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는 젠더(남성과 여성 간의 권력관계)뿐만 아니라 문화 혁명에준하는 사건으로서 우리 사회 전반의 뿌리 깊은 인습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에 문외한인 나조차 오래전부터 고은의범법 행위를 알고 있었다. 내용도 알려진 사실보다 심각하다. 그의행동은 상습적인 범법일 뿐 한량 문화도 아니고 기행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시가 계속 교과서에 실리기를 주장하는 이유는 ‘문학적업적‘ 때문이 아니다. 나는 원래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서사시, 대하소설...... 한국의 일부 남성 문인들은 자신을 예술가가 아니라 역사 서술의 주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생각이 여성에 대한 폭력의 구조 중 하나다. ‘내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민족을 대표하기 때문에‘ 타인은 없는 존재이거나 존재하더라도 그/그녀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그래서 나를 위해 봉사해야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폭력의 원인이다. - P135

친일과 반공으로 사익을 챙겨 온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에대한 차별이 불가피하다고 믿어 온 일부(?) 진보 진영의 자기 직면은 지금부터다. 고은의 작품이 교과서에 남아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교과서에는 모범적인 저자와 글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현실, 실패한 역사도 포함되어야 한다. 둘째 이유는 ‘노벨상 타령‘으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서구 콤플렉스와 남성 패거리 문화를 영원히 기록하기 위해서다. "이런 시를 쓴 사람이 그런 행동을 - P135

했고 한국 사회는 그를 숭배해 왔지만 여성들의 투쟁이 있었다"라고 적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반성 없이 탄생한 시, 성폭력 가해자가 연출한 작품은 무조건 졸작인가. 교과서는 이를 논쟁적으로 제시하는인식론을 제공해야 한다. 영화감독 김기덕은 <해안선> <나쁜 남자><빈 집〉〈스톱〉 등 작품의 완성도 자체가 황망한 경우부터 목불인견인 영화,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수작까지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공과를 따지기보다 인간과 사회는 복잡하고 모순적이라는사실을 인정하고 사유하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투명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를 포함해 현실을 세탁한 모든 텍스트는 "껍데기‘다. 우리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책들은 넘치고 넘친다. 교사는 말할 것도 없고 학생들은 한국 사회의실제 모습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현실과의 괴리로 인한 갈등도 적어지고 이후 현명한 대처도 가능해진다. 교과서는 우리를 인식할수 있는 교사이자 반면교사여야 한다. 그것이 가해자가 가해자로서 역사에 남는 방법이다. - P136

피임 방법 중 여성이 매일 복용해야 하는 경구 피임약이나 자궁내 장치보다 남성의 콘돔 사용이 안전하고 편리하지만, 대개 남성좋은 콘돔 사용을 기피한다. 성별 권력관계는 피임의 책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성이 남성에게 콘돔 사용을 강제할 협상력이없고, 콘돔 사용을 "장화 신고 달리기"라며 억울해하는 남성 문화메다, 피임은 여성의 책임이라는 의식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여성은 임신 중단이라는 자신의 몸에 대한 폭력과 사회적 낙인, 죄의식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낙태죄 폐지 주장은 폭력의 후유증을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절실한 요구일 뿐이었다. 남성의 ‘귀찮음‘이 여성의 생명권을 침해한다 - P140

낙태죄 존속과 폐지 주장 이전에 더 중요하고 효과적인 문제는 남성의 인식 교정이다. 성관계는 쾌락, 의무, 교환 등 여러 의미가 있지만 그 모든 의미의 전제는 출산을 원치 않는다면, 피임이다. 피임을 성관계의 일부로 규범화해야 한다. 여성들은 피임 자세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남성과는 성관계를 거부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성적 자기 결정권이다. 남성의 인격은 성관계 시 피임과자신의 성병을 살펴보는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 - P141

