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난민, 노숙인은 쉽게 가해자로 간주된다. 현실은 다르다. 미투 운동에서 보았듯이 예술, 학문, 종교계의 성폭력이 더 교묘하고 만연해 있다. 조직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남성 주도 인터넷커뮤니티에서는 ‘한국 여성 보호=난민 반대‘와 ‘난민이 못된 한국여성을 강간해야 한다=난민 찬성‘ 입장이 싸우기도 했다. 왜 ‘난민은 남성‘으로, ‘한국인은 여성‘으로 대표되는가. 한국 남성은 한국인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가? 집단의 성별적(性別的) 재현. 이는 난민을 위협 세력, 침략자로 만드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한국 남성이 이주 여성에게 자행해 온 폭력이 드러나지않는다.
난민은 ‘우리‘의 거울이다. 수용이나 혐오 등 차이에 대한 태도는민주주의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자국민 우선? 아니, 누가 자국민인가? 도처의 양극화를 보라. 어느 사회 내부도 균질적이지 않다. 여성주의는 정체성의 정치가 아니다. 사회정의를 위한 수많은 주장중에 가장 창의적인 사고일 뿐이다. - P89

여성의 경험을 대변하는 언어가 없는 사회에서, 여성주의 언어는여성의 삶을 갱신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이는 여성뿐아니라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식민 상황에 놓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금지된 말, 나를 억압하는 말, 늘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지만 그런 말의 부재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투명한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나의 언어고 어디까지가 지배의언어일까, 사회적 약자에게 이것은 생존의 화두다. 나를 적대하는세상에서 "어떻게 말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언어 자체가 센더 혹은 권력의 산물이라는 진리는 새삼스럽지않다. 디아스포라 지식인 차학경의 <딕테>나 정치철학자 이정화和)의 중얼거림의 정치사상 - 요구되는 시선, 슬픔에게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게로처럼, 나도 기존 언어의 질서 자체를 질 - P90

문하는 글을, 감히, 쓰고 싶다. 지금 이 글의 주제인 ‘고백, 기억, 자기 서사, 주체화, 치유 불능의 관점에서 보는 미투 운동‘에 대해 나는 솔직하게 제대로 ‘지적으로 쓸 수 있을까. 미투뿐 아니라, 여성의 범주를 부정하는 여성으로서, ‘다른 목소리(메타 젠더)‘를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간 겪었던 모든 부조리한 일들을 다 쓰리라‘는 망상에 잠시 흥분한다. - P91

사실 미투는 젠더 질서의 소립자일 뿐이다‘. 미투 운동은 ‘적폐청산(가해자 처벌)‘은 기본이고 미투의 구조인 사회 바닥에 가라앉은점토와도 같은 시스템, 젠더 질서를 파헤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미 벌어지고 있는 바, 미투는 일시적 스캔들, 남성 사회의반발, 인간성을 의심케 하는 잔인한 뉴스로 치부될 것이다. 여성에대한 폭력은 끔찍하게 정상적인데, 사회는 이것을 ‘소수의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일탈‘로 취급한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남성 사회의 정상성을 유지하려면, 여성의 정신 상태가 ‘이상‘ 해야 한다. 여성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과 들은 것 사이에서 분열하면서, ‘내 남자‘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에서 보듯, 나를 지켜준다는 남자가 가장 위험하다. ‘멀쩡해 보이는 남성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고, 많은 여성들이 소중한 인생을 남 - P91

성 문화의 덫에 걸려 분노와 자책의 시간을 보낸다. 미투는 여성들이 시간을 되찾기 위한 변화와 재생의 과정이다.
거듭 말하면, 미투는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런 글은
‘속삭임‘이어야 한다. 나는 요즘 스탈린 시대의 내밀한 이야기, 올랜드 파이지스의 속삭이는 사회>를 자주 상기한다. 속삭임을 쓰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미투‘에 동참하지 못했다. 나의 가해자는 남녀 커플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비윤리적인 행동을 감추기 위해 온갖 방식으로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나는 사법 처리를 원했지만, 모든 변호사가 다 만류했다. 내가 당한 일을 나도 못 믿겠는데,
누가 믿겠는가. 다만 내가 절망한 이유는 그들이 우리 사회 최전선의 ‘진보 인사이자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이다. 이런 정황에서 누가
‘스탈린‘이란 말인가? 며칠을 기진하다가 그간 우리 사회를 변화시켰던 수많은 내부 개혁자들에게 고개를 숙였을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매일매일 마음속으로‘만‘ 미투를 외칠 수밖에 없는다른 여성들의 사연도 비슷하리라 - P92

