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상대를 봐 가며 눈치껏 대답한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을 만나면 ‘아이고, 제가 아직 좋은 사람이 없어서 결혼을 못했습니다.’라고 둘러대고,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친구들을 만나면 ‘여자들한테는 결혼이 좀 차별적이잖아요. 가부장적 문화도 그렇고, 육아 문제도 그렇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되는 친밀한 사이라면 ‘비혼주의자’라고 솔직하게 얘기를 한다.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은 독신에 대해서 특별한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꼭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을 ‘비혼주의자’라고 하진 않는다. 내가 스스로를 ‘비혼주의자’라 부르는 까닭은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내 삶의 방식이 오랜 사유 끝에 행한 적극적 선택이고, 그 생각을 뒷받침하는 나만의 철학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스물여섯 겨울 즈음, 결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혼이란 게 과연 어떤 장단점을 가진 제도인지, 과연 그 제도가 내 삶에 꼭 필요한 것인지, 그 제도를 선택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는지……. 성과 사랑의 본질, 가족의 역사, 결혼 제도의 성립 과정 등에 관한 책을 읽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의 체험담을 듣기도 하며 내 성향과 기질을 분석했다. 그 결과, 스물일곱 겨울에 독신을 선택하고 ‘비혼주의자’임을 선언했다.

 십 년도 더 된 일이지만, 주위 사람들이 기막혀 하던 표정이 아직도 선하다. 결혼이란 게 나이 차고 좋은 사람 생기면 하는 거지, 애인도 없으면서 그걸 미리 선택 하냐고……. 쓸 데 없는 말을 지껄인다고 언짢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직 어려 뭘 몰라서 하는 철딱서니 없는 소리라고 깔보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은 ‘본성’이 아니라 ‘제도’이다. 다수의 인간들이 결혼을 선택한 것은 그 제도가 삶을 영위하는 데 상당 부분 유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약한 사회안전망을 대체하기도 하고, 경제적 불안을 완화해주기도 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데도 이점이 있다. 그 뿐인가? 사랑을 매개로 하면 일정 기간까지는 존재적 외로움까지도 덜어주니 이 얼마나 좋은 제도인가.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제도일지라도 그 제도가 모두에게, 모든 점에서 다 유용한 것은 아니어서 한계도 분명하다.




 결혼이 가지는 치명적 한계는 바로 사랑과 성의 자율적 선택권을 포기해야하는 것이다. 쉬운 말로 바람피우면 안 된다는 말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결혼제도 안에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일이 되고 만다. 제도의 한계란 그런 것이다.

 

 비혼주의자로 살면 적어도 그런 한계에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내 평생 사랑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배우자의 조건 따위 고려하지 않아도 되고, 내 자유 의지를 억압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현실의 삶은 자유 의지만으로 살 수 없단 것을, 제도 내에서 매 순간 타협할 수밖에 없단 걸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나는 사람에 대해서만은, 사랑에 대해서만은, 성에 대해서만은 제도적 타협을 용납하기 싫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친구들은 ‘사랑이 밥 먹여 주냐?’며 정신 차리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말 그대로 사랑은 ‘밥’과 무관하다.

 그러나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이라 했던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사랑, 바로 그 무용한 사랑이기에 내게는 가장 유용한 가치가 될 수 있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오롯이 ‘사람’이어도 되는 삶, 사랑할 자유는 있으되, 사랑해야 하는 의무는 없는 삶, 성실한 노력만이 사랑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인 삶. 비혼주의는 그래서 매력적이다. 


 끝으로, 이 글을 읽고 비혼주의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 얼마나 많은 사랑을 해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라. 배우자의 조건으로 마땅한 학벌, 재산, 직업 따위 다 걷어내고 오로지 자신의 실존만으로 빛나는 남자가 몇이나 눈에 띄는지. 그대의 눈에 보이는 현실이 바로 내 현실이란 말이 답이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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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초롱 2008-04-22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이란, 모든 세상이 나를 버리고 난 후,내 인생의 사막에서 피어나는 한 포기 풀 같은 존재이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순간 인간은 강해지며,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 인간은 용기를 얻고,늙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기에 늙는 것이라고 합니다.

