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연히 황지우 시인과 최승자 시인을 인사동에서 만나 오랜만에 수다를 떨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아침에 집에서 수상 통보를 받고 나왔다고 하자 두 시인이 ‘아 이제 여자에게도 상을 주는구나‘ 하면서 놀라워하던 일이 생각나요. 그만큼 여자들의 시를 제대로 읽어주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어요. 그 이후 미당문학상을 받았을때도, 대산문학상을 받았을 때도 제가 여자로서는 처음그 상을 받았다, 그런 보도가 뒤따랐지요. 그만큼 여자에게는 비평도, 수상도 인색한 시대였어요. 저는 비평가들에게서 이해를 바란다기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하나근거 없는 비방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게 바람이었지요. 그 당시 제 시집에 대해 글을 쓴 비평은 대부분 제시가 가정주부로서의 생활에서 나온 시라고 전제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언젠가는 ‘살림하고 연탄 가는 여자가 같은구절이 비평 글 속에 있어서 사석에서 그 비평가를 만나저는 아파트에 살아서 연탄을 갈지 않아요, 하고 말한 적도 있었지요. 특히 제가 시론 같은 것을 쓰니까, 제 글에서 문장을 인용해 그 내용과제시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 P145
도 했지요. 그런 식의 비평이 많았어요. 시인의 에세이는시 장르에 대한 자신의 견해 내지 시학을 쓴 것인데, 제시에 대해 일일이 저의 시론을 적용해서 서로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는, 질타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그것은 마치 제가 시론을 먼저 정립해놓고 그에 맞춰서 시를 쓰는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김춘수론이나 김수영론도 읽어보면 그런 적용을 받을 때가 많지요. 하지만 옥타비오 파스의 시론을 통해 옥타비오의 시를 읽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저는 제 시에 대한 다른 이의 비평을 읽고 나서 제시에 대한 저의 생각을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그 비평과 제시가 함께 간다는 생각을 거의 해보지 않은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어떤 평론가 한 분은 마치 형사처럼 제 시의 어떤구절이 어떤 책의 어떤 구절에서 온 것이라 설명해주려 분투하기도 했지요. - P146
제가 등단할 무렵에는 자기 진영의 시인들에게만 평론가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지요. 그래서 시 세계가 정립된, 조금 나이 든 시인들에 대한 비평이 더 많았어요. 자신들의 진영이라 함은 무슨 세계관이나 인식이 같은 방향이라기보다 자신들이 속한 출판사 문예지에서 등단한 시인이나 시집을 낸 시인을 그렇게 여겼지요. 하지만 이런 현상들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소설가들이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고루 출간하면서 완전히 사라졌어요. 이제 출판사 간의 이념 논쟁은 그 출판사가 출간한 책을 가지고 진행할수 없게 되었지요. 그리고 비평가와 시인이 오랜 기간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는 사실상 우리나라에서는 없다고 봐야지요. 시집을 새로 출간할 때마다 같은 평론가가 그 시집에 대한 논평을 하고, 변화의 조짐을 읽어내고, 서로의문학이 고양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저는 그냥 비평을 읽어보고 말지요. 외국의 이론에 근거해 제시를 아무렇게나 절단한 비평을 읽을 때는 제 시가 그의 이론 수입의 당위를 마련해주는 것만 같아 씁쓸해집니다. - P147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혈연으로 얽힌 관계를 정상 가족으로 보는 일종의 ‘가족주의‘를 ‘가족‘이라는 이름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가족주의로 추락시키고 있는 거지요. 가족주의는 여성주의와도 대치하고, 일인가족과도 대치하며, 혈연과 부모 자식을 벗어난 다양한 가족 형태와도 대치합니다. 자식이 있어야 가족입니까? 늘 묻고 싶었습니다. 국가주의는 가족주의의 정상성을 강조함으로써 유지되는 정당성과 당위성을 가지려고 합니다. 가족주의는 국가사업입니다. 가족주의야말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초석입니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가족의 품 안에서 쉬어야 하고, 그 체제를 유지하느라 수고하는 자본주의의 일꾼은 가족의 위계질서 안에서 상위를차지하게 되지요. - P159