임신 중단(낙태)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생명의 소중함과 전혀관련이 없다. 피임의 책임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있다는 사고방식과 여성의 몸은 남성의 소유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성 문화에서 임신 중단은 남성 공동체가 소유한 그릇(container)인 여성의 몸에 (예를 들어 자궁宮) 주인의 허락 없이 그릇을 비우는 행위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골이 들어갔다가 그물 밖으로 나왔을 때의분노와 비슷하다. 축구는 남성 중심적인 섹스를 은유하는데, 골인(goal in)은 사정인 셈이고, 실점은 다른 남자의 정자가 ‘내 여자‘ 에게 들어가는 것이다. 자책골을 넣은 선수나 골키퍼가 살해 위협수준의 비난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 P141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의료 인력의 편중과 부족이다. 성형외과나피부과에 집중되는 것은 심각한 공중보건 문제다. ‘선진국‘ 일본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산부인과 의사 인력 부족 문제를 겪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소아 환자의 진료 거부 사태는, 성형 시술에 국가의 개입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만일 의료 인력 편중으로 ‘우리‘ 누군가 아플 때 의사가 없어서 사망한다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모든 의사가 성형외과를 전공하고(심지어 이 인력도 모자라서 정형외과 의사가 미용 성형에 동원되기도 한다), 대부업과 연계되어여성의 성형 시술을 부추기고, 일부(?) 여성들이 성형 시술로 의료인력을 독점한다면, 여성주의는 이에 어떻게 개입해야 할까. - P147

성교육은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가‘가 아니라 인권과 공중보건교육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타인 몸의 개별성을 인식하고 거리를 둘 줄 알며, 자기 몸에 대한 존중감을 키워주는 게 성교육이다.
이런 훈련은 장애인이나 외국인에 대한 무례나 폭력적 행동도 줄일수 있다. 20대에게 성 문화를 강의하다 보면 무지와 왕성한 활동이빚어낸 비극을 본다. 고통은 거의 여성의 몫이다. 초등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나는 건강교육(성교육), 정치교육, 환경교육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P151

정신이 육체를통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정상이고 합리적이며 우월하기 때문에 이로인한 시민권의 위계와 차별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노인, 유아, 임신부, 다친 사람, 여자환자, 장애인(모두 기저귀를 찬다)에 대한 비하와 혐오는 이 때문이다.
이들은 눈물, 침, 혈액, 월경혈, 양수, 대소변 같은 체액을 통제하지 똥하고 몸 밖으로 ‘줄줄 흘리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모든 가부장제 사회에서 시민권 획득 기준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결정한 사랑 예술장애인, 노인은 아닌)인 것도 이 때문이다. - P154

하지만 아무리 잘난 남자도 생로병사에서 예외일 수 없고, 그 누구도 육체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생명이 지속되는 한 체액은 우리 몸 안팎을 넘나든다. 체액은 타인과 사회에 상호 의존적인적 자아로서 인간의 존재 양식이다. 그러나 체액에도 위계가 있어서 남성 문화는 ‘기저귀 찬 사람‘을 경멸하면서도, 권력의 상징인 페니스에서 나오는 소변, 정액 같은 자기들 체액은 불결하거나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소변 방울이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배변기 앞에서 조심스러워하는 남성은 드물다. 영역 표시를 상징하는 남성의 소변을 성찰하고, 취약한 몸의 구체적 고통에슬퍼하면서 우는 남성이 많아진다면,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사고하는 힘의 원리는 재고될 수 밖에 없다. 육체의 불완전성은 인간의 한계인 동시에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다. ‘기저귀 찬 사람들‘의 목소리와 관계 맺기 이것이야말로 평화정치학의 핵심이 아닐까. - P154

"가정폭력은 사소한 집안일"이라는 인식은우리 사회의 프라이버시는 곧 남성의 프라이버시라는 걸 의미한다.
만일 국가가 사적 영역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면, 1970년대 출산통제 정책이었던 가족계획이나 그 반대인 현재의 저출산 대책, 상속세 등도 모순이며, 더군다나 시민의 연애를 관리하고 간섭하는 ‘곰신‘ 관리 제도는 어불성설이다. - P158

인간은 언어와 상징 없이는 사고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피해야 할 은유나 상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것은 국민적 거부감을 낳고 군 종사자들의 ‘격‘을 떨어뜨리는 문제일 뿐, ‘그들이 원하는 안보 의식 강화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 P170

정체성과 일상의 실천은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물이나 아동과의 관계는 합의가 어려우므로 무성애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이들이 많다. 한편 트랜스젠더나 인터섹스는 인간의 몸의 성별, 즉생물학적 의미의 섹스인 ‘male‘, ‘female‘로 구분된다는 ‘지식‘이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다양하고 유동적인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은 이들의 인권을위해서, 그리고 남성 중심의 이성애를 상대화하고 이성애의 문제들(성폭력, 성 상품화, 가부장적 성적 규범.....)을 문제화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섹슈얼리티 개념의 가장 문제적이고 좁은 개념은 남녀 간 성교(性交, intercourse)이다. 이 행위가 전부가 아니라고 인식할 때 변화도 가능하다. - P175

