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기법의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약자, 특히 여성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오지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모르거나 혼란스러워한다. 타인의 기대와 자신의 원하는 것(want)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이러한 유동성은 인간의 본질에 가깝다. 인간 행동을 설명할 때, "내가 원해서 한 행동"은 극히 일부분이다. 더 논쟁적인 지점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정하는 것은 실상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유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정체성(동일시)과 욕망의 산물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나의 선택이라고 해서 모두 수용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사회 정의와 충돌할 때는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일베‘ 같은 여성혐오 세력이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나"라는뜻이다. 내가 내 몸의 ‘쓸모‘를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와 협 - P218

상하는 삶을 의미한다.
더구나 개인의 선택이나 의지는 사회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사회와 분리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를통해 사고하는데, 그 언어가 이미 사회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전 세계에서 가장 성 산업이 발달된 국가에서 성산업으로의 진입 장벽은 너무나 낮다. - P219

대개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고정관념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어떤 맥락에서 폭력인가 아닌가 여부가 아닐까. 회유는 폭력인가? 저항으로서 폭력은? 솔직히 필자는 폭력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폭력 없는 세상은 모든 인간이 ‘쿨‘하고 우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약자는 분노하고 강자는 차분하기 쉽다. 그렇다면 약자만 폭력적인가? 이 논의는 대단히 복잡하다. 권력은 곧 폭력이라는 주장부터 권력이 있다면 굳이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논의까지. 다음의 주장을 살펴보자  - P220

"자기방어를 위한 폭력은 지성이다."(맬컴엑스) "혁명은 신적(divine) 폭력이다."(슬라보예 지젝 "폭력은 식민지인이 저항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다." (프란츠 파농) "지배자의 평화는 민중에게 비상사태이다." (발터 베냐민) "법은 조직된 공적 폭력의 코드이다."(니코스 풀란차스) "나는 그들을 알고 있다는 식의 타자화(他者化)야말로 가장 큰 폭력이다."(도미야마 이치로) "삽입성교 자체가 폭력이다."(안드레아 드워킨) 모든 대상화, 즉 내가 정의하는 네가 너다. 너의 존재는 나에 의해 정해진다는 논리, 이것이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의 폭력이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군대나 경찰 같은 공권력을 ‘합법적 - P220

(normal) 폭력‘이라고 한다. 다른 의미에서 대표적인 ‘합법적 폭력‘
은 일상에 만연한, 그러나 제대로 처벌되지 않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인류학은 의례(ritual)로서 폭력을 연구한다. 이처럼 폭력 개념을 개인의 의지에 반한 것으로만 설명할 때 우리는 폭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피해 또한 여성의 관점에서 정교하게 드러낼 수 없다. 아내에 대한 폭력도 마찬가지이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성 산업보다 더 안전하다는 일상의 인식은 가족주의에 불과하다. 남편과 손님 중 누가 더 폭력적인가? 이것은 개별 사안의 문제이며, 구조적으로는 오히려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의 폭력이 더 은폐되기 쉽다. 더구나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남성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 P221

성 노동론 주장은 사회적, 공적 임금 노동으로서성산업 종사여성들의 노동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 주장 역시 당연하다. 문제는 이 담론의 효과이다. 성 판매가 노동이라는 엄연한 사실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여성에게는 그 일이 적합하다"는 의미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여성은 잠재적 ‘창녀‘로 간주된다. 이는 성매매 찬반 논쟁과 무관하다. 변화무쌍하게 질주하는 성매매와 성 산업의 성격을 현실에 더 가깝게 드러낼 수 있는 개념이 중요하다. - P222

복지는 원래 보편적인 시민의 권리이다. 소득이 높은사람은 세금을 더 많이 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적게 낸다. 이러한 조세 정의가 실현된 상태에서 모든 시민이 복지를 누리는 것이다. 부자도, 빈자도 복지 인프라를 활용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복지개념은 시혜적인 의미, 모든 이의 권리가 아니라 없는 사람만 국가가 배려해준다는 의식이 강하다(여기서 복지 대상이 되는 이들은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이에 대한 대안적(?) 개념으로 ‘진보 세력‘은 복지라는 단어에 ‘보편적‘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여서 복지를 동어 반복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또다시 불필요한 논쟁 구도가 형성되었다. ‘보편적 복지 대 선별적 시혜적 복지‘가 그것이다. 논의가 이렇게 전개되면, 대개는 선별적 복지가 더 합리적이라는 여론이 만들어지기 쉽고, 이는 보수 진영의 ‘승리‘로 귀결된다. 시민권으로서 복지는 부자와 빈자, 사회 구조의 가해자와 피해자, 시혜자와 수혜자를분리할 수 없는 당위다. ‘가정 경제‘가 ‘나라 경제‘의 토대라면, 학교급식은 복지 이슈가 아니라 단지 일상적인 경제활동인 것이다. - P223

이 글은 ‘시간과 공간‘, ‘마음과 몸‘, ‘문화와 자연의 이분법이라는 근대 서구 남성 중심적 사유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정의하는방식이 될 때, 여성의 몸을 공간으로 간주하는 성별화가 성폭력의발생 원인이 됨을 논하고자 한다. 또한 몸/마음(이성, 정신……), 공간/시간의 이분법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그간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반대 운동의 중요한 논리적 기반이었던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주장을 문제로 삼고자 한다.
여성이 남성 주체에 의해 타자화되거나 대상화될 때 여성의 몸은공간화된다. 이때 공간 개념은 사회적 공간이 아니라 몸에 기반하 - P236

지 않은 본질주의적인(disembodiment)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 인식이 젠더 논리와 결합하면, 여성의 몸은 남성 문화를 담는 그릇으로 간주된다. 전쟁, 제노사이드(genocide, 인종 청소) 자체가 젠더적현상인데, 특히 최근 국제 사회에서 심각한 인권 이슈로 등장하는제노사이드 상황에서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은 여성의 몸이 인종화되고 성애화된 공간으로 영토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에대한 집단 성폭력이 제노사이드의 주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성폭력을 공간 문제와 연결하여 살펴보면, 공간과 젠더는 상호 연고 교직(交織, interweave)되어 서로를 생산함을 알 수 있다. 젠더가개입된 ‘공간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터‘와 ‘집‘ 분리 같은성별에 따른 공간 분리에 대한 비판이 가능할 뿐 아니라, 성폭력을근절하기 위해서는 젠더 질서의 변화와 몸, 공간에 대한 사유의 변화가 동시에 필요함을 알 수 있다. - P237

남성의 폭력을 기억하는 여성의 몸은주체의 의지대로 이동하지 못한다. 공간지각 능력은 개인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의 능동성과 관련이 있다. 인간이 존재한다 혹은 살아 있다는 근거는, 인간의 몸이 공간의 어느 구체적인 장소에 실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이 공간을 인식하는 주체로부터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공간이 인식 주체의 몸을 기준으로 삼아서만 특정하게 인식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몸이 없다면 공간도 인식되지 않는다. 폭력으로 인해 몸의 주체성을 빼앗긴 여성들은 자신의 육체가 머물고 있는 공간과 자기의 관계, 즉 공간에서 자기몸의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공간지각력 상실은 여성에 대한폭력 피해자뿐만 아니라 고문 등 국가폭력의 피해자에게서도 공통적으로발견된다). - P240

성폭력 발생 원인은 물론이고 이후 투쟁은 피해 여성 개인의 사회 의식, 자원, 장애 여부, 인종, 사회적 관계망, 학력, 계급, 외모,
나이, 건강 상태, 비혼 여부, 지역 같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한 명의 여성이 안전하지 않다면 모든 여성은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은여성 운동으로서 성폭력 운동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말이지만, 여성 경험의 공통성을 증명해야 하는 정치적 부담이 있을 뿐 아니라실제로 여성의 현실은 같지 않다. 김은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모든 여성이 일정 정도는 젠더 연속선(continuum)에서 살아간다. 즉 언제든지 여성 한 명의 피해가 다른 여성의 피해로 대치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한 여성의 문제는 모든 여성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연속선이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처지와 맥락이 다른 여성들의 젠더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 P2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투는 젠더(남성과 여성 간의 권력관계)뿐만 아니라 문화 혁명에준하는 사건으로서 우리 사회 전반의 뿌리 깊은 인습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에 문외한인 나조차 오래전부터 고은의범법 행위를 알고 있었다. 내용도 알려진 사실보다 심각하다. 그의행동은 상습적인 범법일 뿐 한량 문화도 아니고 기행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시가 계속 교과서에 실리기를 주장하는 이유는 ‘문학적업적‘ 때문이 아니다. 나는 원래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서사시, 대하소설...... 한국의 일부 남성 문인들은 자신을 예술가가 아니라 역사 서술의 주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생각이 여성에 대한 폭력의 구조 중 하나다. ‘내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민족을 대표하기 때문에‘ 타인은 없는 존재이거나 존재하더라도 그/그녀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그래서 나를 위해 봉사해야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폭력의 원인이다. - P135

친일과 반공으로 사익을 챙겨 온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에대한 차별이 불가피하다고 믿어 온 일부(?) 진보 진영의 자기 직면은 지금부터다. 고은의 작품이 교과서에 남아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교과서에는 모범적인 저자와 글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현실, 실패한 역사도 포함되어야 한다. 둘째 이유는 ‘노벨상 타령‘으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서구 콤플렉스와 남성 패거리 문화를 영원히 기록하기 위해서다. "이런 시를 쓴 사람이 그런 행동을 - P135