저는 ‘가족 같아‘나 ‘가족이니까‘ 같은 말들을 참으로 싫어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족‘이라 불리는 상대방은 ‘가족주의‘의 품 안으로, 가족 위계질서의 하위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의 하수인이 되는 거지요. 여자들이 나이 많은 남자나 남편을 오빠나 아빠로 부르는 것도 좋지 않아 보입니다. 여자들 스스로 자신을 상대방과 같은, 평등한 위치에 두지 않는 것 같아서 보기 좋지 않습니다. 사회를 가족화하려는 것 같아서요. 부부가되었으면 나이는 따지지 말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평등한 호칭을 사용해야 합니다. 의사가 여성 환자인 저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도, 식당에서 일하는 나이 든 여자를 언니, 이모라 부르는 것도 좋지 않아 보입니다. - P162
제 시가 만약 서양 사람들이 쓴 시집에 대한 리뷰들처럼 ‘저항‘ 담론이라면 이 가족주의 이미지들의 연속성 안에서 표출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시가 ‘마음으로 쓰이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가족인, 제 심장 속의 무의식적 지옥이나 그 지옥이 일으킨 상처의 형상을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가족은 반복적인 환대와 책임과 - P171
‘문학하기‘는 읽은 만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읽은 것이 상상하기를 자극하니까요. 상상의 근육과 장소를 키워주니까요. - P179
바리공주의 저곳은 결코 선악의 ‘바깥‘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중립지대, 중간 지대라는 장소입니다. 세월호의 방송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하는 무관심, 무대응, 무데뽀無鐵砲, 그곳은 그냥, 그런 장소입니다. 뻐꾸기가 자신의 알을 남의 둥우리에 탁란하듯 악랄하지만 자연스러운곳일 수도 있습니다. 옛 시인들은 저곳을 지옥, 낮은 곳, 지하, 바닷속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바리공주는 이곳에서저곳인 지금의 죽음을 왕복합니다. 너무 자주 죽습니다. 너무 자주 경계를 넘습니다. 바리공주처럼 그렇게 이곳과저곳을 왕복하는 시 언어를 저는 아직도 계속 생각하고있습니다. - P198
‘선생‘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먼저 산‘입니다. 그러나 저는 ‘먼저 죽는‘ 혹은 ‘먼저 살다 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죽음을 학생들에게 보여야하는 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말입니다. 선생은먼저 죽는 수치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지요. 선생은 이제까지 있어온 문화를 칠판에 적는 사람입니다. 이제까지있어온 것을 말함으로써 그것을 듣는 학생들이 이제까지없었던 것을 발명하고 발견하도록 장려하는 사람이지요. 그렇기에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짓을 하는 사람이 선생입니다. 저는 수업에 임할 때 참 부끄러웠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들을 한 걸음이라도 어딘가로 내딛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제까지 제가 한 말이 이들을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할수 있었나, 늘 생각했지요. - P208
문학은 기술적 연마가 아니니 ‘어떤 달성‘을 목표로 삼을수 없고, 그것의 결과를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문학하기도 일종의 인생의 선택인데, 이것은 낭비의 선택이고, 실패의 선택이고, 가난의 선택입니다. 황현산 선생님은 언젠가 "대학은 인생을 낭비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인문학은 경제적 성취나 기술적 성취의 면에서 보면 낭비의제도임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그들 앞에 늘 있었으나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른 문‘을 열어보기를 바랐지요. 그 문은 다른 문을 닫아야 열기가 가능한 문이지요. 고독을 선택하고, 관계를 거절하고, 상투적 어법에 분노하고, 필멸을 마주한 자만이 닫을 수 있고 다시 열 수있는 문입니다. 그 문밖에선 각자 다르게 간직한 원초적장면이 보이고, 다른 모국어가 들리고, 다른 모국어 문법이 통용됩니다. 저는 학생들 마음 안에 뿌리를 내릴, 그런귀한 말은 한 적도 없고, 그런 뿌리 내리는 말을 할까 봐 무서웠지요. 시는 늘 부정이니까요. - P212
