도 않는 우리의 모습을들여다보자. 식민지적 학문 세계에 안주하고, 식민지적 생활을 누리면서 더 이상 갈등을 느끼지 않게 된 우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학문적 용어가 삶과는 전혀 유리된 것이어도 무리없이 그것을 재생산해 내는 일을 계속하지는 않는가? "자기 삶을 들여다보지 않아도되는 인문학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자기 성찰을 위한 언어가 없는 것은 얼마나 편한가? 이 복잡한 세상을 어떻게 다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단 말인가? 기계적으로 사는 것이 편하다"라면서 때로 우리는 행복해 하기까지 한다. 그런 와중에 ‘인식‘과 삶을 일치시켜 가려는 사람들은 돌팔매를 맞고 죽어 가거나 숨을 쉬지 못해 이 땅을 떠나거나, 타협한다. 타협한 이들은 자신이 포기한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모두 다같이 타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거대한 압력 집단이 되어 타인의 삶을 짓누른다. 말은 계속 겉돌고,
삶은 헛돈다. - P28

내가 우리 사회의 식민지성과 내 속의 식민지성을 인식하기까지에는 사실상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 의식은 민족 문제에 대한 자각에서 싹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싹튼 것이다.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나는 소수의 ‘중심‘에 있는 남성들이 자신의 한정된 경험을 토대로 ‘모든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처방‘을 제시하며, 주변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여성들이 주변화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주변화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 삶을 자신의 욕구에 맞추어 변화시켜가게 하는 언어의 부재와 맞닿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민족 문제와 여성 문제를 풀어 가는 방법론은, 그러므로 같은 것이며, ‘지식인‘의 범주에 드는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작업은 바로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언어를 되찾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임을 깨달은 것도 이러한 여성 ‘주체‘로 서가는 인식의 과정에서이다. - P31

탈식민화를 원하는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거울을 들이대고 스스로를 비추어 본다. 외면하고 싶지만 들여다본다. 그리고 서로에게기대면서 새롭게 태어난다. 체험이 담긴 언어, 기억을 나누기, 이런일을 착수하자고 나는 마지막 장에서 독자를 ‘꼬시고 있다.‘
본문에서 계속 강조해 온 역사성의 깊이와 끊임없이 적극적으로재구성해 나가야 할 ‘주체‘에 대한 감을 잡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탈식민화의 가능성을 보이는 영화 <서편제>에 관한 비평문을부록으로 싣는다. 민족주의 담론은 이제 더 이상 권위주의적이어서도, 본질주의적이어서도 안된다. 서로 다른 전제를 가진 집단들이공존하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그려 가는 것, 공존하는 법을터득해 가는 것, 소외의 상태를 벗어나 다들 스스로 자기 말을 하면서 즐거워지는 것, 이런 것들이 실은 탈식민화를, ‘지방‘과 ‘중앙‘의 알력을, 남녀 사이의 갈등과 계급 갈등을, 그리고 세대 사이의 ‘분단‘과 지역 ‘분단‘과 남북 ‘분단‘의 문제를 풀어 가는 지름길이다.  - P37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름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네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갑부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돌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 P38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젓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P39

학생들은 일제 시대에 교육을 받은 교사를 경멸하며 더욱 미국식 지식을 선호했으나 또한 이미 구조화된 학교의 일본식 권위주의체제에 길들여졌다. 결과적으로 이 교육은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많은 이상적인 엘리트들을 길러 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열심히 미국 영어를 배웠고, 헐리우드 영화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공산주의에대한 체질적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엘리트들은 미국을 ‘해방을 가져다 준 은인의 나라‘로 간주하여 열렬한 충성을 바쳤고, 마침 그 나라가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였기 때문에 엘리트 층의 상당수가 그 나라에 유학을 갔다가 이민으로 눌러 앉아 버리는 사태를 낳았다. 엘리트 층이 대거 이민을 간 현상에서 우리는 그 동안의 근대사가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는 지식인 집단을 만들어 내는 데 실패했음을 여실히 보게 된다.
물론 그 동안의 역사가 망명을 강요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이북에서 월남한 이들이 남한의 터주 대감들의 등쌀에 삶의 뿌리를 내리기 어려웠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변명을 하기보다 그 동안 묻어 두었던 상처를 꺼내서 치유해 가고자 하므로 생각을 멈추지 않고 이어가 보자. - P72