했고 한국 사회는 그를 숭배해 왔지만 여성들의 투쟁이 있었다"라고 적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반성 없이 탄생한 시, 성폭력 가해자가 연출한 작품은 무조건 졸작인가. 교과서는 이를 논쟁적으로 제시하는인식론을 제공해야 한다. 영화감독 김기덕은 <해안선> <나쁜 남자><빈 집〉〈스톱〉 등 작품의 완성도 자체가 황망한 경우부터 목불인견인 영화,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수작까지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공과를 따지기보다 인간과 사회는 복잡하고 모순적이라는사실을 인정하고 사유하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투명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를 포함해 현실을 세탁한 모든 텍스트는 "껍데기‘다. 우리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책들은 넘치고 넘친다. 교사는 말할 것도 없고 학생들은 한국 사회의실제 모습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현실과의 괴리로 인한 갈등도 적어지고 이후 현명한 대처도 가능해진다. 교과서는 우리를 인식할수 있는 교사이자 반면교사여야 한다. 그것이 가해자가 가해자로서 역사에 남는 방법이다. - P136

피임 방법 중 여성이 매일 복용해야 하는 경구 피임약이나 자궁내 장치보다 남성의 콘돔 사용이 안전하고 편리하지만, 대개 남성좋은 콘돔 사용을 기피한다. 성별 권력관계는 피임의 책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성이 남성에게 콘돔 사용을 강제할 협상력이없고, 콘돔 사용을 "장화 신고 달리기"라며 억울해하는 남성 문화메다, 피임은 여성의 책임이라는 의식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여성은 임신 중단이라는 자신의 몸에 대한 폭력과 사회적 낙인, 죄의식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낙태죄 폐지 주장은 폭력의 후유증을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절실한 요구일 뿐이었다. 남성의 ‘귀찮음‘이 여성의 생명권을 침해한다 - P140

낙태죄 존속과 폐지 주장 이전에 더 중요하고 효과적인 문제는 남성의 인식 교정이다. 성관계는 쾌락, 의무, 교환 등 여러 의미가 있지만 그 모든 의미의 전제는 출산을 원치 않는다면, 피임이다. 피임을 성관계의 일부로 규범화해야 한다. 여성들은 피임 자세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남성과는 성관계를 거부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성적 자기 결정권이다. 남성의 인격은 성관계 시 피임과자신의 성병을 살펴보는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 - P141

임신 중단(낙태)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생명의 소중함과 전혀관련이 없다. 피임의 책임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있다는 사고방식과 여성의 몸은 남성의 소유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성 문화에서 임신 중단은 남성 공동체가 소유한 그릇(container)인 여성의 몸에 (예를 들어 자궁宮) 주인의 허락 없이 그릇을 비우는 행위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골이 들어갔다가 그물 밖으로 나왔을 때의분노와 비슷하다. 축구는 남성 중심적인 섹스를 은유하는데, 골인(goal in)은 사정인 셈이고, 실점은 다른 남자의 정자가 ‘내 여자‘ 에게 들어가는 것이다. 자책골을 넣은 선수나 골키퍼가 살해 위협수준의 비난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 P141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의료 인력의 편중과 부족이다. 성형외과나피부과에 집중되는 것은 심각한 공중보건 문제다. ‘선진국‘ 일본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산부인과 의사 인력 부족 문제를 겪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소아 환자의 진료 거부 사태는, 성형 시술에 국가의 개입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만일 의료 인력 편중으로 ‘우리‘ 누군가 아플 때 의사가 없어서 사망한다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모든 의사가 성형외과를 전공하고(심지어 이 인력도 모자라서 정형외과 의사가 미용 성형에 동원되기도 한다), 대부업과 연계되어여성의 성형 시술을 부추기고, 일부(?) 여성들이 성형 시술로 의료인력을 독점한다면, 여성주의는 이에 어떻게 개입해야 할까. - P147

성교육은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가‘가 아니라 인권과 공중보건교육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타인 몸의 개별성을 인식하고 거리를 둘 줄 알며, 자기 몸에 대한 존중감을 키워주는 게 성교육이다.
이런 훈련은 장애인이나 외국인에 대한 무례나 폭력적 행동도 줄일수 있다. 20대에게 성 문화를 강의하다 보면 무지와 왕성한 활동이빚어낸 비극을 본다. 고통은 거의 여성의 몫이다. 초등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나는 건강교육(성교육), 정치교육, 환경교육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P151

정신이 육체를통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정상이고 합리적이며 우월하기 때문에 이로인한 시민권의 위계와 차별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노인, 유아, 임신부, 다친 사람, 여자환자, 장애인(모두 기저귀를 찬다)에 대한 비하와 혐오는 이 때문이다.
이들은 눈물, 침, 혈액, 월경혈, 양수, 대소변 같은 체액을 통제하지 똥하고 몸 밖으로 ‘줄줄 흘리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모든 가부장제 사회에서 시민권 획득 기준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결정한 사랑 예술장애인, 노인은 아닌)인 것도 이 때문이다. - P154

하지만 아무리 잘난 남자도 생로병사에서 예외일 수 없고, 그 누구도 육체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생명이 지속되는 한 체액은 우리 몸 안팎을 넘나든다. 체액은 타인과 사회에 상호 의존적인적 자아로서 인간의 존재 양식이다. 그러나 체액에도 위계가 있어서 남성 문화는 ‘기저귀 찬 사람‘을 경멸하면서도, 권력의 상징인 페니스에서 나오는 소변, 정액 같은 자기들 체액은 불결하거나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소변 방울이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배변기 앞에서 조심스러워하는 남성은 드물다. 영역 표시를 상징하는 남성의 소변을 성찰하고, 취약한 몸의 구체적 고통에슬퍼하면서 우는 남성이 많아진다면,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사고하는 힘의 원리는 재고될 수 밖에 없다. 육체의 불완전성은 인간의 한계인 동시에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다. ‘기저귀 찬 사람들‘의 목소리와 관계 맺기 이것이야말로 평화정치학의 핵심이 아닐까. - P154

"가정폭력은 사소한 집안일"이라는 인식은우리 사회의 프라이버시는 곧 남성의 프라이버시라는 걸 의미한다.
만일 국가가 사적 영역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면, 1970년대 출산통제 정책이었던 가족계획이나 그 반대인 현재의 저출산 대책, 상속세 등도 모순이며, 더군다나 시민의 연애를 관리하고 간섭하는 ‘곰신‘ 관리 제도는 어불성설이다. - P158

인간은 언어와 상징 없이는 사고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피해야 할 은유나 상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것은 국민적 거부감을 낳고 군 종사자들의 ‘격‘을 떨어뜨리는 문제일 뿐, ‘그들이 원하는 안보 의식 강화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 P170

정체성과 일상의 실천은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물이나 아동과의 관계는 합의가 어려우므로 무성애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이들이 많다. 한편 트랜스젠더나 인터섹스는 인간의 몸의 성별, 즉생물학적 의미의 섹스인 ‘male‘, ‘female‘로 구분된다는 ‘지식‘이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다양하고 유동적인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은 이들의 인권을위해서, 그리고 남성 중심의 이성애를 상대화하고 이성애의 문제들(성폭력, 성 상품화, 가부장적 성적 규범.....)을 문제화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섹슈얼리티 개념의 가장 문제적이고 좁은 개념은 남녀 간 성교(性交, intercourse)이다. 이 행위가 전부가 아니라고 인식할 때 변화도 가능하다. - P175

중·고등학교 생물 교과서는 포유류 같은 고등동물은 자웅이체, 미생물 같은 하등동물은 자웅동체 라고 가르친다. 물론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이는 가부장제가 얼마나 과학을 오염시킬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자연과학 역시 가부장제 담론임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다. 자웅이 한몸에 있거나 남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우를 인터섹스라고 한다. 이것은 ‘기형도 ‘장애‘도 아니다. 이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통계치는 그 자체로 정치학이다. 남성과 여성의 몸의 차이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따라 인터섹스를 100명 중의 1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이를 몸의 ‘문제‘로 인식하고(클라인펠터 증후군Klinefelter syndrome) ‘과학적‘ 측정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이들도 있다.  - P181

나는 ‘타인의 취향‘ 존중이나 ‘톨레랑스‘ 같은 자유주의적 사고를 그다지 선진적인(?)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는 이런 가치를 적용할 대상조차 드물다는 것이다. 다름에 대한 무지, 무시, 무감각은 모든 독립적인 타인(개인, individuals)을 타자(the others)로 만들어버린다.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기 이전에, 인간이 개인으로, 타인으로 존재하기 힘든 사회다. 모두가 우리이거나 모두가 우리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인 사회다. 톨레랑스? 관용하고 배려할 ‘다름‘ 자체가 제대로 가시화되기 힘들다. - P185

스포츠 경기에서 남녀 구분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은 누구나 안다. 다만 성별 확인이 불가피하다 해도 다른 형식, 다른 방식, 다른 사유가 있을 수 있다. 여성의 성별을 가임 여부나 몸의 특정 부위를 확인해야만 알 수 있는가. 남자 같아 보이는 여성 축구 선수 논란은 겹겹의 무지가 중첩된 사건이다. 국가정책, 지식 사회, 사회 운동을 비롯한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젠더사안을 인식하지 못한다. 평소 이에 대한 사유가 축적돼 있지 않은데다 구별 집착이 겹쳐 발생한 ‘해프닝‘이다. 그러나 이 해프닝은 에피소드가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인권 침해의 상상력을 구성하는 공포정치다. 장애인, 성적 소수자, 이주노동자, 환자, 노인(우리 모두는 나이 든다) 모두 이 ‘확인의 정치‘에서 타자가 될 수 있다.
사회 구성원 스스로 타자화의 대상이자 타자를 생산하는 주체라는 점에서 논쟁은 계속돼야 한다. - P185