시를 쓰는 것은 사실 ‘설명‘을 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경찰관과 검사와 판사는 설명을 요구하지만 시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지요. 시 쓰기가 소설 쓰기와 다른 점은 이 설명을 포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지점에 있습니다. 시를처음 쓰는 사람에겐 이 설명을 포기하기가, 그리고 장식을 포기하기가 그렇게 어렵지요. 설명을 포기한 순간 시의 틀은 저절로 생겨나지요. 그다음 한국어의 결에 대해얘기할 수 있게 되지요. 자기자신과 타자에 대해 설명하려는 의지를 제거하면, 낯선 언어의 기술이 스스로 가동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자신의 글쓰기의 그 낯선발생지를 처음 본 듯 발견하게도 되지요. 여기 앉아 있지만저 먼 곳에서 발견되는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시는 설명에 소환되지 않는, 해석을 거부하는, 비평의 액자에 갇히지 않는, 모습이 정해진 것이 없는 말들이지요. 저항의 말이지만, 정리될 수 없는 말이기 - P214
도 합니다. 그러나 풍자를 장착한 시는 설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풍자의 수많은 기교가 포함된 언술 방법이 설명이지요. 그러니 시 강의가 어렵지요. 저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했다기보다 ‘시를 쓰겠다‘는그 의지를 존중했지요. 이 설명과 정보의 시대에 말입니다. 저는 학기 중에는 거의 제시를 쓰지 못했어요. 방학이되어야 비로소 제 시 쓰기가 가능했어요. 왜냐하면 수업시간에 제 시를 여러 방식의 언어로 다 풀어줬으니까요. 한번 뱉은 것을 다시 주워 담기 싫었어요. - P215
말씀하신 것처럼 시는 강력한 정치이고 저항입니다. 그것을 읽어내는 데는 읽는 사람의 힘이 필요합니다. 제가 파리국제도서전에 갔을 때, 그들은 저를 ‘저항‘ 섹션에 넣었습니다. 그들은 제시가 제 욕망을 억압하는 권력 체계에저항하는 방식의 상상력과 경험을 동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상상하는 방식속에 저항의 방식이 숨어 있다는것을 말했습니다. 권력 밖에 우리가 있지 않다는 걸 모두알지 않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권력으로부터 도망할 수도없고, 권력 자체엔 밖이 있지도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제 시를 그렇게읽지 않습니다. ‘사회의 바다‘로 나오라 하지요. 클로드 무샤르가 쓴 책 다른 생의 피부』를 보면 그는 저의 오래된 시들에 관한 크리틱에서 저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여섯단어, 제시의 위험 요소들을 색출합니다. "저항, 변신, 증식, 삼킴, 고통과 웃음." 우리나라에선 아무도 그렇게 읽지않지요. - P223
문학작품 쓰기의 마지막은 언제나 독자입니다. 작가가 알지 못하는 그 ‘누구‘들이 문학을 완성하거나 끝내주지요. 그러니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항상 열어둔 채 시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만약 문학이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을 종용했다면 그 문학은 근대적 주체로서 휴머니즘의 부활을 바라는 저자의 것이겠지요. 그는 독자가 언제나 세계 내 존재로서 질서와건강을 유지하며 살기를 바라겠지요. 하지만 시에서는 그런 권유가 불가능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네 문학이 누굴 위로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저는 당황하기도 하고화가 나기도 하지요. 위로를 받으려면 교회나 성당이나절에 가야 하지요. 44시는 연대할 수 있지만 위로할 순 없어요. 저자가 말하는것이 아니라 시가 말하게 하는 것이 시이고, 시는 언어적사건이라 생각하는 저로서는 시인마저도 언어수행적 주체, ‘시하는‘ 존재로 생각하니까요. - P240
