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은 자신의 시에서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고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십대를 그렇게 보냈던 듯 하다. 이념보다는 그 이념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술 보다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퍽도 좋아했었던 것 같다. 삼십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요즘, 나는 여전히 자신의 신념을 소박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요 몇 년 사이, 나는 술자리의 분위기가 싫어졌다.

 

  내가 사랑했던 술자리의 분위기란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 그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었을 게다. 술자리의 분위기란 게 막걸리집이든 호프집이든 아니면 대학 캠퍼스 잔디밭이든 다 좋았던 걸 보면 그게 술집의 분위기를 말하는 게 아닐 테니, 아마도 나는 그 술자리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을 사랑했던 것 같다.

  

  더 많이 누리고 산다는 게 한없이 미안하고, 자기를 더 많이 희생하지 못하는 것이 더없이 부끄러웠던 그때,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그 말들... 그 말들의 유통기한이 술자리가 파할 때 까지 뿐일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진실했던 그 말들을 사랑했다. 그런데 이젠 술자리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의 말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

  

  삼십대는 현실 속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이, 적당한 체념과 적절한 타협이 조화로운 관계와 순조로운 삶을 보장한다는 걸 알아가는 나이.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 듯 하다. 현명한 사람은 그 속에서 행함의 어려움을 배우고,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자기만의 원칙을 세우며 삼십대를 난다. 도전 받아본 적 없는 이념과, 갈등해보지 않은 원칙이 얼마나 나약한지 깨닫는 건 삼십대 인생살이가 주는 별책부록이다.


  나는 그런 깨달음을 나를 만나는 시간에서 얻었다. 갈등하는 나를 다독거리면서, 비겁한 나를 위로하면서, 부끄러운 나를 격려하면서 나는 나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알몸 그대로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지 않고 타인의 추켜세움에 으쓱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동반자인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험한 세상 살아나갈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술자리에서는 누구도 부족한 자기를 보여주려 하지 않고, 나약한 상대를 보아주려 하지 않는다. 요즘 술자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도 좋은 이야기보다는 나쁜 이야기들. 술자리 내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깎아내리면서 서로 동의를 구한다. (이 속엔 정치인들 욕도 포함되어 있다) 또, 자기를 인정해 달라는 말들로 채워진다. 자기의 부를, 자기의 지위를, 자기의 지식을 드러내면서 부러움의 말과 존경의 눈빛을 요구한다.

 

  그런데, 모두가 똑똑한 자기, 잘난 자기를 보여주기 바쁘다 보니, 정작 상대의 말이 내 귀에, 내 가슴에 들어올 겨를이 없다. 술자리를 파할 때쯤이면 서로에게 스며들지 못한 말들과 헛웃음들이 탁자 위에 담배꽁초처럼 수북이 쌓여있다. 술자리 내내 허공에서 맴돌다가 그냥 맥없이 떨어져 쌓이는 위선과 가식과 허위, 자괴감과 욕망이 뒤엉켜 있는 오물더미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밤은 맥주 한 잔에도 속이 역겹다.  

 

  헌데, 이런 술자리임에도 유독 술자리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무척이나 사교적인 사람들? 아니, 그들은 자기와 오롯이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기를 확인하는 것이 겁나고, 혼자서 만나야 하는 자기마음이 두려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해 줄 수 없음을. 그 누구의 사랑도 그들의 외로움을 씻어 줄 수 없음을. 그래서 그들의 습관적인 술자리를 함께 하는 날은 마음이 슬프다.    

  

  (이 글을 쓰다 보니, 까칠한 성격 탓에 그나마 별로 남지 않은 인간관계가 새해 들어 더 얄팍해질까봐 군말 하나 덧붙인다.)


  내가 모든 술자리를 꺼리는 건 아니다. 자기 스스로를 평소에 잘 돌봐 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라도 즐겁다. 자신에게 사랑받는 사람 특유의 여유와 안정감이 있어 그 사람과 있으면 내 몸에도 먹 향기가 스민다. 그런 이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은 도시 한가운데서도 밤하늘의 별빛을 찾는다.