‘속삭이는 사회‘를 쓰려면 피를 보든 법정에 서든 증인을 불러야한다. 모두 ‘더러운 노동(dirty work)‘이다. 미투는 정당하다. 그러나 마치 예전에, 아니, 지금도 개인의 욕망을 민족의 대의로 포장하는 이들이 그랬듯이, 미투라는 대의를 내세우며 또 다른 부정의를생산하는 여성, 여성주의자도 많다. ‘대의‘와 ‘당장의 시급한 문제를 앞세우는 문화가(내가 이 글에서 실천하지 못했지만) 또 다른 ‘미투‘를 낳을 판이다. 나는 이들의 이름과 행위를 낱낱이 ‘속삭이고‘싶다. - P92

이들 중에는 남녀 불문하고 미투 운동조차 매수하는 페미니스트 피해자가 너무 지친 나머지 말하기를 포기한 ‘운 좋은‘ 가해자들 페미니즘이나 사회 운동을 ‘지나치게‘ 사적으로 이용하는 이한마디로 뻔뻔한 것이 강한 것이고 뻔뻔하면 이긴다는 성취를 맛본 이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더 놀랄 일이 무엇인가.
속삭임 대신 ‘주인의 도구‘로 쓰는 이 글은 이렇게 변명투성이다.
고통과 폭력 상황을 드러내고 공부하려면, 일단 그것과 마주해야하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다. 이를 통과한다 해도 또 다른 폭력과싸워야 한다. 나는 가정폭력(아내에 대한 폭력)과 인권의 성별화를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이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는데 23년이지난 지금까지도 "과장 아니냐?"는 질문을 받고 산다.  - P93

당시 5년간 만났던 피해 여성들의 경험 중에서 가장 ‘경미한 사례‘를 썼을 뿐인데도 말이다. 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공부하지만 폭력 근절‘보다 그 현실을 말할 수 없는 딜레마와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다. 나는 ‘과장‘, ‘선정성‘이라는 말만 나와도 얼어버린다. 나 스스로 완전한(innocent) 인간만이 사회를 비판할 수 있다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고함 여부는 애초부터 쟁점이아니다. 완전한 인간이 없는데, 어떻게 완전한 문제 제기자, 완전한피해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어차피 해석의 문제이고 가해 구조가만들어내는 것이다.
주인의 도구로 주인의 집을 부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나에게는다른 도구도 없다. 다른 언어를 추구할 뿐이다.  - P93

따라서 이 글은 객관적인 글도, ‘여성주의적‘ 글도 아니다. 만일 이 글에 의미가 있다면, "말하기와 치유, 해결은 불가능하다"라는 사실을 들추어내고 그 과정을 통해 분노의 유한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 P94

‘미투 혁명‘.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에 대해 ‘혁명‘보다정확한 명명은 없을 것이다. 모든 혁명은 미완이라는 의미에서, 곳곳에 반동이 매복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불가피하다는 의미에서, 사회 구성원에게 충격과 격세지감을 안겨주었다는 면에서, 혼란 속에서는 늘 장사꾼과 ‘밀정‘이 활보한다는 의미에서…… 모두 그렇다. 준비된 혁명은 없다. 언어도 제도도 구비되지 않은 혁명, 대안 없는 혁명, 매번 실패하기 때문에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미투는 혁명이 분명하다. 준비되지 않은 혁명은 ‘파시즘‘, ‘매카시즘‘, ‘문화 혁명‘의 성격을 띠기 쉽다. 하지만 남성 지배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려면 어느 정도의 파시즘적열정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아니, ‘파시즘‘은 여성들의 실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언론의 상업성이 주도하고 있다. - P94

특히 가해 남성에 대한 이미지 타격은 성폭력의 본질과 맞닿아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다. 성폭력을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가아니라 남성과 남성의 권력관계로 변질시키는 남성 사회의 전략은, 여성주의를 곤경에 빠뜨리는 젠더 체제의 핵심이다. 일본군 위안부문제, 전시 성폭력이 모두 이러한 인식에서 발생한 폭력이다. 강간범죄가 남녀 간의 성별 권력관계가 아니라 국가 간 민족 간 문제로 인식되면서 여성의 몸은 남성들 간의 전쟁터가 된다.
범죄의 경중과 죄질이 아니라 피해 여성을 ‘소유‘ 남성들 간의진영 논리로 사안의 중대성이 결정된다면, 이에 따라 피해 여성의이해가 좌우된다면 미투는 남성 정치의 또 다른 연속일 뿐이다.  - P97