우리가 쓰는 언어를 하나의 도구라고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언어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꺼내게 하는 무엇입니다. 이것을 시의 언어라고 불러봅시다. 우리는 시를 쓰면서 한 사람인 ‘나‘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어떤 사건을 꺼냅니다. 이것은 정말 작은 사건, 아니면 어떤 사건의 분자여서 절대로 누구도 관심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작은 사건의 분자 때문에 이 글을 쓴사람은 한 인간이 아니라 여러 사람인 한 인간, 자신마저도 벗은, 이미 존재를 탈각한 무엇의 방향으로 움직여 가게 됩니다. 그 작은 사건의 분자가 그렇게 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어가 없는 문장처럼 여러 곳에 이 사건을 출몰하게 합니다. 익명의, 어쩌면 명사를 벗은 동사로, 움직이는 시의 언어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 P244
그 작은 사건의 분자가 그렇게 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어가 없는 문장처럼 여러 곳에 이 사건을 출몰하게 합니다. 익명의, 어쩌면 명사를 벗은 동사로, 움직이는시의 언어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리듬으로 쓰인 시의 언어가 한 사람을 여러 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탈존의 존재의 글쓰기, ‘나‘ 를 죽임으로 여럿이 된, 죽은 후에 복수적 인간이 된 글쓰기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시하기‘의 리듬으로 달성되는, 검은 글씨들 밖으로 뛰쳐나가는, 리듬처럼 등장하더니 곧 - P244
사라지는 시의 모습일 겁니다. 유령이 된 화자는 거듭 출몰합니다. 동시적으로 여러 곳에, 그리고 다양한 ‘너(희)‘ 를 향해, 독자를 향해. 그러니 우리는 시를 쓰면서 거듭 어딘가를 향해 열려 있겠지요. ‘내‘가 없는 곳을 향해. - P245
그렇지만 ‘시‘라는 이 이상한 제도는 문학의 관습화된 육체 속에 어떤 내밀성을 탑재한 미묘함 같은 것, 이름 없는실존이지요. 문화라는 것 안에 이 ‘시‘라는 것이 사멸한다면 그 문화는 허상일 겁니다. 시는 문화보다 자연에 가깝지요. 풍경 그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태어나서 죽는 자연 말입니다. 시는 문화의 어떤 이념처럼 특정 이데올로기 자아의 상, 이 시대 한국에서 유행하는 K 무엇처럼 국가의 상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유토피아적 공동체를상정하지도 않습니다. 시는 문화처럼 전체를 가정하지 않지요. 근대 이후 시는 늘 위기를 먹고 살고, 재난을 먹고살고 있지요. 요즈음 우크라이나에서 쏟아지는 시들이 영어로 번역되는 것을 읽고 있으면 시는 정말 위기를 먹고산다고 말하고 싶네요. 저의 시도 제 삶 안팎의 위기와 거기서 파생된 감각을 먹고 살아왔지요. 어떤 익명적 실존의 모습으로서 말입니다. - P252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개개인의 모든 일이 책이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요. 책을 쓴 사람을 모두 작가나 창조자라고 부를 수 없는 시대에 말이에요. 그 책들은 상호작용해서 독자들에게 어떤 책의 모습을 지시하고있습니다. 이것이 당대의 책의 모습이지요.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제 독자가 찾아내야 하는, 보물찾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 P282
그럼에도 무한히 사회와 역사를 넘어 다른 텍스트와 연결되고 확장되는 망상 조직을 거느리는 것이 텍스트이기 때문에 영원히, 그 책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겠지만 ‘책‘이라는 것을 향해 가겠지요. 무한히 계획되고, 무한히 구축 중인 책이라는 것이 있겠지요. 어쨌든 당대의 책이라는 것에 시 작품이라는 텍스트를 투척하는 것이 우리의 작업이아닙니까? 전통을 배반하면서, 상상력을 저곳이 아니라이곳에서 온 것이라고 믿으면서, 절대로 이곳을 위반하면서 하찮은 꿈을 써 내려가는 우리의 일 말입니다. 이곳의당대라는 그 책, 그 주변과 중심, 망각과 기억이 공존하는그 책이라는 것을 향해서 말입니다. 아직 쓰이지 않은 그책을 향해서 말입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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