산딸나무님은 비혼주의자 개념보다 자기만의 삶을 살줄알고, 이 시대에 거의 멸종위기의 몇안되는 순수 로맨티시스트는 아닐런지....

산딸나무 2008-04-28 13:23   좋아요 0 | URL
금강초롱님, 저는 비혼주의자입니다.
자기만의 삶을 살 줄도 알고,
순수한 로맨시스트이기도 하지만
제가 선택한 비혼주의자라는 개념이
그 모두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로그인 2008-04-26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다는 것이 '일회성'이므로,
갈림 길에서 늘 선택을 해야만 하더군요.
어떨 때는 양쪽을 다해보고 싶을 때도 있었지요.
선택을 유보하는 것도 결국 선택이었고요.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산딸나무님의 실존적 선택이겠지요.
다만,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지 않고 단정짓는 것은 다소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답니다.
삶이 유한하므로 가능하다면 많은 일을 경험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산딸나무 2008-04-28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저는 스물일곱의 나이가 결코 어리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나이에 결혼을 선택하지요.
그들의 선택이 모두 철없는 게 아닌 것처럼 저 역시, 비혼의 삶을 진지하게 선택했답니다.
비혼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랍니다.
비혼의 삶에도 결혼을 선택한 사람들이, 혹은 선택을 유보하고 있는 사람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매력적인 인생 경험들이 넘쳐난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서른여덟의 비혼주의자로, 혼자서 살고 있단 얘길 들으면 처음엔 예의상 ‘능력 있는 골드미스’라고 추켜세운다. 그러나 술이든 이야기든 한 차례 돌고 나면 슬슬 질문이 이어진다. 그 질문들은 염려라는 꿀을 바른 속된 궁금증들이 대부분이다. 하긴, 심심한 인생에 타인의 삶에 끼어드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여흥거리가 어디 있을까 생각하니 이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성과 나이를 초월해서 사람들이 독신녀에게 던지는 질문 가운데 유독 자주 등하는 단어가 있으니, 다음 지문을 읽고 한 번 맞혀보시라.


 애 둘 낳고 살고 있는 여자친구가 묻는다. 
 “밤에 아프면 약 사줄 사람도 없고, 서러워서 어떻게 하니?” 
 연애에 빠져서 정신없는 어린 여자후배가 묻는다. 
 “혼자 살면 밤에 무서워서 어떻게 해요?” 
 일 때문에 만난 같은 또래의 유부남이 묻는다. 
 “혼사 살면 밤에 외롭지 않나요?”

 초등 1학년 국어 문제 수준인데 설마 못 맞힌 분들은 없겠지? 그렇다. 그 단어는 바로 ‘밤’이다. 사람들은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해서 그녀의 ‘낮’보다는 특히 ‘밤’을 궁금해 한다. 결혼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밤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데, 혼자 사는 여자의 밤에는 왜 그리 관심이 많을까? 나는 오히려 그게 더 궁금하다.

 하도 이런 질문들을 자주 들어서 하루는 나도 내가 밤에 도대체 뭘 하는지 곰곰이 한번 생각해봤다.

 일주일을 돌아보니 사흘 정도는 집안일을 한다. 
 일을 늦게 마친 날은 청소기를 돌릴 수가 없어서 손으로 방을 쓸고 닦기도 한고, 세탁기가 해결해 주지 못하는 옷가지를 빨기도 한다. 마흔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손목이 시큰거린다. 그리고 한 주에 한 번 정도는 24시간 영업하는 마트를 들러 장을 본다. 장바구니에 세탁 세제, 복사용지, 무, 감자 따위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날은 정말 ‘짜증 지대로’다. 그래도 내 몸뚱이를 살아가게 만드는 이런 일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틀 정도는 책을 읽는다. 너무 고상한 척한다고 생각하진 마시길. 반 이상이 만화책이니까.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으면서 보내는 시간을 더없이 사랑한다. 