누가 여성인가, 그리고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가. 해부학?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구호는 생물학‘적‘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생물학조차 과학적이지 않다. 양성이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생물학을 혼동한다. 실제로 이 둘은 정반대다. 생물학은 환경과 문화와 생명체의 상호작용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지, 본질을 캐는 학문이 아니다. 아니, 생물학뿐만이 아니다. 본질을 추구한다면 이미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 ‘신앙이다".
모든 이들은 ‘사람‘으로 태어날 뿐인데, 가부장제 사회에서만 인간을 ‘남녀‘로 구별한다. 이는 차이가 차별을 낳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어야 차별의 근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흔 - P186

한 표현은 차이를 원래 있는 것처럼 본질화하고 고정화하는 사고방식이다. 무엇이 의미 있는 차이인지 아닌지를 정하는 것은 사회적 맥락이다. 여성도 남성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으로 표시되는 것뿐이다. 성별은 없다. 억압받는, 그리고 억압하는 성별이 있을 뿐이다. 여성은 실체도 실재도 아닌 지배 규범(성 역할사회화)의 산물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특정한 여성만 여성으로 간주된다. 나이, 인종, 계급, 외모, 직업 등에 따라 여성의 개념은 유동적이다. - P187

여성주의 사상의 핵심은 ‘차이‘이며, 이는 현대 철학 전반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쳤다. 여성이라고 간주되는 집단 내부의 차이, 흑인노예 여성과 백인 중산층 여성은 성별보다 인종의 차이가 더 크다.
이 때문에 정체성의 정치에서 출발한 여성주의는 진정한 여성이라는 허명으로 다른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타자화하기도 한다.
정체성(正體性)은 "우리는 같다"는 팩트가 아니다. 오히려 같지 않기 때문에 동일시(同一) - 여성임을 자각‘ -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주의의 전부는 아니다.
이제까지 현모양처, ‘예쁜 여성‘ 같은 여성의 기준은 남성 문화가정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혐오 사태는 여성이 남성을 대신 - P187

해서 누가 여성인지를 정하겠다는 발상이다. 일단 이 ‘진정한 여성‘기획은 불가능하다. 오랜 역사를 거쳐 구성된 여성 개념은 이미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기는 작은 차이다. 작은 다름을 본질로 만드는 그것이 바로 권력이다. 자궁이 있어서 출산을 하고 저절로 육아 전문가가 된다면, 성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하는가.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저절로 여성이나 여성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성애 제도는 인간을 남녀로 구별하기 위한 강력한 장치다. 이성애는 자연의 법칙이 아니다. 동성애, 무성애, 범성애 등 인간의성적 실천은 다양하고, 이에 따라 성별 정체성도 달라진다. 성별은본디 정해진 것이 아니므로 사회적 강제를 거부하고 개인이 선택할수 있다. - P188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그들이 여성의 권리를 빼앗아 간다? 여성 우선 페미니즘? 누구도 타인의 성별을 규정할 수 없다. 이제까지 여성 운동은 민족/민중/시민 개념을 독점하면서 인권의 위계에 따른 순서("여성 문제는 나중에")를 주장해온 남성 중심의 사회 운동에 저항해 왔다. 여성주의가 진짜 여성과 가짜 여성을구별하고 배제에 앞장선다면, 그런 여성주의가 왜 필요할까. - P188

에로틱의 의미는 계속 재정의되어야 한다. 사랑이나 성애의 상대가 누구든 간에 동등함과 관계성, 인격적 관계가 에로틱한 것이며 이러한 상태(사랑)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파일은 인간의 사랑 행위 중 일부일 뿐, ‘동물과 섹스하는 사람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섹스가 아니라 동물의 삶을 성의 측면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레즈비언이 되기로 ‘선택‘
한 여성들, 아니, 주파일이 되기로 ‘선택‘하는 사람들은 다른 모든인간처럼 더 나은 삶을 원한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선택한다는것은 성적 지향에 머무는 일이 아니며,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인생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성애자와 주파일 중 누가 더 성과 사회에 고민이 많겠는가. 그런 면에서 주필리아는 여성 노동의 성애화, 여성 섹슈얼리티의 상품화, 만연한 젠더폭력, 구조적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남성 문화에대한 강력한 비판이자 새로운 목소리다. - P196

성별 의제를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눈다면, 하나는 차별을 정상화하는 성별 분업(이는 곧 여성의 이중 노동이다)을 극복하기 위한평등권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양성 자체의 구분을 문제 제기하는것이다. 물론 이 두 의제는 상호 보족적이며 현장의 상황에 따라달라진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전략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 무엇이 의미 있는 차이이고 의미 없는 차이인지를 규정하기 때문에, 차이는그 자체로 언제나 문제가 된다. 의미 없는 차이는 만들어지지 않거나 ‘다양성‘ 등으로 탈정치화된다. 차이는 선재(先在)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만들기 위한 전제다. 세상의 어떤 차이도 의미 없는 것은 없다. 이것이 차이의 정치학이다. 그러므로 여성, 장애인, 성적소수자의 이해가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고 또 연대해야 한다. - P210

인터섹스의 가시화는 1) 그 상태도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 2) 남녀는 모두 뒤섞인 사회적 몸(social body)이라는 것 3) 몸의 차이는 연속선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즉 여성, 장애인, 성적소수자의 인권 (이들을 인구수로 합치면 전 인구의 과반을 훨씬 넘는다)을 완전히 다른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게 한다. 한마디로 인간의 기준을 바꾸는 것이다. 기존의 인권 개념이 백인 남성을 모델로 하여 약자에게까지 그것을 ‘적용‘(배려, 시혜, 관용...…)하는 과정이었다면(그조차 가능했던가?) 인터섹스는 사람의 개념을 새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인식론이다.
이 글이 강조하는 것은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을 깨자‘라거나 ‘비정상의 정상화‘가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 원래 그런 것은 없다.
그것은 권력의 선택이고 담론의 구성이다. 케이트 본스타인은 말한다. "젠더를 이야기하는 데 이렇게 힘을 많이 쏟아 붓다니, 도대체 사람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던 시절에는 세상이 어땠을지 궁금하네. " - P2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흑인 난민, 노숙인은 쉽게 가해자로 간주된다. 현실은 다르다. 미투 운동에서 보았듯이 예술, 학문, 종교계의 성폭력이 더 교묘하고 만연해 있다. 조직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남성 주도 인터넷커뮤니티에서는 ‘한국 여성 보호=난민 반대‘와 ‘난민이 못된 한국여성을 강간해야 한다=난민 찬성‘ 입장이 싸우기도 했다. 왜 ‘난민은 남성‘으로, ‘한국인은 여성‘으로 대표되는가. 한국 남성은 한국인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가? 집단의 성별적(性別的) 재현. 이는 난민을 위협 세력, 침략자로 만드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한국 남성이 이주 여성에게 자행해 온 폭력이 드러나지않는다.
난민은 ‘우리‘의 거울이다. 수용이나 혐오 등 차이에 대한 태도는민주주의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자국민 우선? 아니, 누가 자국민인가? 도처의 양극화를 보라. 어느 사회 내부도 균질적이지 않다. 여성주의는 정체성의 정치가 아니다. 사회정의를 위한 수많은 주장중에 가장 창의적인 사고일 뿐이다. - P89

여성의 경험을 대변하는 언어가 없는 사회에서, 여성주의 언어는여성의 삶을 갱신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이는 여성뿐아니라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식민 상황에 놓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금지된 말, 나를 억압하는 말, 늘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지만 그런 말의 부재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투명한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나의 언어고 어디까지가 지배의언어일까, 사회적 약자에게 이것은 생존의 화두다. 나를 적대하는세상에서 "어떻게 말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언어 자체가 센더 혹은 권력의 산물이라는 진리는 새삼스럽지않다. 디아스포라 지식인 차학경의 <딕테>나 정치철학자 이정화和)의 중얼거림의 정치사상 - 요구되는 시선, 슬픔에게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게로처럼, 나도 기존 언어의 질서 자체를 질 - P90

문하는 글을, 감히, 쓰고 싶다. 지금 이 글의 주제인 ‘고백, 기억, 자기 서사, 주체화, 치유 불능의 관점에서 보는 미투 운동‘에 대해 나는 솔직하게 제대로 ‘지적으로 쓸 수 있을까. 미투뿐 아니라, 여성의 범주를 부정하는 여성으로서, ‘다른 목소리(메타 젠더)‘를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간 겪었던 모든 부조리한 일들을 다 쓰리라‘는 망상에 잠시 흥분한다. - P91

사실 미투는 젠더 질서의 소립자일 뿐이다‘. 미투 운동은 ‘적폐청산(가해자 처벌)‘은 기본이고 미투의 구조인 사회 바닥에 가라앉은점토와도 같은 시스템, 젠더 질서를 파헤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미 벌어지고 있는 바, 미투는 일시적 스캔들, 남성 사회의반발, 인간성을 의심케 하는 잔인한 뉴스로 치부될 것이다. 여성에대한 폭력은 끔찍하게 정상적인데, 사회는 이것을 ‘소수의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일탈‘로 취급한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남성 사회의 정상성을 유지하려면, 여성의 정신 상태가 ‘이상‘ 해야 한다. 여성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과 들은 것 사이에서 분열하면서, ‘내 남자‘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에서 보듯, 나를 지켜준다는 남자가 가장 위험하다. ‘멀쩡해 보이는 남성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고, 많은 여성들이 소중한 인생을 남 - P91