  새해엔 모두 그 동안 홀대했던 자기를 많이 사랑하는 해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다른 이들의 상흔도 어루만져 주면 좋을 테고.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면...... 전화하시라. 술 한 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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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04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지 않고 타인의 추켜세움에 으쓱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동반자인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말씀이 마음에 듭니다. 산딸나무님


산딸나무 2007-01-05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외로움과 친구가 되는 방법을 이제 겨우 깨달았을 뿐인데 글이 너무 과한 것 같아 조금 민망합니다.
한사님께서도 새해엔 더 행복하시길...
 
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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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년' 소리 들어가면서 담배를 끊은 지 두 해가 되어간다. 근데 오늘은 정말 미치게 담배가 '땡긴다'

그 동안 성석제의 소설들은 유일하게 '낄낄대며' 웃어제낄 수 있는 글이었다. 때론 호탕하게, 때론 우아하게, ‹š론 해맑게 웃는 웃음이 아니라, 정말 '낄낄대며' 웃을 수 있는 그런 글. 

근데 이번 소설집은 딱 두 군데서 피식 웃고는 내내 마음이 가라앉아 담배 생각만 간절하게 만든다.

온갖 양념범벅이 된 생선찌개를 먹다가 날 생선 그대로를 입에 갖다댈 때의 그 비릿한 내음, 그리고 뒤따라 오는 토악질이랄까... 삶을 날 것 그대로 들이대는 작가의 글 앞에선 끝도 없는 토악질에 속에서 신물만이 올라오고 눈가는 눈물로 뒤엉킨다.

아, 정말 맵다. 우리 삶의 몸뚱이를 홀라당 벗겨 놓은 꼴이란 게 이렇게 짜고 맵구나.

언제쯤 우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쯤 우리는 더 이상 '살아내야' 하지 않아도 될까 말이다. 그런 날이 오긴 할까?  

담배의 유혹을 끊기 위해서라도 찾아봐야겠다. 이 질긴 생을 이어가야할 까닭을. 열개쯤 찾으면 담배 생각이 가시려나. 안 되면 스무개, 서른개, 백개, 천개라도 찾아내야지. 내 삶을 샅샅히 훑어서라도 찾아보자.

참말로 좋은날이라... 참말로 사람 잡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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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공감 - 김형경 심리 치유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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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던 띠별 운세나 별자리 운세가 왜 그리도 장수하는지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요즘엔 젊은 세대를 겨냥하는 혈액형별 운세 따위도 인기절정인 걸 보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세대를 불문하고 스멀스멀 스며드는 바이러스 같다.

서점마다 번듯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고만고만한 심리학 책들을 보면서 이런 책들의 유행도 어쩌면 미래를 점치는 것들처럼 우리 속에 들어앉은 불안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전엔 그나마 다가오지 않은 미래만이 불안했다면 이젠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바로 나 자신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막연한 불안감이 동시대인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게 아닐까?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과 공포를 낳는다. 그것이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나는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가?

그래서 사실은 심리학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대한민국을 떠도는 논술유령을 상품화해서 무수한 논술용책들이 돈벌이에 나서는 것처럼, 이런 류의 책들이 자기에 대한 불안함을 다스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부추긴다는 느낌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형경의 <천개의 공감>을 샀다. 그것도 예약해서.

그동안  이 작가의 작품을 빠짐없이 읽어오면서 그 작품들에 반했다. 그리고 그의 치열한 자기성찰에 감탄했다. 매번 새로운 작품들을 만나면서 한껏 기대할 수 밖에 없다. 또 이번엔 얼마나 성장했을까?

그가 소설 외의 글쓰기를 외도라고 부르든 말든 나는 그의 모든 글쓰기에 일단 후한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고통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공감의 능력이 아닐까? 가난한 자만이 가난의 깊이를 알 수 있고, 상처받아본 자만이 상처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진리는 착한 부자들이나 상처받지 않은 선한 사람들에겐 좀 억울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 공감의 능력마저 주어지지 않는 고통이란 너무 부조리하지 않은가.

김형경의 에세이에는 바로 그 공감의 능력이 극대화되어 있다. 그래서 그 어떤 전문가가 쓴 글 보다 ƒˆ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읽다 보면 다 뻔한 소리하고 할 법한 이야기가 그가 하면 어찌나 다정하게 느껴지는지. 그렇다. 핵심은 바로 그의 글이 '정확하다, 똑똑하다, 분명하다'에 있지 않고 바로 '다정하다'에 있다.