조직 내부에서 발생한 성폭력인 경우 여성들의 건강과 직업, 꿈이 어떻게 박살 나는지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살아야 하는지는 이 글에서 따로 쓸 필요가 없겠다. 문제는 이들조차 전체 피해자의 수에서 보면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연극계를 좌우해 온 이윤택의 범죄는 끔찍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의 삶은 그와 무관하다. ‘일반 여성‘은 대개 ‘일반 남성‘에게 피해를 입는다.
그럴 경우 경찰에 신고하거나 신고를 포기하지, 미투를 하지는 않는다. 평범한 가해자에게 당한 여성의 미투를 누가 보도하겠는가.
경찰서에서 제대로 처리만 해주어도 다행이다. - P99

많은 사람들이 미투의 현실에 놀랐겠지만, 이처럼 가해·피해구조는 극히 일부분만 드러났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2004년 성매매특별법 시행 초기에 일부 남성들은 이 법이 자신의
‘행복추구권‘을 방해한다며 ‘불행감‘에서 헌법 소원을 제기한 적이있다. 사실 이들은 불행해할 필요가 없었다. 2004년 시행 당시에는물론이고 지금도 성매매특별법이 규제할 수 있는 성매매는 전체성 산업의 1~5퍼센트 정도다. 성매매의 다양성과 증식의 속도는현장에서 30~40년 헌신한 운동가들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다.
여성이 겪는 성적 폭력은 비상시가 아니라 상시적인 일이다.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실제 규모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인류 역사상 밝혀진 바도 없다. 빈발하지만 숨겨진 범죄인 데다가,
가장 중요한 점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무엇이 성적 폭력인지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언어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5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다른 분야의 여성 현실도 크게다르지 않다. 프랑스가 1944년 이탈리아가 1945년에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 P100

어려운 개념이다.
젠더(gender)는 정확하게 한국어로 번역하기일본어에서는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다. 장음) 처리하여 ‘젠다아(17)‘라고 쓴다. 섹스와 구별되는 사회적 성? 그런 논의구도는 이미 지나갔다.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사회 제도의 산물이다. 젠더는 성별(性別) 혹은 성차별(性差別)로 번역할 수 있으나 성의 구분이 모두 성차별을 의미하는 것은아니므로 나는 주로 성별 제도라고 표현한다. - P103

1949년 출간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서부터 주디스버틀러의 정체성이 아닌 수행성(performance)으로서 젠더‘에 이르기까지 사상가들의 입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젠더는 다음 세 차원에서 작동한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서로 의존하며 연결된다.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남성다움/여성다움, 남성성/여성성, 성별, 성분업, 성차별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만들어낸 차이로서 젠더다. 둘째는 계급, 인종과 함께 사회적 분석범주(category)로서 젠더, 즉 사회 구성 요소(factor)이다. 커피 자판기의 종이컵이 사회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뜨거운 물일 것이다. 이 뜨거운 물이 젠더이다. 물을 얼마나 붓는가, 몇 도의 물을붓느냐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질 것이다. 프로이트는 젠더를 인간의 무의식으로부터 드러냈다. 젠더를 고려하지 않으면 인간과 사회, 자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젠더화된 세상에서 - P103

살고 있다. 가부장제는 내외부가 없다. 다시 말해 젠더 인식이 없는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 셋째는 메타 젠더(meta gender)로서 다른 목소리‘, 새로운 인식론이다. 젠더에 기반하되 젠더를 넘어서는 ‘대안‘으로서 사유를 말한다. 젠더는 ‘여성 문제가 아니라 에피스테메(episteme), 새로운 인식론이다.
그간 젠더는 한국 사회를 좌우해 왔지만, 우리는 젠더에 대해 알지 못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세 번 젠더에 의해 결정되었다(아들 병역 비리 문제로 인해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 패한이회창과 ‘박정희의 딸‘로서 박근혜).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젠더의역할에 관한 연구를 본 적은 없다. 젠더에 대한 인식론적 지위가 낮은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남성, 여성으로서 자신의 일차적정체성, 위치성을 알지 못한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회처럼 위험한 사회는 없다. 이런 사회에서 미투는 반복될 것이다. 그것도, 진전 없는 반복이 지속될 것이다. - P104