성 문화의 덫에 걸려 분노와 자책의 시간을 보낸다. 미투는 여성들이 시간을 되찾기 위한 변화와 재생의 과정이다.
거듭 말하면, 미투는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런 글은
‘속삭임‘이어야 한다. 나는 요즘 스탈린 시대의 내밀한 이야기, 올랜드 파이지스의 속삭이는 사회>를 자주 상기한다. 속삭임을 쓰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미투‘에 동참하지 못했다. 나의 가해자는 남녀 커플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비윤리적인 행동을 감추기 위해 온갖 방식으로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나는 사법 처리를 원했지만, 모든 변호사가 다 만류했다. 내가 당한 일을 나도 못 믿겠는데,
누가 믿겠는가. 다만 내가 절망한 이유는 그들이 우리 사회 최전선의 ‘진보 인사이자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이다. 이런 정황에서 누가
‘스탈린‘이란 말인가? 며칠을 기진하다가 그간 우리 사회를 변화시켰던 수많은 내부 개혁자들에게 고개를 숙였을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매일매일 마음속으로‘만‘ 미투를 외칠 수밖에 없는다른 여성들의 사연도 비슷하리라 - P92

‘속삭이는 사회‘를 쓰려면 피를 보든 법정에 서든 증인을 불러야한다. 모두 ‘더러운 노동(dirty work)‘이다. 미투는 정당하다. 그러나 마치 예전에, 아니, 지금도 개인의 욕망을 민족의 대의로 포장하는 이들이 그랬듯이, 미투라는 대의를 내세우며 또 다른 부정의를생산하는 여성, 여성주의자도 많다. ‘대의‘와 ‘당장의 시급한 문제를 앞세우는 문화가(내가 이 글에서 실천하지 못했지만) 또 다른 ‘미투‘를 낳을 판이다. 나는 이들의 이름과 행위를 낱낱이 ‘속삭이고‘싶다. - P92

이들 중에는 남녀 불문하고 미투 운동조차 매수하는 페미니스트 피해자가 너무 지친 나머지 말하기를 포기한 ‘운 좋은‘ 가해자들 페미니즘이나 사회 운동을 ‘지나치게‘ 사적으로 이용하는 이한마디로 뻔뻔한 것이 강한 것이고 뻔뻔하면 이긴다는 성취를 맛본 이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더 놀랄 일이 무엇인가.
속삭임 대신 ‘주인의 도구‘로 쓰는 이 글은 이렇게 변명투성이다.
고통과 폭력 상황을 드러내고 공부하려면, 일단 그것과 마주해야하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다. 이를 통과한다 해도 또 다른 폭력과싸워야 한다. 나는 가정폭력(아내에 대한 폭력)과 인권의 성별화를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이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는데 23년이지난 지금까지도 "과장 아니냐?"는 질문을 받고 산다.  - P93

당시 5년간 만났던 피해 여성들의 경험 중에서 가장 ‘경미한 사례‘를 썼을 뿐인데도 말이다. 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공부하지만 폭력 근절‘보다 그 현실을 말할 수 없는 딜레마와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다. 나는 ‘과장‘, ‘선정성‘이라는 말만 나와도 얼어버린다. 나 스스로 완전한(innocent) 인간만이 사회를 비판할 수 있다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고함 여부는 애초부터 쟁점이아니다. 완전한 인간이 없는데, 어떻게 완전한 문제 제기자, 완전한피해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어차피 해석의 문제이고 가해 구조가만들어내는 것이다.
주인의 도구로 주인의 집을 부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나에게는다른 도구도 없다. 다른 언어를 추구할 뿐이다.  - P93

따라서 이 글은 객관적인 글도, ‘여성주의적‘ 글도 아니다. 만일 이 글에 의미가 있다면, "말하기와 치유, 해결은 불가능하다"라는 사실을 들추어내고 그 과정을 통해 분노의 유한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 P94

‘미투 혁명‘.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에 대해 ‘혁명‘보다정확한 명명은 없을 것이다. 모든 혁명은 미완이라는 의미에서, 곳곳에 반동이 매복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불가피하다는 의미에서, 사회 구성원에게 충격과 격세지감을 안겨주었다는 면에서, 혼란 속에서는 늘 장사꾼과 ‘밀정‘이 활보한다는 의미에서…… 모두 그렇다. 준비된 혁명은 없다. 언어도 제도도 구비되지 않은 혁명, 대안 없는 혁명, 매번 실패하기 때문에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미투는 혁명이 분명하다. 준비되지 않은 혁명은 ‘파시즘‘, ‘매카시즘‘, ‘문화 혁명‘의 성격을 띠기 쉽다. 하지만 남성 지배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려면 어느 정도의 파시즘적열정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아니, ‘파시즘‘은 여성들의 실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언론의 상업성이 주도하고 있다. - P94

특히 가해 남성에 대한 이미지 타격은 성폭력의 본질과 맞닿아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다. 성폭력을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가아니라 남성과 남성의 권력관계로 변질시키는 남성 사회의 전략은, 여성주의를 곤경에 빠뜨리는 젠더 체제의 핵심이다. 일본군 위안부문제, 전시 성폭력이 모두 이러한 인식에서 발생한 폭력이다. 강간범죄가 남녀 간의 성별 권력관계가 아니라 국가 간 민족 간 문제로 인식되면서 여성의 몸은 남성들 간의 전쟁터가 된다.
범죄의 경중과 죄질이 아니라 피해 여성을 ‘소유‘ 남성들 간의진영 논리로 사안의 중대성이 결정된다면, 이에 따라 피해 여성의이해가 좌우된다면 미투는 남성 정치의 또 다른 연속일 뿐이다.  - P97

조직 내부에서 발생한 성폭력인 경우 여성들의 건강과 직업, 꿈이 어떻게 박살 나는지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살아야 하는지는 이 글에서 따로 쓸 필요가 없겠다. 문제는 이들조차 전체 피해자의 수에서 보면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연극계를 좌우해 온 이윤택의 범죄는 끔찍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의 삶은 그와 무관하다. ‘일반 여성‘은 대개 ‘일반 남성‘에게 피해를 입는다.
그럴 경우 경찰에 신고하거나 신고를 포기하지, 미투를 하지는 않는다. 평범한 가해자에게 당한 여성의 미투를 누가 보도하겠는가.
경찰서에서 제대로 처리만 해주어도 다행이다. - P99

많은 사람들이 미투의 현실에 놀랐겠지만, 이처럼 가해·피해구조는 극히 일부분만 드러났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2004년 성매매특별법 시행 초기에 일부 남성들은 이 법이 자신의
‘행복추구권‘을 방해한다며 ‘불행감‘에서 헌법 소원을 제기한 적이있다. 사실 이들은 불행해할 필요가 없었다. 2004년 시행 당시에는물론이고 지금도 성매매특별법이 규제할 수 있는 성매매는 전체성 산업의 1~5퍼센트 정도다. 성매매의 다양성과 증식의 속도는현장에서 30~40년 헌신한 운동가들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다.
여성이 겪는 성적 폭력은 비상시가 아니라 상시적인 일이다.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실제 규모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인류 역사상 밝혀진 바도 없다. 빈발하지만 숨겨진 범죄인 데다가,
가장 중요한 점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무엇이 성적 폭력인지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언어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5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다른 분야의 여성 현실도 크게다르지 않다. 프랑스가 1944년 이탈리아가 1945년에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 P100

어려운 개념이다.
젠더(gender)는 정확하게 한국어로 번역하기일본어에서는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다. 장음) 처리하여 ‘젠다아(17)‘라고 쓴다. 섹스와 구별되는 사회적 성? 그런 논의구도는 이미 지나갔다.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사회 제도의 산물이다. 젠더는 성별(性別) 혹은 성차별(性差別)로 번역할 수 있으나 성의 구분이 모두 성차별을 의미하는 것은아니므로 나는 주로 성별 제도라고 표현한다. - P103

1949년 출간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서부터 주디스버틀러의 정체성이 아닌 수행성(performance)으로서 젠더‘에 이르기까지 사상가들의 입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젠더는 다음 세 차원에서 작동한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서로 의존하며 연결된다.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남성다움/여성다움, 남성성/여성성, 성별, 성분업, 성차별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만들어낸 차이로서 젠더다. 둘째는 계급, 인종과 함께 사회적 분석범주(category)로서 젠더, 즉 사회 구성 요소(factor)이다. 커피 자판기의 종이컵이 사회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뜨거운 물일 것이다. 이 뜨거운 물이 젠더이다. 물을 얼마나 붓는가, 몇 도의 물을붓느냐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질 것이다. 프로이트는 젠더를 인간의 무의식으로부터 드러냈다. 젠더를 고려하지 않으면 인간과 사회, 자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젠더화된 세상에서 - P103

살고 있다. 가부장제는 내외부가 없다. 다시 말해 젠더 인식이 없는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 셋째는 메타 젠더(meta gender)로서 다른 목소리‘, 새로운 인식론이다. 젠더에 기반하되 젠더를 넘어서는 ‘대안‘으로서 사유를 말한다. 젠더는 ‘여성 문제가 아니라 에피스테메(episteme), 새로운 인식론이다.
그간 젠더는 한국 사회를 좌우해 왔지만, 우리는 젠더에 대해 알지 못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세 번 젠더에 의해 결정되었다(아들 병역 비리 문제로 인해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 패한이회창과 ‘박정희의 딸‘로서 박근혜).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젠더의역할에 관한 연구를 본 적은 없다. 젠더에 대한 인식론적 지위가 낮은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남성, 여성으로서 자신의 일차적정체성, 위치성을 알지 못한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회처럼 위험한 사회는 없다. 이런 사회에서 미투는 반복될 것이다. 그것도, 진전 없는 반복이 지속될 것이다. - P104

미투는 젠더 사회의 습속(俗)이다. 미투는 혁명적이지만 일상적인 차별을 계속 문제 제기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장애인 문제나 성소수자 억압 같은 이슈 역시 ‘해결‘은 어렵지만, 우리는 대책을 세운다. 그러나 젠더 문제는 아예 개념이 없다. 이를 몰성적(genderlind)‘이라고 한다. 젠더를 논의할 인식론적 기반이 없다는 뜻이다. - P106