밤하늘의 별처럼 많고 많은 공감의 언어들... 마음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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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8 0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딸나무 2006-12-18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
조연현 글.사진 / 비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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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때부터 스물두 살까지 기독교인으로 살다가, 맑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서, 예수에게 혁명가의 모습을 뒤집어 쒸우며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리고도 한참을 기독교인임을 포기하지 못하고 살다가 버틀란트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으면서 그 어줍잖은 화해마저 깔끔하게 털어버렸다.

그러나, 늘 생각했다. '종교가 아편'이고, 언젠가 소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만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고. 살면서 좀 더 선하게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한 것,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 타인에 대한 연민, 나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고백 등 내 삶의 모든 궤적들마다 종교의 가르침이 있었다고.

물론 헌금의 액수를 공개하고, 내밀한 기도마저 보이기 위해 연습해야 하고, 성경을 몇번 읽었는지 검사받던 주일학교 생활들이 끔직하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은 인간의 문제이고, 내가 만나던 하나님은 그것과는 무관하게 온전히 나만의 '아버지'였다.

지금 나는 여전히 무신론자이고, 종교의 해악, 특히 한국기독교의 해악에 대해 치 떨리도록 분노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여전히 사랑을 온전히 온몸으로 실현하려는 종교인들과 그들의 종교를 존중한다. 그 어떤 진보적 사상도 궁극적으로는 다름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라고 믿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뿌리내려온 많은 종교들의 궁극적 목적이 그것과 다르지 않기에.

이 책에서 아름다운 구도자들을 만나면서, 종교가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해 왔던가 다시 되새길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을 든든히 받쳐준 종교의 힘에 감사한다. 그리고 내일 내가 당장 죽는다 하더라도 후회없도록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해야겠다. 기껏 벌어 놓고 쓰지 못한 돈, 미처 먹지 못한 맛난 음식, 미처 가보지 못한 멋진 장소들은 죽음 앞에서 무용지물이겠지, 하지만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을 남기고 죽는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끔직한 일이겠다.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기도와 구도는 수행자들만의 몫은 아니라고 본다. 인간은 모두가 이 세상이라는 도량에서 한평생 정진하고 또 정진해야하는 수도자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니겠는가.

오랜만에 기도를 읊조려본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해 주시고, 만일 너무도 미운 자가 있다면 한시바삐, 용서하게 해주시고, 미워한 마음만큼 더 많이 사랑하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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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이 2007-03-1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는 아름다운 사람

산딸나무 2007-03-15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쁘이님! 고마워.
내가 누군지 알고 글 남겨주는 첫손님이네.
감동!
 

얼마만큼의 돈이 있어야 삶이 행복할까?

30평대 아파트 한 채 값? 유학 갈 자금? 평생을 놀고 먹을 수 있을 만큼의 돈? 그게 아니라면 무조건 많이?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르겠지. 그런데 그 기준이 있긴 한 걸까?


모두가 가난한 동네에서 특별히 더 가난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내가 가난하단 걸 전혀 모르고 자랐다. 다 자란 다음에야 ‘비교의 대상’이 되는 세상을 보고, 나 같은 애를 보고 ‘가난한 집 애’라고 하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걸 알았을 땐 이미 열등감보단 불평등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에 가난이 준 상처가 없다. (우리 부모님이 동네를 잘 골라 이사를 왔지. 역시 노는 물이 중요하단 걸 새삼 느낀다.)


비싼 옷을 입은 친구가 없으니 더 예쁜 옷을 사 달라고 졸라 본 적이 없고, 모두가 종이 인형을 그려 대며 놀았으니까 ‘바비 인형’을 사 달라고 떼를 써 본 기억도 없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 밀가루 떡볶이는 50원어치만 사면 실컷 먹을 수 있었기에 큰언니가 가끔 100원어치를 사주면 다음날까지 배가 불렀다. 무언가가 갖고 싶어서 돈을 열망할 필요가 없는 삶이었다. 그런 내가 환장하도록 갖고 싶어서 미치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책’이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언니 따라 간 만화방에서 아줌마가 귀엽다고 주는 단팥죽을 공짜로 얻어먹으며 뒤적거리던 5원짜리 만화책은 정말 별세계였다. 네댓 살일 때어서 글자를 몰랐는데도 내용은 다 이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앗’, ‘얏’, ‘받아랏’ 따위의 글자들을 ‘어머니, 아버지, 우리나라’보다 먼저 읽어냈다.)