미투는 젠더 사회의 습속(俗)이다. 미투는 혁명적이지만 일상적인 차별을 계속 문제 제기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장애인 문제나 성소수자 억압 같은 이슈 역시 ‘해결‘은 어렵지만, 우리는 대책을 세운다. 그러나 젠더 문제는 아예 개념이 없다. 이를 몰성적(genderlind)‘이라고 한다. 젠더를 논의할 인식론적 기반이 없다는 뜻이다. - P106

쟁점은 우리가 젠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다. 젠더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젠더를 이해할때 미투 운동의 위치도 가늠할 수 있다. 미투는 젠더 체제에 비하면, 너무나 갈 길이 먼 시작이자 동시에 엄청난 사건이다. 미투는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먼지만 한 움직임(범죄 신고 캠페인)이지만,
이 작은 실천조차 남성 문화는 모든 것을 빼앗긴 것처럼 분노하고있다. 그들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여성의 작은 목소리만으로도 자신들이 진공 상태에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러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남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우리가 토론해야 하는 것은 이 ‘두려움‘이 어떤 사회를 향한 징조인지, 어떤 사회를 추구하는 정지 작업으로서 미투인지를 되묻는 일이다. - P110

자기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 가해자는 괴롭지 않다. 페미니스트작가 안드레아 드워킨과 에이드리언 리치는 여성들이 성폭력으로고통받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폭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성폭력처럼 이 사건도 성폭력과 연애의 모호한 경계에서 발생했다. 성폭력인지 사랑인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성폭력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은 안 되고 사랑은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두 가지가 잘 구분되지 않는 것 자체가 더 심각한 정치적 문제라는 뜻이다. 이 남성의 행동은 성폭력의현행법 개념, 즉 물리적 강제에 의한 폭력도 있지만, 연애에 취약한
‘여성적‘ 심리를 이용한 여성의 감정 노동에 대한 착취가 주를 이루었다. - P114

나는 이 사례들이 모두 동일한 정치적 맥락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성폭력인지 연애인지, 동의였는지 강제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남성들은 여성을 인간이 아니라 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상대 여성이 사회적으로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 그 여성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다. "여자는 여자일 뿐"인 것이다. 여성이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라 ‘몸‘일 때, 모든 여성은 개인의 정체성, 능력, 지위에 상관없이 남성의 성 행동 대상으로서 개별성이없는 동일한 존재가 된다. 언제든지 몸을 기준으로 대체 가능한 물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은 ‘노동자와 자본가‘로 나뉘지만 여성은 ‘어머니와 창녀‘로 구분된다. - P115

문제는 여성의 ‘멀티‘(양다리‘ 혹은 그 이상)는 남성 연대를 위협하지 않는데, 남성의 멀티는 여성을 분열시키고 여성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남성은 멀티할 때, 다른 남자의 눈치를 볼 뿐 상대 여성들끼리 서로 어떤 관계인지는 개의치 않는다. 여성의 감정과 고통쯤은 무시해도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폭력이다.
한 여성이 다수 남성과 ‘복잡한 연애‘를 했을 때 남성들은 여성을 공유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그렇다), 반대의 경우 여성들은 자존감에 큰 타격을 입는다.
이성애 제도에서 여성과 남성의 지위는 같지 않다. - P116

남녀 모두 남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이성애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이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지 않지만, 아직도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계급, 자아존중감, 정체성이 형성된다. 한마디로 의사가 될지 의사 부인이 될지를 고민하는 여학생은 있어도 의사가 될지 의사 남편이 될지를 고민하는 남학생은 없는 것이다.
많은 남성이 성매매와 성폭력을 섹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여성이 사랑과 폭력의 연속선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그럴수밖에 없다. 교환당하는 것보다는 폭력(사랑)이 나으니까. 폭력은교환하지 않음 즉, ‘내 여자 삼음‘의 대가인 셈이고 또 그렇게 인식된다. 진짜 문제는 남성 연대를 위한 여성의 교환이다. 그래서 마음을 이용한 남자가 두들겨 패는 남자보다 더 나쁜 거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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