 그리고 하루는 이런 저런 관계의 사람들을 만난다. 책 읽고 토론하는 모임 친구들, 함께 밴드를 하는 언니 동생들, 내 밑바닥까지 알고 있는 내 가족들……. 까칠한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네주는 이들에게 늘 고맙다.

 그리고 나머지 하루는 나를 만난다. 가끔씩 달빛이 부서지는 봄밤, 동네를 한바퀴 걷기도 하고, 비가 촉촉이 내리는 밤은 두보의 시를 떠올리며 사유에 잠기기도 한다. 내가 가장 아끼는 시간이다. 이 시간만은 오롯이 실존의 자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실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만나기 어려운 인물은 대통령도, 인기스타도 아니다. 그건 바로 자신이다. 명함이 말해주는 나, 돈이 말해주는 나, 관계가 말해주는 나가 아닌 진짜 실존의 자아를 만나본 적이 언제인가? 아니,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그런 나를 만난 적이 있기는 한 걸까?

 짬 없는 일상과 틈 없는 관계에 질식하기 직전인 나를 만나면 나는 늘 외롭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외로움과는 다른,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살아가는 본연의 외로움이다. 누군가의 부재로 인한 상대적 외로움, 존재적 외로움, 상실의 외로움이 아니라, 나를 느끼는 사람만이 가지는 절대적 외로움, 실존적 외로움, 충만한 외로움이다.

 그렇기에, 혼자 사는 여자의 밤은 가끔 외롭다. 그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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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4-17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로워서 행복하시다. 하하..
저는 50이 넘은 소위 완전한 아저씨인데도 종종 외롭답니다.. 하하
실존적 외로움에 한표!!!


산딸나무 2008-04-17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누구에게나 실존적 외로움을 느낄 권리는 있답니다.
나이, 성, 삶의 방식과는 상관 없이요.
저도 님의 외로움에 한 표 드리죠.^^

2008-04-17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17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금강초롱 2008-04-18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정호승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 간다는 것은 외로움 견디는 일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길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라
갈대숲속에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가끔씩 하느님도 눈물을 흘리신다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산 그림자도 외로움에 겨워
한번씩은 마을로 향하며
새들이 나무가지에 앉아서 우는것도
그대가 물가에 앉아있는것도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 간다는 것은 외로움 견디는 일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그대 울지마라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아! 외로움이란 나에게 있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너무 익숙하기에 그냥 무시하고, 아무렇지도않은듯, 별일 없는듯, 어쩌면 나에겐 너무 사치스런 감정인냥 그냥 그렇게 그럭저럭 버티며 지금까지 여기까지....

실존적인 외로움이란 결국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의 본성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을 아름답게 승화시킬 의무가 있겠죠. 님과같이, 그 외로움이 행복으로 다가온다니, 다행이네요,진심으로 행복이 가득하길!

산딸나무 2008-04-21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서 맥주 한 잔을 나누게 되었다.

 서로의 근황을 묻다가 요즘 내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고 하니, 오랜 칩거를 끝내고 돌아온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다.

 나는 안주접시에 놓인 콩알 한 개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접시 가장자리에 놓으며

 “이게 나. 이 가운데 모여 있는 콩알들이 보편의 삶이라면 나는 이렇게나 떨어져 있는 인간이더라구. 내 주변엔 늘 그렇고 그런 사람들만 있어서 나는 몰랐지, 내 사고와 삶의 방식이 보편적 삶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이지. 음, 그런대로 괜찮은 경험이야.”

 친구는 깔깔대면서 웃더니 그걸 여지껏 몰랐냐며 까딱하다간 접시 밖으로 떨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란다.

 

 팍팍한 세상사에 대한 푸념을 안주 삼아 술을 두어 잔 비웠다. 친구가 안주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젓가락으로 가운데 콩알더미들을 내 콩 가까이 밀치면서 얘기를 덧붙인다. 

 “그래, 세상이 답답하지? 어떻게 저런 생각을 갖고 사나 싶지? 정말 나도 세상이 조금 더 진보해서 이렇게 보편이란 중심이 좀 더 우리 쪽으로 옮겨왔으면 싶다.”