중·고등학교 생물 교과서는 포유류 같은 고등동물은 자웅이체, 미생물 같은 하등동물은 자웅동체 라고 가르친다. 물론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이는 가부장제가 얼마나 과학을 오염시킬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자연과학 역시 가부장제 담론임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다. 자웅이 한몸에 있거나 남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우를 인터섹스라고 한다. 이것은 ‘기형도 ‘장애‘도 아니다. 이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통계치는 그 자체로 정치학이다. 남성과 여성의 몸의 차이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따라 인터섹스를 100명 중의 1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이를 몸의 ‘문제‘로 인식하고(클라인펠터 증후군Klinefelter syndrome) ‘과학적‘ 측정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이들도 있다.  - P181

나는 ‘타인의 취향‘ 존중이나 ‘톨레랑스‘ 같은 자유주의적 사고를 그다지 선진적인(?)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는 이런 가치를 적용할 대상조차 드물다는 것이다. 다름에 대한 무지, 무시, 무감각은 모든 독립적인 타인(개인, individuals)을 타자(the others)로 만들어버린다.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기 이전에, 인간이 개인으로, 타인으로 존재하기 힘든 사회다. 모두가 우리이거나 모두가 우리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인 사회다. 톨레랑스? 관용하고 배려할 ‘다름‘ 자체가 제대로 가시화되기 힘들다. - P185

스포츠 경기에서 남녀 구분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은 누구나 안다. 다만 성별 확인이 불가피하다 해도 다른 형식, 다른 방식, 다른 사유가 있을 수 있다. 여성의 성별을 가임 여부나 몸의 특정 부위를 확인해야만 알 수 있는가. 남자 같아 보이는 여성 축구 선수 논란은 겹겹의 무지가 중첩된 사건이다. 국가정책, 지식 사회, 사회 운동을 비롯한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젠더사안을 인식하지 못한다. 평소 이에 대한 사유가 축적돼 있지 않은데다 구별 집착이 겹쳐 발생한 ‘해프닝‘이다. 그러나 이 해프닝은 에피소드가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인권 침해의 상상력을 구성하는 공포정치다. 장애인, 성적 소수자, 이주노동자, 환자, 노인(우리 모두는 나이 든다) 모두 이 ‘확인의 정치‘에서 타자가 될 수 있다.
사회 구성원 스스로 타자화의 대상이자 타자를 생산하는 주체라는 점에서 논쟁은 계속돼야 한다. - P185

누가 여성인가, 그리고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가. 해부학?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구호는 생물학‘적‘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생물학조차 과학적이지 않다. 양성이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생물학을 혼동한다. 실제로 이 둘은 정반대다. 생물학은 환경과 문화와 생명체의 상호작용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지, 본질을 캐는 학문이 아니다. 아니, 생물학뿐만이 아니다. 본질을 추구한다면 이미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 ‘신앙이다".
모든 이들은 ‘사람‘으로 태어날 뿐인데, 가부장제 사회에서만 인간을 ‘남녀‘로 구별한다. 이는 차이가 차별을 낳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어야 차별의 근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흔 - P186

한 표현은 차이를 원래 있는 것처럼 본질화하고 고정화하는 사고방식이다. 무엇이 의미 있는 차이인지 아닌지를 정하는 것은 사회적 맥락이다. 여성도 남성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으로 표시되는 것뿐이다. 성별은 없다. 억압받는, 그리고 억압하는 성별이 있을 뿐이다. 여성은 실체도 실재도 아닌 지배 규범(성 역할사회화)의 산물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특정한 여성만 여성으로 간주된다. 나이, 인종, 계급, 외모, 직업 등에 따라 여성의 개념은 유동적이다. - P187

여성주의 사상의 핵심은 ‘차이‘이며, 이는 현대 철학 전반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쳤다. 여성이라고 간주되는 집단 내부의 차이, 흑인노예 여성과 백인 중산층 여성은 성별보다 인종의 차이가 더 크다.
이 때문에 정체성의 정치에서 출발한 여성주의는 진정한 여성이라는 허명으로 다른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타자화하기도 한다.
정체성(正體性)은 "우리는 같다"는 팩트가 아니다. 오히려 같지 않기 때문에 동일시(同一) - 여성임을 자각‘ -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주의의 전부는 아니다.
이제까지 현모양처, ‘예쁜 여성‘ 같은 여성의 기준은 남성 문화가정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혐오 사태는 여성이 남성을 대신 - P187