쟁점은 우리가 젠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다. 젠더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젠더를 이해할때 미투 운동의 위치도 가늠할 수 있다. 미투는 젠더 체제에 비하면, 너무나 갈 길이 먼 시작이자 동시에 엄청난 사건이다. 미투는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먼지만 한 움직임(범죄 신고 캠페인)이지만,
이 작은 실천조차 남성 문화는 모든 것을 빼앗긴 것처럼 분노하고있다. 그들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여성의 작은 목소리만으로도 자신들이 진공 상태에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러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남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우리가 토론해야 하는 것은 이 ‘두려움‘이 어떤 사회를 향한 징조인지, 어떤 사회를 추구하는 정지 작업으로서 미투인지를 되묻는 일이다. - P110

자기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 가해자는 괴롭지 않다. 페미니스트작가 안드레아 드워킨과 에이드리언 리치는 여성들이 성폭력으로고통받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폭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성폭력처럼 이 사건도 성폭력과 연애의 모호한 경계에서 발생했다. 성폭력인지 사랑인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성폭력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은 안 되고 사랑은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두 가지가 잘 구분되지 않는 것 자체가 더 심각한 정치적 문제라는 뜻이다. 이 남성의 행동은 성폭력의현행법 개념, 즉 물리적 강제에 의한 폭력도 있지만, 연애에 취약한
‘여성적‘ 심리를 이용한 여성의 감정 노동에 대한 착취가 주를 이루었다. - P114

나는 이 사례들이 모두 동일한 정치적 맥락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성폭력인지 연애인지, 동의였는지 강제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남성들은 여성을 인간이 아니라 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상대 여성이 사회적으로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 그 여성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다. "여자는 여자일 뿐"인 것이다. 여성이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라 ‘몸‘일 때, 모든 여성은 개인의 정체성, 능력, 지위에 상관없이 남성의 성 행동 대상으로서 개별성이없는 동일한 존재가 된다. 언제든지 몸을 기준으로 대체 가능한 물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은 ‘노동자와 자본가‘로 나뉘지만 여성은 ‘어머니와 창녀‘로 구분된다. - P115

문제는 여성의 ‘멀티‘(양다리‘ 혹은 그 이상)는 남성 연대를 위협하지 않는데, 남성의 멀티는 여성을 분열시키고 여성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남성은 멀티할 때, 다른 남자의 눈치를 볼 뿐 상대 여성들끼리 서로 어떤 관계인지는 개의치 않는다. 여성의 감정과 고통쯤은 무시해도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폭력이다.
한 여성이 다수 남성과 ‘복잡한 연애‘를 했을 때 남성들은 여성을 공유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그렇다), 반대의 경우 여성들은 자존감에 큰 타격을 입는다.
이성애 제도에서 여성과 남성의 지위는 같지 않다. - P116

남녀 모두 남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이성애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이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지 않지만, 아직도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계급, 자아존중감, 정체성이 형성된다. 한마디로 의사가 될지 의사 부인이 될지를 고민하는 여학생은 있어도 의사가 될지 의사 남편이 될지를 고민하는 남학생은 없는 것이다.
많은 남성이 성매매와 성폭력을 섹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여성이 사랑과 폭력의 연속선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그럴수밖에 없다. 교환당하는 것보다는 폭력(사랑)이 나으니까. 폭력은교환하지 않음 즉, ‘내 여자 삼음‘의 대가인 셈이고 또 그렇게 인식된다. 진짜 문제는 남성 연대를 위한 여성의 교환이다. 그래서 마음을 이용한 남자가 두들겨 패는 남자보다 더 나쁜 거다. - P1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쓰기는 더욱 어렵고 두려운 일이 되었다. 현실에 들고 나는 과정(in and out), 즉 인식 과정이 격렬해졌고 그만큼 언어화도 힘들어졌다. 근본적으로는 나의 무능력 탓이지만, 예전과 달리 이제는남성 문화뿐만 아니라 동료, 여성주의자, 여성들과 내 의견이 다른경우가 많아졌다.
분명 페미니즘은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한계 없는 자본주의, 인류세 시대의 한국 사회 페미니즘에 대한 억압과 금기, 반발은 그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 삶의 ‘기본값‘이 된 반면, 그만큼 남성 문화의 저항도 심해졌다. 이 문제의 양상은 상당히 복잡해 보인다.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의 의미는 이전과 달라졌고, 남성 문화는 그저 당황하고 있다. 다시 말해페미니즘의 대중화에 비해 한국의 여성주의 담론의 발전은 더디고,
일부 여성들은 기본적인 사회 정의에 반하는 언설(예를 들어 성소수자나 난민에 대한 적대와 탄압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 P7

있다. 한편 남성 문화의 젠더 문해력은 ‘혐오‘ 수준에 가깝다. 지난30여 년간 여성 운동이 추구해 온 젠더 관련 법들은 그 시행과 결과 모두 극히 불안정하다. 금내 몸은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에 역부족인 듯싶다. 매일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이다. 한국 사회에서 젠더는 크게 변화했지만 그변화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는 준비가 부족한 듯하다. 최소한 나는그렇다. 한편 당연하게도 30대의 젠더와 50대의 젠더는 다를 수밖에없는데, 이 차이를 두고 사회와 타인과 소통하기도 쉽지 않다.
누구나 그렇듯 자기소개는 어려운 일이다. 나는 안목 있는 독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 군 ‘위안부‘ 문제를 계속 공부하는 연구자, 남성성과 여성성이 모두 자원으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를 희망하는 사람이고 싶다. 이 중 맨 마지막은 앞의 두 가지에 비해 나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 P8

<페미니즘의 도전>이 사회 정의로서 여성주의를 소개했다면, 이책은 변화된 여성주의 정체성의 정치 위주의 담론을 분석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변화해 온 한국 사회의 성 문화(섹슈얼리티, sexuality)를 살펴보고 더불어 기존의 논쟁 구도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개인을 보호하는 공동체나 사회구조가 작동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하는 통치 방식을 가리킨다. 이때 개인들은 생존하기 위해 자신이 지닌 자원을 총동원하는데, 부모의 자원은 물론이거니와 나이, 건강, 젠더, 식사량(먹방 유튜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망라한다. 특히 여성성은 기존에는 차별과 억압의 ‘원인‘이었지만, 지금 일부 여성에게는 자원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가속화할 것이다. - P9

특히 여성이 자신의 성을 자원으로 삼기 위한 ‘자기 결정‘을 하는 경우에는 매우 논쟁적인 이슈가 된다. 다시 말해 성적 자기 결정권은 성폭력처럼 성적 자기 결정을 침해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주장할 수 있지만 성매매, 다이어트, 외모 관리, 여아 낙태처럼 여성이자신의 의지로 (대개 남성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자원, 투자, ‘처벌‘, ‘학대‘의 대상으로 삼을 권리로도 주장할 수 있게된다. 그래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나"이다. 내가 내 몸의 ‘쓸모‘를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와 협상하는 삶을 의미한다. - P18

이 책이 쉽게 읽히지 않는, 논쟁의 불씨가 되는 텍스트이기를 바란다. 여성학, 여성 운동은 모든 담론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경합을통한 생산적인 갈등 없이는 진전도 없다. 한국의 여성주의가 나아감 없이 여성의 생존의 목소리가 왜곡되어 미소지니의 타깃이 되지않기를 희망한다. 나는 여성의 공부, 다른 언어, 남성 사회가 못 알아듣는 언어가 최고의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남성 사회의 질문에답하지 말고, 그들이 못 알아듣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자. - P20

사회적 약자의 피해와 고통이 저절로 규명된다면 이미 유토피아이고, 사회 운동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 입장에서 피해가자명한 사실로 인정되고, 가해자가 ‘내가 받은 상처 이상으로 처벌받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피해와 가해 여부는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가 결정한다. 문제는 성 중립적(gender neutral) 사회는 없다는 것이고, 이는 곧 여성에 대한 성차별을 의미한다.
피해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경합적 가치다. 즉 피해를 당했다고해서 곧바로 피해자가 되는 게 아니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모두 피해자로 인정받는 건 아니다. 피해자는 투쟁으로 획득되는 지위‘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피해자의 저항은 평생에 - P24

걸친 과정일 수도 있고, 생전에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해자가 피해자라고 나서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제주 4·3 사건도 그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도 그랬다. 일상적으로는 여성이 겪는성폭력이 대표적이다.
성폭력 실태 조사를 해보면 성폭력 범죄는 범인이 아는 사람인 경우가 70퍼센트를 넘고, 범행 장소도 가해자나 피해자의 집인 비율이가장 높다. 증인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검찰과 경찰은 피해자에게 피해 증명을 떠맡긴다.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는 여전히 피해자나 여성 단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피해자가 사법 기관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 취조받는 현실에도 변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구호가 피해자 중심주의다. 사기나 절도 범죄에는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당연하기 때문이다. 어느 범죄나신고가 접수되면 피해자 말부터 듣는 게 상식이다. - P25

오드리 로드는 "주인의 도구로 주인의 집을 부술 수 없다"는 말로 이 곤경을 정확히 해석했다. 남성 문화는 남성들의 주관성을 보편성, 객관성, 과학, 전통, 국민의 뜻, 대의 따위로 포장해 왔다. 이에 대항한 여성주의 지식은 남성의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재구성하고 해체하려고 노력해 왔다. 남성도 마찬가지지만 여성의경험도 객관적이지 않다. 여성들 간에 이해의 충돌이 있을 때 어떤여성의 경험을 여성주의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지식은 맥락에서 발생하는 상황적 지식 (situated knowledge)이고 당파적/부 - P26