자신이 몸담아 온 사회의 삶을 걱정하고 이론화해 가는, 그리고 주도해 가는 엘리트 층은 실은 그리 쉽게 딴 사회에 가서 주저앉지못한다. 지식인 범주에 드는 사람은 삶을 살아가는 데 책임과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 애국심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자기를 위해서라도 이민을 가지는 않는다. ‘말‘을 포기하면서까지 자기 땅을 떠나서 살 생각을 좀체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언어란 그냥 의사 소통에 불편이 없이 말을 하는 능력을 뜻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과 아직 표출되지 않은 무의식까지도 표현해 낼 수 있는 언어 구사 능력 - P72

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서 말하는 지식인 사회의 ‘식민지성‘은 오히려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심어졌고 ‘기억 상실증‘은 더욱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실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족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민족주의 담론이 새롭게 일었는데, 이것은 ‘국풍‘ 등의 이벤트와 서울올림픽 등에서 꽃을 피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 대항 담론은 어떻게해서든 빈곤에서 벗어나 선진국 대열에 끼어들겠다는 경제 제일주의와 위계 서열적인 냉전 질서 속에 고스란히 편입된, 지배 담론의복제품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70년대 후반부터 반체제 운동권 안에서도 민족주의적 대항 담론이 형성된다. 학생 운동권과 민중 운동권은 ‘민중 문화‘를 부각시킴으로 새롭게 민족 주체성을 만들어 가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논의는 보다 포괄적인 삶의 성찰 작업으로 이어지지 못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통일‘이라는 과제를 절대 명제로 정해 버렸기때문일 것이다. - P73

창조적 오독이 아니라 입시를 위한 오독이, 문맥과는 관련없는 오독이 판을 친다. 그래서 ‘식민지성‘에 대한 논의는 지금 세대 청소년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하다. 입시 제도가 바뀌면 많은 것이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생각들을 할 뿐이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상태에서 청산 작업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일제 말기에 독립 운동 비밀 결사 조직인 ‘칠형제‘에 가담하여 목숨을 걸고 독립 운동의 연락 임무를 맡아 온 남동순 씨의 일생에 관한 글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해방 후에 얼마나 쉽게 친일 세력을 용서하고 함께 일하게 되는지를 보면서 정말 이해할 수 없어 했던 기억이 난다. 해방 후에 남씨는 ‘칠형제‘를 집요하게 추적하던 조선인 형사가 목숨을 구걸하러 나타나자 호통을 치다가 "그 사람 따지고 보면 친일파지만 그 당시에는 자식들하고 먹고 살려고 그런 일 안한 사람 거의 없었고 불쌍한 생각이 나서 육군 소령 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씨는 자신이 좌익으로 가야 할지 우익으로 가야 할지를 이 형사에게 묻기까지 한다. 이것을 행동 대원의 단순함에 기인하는 예외적 경우로 처리할 수 있을까? - P75

그런데 자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외국어는 잘할 수 있을까? 언어가 무엇인지 감이 없는 이들이나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제 국제화 시대에 들어섰으므로, 우리는 더욱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훈련을 시켜가야 한다. 그러면서 훌륭한 번역을 해내고, 훌륭한 동시 통역을 할 전문가들을 길러 내야 한다. 국민 대중이 외국인을 만나 일상적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국제화‘가 아니다. 외국에 내놓을 작품도 없으면서 번역만 한다고 세계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세계적‘이 되는 길이다.
우리에게 언어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역사는 있는가?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싶어하는가? 자기 생각을 드러내기 위한 언어를 우리는 진정 갖고 싶어하는가? 선배로서 역사의 무게를 덜어 주지도, 풀어 주지도 못하면서 계속 ‘쌓이게‘만 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런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단도 직입적으로 던져야 한다.  - P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