 순간, 나는 친구의 말에 가슴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세상이 진보한다는 건 보편의 중심점이 이렇게 옮겨오는 것? 그렇구나, 우리가 다양성을 얘기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유의 뿌리는 이토록 폭력적이구나. 

 나는 접시 위에 놓인 콩들을 이리저리 흩어 놓았다. 콩들은 넓은 접시 위에 제 멋대로 이리 저리 뒹굴었다.

 “아니, 내가 바라는 세상은 중심이 옮겨오는 게 아니라, 이 넓은 접시에 모든 콩들이 각자 제 멋대로 흩어져서 제 식대로 살아가는 것. 나와 다른 다양한 삶과 사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게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해.”

 

 그가 하는 말에 달린 이름표가 보수이든, 진보이든, 우파이든, 좌파이든 중심을 자기 쪽으로  옮기려는 모습에서는 파시즘의 냄새가 난다.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외따로 떨어져 살아가는 콩알들을 모두 접시 밖으로 떨어뜨려야 마땅하다는 생각은 참으로 섬뜩하다.

 

 인간이 복잡한 뇌를 가진 동물로 진화한 순간부터 우리는 결코 편안할 수 없다. 끝없이 생각하고, 회의하고, 또 판단하는 걸 멈출 수 없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그러나 뇌를 멈추고 싶은 유혹은 얼마나 많은가?




 살아가면서 ‘절대 선’의 경지에 무언가를 올려두면 한없이 편안하다. 회의도, 사유도 필요없고 오로지 삶을 그 절대 선에 끼워 맞추면 되니까. 청소년 시절엔 성적과 대학이 절대 선이었고, 성인이 된 다음엔 출세, 사랑, 돈, 가족 따위가 절대 선의 자리를 차지하겠지. 가끔은 신과 인간을 얘기하는 사람을 만난다. 또 드물게는 민족과 통일을 얘기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또 더 드물게는 노동과, 계급을 얘기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들이 얘기하는 그것들이 절대적 가치가 되어버릴 때, 나는 그 절대 선 앞에서 내 삶과 그들의 삶이 삶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절대선의 논리 앞에 변형되어져 일그러져가고 있는 것을 본다.




 개체의 삶이 그 삶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진보는 허구다. 이념 앞에 현실의 삶을 찌그러뜨려야 한다면 바로 그 이념이 폭력이다.

 

 다르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다수, 보편, 단결이란 미명하에 삶과 사유를 억압한다. 그러나 다른 삶을 인정하는 곳에서는 연대의 가능성이 열린다. 연대, 그것은 네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하는 삶의 방식이 아닌가.  




 인간, 가족, 사랑, 신, 돈, 민족, 통일, 평화, 자유, 노동...

 우리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들이 어떻게 우리 뇌를 장악하게 되었던가, 그 역사적 발걸음을 확인하지 않을 때, 그 절대자들은 우리의 두 눈과 우리의 뇌와 종국에는 우리의 심장을 파먹는 벌레가 될 것이다.




“나의 맘 속에 나를 먹는 벌레가 살아 녀석은 나의 뇌 속에 처음 둥지를 틀고 이제는 나의 세포 모두에 자리를 잡아가 그래서 말이지만 내가 벌렌지 벌레가 난지...”

 자우림의 노래 '벌레‘의 가사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다시 회의하고 사유하자. 벌레가 우리 뇌를 다 먹어치우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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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2-14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산딸나무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이 자유로운 사회.
"나와 다른 다양한 삶과 사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회"
그럼요. 그게 바람직한 사회이지요.



산딸나무 2008-02-14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도 조심하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접시 밖으로 굴러 떨어질지도...^^

아리라 2008-02-1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빙점』을 쓴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익숙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다르다는 것은 익숙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만남, 새로운 세상과 익숙해진다는 것은 또 다른 당신을 포기하는 것일 수 도 있다.