분적(partial)이다.
인식자의 위치도 유동적이어서 우리는 이를 유목적 주체, 과정적 주체라고 부른다. 남성 중심적 보편성이 인식론적 폭력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피해자 중심주의가 그 대응 방법이 될 수는 없다. 피해와 가해는 논쟁과 경합의 산물이며, 이 과정에서 여성주의 지식도 발전한다. 여성주의 지식이 모든 학문 분야에서 ‘최첨단‘의 질문과 문제의식으로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힘도 상황에 맞는(contextual) 사유의 힘 때문이다. - P27

성차별은 여전하다. 남녀 간 임금 격차는 여전하다 (100 대 60).
다만 변화하는 상황에 남녀가 다르게 대응함으로써, 특히 하층 계급 남성들이 자기만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김중배와 심순애 스토리로 대변되는 남성 심리, 여자는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생각은 통념-이데올로기-자격지심의 삼중합작품이다. 여성들은 남편이 돈벌이가 시원찮아도, 가사나 육아에 적극적이고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하면 얼마든지 자신이 생계를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사회적 자원과 경제력이 없을수록 열등감 때문에 시간많은 남성이 더 가사 노동을 안 한다는 것이다. 남성의 이런 상태는 여성이 결혼을 기피하는 가장 결정적 이유이자 성차별 현실을요약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사 노동을 얼마나 천시하는지(솥뚜껑운전‘, ‘집에 가서 애나 봐라‘.......), 그리고 가사 노동 전담 여성을 얼마나 비하하는지 모르는 여성은 없다. 남성 문화는 가사 노동을 루저의 상징으로 삼는다. 여성들은 이 구조를 간파했다. 더욱이 ‘외모와 능력‘을 모두 갖춘 여성들이 많아졌지만, 남성의 의식은 그대로이고 남성의 입장에서는 배우자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 P35

아예 맥락을 벗어난 기이한 일도 있다. 2022년 한국의 대통령 윤석열 부부가 동아시아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캄보디아를 방문한때 일이다. 김건희 여사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선천성 심장질환을앓고 있는 14살 소년의 집을 직접 찾아 아이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정상 배우자들의 앙코르와트 방문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대신비공개로 개별 일정을 진행한 것이었다. ‘캄보디아의 이미지)‘에 동일시하는 지구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실제 캄보디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분노했다. 동시에 이는 평범한 시민의 고달픈일상이기도 하다. 타인이나 집단이 나를 마음대로 재현(묘사, 평가,
규정)할 때는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야 할까.
대통령의 배우자는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가 아니다. ‘가난한나라‘에서 국제적인 공식 회의가 있어서 대통령을 따라간 배우자가그 나라 빈곤 지역의 심장병 아동을 찾아가, 조명을 설치했다는 루머는 뒤로하더라도, 사진을 찍고 배포하는 행위는 적절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폭력이다. 전쟁만 폭력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불가피한 전쟁도 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타인이나 집단 전체를 이용하는 행위는 가장 뿌리 깊은 폭력이다 - P43

대상과 대상화는 다르다. 누구나 대상일 수 있다. 대상화는 ‘나‘ 를 설명하기 위해 타인을 동원한다. 이성애의 정상성은 동성애에대한 낙인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결혼 제도의 정상성은 이혼과저출산이 문제라는 사고방식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다. 흰 피부의우월성은 흑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것이 사고방식으로서 ‘미소지니다.
카메라와 권총은 동반 발전했다. 사진을 ‘찍다‘와 총을 쏘다‘의 스펠링이 모두 ‘shoot‘로 같은 이유이다. 김건희의 성모 마리아, 오드리 헵번 흉내 내기는 ‘캄보디아‘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제국주의는 물자와 노동력을 착취하는 시스템만이 아니다. 그것을 당연하다고 믿게 만드는 장치까지 포함한다.
제국주의는 불쌍한 어린이를 이용해서 관용을 선전한다. 제국주의라는 용어가 불편하다면, 순한 말로 바꿀 수 있다. 주인공병,
‘관종‘, 돋보이고 싶은 욕심, "돋보이고 싶다"도 그 행동에 비한다면 너무 좋은 표현이다. 타인의 생명과 고통을 볼모로 삼아 ‘셀럽(celebrity)‘이 되고 돈을 버는 이유가 겨우 돋보이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 P46

미소지니는 대통령조차 ‘여성‘으로 격하시킬 수 있는 남성 문화를 말한다. 미소지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정(失政)을 벗은 몸으로 공격한 경우이다. 당시 나는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의 공적 영역의 지위가 성 역할로서 여성으로 환원되는 문화현상에 반대했다. 반면 김건희 여사는 경제력을 기반으로 해서 가부장제가 원하는 규범적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자원을 확보해 왔다. 외모와 교양이 그것인데, 외모보다 ‘교양 확보‘는좀 더 복잡하다. 미술계에서 일하거나 대학원 생활을 조금이라도해본 이들은 그의 경력이 모두 위조라는 것을 안다. 자신만 모르는듯하다. 그러니 "돋보이고 싶은 욕심" "(기자에게 당신도 털면 안나올 줄 아느냐"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 P49

20~30대를 중심으로 한 ‘젠더 갈등‘이 왜 중장년층에서는 그만큼 격렬하지 않을까. 갈등은 상호 대칭적인 지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차별‘이 ‘갈등‘으로 재현되는가. 정치권은 마치 여성 유권자는 없는 것처럼, 일부 남성의 눈치를 보면서 ‘남성을 위한정책‘도 없으면서 그들에게 아부하는 데 정신이 없다. 이런 상황 자체가 남성 중심의 성차별 사회라는 증거다. 선거에서든 일상에서든힘 있는 집단에는 누구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특히 정치인은 여성은 무시해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거 때조차 여성 인권을 누가 더 멀리 내팽개치나 경쟁하고 있다. 20~30대 청년의 구조적 어려움에 대응하기보다는 목소리 큰 편에서 갈등을 부추기고 선거에 이용하는 것이 ‘용감하고 책임감 있는 남성어른‘의 태도인가? 성차별을 젠더 갈등으로 둔갑시키는 이들의 ‘능력‘이 선거 전략인지 무지(ignore)인지 모르겠지만, 선거관리위원회라도 나서서 "여성도 유권자"라고 그들에게 고지해야 할 지경으로보인다. - P53

우리는 2인 1조의 사업장에 배치된 19세 청년들이 혼자 일하다 사망하는 현실을 무척 자주 목격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사라지고없는 현실이 뉴스가 되고 있다.
가장 탈정치적이고 비윤리적인 인식의 사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그래도 예전(조선시대? 1980년대)보다는 나아졌다." 우리는 과거를 살아본 적이 없다. 과거를 어떻게 아는가? 사회적 약자는 언제나 과거에 살아야 하가? 심지어 "나아졌다"는 주장은 누구의 기준인가. 장애인의 지위는 당대 비장애인의지위와 비교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서로 고통을 경쟁하면서약자에게 "당신들, 예전보다 나아졌잖아!"라고 분노하고 있다. 그핵심에 ‘이대남‘ 이슈가 자리 잡고 있다. 물론 20대 남성 내부의 인식도 같지 않다. 우리는 ‘온라인‘을 너무 믿는다. - P56

나는 성매매가 필요악인지 아닌지에 관심이 없다. 질문은 한 가지 왜 언제나 팔거나 팔리는 사람은 여성이고 사는 사람은 남성인가이다. 성폭력도 마찬가지다. 가해자가 여성인 경우는 거의 없다.
만취한 가해 남편은 아무리 필름이 끊겨도 아무나 때리지 않는다. 꼭 집에 와서 아내만 구타한다.
1992년 10월 28일 기지촌 성 산업에 종사하던 여성 윤금이(당시26세)가 미군 병사 케네스 마클(당시 20세)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처음도 끝도 아니었다.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하자마자 시작되었으며 ‘윤금이 이후‘ 격렬했던 여성 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희생은 멈추지 않으며 알려지지도 않는다. 여성에게는모든 곳이 ‘강남역‘이다. 나의 바람은 여성폭력 근절이라기‘보다‘
피해가 드러나는 것이다. - P66

남성에게 성(섹슈얼리티)은 삶의 ‘유용한 도구‘이다. 갑이 남성이고 올이 여성일 때, 권력은 성폭력으로 행사된다. 스포츠 기대주였던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코치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낙태한 후 선수 생활을 포기한 사례만큼이나, 여자 선수를 지도하는 남성들이룸살롱에 갈 필요가 없다는 ‘자랑‘이 끔찍한 이유이다.
간혹 여론은 가해자들에게 비교적 ‘고른‘ 분노를 보이거나 가해자를 옹호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판단 기준이 가해자의 폭력이 아니라 피해자의 대응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완벽한 피해자의 성폭력 피해만 인정한다. 완벽한 인간도 없는데, 완벽한 피해자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 잣대를 유독 여성에게만요구한다. 피해 여성은 끊임없이 사건 자체는 물론이고 자신의 모든 인생과 과거사를 검열당하고 변명해야 하는 상황과 마주하게 - P69

된다. 남성도 상사에게 구타당한 다음 날 ‘웃으며‘ 출근하고, 자기를 때린 사람을 위해 맛집을 검색한다. 이것이 피해자가 동의한 증거인가?
성폭력 범죄자가 강력한 처벌을 받기를 바라지만 그럴 필요도없다. 여성들은 합리적인 처벌을 바란다. 한국은 성폭력 관련 법이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이지만, 실제 법률 서비스 전 과정은 피해자에게 유리하지 않다. 대단히 지난한 과정이다. 미국에서는 몇백 년 형에 처해지는 범죄가 한국에서는 무죄 방면되는 경우가 많다. 온라인 성폭력 범죄자 손정우의 경우가 그것이다. 2018년 미국체조 국가대표팀 주치의이자 미시간주립대 의대 교수였던 래리 나사르는 여자 선수들 150여 명의 고발로 360년 형에 처해졌다. - P70