해서 누가 여성인지를 정하겠다는 발상이다. 일단 이 ‘진정한 여성‘기획은 불가능하다. 오랜 역사를 거쳐 구성된 여성 개념은 이미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기는 작은 차이다. 작은 다름을 본질로 만드는 그것이 바로 권력이다. 자궁이 있어서 출산을 하고 저절로 육아 전문가가 된다면, 성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하는가.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저절로 여성이나 여성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성애 제도는 인간을 남녀로 구별하기 위한 강력한 장치다. 이성애는 자연의 법칙이 아니다. 동성애, 무성애, 범성애 등 인간의성적 실천은 다양하고, 이에 따라 성별 정체성도 달라진다. 성별은본디 정해진 것이 아니므로 사회적 강제를 거부하고 개인이 선택할수 있다. - P188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그들이 여성의 권리를 빼앗아 간다? 여성 우선 페미니즘? 누구도 타인의 성별을 규정할 수 없다. 이제까지 여성 운동은 민족/민중/시민 개념을 독점하면서 인권의 위계에 따른 순서("여성 문제는 나중에")를 주장해온 남성 중심의 사회 운동에 저항해 왔다. 여성주의가 진짜 여성과 가짜 여성을구별하고 배제에 앞장선다면, 그런 여성주의가 왜 필요할까. - P188

에로틱의 의미는 계속 재정의되어야 한다. 사랑이나 성애의 상대가 누구든 간에 동등함과 관계성, 인격적 관계가 에로틱한 것이며 이러한 상태(사랑)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파일은 인간의 사랑 행위 중 일부일 뿐, ‘동물과 섹스하는 사람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섹스가 아니라 동물의 삶을 성의 측면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레즈비언이 되기로 ‘선택‘
한 여성들, 아니, 주파일이 되기로 ‘선택‘하는 사람들은 다른 모든인간처럼 더 나은 삶을 원한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선택한다는것은 성적 지향에 머무는 일이 아니며,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인생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성애자와 주파일 중 누가 더 성과 사회에 고민이 많겠는가. 그런 면에서 주필리아는 여성 노동의 성애화, 여성 섹슈얼리티의 상품화, 만연한 젠더폭력, 구조적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남성 문화에대한 강력한 비판이자 새로운 목소리다. - P196

성별 의제를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눈다면, 하나는 차별을 정상화하는 성별 분업(이는 곧 여성의 이중 노동이다)을 극복하기 위한평등권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양성 자체의 구분을 문제 제기하는것이다. 물론 이 두 의제는 상호 보족적이며 현장의 상황에 따라달라진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전략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 무엇이 의미 있는 차이이고 의미 없는 차이인지를 규정하기 때문에, 차이는그 자체로 언제나 문제가 된다. 의미 없는 차이는 만들어지지 않거나 ‘다양성‘ 등으로 탈정치화된다. 차이는 선재(先在)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만들기 위한 전제다. 세상의 어떤 차이도 의미 없는 것은 없다. 이것이 차이의 정치학이다. 그러므로 여성, 장애인, 성적소수자의 이해가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고 또 연대해야 한다. - P210

인터섹스의 가시화는 1) 그 상태도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 2) 남녀는 모두 뒤섞인 사회적 몸(social body)이라는 것 3) 몸의 차이는 연속선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즉 여성, 장애인, 성적소수자의 인권 (이들을 인구수로 합치면 전 인구의 과반을 훨씬 넘는다)을 완전히 다른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게 한다. 한마디로 인간의 기준을 바꾸는 것이다. 기존의 인권 개념이 백인 남성을 모델로 하여 약자에게까지 그것을 ‘적용‘(배려, 시혜, 관용...…)하는 과정이었다면(그조차 가능했던가?) 인터섹스는 사람의 개념을 새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인식론이다.
이 글이 강조하는 것은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을 깨자‘라거나 ‘비정상의 정상화‘가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 원래 그런 것은 없다.
그것은 권력의 선택이고 담론의 구성이다. 케이트 본스타인은 말한다. "젠더를 이야기하는 데 이렇게 힘을 많이 쏟아 붓다니, 도대체 사람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던 시절에는 세상이 어땠을지 궁금하네. "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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