산딸나무 2008-02-20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부터 철학적 사유가 시작된다고 하죠.
요즘 세상과 소통하면서 저는 제 자신이 낯설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세상과 익숙해지려고 소통하는 게 아니라
가장 익숙한 자기 자신을 낯설게 만들기 위해, 더 많이 소통해야 하는 것 같아요.
 

 

 

 새해다. 만나는 사람마다 덕담을 건넨다. 그런데 그 덕담들이 내게는 전혀 ‘덕담’이 아닌 때가 더 많다. 나를 황당하게 만드는 ‘덕담’ 가운데 1위는 뭐니 뭐니 해도 단연 ‘새해엔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세요.’이다.




 비혼주의자인 내게 ‘결혼’을 권하다니……. 일부일처제를 선택해서 결혼한 사람들에게 ‘새해에는 바람 피세요.’, ‘이제 살만큼 사셨으니 이혼하세요.’라는 게 덕담이 될 수 없다면 내게도 그런 인사가 모욕이란 것쯤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언제쯤이면 이런 욕 안 먹고 살 수 있을까?




 새해엔 평소보다 더 많은 모욕을 당하고 살아야하는 내 삶이 너무도 꿀꿀해서 친구와 술  한 잔 하면서 툴툴댔더니, 오래된 내 친구가 하는 말이

 “차 선생, 새해엔 제발 그 성격 좀 죽이고 사세요. (나를 비꼴 때면 늘 ‘차 선생’이란 호칭과 경어체를 사용하는 버릇이 있다). 결혼을 하라는 게 본질이 아니고, 댁이 나이 서른여덟 되도록 혼자 사는 게 외로워 보이니 누군가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보내는 거라고 좀 좋게 해석하세요. 이제 낼 모레면 마흔 줄에 접어드는데 그 놈의 성격은 어찌 그래 수세미보다 더 까칠하신지…….”




 아, 그렇구나. 그 말은 내 외로움을 염려해주는 살가운 말이구나. 그런데 그러니까 더 궁금해진다. 결혼하면 외롭지 않나? 결혼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결혼해서 사니 정말 외롭지 않니?




 솔직히 나는 혼자 사는 지금, 연인이 없는 지금 조금도 외롭지 않다. 오히려 연애를 할 때가 더 외로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외로움을 덜어줄 거란 기대가 있으니까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공허함과 외로움이 더 짙어지는 걸 경험했다. 연애의 유용성은 심심함을 덜어주는 정도로 밖에 기억되지 않는다. 그래서 연인이 없는 요즘은 가끔 아주 가끔 심심할 때는 있지만 결코 외롭지는 않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 배타적인 성적 사랑, 결혼을 통해서 가족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안착시키는 방법을 선택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구태의연한 방법에 나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결혼제도가 주는 안정감(반면 권태로움과 지루함은 한 세트로 배달된다.)이야 당연한 것이라 하더라도 외로움을 해결하는데 뭐 그리 도움이 될까 싶다.




 내 경우는 연인보다, 가족보다 사유를 함께 나누는 친구야 말로 내 삶을 외롭지 않게 해주는 존재였다.




 어느 글에서 ‘성적 사랑은 인류의 재생산에 기여하지만 정작 인류 공동체를 유지 존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비성적 사랑이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있다.

 성적 사랑도 비성적 사랑도 자연의 어머니가 우리 인간에게 선사한 매력적인 선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인류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이 두 종류의 사랑은 그 모습이 너무도 다르다. 성적 끌림이 마치 자석과 같아서 그야말로 끌어당기고 끌려가는 불같은 것이라면 친구와의 만남은 낚시 바늘로 인연을 걸어 올리는 섬세한 작업이 아닐까 싶다.

 

 내 마음의 철을 가늘게 다듬고, 상대의 감성에 맞추어 적절히 구부리고, 거기에다 상대와의 대화 속에서 소통의 지점을 오래 오래 참고 기다렸다가 순식간에 낚아채는 것. 그 작업이 조금이라도 불성실하면 여지없이 빈 망태로 터덜터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 친구와 나누는 지적교류가 아닐까?