2018년에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은 구한말 노비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다. 그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어디서 왔느냐?(Where are you from?)"였다. 이방인인 그는이 질문이 고통스럽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모르는 것을 묻는다‘는평범한 의미가 아니다. "여기는 내 땅인데,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뜻이다. 익숙한 논리다. 어린 시절 어깨동무를 하고 편을 갈라 주고받던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이 노래가 시작이었을까.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노동이다. 이외의 모든 질문은 권력 행위다. 타인에 대한 물음은 호기심에서부터 신문(訊間), 힐난, 비난까지 다양하다. 묻는 자의 정체나 위치는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도 묻는 자의 교양, - P78

인격, 무지, 태도를 알 수 있다. "어쩌다 동성애자가 되었나요?"
"자네는 어느 대학을 나왔나?" "왜 아직도 취직을 못했나?" "여자가 왜 이런 일을?" 이런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인권 침해이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질문에 노출되기도하고,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 상대는 어디에서 있는지, 내가 하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러 질문들이 평생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편견이 담긴 고착된 질문은 폭력이다. 가장 괴로운 질문은 답이정해져 있는 질문일 것이다. 고문이 대표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질문은, 가해자(피의자)에게 해야 할질문을 피해자에게 하는 경우다. 성폭력 범죄가 그것이다. 조사를가장한 피해자 비난 여론 재판...... 유아 성폭력이거나 가해자가여러 명인 사건을 제외하곤(?) 피해자가 질문에 시달린다. 피해자는 목숨을 걸고 저항했는지, 거절이 얼마나 단호하고 절절했는지,
특히 자신이 얼마나 피해자다웠는지 최대한 증명해야 한다. - P79

피해자가 폭력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당사자마다 다르며, 제3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리고 피해자는 이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다.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사회 운동은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성별 권력관계는 더욱 그렇다. 가해자에게 질문하는 반(反)성폭력 운동을 제안한다.
우리는 가해자에게 물어야 한다. 왜 여성을 때렸습니까? 아내를
‘교육시킨다‘면서, 교육만 시키지 왜 죽였습니까? 안 때린다고 공 - P80

증까지 했으면서 왜 또 때렸습니까? 술을 마셔서 때린 게 아니라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 거 아닌가요? 술을 마시고도 아내를 때리지않는 남성이 훨씬 많습니다!
왜 비서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까? 왜 안마를 요구했습니까? 왜 수시로 초과 노동을 시켰습니까? 왜 해외 업무에 동반했습니까? 왜 평소엔 여성 인권 운운했으면서, 이중적 태도를 보였습니까? 왜 자신의 성폭력 재판에 부인이 나왔죠? 본인이 생각하는 성폭력과 성관계, 사랑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피해자와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왜 불륜이라고 거짓말했습니까?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폭력과 관련된 질문 내용은 그 자체로 가해자의 시각에서 구성한 것이다. 위력 행사가 자연스럽다고 믿는사회에서는 가해자의 행동이 궁금하지 않다. 대신 피해자의 대응이의문시될 뿐이다. 피해와 피해 이후의 심문, 약자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법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다. - P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날 우연히 황지우 시인과 최승자 시인을 인사동에서 만나 오랜만에 수다를 떨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아침에 집에서 수상 통보를 받고 나왔다고 하자 두 시인이
‘아 이제 여자에게도 상을 주는구나‘ 하면서 놀라워하던 일이 생각나요. 그만큼 여자들의 시를 제대로 읽어주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어요. 그 이후 미당문학상을 받았을때도, 대산문학상을 받았을 때도 제가 여자로서는 처음그 상을 받았다, 그런 보도가 뒤따랐지요. 그만큼 여자에게는 비평도, 수상도 인색한 시대였어요. 저는 비평가들에게서 이해를 바란다기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하나근거 없는 비방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게 바람이었지요. 그 당시 제 시집에 대해 글을 쓴 비평은 대부분 제시가 가정주부로서의 생활에서 나온 시라고 전제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언젠가는 ‘살림하고 연탄 가는 여자가 같은구절이 비평 글 속에 있어서 사석에서 그 비평가를 만나저는 아파트에 살아서 연탄을 갈지 않아요, 하고 말한 적도 있었지요. 특히 제가 시론 같은 것을 쓰니까, 제 글에서 문장을 인용해 그 내용과제시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 P145

도 했지요. 그런 식의 비평이 많았어요. 시인의 에세이는시 장르에 대한 자신의 견해 내지 시학을 쓴 것인데, 제시에 대해 일일이 저의 시론을 적용해서 서로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는, 질타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그것은 마치 제가 시론을 먼저 정립해놓고 그에 맞춰서 시를 쓰는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김춘수론이나 김수영론도 읽어보면 그런 적용을 받을 때가 많지요. 하지만 옥타비오 파스의 시론을 통해 옥타비오의 시를 읽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저는 제 시에 대한 다른 이의 비평을 읽고 나서 제시에 대한 저의 생각을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그 비평과 제시가 함께 간다는 생각을 거의 해보지 않은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어떤 평론가 한 분은 마치 형사처럼 제 시의 어떤구절이 어떤 책의 어떤 구절에서 온 것이라 설명해주려 분투하기도 했지요.  - P146

제가 등단할 무렵에는 자기 진영의 시인들에게만 평론가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지요. 그래서 시 세계가 정립된, 조금 나이 든 시인들에 대한 비평이 더 많았어요. 자신들의 진영이라 함은 무슨 세계관이나 인식이 같은 방향이라기보다 자신들이 속한 출판사 문예지에서 등단한 시인이나 시집을 낸 시인을 그렇게 여겼지요. 하지만 이런 현상들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소설가들이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고루 출간하면서 완전히 사라졌어요. 이제 출판사 간의 이념 논쟁은 그 출판사가 출간한 책을 가지고 진행할수 없게 되었지요. 그리고 비평가와 시인이 오랜 기간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는 사실상 우리나라에서는 없다고 봐야지요. 시집을 새로 출간할 때마다 같은 평론가가 그 시집에 대한 논평을 하고, 변화의 조짐을 읽어내고, 서로의문학이 고양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저는 그냥 비평을 읽어보고 말지요. 외국의 이론에 근거해 제시를 아무렇게나 절단한 비평을 읽을 때는 제 시가 그의 이론 수입의 당위를 마련해주는 것만 같아 씁쓸해집니다.  - P147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혈연으로 얽힌 관계를 정상 가족으로 보는 일종의 ‘가족주의‘를 ‘가족‘이라는 이름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가족주의로 추락시키고 있는 거지요.
가족주의는 여성주의와도 대치하고, 일인가족과도 대치하며, 혈연과 부모 자식을 벗어난 다양한 가족 형태와도 대치합니다. 자식이 있어야 가족입니까? 늘 묻고 싶었습니다. 국가주의는 가족주의의 정상성을 강조함으로써 유지되는 정당성과 당위성을 가지려고 합니다. 가족주의는 국가사업입니다. 가족주의야말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초석입니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가족의 품 안에서 쉬어야 하고, 그 체제를 유지하느라 수고하는 자본주의의 일꾼은 가족의 위계질서 안에서 상위를차지하게 되지요.  - P159

저는 ‘가족 같아‘나 ‘가족이니까‘ 같은 말들을 참으로 싫어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족‘이라 불리는 상대방은 ‘가족주의‘의 품 안으로, 가족 위계질서의 하위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의 하수인이 되는 거지요. 여자들이 나이 많은 남자나 남편을 오빠나 아빠로 부르는 것도 좋지 않아 보입니다. 여자들 스스로 자신을 상대방과 같은, 평등한 위치에 두지 않는 것 같아서 보기 좋지 않습니다. 사회를 가족화하려는 것 같아서요. 부부가되었으면 나이는 따지지 말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평등한 호칭을 사용해야 합니다. 의사가 여성 환자인 저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도, 식당에서 일하는 나이 든 여자를 언니, 이모라 부르는 것도 좋지 않아 보입니다. - P162

제 시가 만약 서양 사람들이 쓴 시집에 대한 리뷰들처럼
‘저항‘ 담론이라면 이 가족주의 이미지들의 연속성 안에서 표출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시가 ‘마음으로 쓰이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가족인, 제 심장 속의 무의식적 지옥이나 그 지옥이 일으킨 상처의 형상을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가족은 반복적인 환대와 책임과 - P171

‘문학하기‘는 읽은 만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읽은 것이 상상하기를 자극하니까요. 상상의 근육과 장소를 키워주니까요. - P179

바리공주의 저곳은 결코 선악의 ‘바깥‘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중립지대, 중간 지대라는 장소입니다. 세월호의 방송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하는 무관심, 무대응, 무데뽀無鐵砲, 그곳은 그냥, 그런 장소입니다. 뻐꾸기가 자신의 알을 남의 둥우리에 탁란하듯 악랄하지만 자연스러운곳일 수도 있습니다. 옛 시인들은 저곳을 지옥, 낮은 곳,
지하, 바닷속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바리공주는 이곳에서저곳인 지금의 죽음을 왕복합니다. 너무 자주 죽습니다.
너무 자주 경계를 넘습니다. 바리공주처럼 그렇게 이곳과저곳을 왕복하는 시 언어를 저는 아직도 계속 생각하고있습니다. - P198