 

국민학교를 들어가서 생전 처음 내 책(교과서)을 가졌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 뒤로도 해마다 교과서를 받으면 일단 한번을 소설책 읽듯 읽었다. 새 책을 펼칠 때 느껴지는 그 두근거림과 설레임이 너무 좋았다.

옆집에 내 또래 남매가 있었는데 그 집엔 당시로는 드물게 전래동화전집이 있어, 방학이면 아침을 먹자마자 늘 그 집으로 출근을 했다. 그때 읽었던 ‘은방울전’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미 직장생활을 하던 큰언니가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교회를 다닌 덕에 크리스마스를 챙겼다) 때면 계림문고에서 나온 명작 동화를 한 권씩 사주었다. 그 때마다 이걸 다 읽으면 다음 읽을 책을 구할 때까지 얼마나 더 참아야하나 싶어서 그걸 아껴서 읽었다. 한꺼번에 읽지 않으려고 참고 또 참으면서, 줄어드는 뒷장들을 헤아려가면서... ‘백번 헤아릴 때까지 참고 읽기’, ‘고무줄 놀이 하고 와서 읽기’, ‘뒷 이야기를 열 가지 상상해보고 나서 읽기’... 그때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책을 아껴 읽으려고 써먹었던 방법들이다. (이런 얘길 내 조카들에게 하면 ‘바보 아냐?’ 그런 눈으로 쳐다본다)


늘 읽을거리가 고팠던 난 나중에 어른이 되면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사볼 수 있는 부자가 되리라고 결심했다. 다른 목표 따윈 없었다. 오로지 만화책부터 소설책, 시집 가리지 않고, 책값 들여다보지 않고 책을 살 수 있는 부자... 그게 내 돈벌이의 기준이었다.


지금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됐다.

적어도 내 손으로 돈을 벌고 나서부터 나는 사고 싶은 책을 못 사 본 적이 없다. 나는 이미 내가 바라던 만큼의 돈을 벌었다. 그래서 행복하다.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된 내 생활은 이런 것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재미있는 책을 신청해 놓고 다음날 택배 아저씨가 올 때까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계속 시계만 쳐다보고 기다린다. 어떤 날은 읽던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차마 덮질 못해 몸이 아프다며 약속을 미루는 악행도 종종 저지른다. 기다리던 만화책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한달음에 서점으로 날아간다. 어떤 때는 보고 싶은 책을 사 들고 집까지 오는 사이를 못 참아서 버스정류장 옆 찻집에 들어가서 다 읽고 집에 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그 밖의 일에 돈을 쓰는 건 별로 즐겁지가 않다.

차를 샀을 때... 인생이 달라진다던 선배 말대로 달라지긴 달라졌다. 이젠 그놈의 주차난 때문에 예전처럼 시내에 내려서 책방을 들러 하염없이 책을 들여다보던 행복을 잃어버렸다.

작은 집을 마련 했을 때... 대한민국에서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을 가진 걸 모두 축하해줬지만  정작 나는 당분간은 이사 땜에 책 안 싸도 되겠다는 생각뿐이었고 그다지 감격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정말 내가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은 어린 시절 꿈이었던 ‘원 없이 책 사보는 돈’뿐인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분명 행복의 조건이다. 하지만 모든 돈이 모두 행복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꿈이 없는 돈은 끈 떨어진 연처럼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내 삶의 하늘을 어지럽게 날아다닐 뿐이다. 우린 모두 그 진실을 알고 있다.

요즘 자고 일어나면 몇 천만원이 올랐다고 하는 아파트 값을 보면서 미친 세상을 원망하는 서민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지만 우리 너무 서러워하지도 억울해하지도 말자. 그렇다고 그들이 늘어난 집값만큼 행복해지지는 않으니까...

 

지금 이 순간도, 만화가 양영순의 ‘천일야화’를 빨리 봐야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행복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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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1-22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딸나무님, 오랜만이죠^^ 그래요 님은 참 부자에요^^ 그리고 행복하시구요.
그런 님을 보니 저도 무지 행복해지는 느낌이에요. 마음의 부자로 살래요^^

산딸나무 2006-11-23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늘 좋은 인사를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2007-01-03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딸나무 2007-01-03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이 되신다니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