 내 마음을 통제할 수 없이 끌어당기는 배타적사랑도 좋고, 거부할 수 없는 구속과 배려를 동시에 안고 있는 가족도 좋고, 소소한 일상의 한없는 남루함을 자글자글 풀어내는 술친구도 좋지만, 철학적 사유와 지적 감성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 삶은 충만함으로 가득할 텐데…….




 연애가 천국과 지옥을 하루에도 수차례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삶의 마약이라면, 지적사유를 공유하는 친구란 천국의 정원을 바라보며 천천히 음미하는 짙은 국화차 한 잔 같다.

 지적 사유를 함께 하는 친구를 만나면 내 언어가 빛나고, 내 사유가 춤추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운 날이다.

 

 지금 사랑에 빠져 세상 무엇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사랑의 유효기간은 그대의 생각보다, 그대의 바람보다 짧으니, 그 연애가 지루해질 즈음엔 이런 친구 하나 찾는 작업 해 보는 게 어떨지…….




 자,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드리는 새해 덕담.

 부디 새해엔 그대의 언어를 빛나게 하고 사유를 춤추게 만드는 멋진 벗 하나 만나시기를 …….


* 지난 해 지나가는 단상을 페이퍼에 옮겨놓았다가 다시 갈무리 해서 글을 썼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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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04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 사유를 함께 하는 친구를 만나면 내 언어가 빛나고,
내 사유가 춤추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

오.. 하하하.
새해에 즐거운 덕담을 듣습니다. 산딸나무님.

책 좋아하는 지인과 술한잔 하며, 밤새워 책이야기.. 하하
40대 초반의 특별한 즐거움이었지요.


산딸나무 2008-01-04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께서도 새해엔
좋은 벗 만나시길 빕니다.

시골사람 2008-01-04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 나이 들수록 그 의미가 더 커집니다. 술친구도 좋고, 수다친구도 좋고, 생각을 나누는 친구도 좋고, 마음을 나누는 친구도 좋고~~ 친구... 친구...^^

산딸나무 2008-01-04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나중에 다시 연애를 하게 된다면
이 글을 보고 '어느 미친 인간이 저딴 소릴...'해댈지도 모르지만
분명 연인이 가져다줄 수 없는 충만함이 친구에게 있는 것 같아요.
꼬박님도 새해에 좋은 친구들 많이 만드시길...

비로그인 2008-01-12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딸나무님 책소개 없으니,
심심하다. 하하


산딸나무 2008-01-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새해 되니 좀 바빠서요^^

가이아 2008-01-18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친구란 자유를 의미하지요, 괜한 규칙으로의 자유,저도 소실적 좋아했던 아가씨들 열정적으로 집착하다 다 떠나보냈는데, 차라리 친구가 연인 보다 더욱 가치있는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던데여.산딸나무님 성격이 좋으신것 같은데 좋은친구 많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산딸나무 2008-01-1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가이아 님.
근데 비성적 사랑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구요,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성적 사랑의 가치만 추앙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좋은 덕담 고맙습니다^^
 

 책상 위 달력이 달랑 12월 한 장만을 남기기가 무섭게, 초등학교 여자동창들 모임 송년회에 끌려 나갔다. 달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졌는데, 그 핑계들도 열한 가지는 떠오르더니만 열두 번째 핑계는 끝끝내 떠오르지 않아 눈 딱 감고 3시간만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시내 밥집으로 나갔다.

 

 내가 기껏해야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일 뿐인 일에 왜 이리 심각한 표현을 써 대느냐 하면 그 자리가 초등학교 시절의 숙제나 시험보다 백배는 끔찍하기 때문이다.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과, 71년생 돼지띠란 것, 여자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공통점이 없는 이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세 시간이나 유지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자리를 가도 얘기할 거리가 없어서 입 닫고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이 모임에만 가면 정말 입 한 번 달싹거리지 못 하고 돌아온다.