‘선생‘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먼저 산‘입니다. 그러나 저는 ‘먼저 죽는‘ 혹은 ‘먼저 살다 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죽음을 학생들에게 보여야하는 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말입니다. 선생은먼저 죽는 수치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지요. 선생은 이제까지 있어온 문화를 칠판에 적는 사람입니다. 이제까지있어온 것을 말함으로써 그것을 듣는 학생들이 이제까지없었던 것을 발명하고 발견하도록 장려하는 사람이지요.
그렇기에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짓을 하는 사람이 선생입니다.
저는 수업에 임할 때 참 부끄러웠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들을 한 걸음이라도 어딘가로 내딛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제까지 제가 한 말이 이들을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할수 있었나, 늘 생각했지요.  - P208

문학은 기술적 연마가 아니니 ‘어떤 달성‘을 목표로 삼을수 없고, 그것의 결과를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문학하기도 일종의 인생의 선택인데, 이것은 낭비의 선택이고, 실패의 선택이고, 가난의 선택입니다. 황현산 선생님은 언젠가 "대학은 인생을 낭비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인문학은 경제적 성취나 기술적 성취의 면에서 보면 낭비의제도임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그들 앞에 늘 있었으나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른 문‘을 열어보기를 바랐지요. 그 문은 다른 문을 닫아야 열기가 가능한 문이지요. 고독을 선택하고, 관계를 거절하고, 상투적 어법에 분노하고, 필멸을 마주한 자만이 닫을 수 있고 다시 열 수있는 문입니다. 그 문밖에선 각자 다르게 간직한 원초적장면이 보이고, 다른 모국어가 들리고, 다른 모국어 문법이 통용됩니다. 저는 학생들 마음 안에 뿌리를 내릴, 그런귀한 말은 한 적도 없고, 그런 뿌리 내리는 말을 할까 봐 무서웠지요. 시는 늘 부정이니까요.  - P212

시를 쓰는 것은 사실 ‘설명‘을 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경찰관과 검사와 판사는 설명을 요구하지만 시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지요. 시 쓰기가 소설 쓰기와 다른 점은 이 설명을 포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지점에 있습니다. 시를처음 쓰는 사람에겐 이 설명을 포기하기가, 그리고 장식을 포기하기가 그렇게 어렵지요. 설명을 포기한 순간 시의 틀은 저절로 생겨나지요. 그다음 한국어의 결에 대해얘기할 수 있게 되지요. 자기자신과 타자에 대해 설명하려는 의지를 제거하면, 낯선 언어의 기술이 스스로 가동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자신의 글쓰기의 그 낯선발생지를 처음 본 듯 발견하게도 되지요. 여기 앉아 있지만저 먼 곳에서 발견되는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시는 설명에 소환되지 않는, 해석을 거부하는, 비평의 액자에 갇히지 않는, 모습이 정해진 것이 없는 말들이지요. 저항의 말이지만, 정리될 수 없는 말이기 - P214

도 합니다. 그러나 풍자를 장착한 시는 설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풍자의 수많은 기교가 포함된 언술 방법이 설명이지요. 그러니 시 강의가 어렵지요.
저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했다기보다 ‘시를 쓰겠다‘는그 의지를 존중했지요. 이 설명과 정보의 시대에 말입니다. 저는 학기 중에는 거의 제시를 쓰지 못했어요. 방학이되어야 비로소 제 시 쓰기가 가능했어요. 왜냐하면 수업시간에 제 시를 여러 방식의 언어로 다 풀어줬으니까요.
한번 뱉은 것을 다시 주워 담기 싫었어요. - P215

말씀하신 것처럼 시는 강력한 정치이고 저항입니다. 그것을 읽어내는 데는 읽는 사람의 힘이 필요합니다. 제가 파리국제도서전에 갔을 때, 그들은 저를 ‘저항‘ 섹션에 넣었습니다. 그들은 제시가 제 욕망을 억압하는 권력 체계에저항하는 방식의 상상력과 경험을 동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상상하는 방식속에 저항의 방식이 숨어 있다는것을 말했습니다. 권력 밖에 우리가 있지 않다는 걸 모두알지 않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권력으로부터 도망할 수도없고, 권력 자체엔 밖이 있지도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제 시를 그렇게읽지 않습니다. ‘사회의 바다‘로 나오라 하지요. 클로드 무샤르가 쓴 책 다른 생의 피부』를 보면 그는 저의 오래된 시들에 관한 크리틱에서 저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여섯단어, 제시의 위험 요소들을 색출합니다. "저항, 변신, 증식, 삼킴, 고통과 웃음." 우리나라에선 아무도 그렇게 읽지않지요. - P223

문학작품 쓰기의 마지막은 언제나 독자입니다. 작가가 알지 못하는 그 ‘누구‘들이 문학을 완성하거나 끝내주지요.
그러니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항상 열어둔 채 시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만약 문학이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을 종용했다면 그 문학은 근대적 주체로서 휴머니즘의 부활을 바라는 저자의 것이겠지요. 그는 독자가 언제나 세계 내 존재로서 질서와건강을 유지하며 살기를 바라겠지요. 하지만 시에서는 그런 권유가 불가능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네 문학이 누굴 위로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저는 당황하기도 하고화가 나기도 하지요. 위로를 받으려면 교회나 성당이나절에 가야 하지요.
44시는 연대할 수 있지만 위로할 순 없어요. 저자가 말하는것이 아니라 시가 말하게 하는 것이 시이고, 시는 언어적사건이라 생각하는 저로서는 시인마저도 언어수행적 주체, ‘시하는‘ 존재로 생각하니까요. - P240

우리가 쓰는 언어를 하나의 도구라고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언어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꺼내게 하는 무엇입니다. 이것을 시의 언어라고 불러봅시다.
우리는 시를 쓰면서 한 사람인 ‘나‘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어떤 사건을 꺼냅니다. 이것은 정말 작은 사건, 아니면 어떤 사건의 분자여서 절대로 누구도 관심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작은 사건의 분자 때문에 이 글을 쓴사람은 한 인간이 아니라 여러 사람인 한 인간, 자신마저도 벗은, 이미 존재를 탈각한 무엇의 방향으로 움직여 가게 됩니다. 그 작은 사건의 분자가 그렇게 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어가 없는 문장처럼 여러 곳에 이 사건을 출몰하게 합니다. 익명의, 어쩌면 명사를 벗은 동사로, 움직이는 시의 언어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 P244

그 작은 사건의 분자가 그렇게 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어가 없는 문장처럼 여러 곳에 이 사건을 출몰하게 합니다. 익명의, 어쩌면 명사를 벗은 동사로, 움직이는시의 언어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리듬으로 쓰인 시의 언어가 한 사람을 여러 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탈존의 존재의 글쓰기, ‘나‘ 를 죽임으로 여럿이 된, 죽은 후에 복수적 인간이 된 글쓰기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시하기‘의 리듬으로 달성되는,
검은 글씨들 밖으로 뛰쳐나가는, 리듬처럼 등장하더니 곧 - P244

사라지는 시의 모습일 겁니다. 유령이 된 화자는 거듭 출몰합니다. 동시적으로 여러 곳에, 그리고 다양한 ‘너(희)‘
를 향해, 독자를 향해. 그러니 우리는 시를 쓰면서 거듭 어딘가를 향해 열려 있겠지요. ‘내‘가 없는 곳을 향해. - P245

그렇지만 ‘시‘라는 이 이상한 제도는 문학의 관습화된 육체 속에 어떤 내밀성을 탑재한 미묘함 같은 것, 이름 없는실존이지요. 문화라는 것 안에 이 ‘시‘라는 것이 사멸한다면 그 문화는 허상일 겁니다. 시는 문화보다 자연에 가깝지요. 풍경 그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태어나서 죽는 자연 말입니다. 시는 문화의 어떤 이념처럼 특정 이데올로기 자아의 상, 이 시대 한국에서 유행하는 K 무엇처럼 국가의 상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유토피아적 공동체를상정하지도 않습니다. 시는 문화처럼 전체를 가정하지 않지요. 근대 이후 시는 늘 위기를 먹고 살고, 재난을 먹고살고 있지요. 요즈음 우크라이나에서 쏟아지는 시들이 영어로 번역되는 것을 읽고 있으면 시는 정말 위기를 먹고산다고 말하고 싶네요. 저의 시도 제 삶 안팎의 위기와 거기서 파생된 감각을 먹고 살아왔지요. 어떤 익명적 실존의 모습으로서 말입니다. - P252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개개인의 모든 일이 책이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요. 책을 쓴 사람을 모두 작가나 창조자라고 부를 수 없는 시대에 말이에요. 그 책들은 상호작용해서 독자들에게 어떤 책의 모습을 지시하고있습니다. 이것이 당대의 책의 모습이지요.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제 독자가 찾아내야 하는, 보물찾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 P282

그럼에도 무한히 사회와 역사를 넘어 다른 텍스트와 연결되고 확장되는 망상 조직을 거느리는 것이 텍스트이기 때문에 영원히, 그 책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겠지만 ‘책‘이라는 것을 향해 가겠지요. 무한히 계획되고, 무한히 구축 중인 책이라는 것이 있겠지요. 어쨌든 당대의 책이라는 것에 시 작품이라는 텍스트를 투척하는 것이 우리의 작업이아닙니까? 전통을 배반하면서, 상상력을 저곳이 아니라이곳에서 온 것이라고 믿으면서, 절대로 이곳을 위반하면서 하찮은 꿈을 써 내려가는 우리의 일 말입니다. 이곳의당대라는 그 책, 그 주변과 중심, 망각과 기억이 공존하는그 책이라는 것을 향해서 말입니다. 아직 쓰이지 않은 그책을 향해서 말입니다. - P2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