 

 그날도 결혼해서 아이 낳고 고만고만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30대 후반의 친구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까칠하고 잘난 척 하는 독신녀’라는 소리 안 듣고 무사히 이 시간을 마칠 수 있나 싶어 열심히 웃음 연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일찍 일어날 궁리를 짜내면서... 나도 웃음연기 말고 대사 있는 연기도 하고 싶은데 아이들 얘기, 남편 얘기, 재테크 얘기, 드라마 얘기... 도대체 하나라도 내가 입을 뗄 수 있는 거리들이 없으니. 게다가 그날은 연말이라고 거하게 대낮부터 고깃집이었다. (육식을 못하는 까닭에, 그렇지만 입맛까지 까칠하단 소리 들을까봐 따로 시키지도 못하고) 세 시간을 상추와 당근만 씹으며, 그저 조신하게 웃고만 있으려니 참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내 웃음연기가 완벽해서 마음에 들었는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덕담이랍시고 한 마디씩 던져준다.

 “넌 혼자 살아도 참 행복해 보여.” 
 “넌 남편 없어도 별로 외로워 보이지 않아서 좋다, 얘.” 
 “독신이라도 성격 좋잖아. 애 없어도 생속인 것 별로 표 나지 않고.”

 

 그 애길 들으면서 속없는 년처럼 허허실실 웃었다. 그러나 그 순간 입이 근질근질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억지로 웃느라 뭉친 안면근육을 풀면서 아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혼자서 중얼거렸다.

 “난 혼자 살아서 행복하고, 남편 없어서 외롭지 않고, 아이가 없어서 성격이 좋다. 이것들아, 도대체 뭘 알고 지껄이는 건지...”

 하루 종일 투덜투덜 대봐도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는다. 대놓고 얘기하지, 왜 뒤늦게 이 짓이람. 그렇지만 낼모레면 마흔인 이 나이에 이십 대처럼 굴 순 없지 않나. 20대 후반에 ‘니는 아직도 결혼 안했나? 그 나이까지 뭐했노? 연애 안 하고.’ 하는 선배에게 ‘어, 아직도 이혼 안 하고 살고 있어요? 뭐했어요? 그 나이까지 바람도 안 피고?’ 했다가 성격 더럽다고 십 년 지난 지금까지도 욕먹는다. 나의 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농담을 이해 못하는 인간들에게는 정말 더 이상 대꾸할 기력이 없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장애인인데도 참 즐거워 보여.’, ‘애가 아빠 없이 자랐어도 얼마나 반듯한지 몰라.’, ‘저 집은 가난해도 참 행복해 보여.’, ‘저 친구는 대학을 안 나왔어도 참 똑똑해.’ 따위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면 경악스럽다.

 

 어느 누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순 없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겠나? 결혼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혼자서 행복할 수 있겠나? 사지육신 멀쩡한 게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장애를 가져도 행복할 수 있겠나? 두 부모가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한 부모로도 행복할 수 있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렇기에’ 행복하다. 행복한 독신녀는 남편 따위 없기에 행복한 것이고, 행복한 가난뱅이들은 바로 돈 따위 없기에 행복한 것이다. 행복한 장애인은 바로 그 장애가 있기에 행복할 수 있는 것이고, 행복한 한부모가정은 아빠, 혹은 엄마 따위 없어서 행복할 수 있다.

 

 자기의 잣대로 남의 인생을 재단하지 말자. 제발 자기의 잣대는 자기 인생에만 써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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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2-06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의 잣대는 자기 인생에만 써 먹자.
자기의 잣대는 자기 인생에만 써 먹자.
자기의 잣대는 자기 인생에만 써 먹자.
한 세번 암송했습니다. 산딸나무님.

조금씩 나이 들어가며 내 아이들에게 또는 주위사람들에게
은연중 내 가치관을 들이대는 것 같습니다.
반성합니다. 하하
각인될 때까지 당분간 좌우명으로 삼아야겠어요.

"자기의 잣대는 자기 인생에만 써 먹자."
산딸나무님 고마워요.


산딸나무 2007-12-06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십대 후반의 후배가 자기 인생의 좌우명이
'늙더라도 꼰대가 되지는 말자!'래요.
저도 그 얘기를 들으면서 어찌나 뜨끔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