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서 맥주 한 잔을 나누게 되었다.

 서로의 근황을 묻다가 요즘 내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고 하니, 오랜 칩거를 끝내고 돌아온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다.

 나는 안주접시에 놓인 콩알 한 개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접시 가장자리에 놓으며

 “이게 나. 이 가운데 모여 있는 콩알들이 보편의 삶이라면 나는 이렇게나 떨어져 있는 인간이더라구. 내 주변엔 늘 그렇고 그런 사람들만 있어서 나는 몰랐지, 내 사고와 삶의 방식이 보편적 삶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이지. 음, 그런대로 괜찮은 경험이야.”

 친구는 깔깔대면서 웃더니 그걸 여지껏 몰랐냐며 까딱하다간 접시 밖으로 떨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란다.

 

 팍팍한 세상사에 대한 푸념을 안주 삼아 술을 두어 잔 비웠다. 친구가 안주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젓가락으로 가운데 콩알더미들을 내 콩 가까이 밀치면서 얘기를 덧붙인다. 

 “그래, 세상이 답답하지? 어떻게 저런 생각을 갖고 사나 싶지? 정말 나도 세상이 조금 더 진보해서 이렇게 보편이란 중심이 좀 더 우리 쪽으로 옮겨왔으면 싶다.”

 순간, 나는 친구의 말에 가슴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세상이 진보한다는 건 보편의 중심점이 이렇게 옮겨오는 것? 그렇구나, 우리가 다양성을 얘기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유의 뿌리는 이토록 폭력적이구나. 

 나는 접시 위에 놓인 콩들을 이리저리 흩어 놓았다. 콩들은 넓은 접시 위에 제 멋대로 이리 저리 뒹굴었다.

 “아니, 내가 바라는 세상은 중심이 옮겨오는 게 아니라, 이 넓은 접시에 모든 콩들이 각자 제 멋대로 흩어져서 제 식대로 살아가는 것. 나와 다른 다양한 삶과 사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게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해.”

 

 그가 하는 말에 달린 이름표가 보수이든, 진보이든, 우파이든, 좌파이든 중심을 자기 쪽으로  옮기려는 모습에서는 파시즘의 냄새가 난다.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외따로 떨어져 살아가는 콩알들을 모두 접시 밖으로 떨어뜨려야 마땅하다는 생각은 참으로 섬뜩하다.

 

 인간이 복잡한 뇌를 가진 동물로 진화한 순간부터 우리는 결코 편안할 수 없다. 끝없이 생각하고, 회의하고, 또 판단하는 걸 멈출 수 없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그러나 뇌를 멈추고 싶은 유혹은 얼마나 많은가?




 살아가면서 ‘절대 선’의 경지에 무언가를 올려두면 한없이 편안하다. 회의도, 사유도 필요없고 오로지 삶을 그 절대 선에 끼워 맞추면 되니까. 청소년 시절엔 성적과 대학이 절대 선이었고, 성인이 된 다음엔 출세, 사랑, 돈, 가족 따위가 절대 선의 자리를 차지하겠지. 가끔은 신과 인간을 얘기하는 사람을 만난다. 또 드물게는 민족과 통일을 얘기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또 더 드물게는 노동과, 계급을 얘기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들이 얘기하는 그것들이 절대적 가치가 되어버릴 때, 나는 그 절대 선 앞에서 내 삶과 그들의 삶이 삶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절대선의 논리 앞에 변형되어져 일그러져가고 있는 것을 본다.




 개체의 삶이 그 삶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진보는 허구다. 이념 앞에 현실의 삶을 찌그러뜨려야 한다면 바로 그 이념이 폭력이다.

 

 다르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다수, 보편, 단결이란 미명하에 삶과 사유를 억압한다. 그러나 다른 삶을 인정하는 곳에서는 연대의 가능성이 열린다. 연대, 그것은 네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하는 삶의 방식이 아닌가.  




 인간, 가족, 사랑, 신, 돈, 민족, 통일, 평화, 자유, 노동...

 우리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들이 어떻게 우리 뇌를 장악하게 되었던가, 그 역사적 발걸음을 확인하지 않을 때, 그 절대자들은 우리의 두 눈과 우리의 뇌와 종국에는 우리의 심장을 파먹는 벌레가 될 것이다.




“나의 맘 속에 나를 먹는 벌레가 살아 녀석은 나의 뇌 속에 처음 둥지를 틀고 이제는 나의 세포 모두에 자리를 잡아가 그래서 말이지만 내가 벌렌지 벌레가 난지...”

 자우림의 노래 '벌레‘의 가사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다시 회의하고 사유하자. 벌레가 우리 뇌를 다 먹어치우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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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2-14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산딸나무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이 자유로운 사회.
"나와 다른 다양한 삶과 사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회"
그럼요. 그게 바람직한 사회이지요.



산딸나무 2008-02-14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도 조심하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접시 밖으로 굴러 떨어질지도...^^

아리라 2008-02-1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빙점』을 쓴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익숙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다르다는 것은 익숙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만남, 새로운 세상과 익숙해진다는 것은 또 다른 당신을 포기하는 것일 수 도 있다.

산딸나무 2008-02-20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부터 철학적 사유가 시작된다고 하죠.
요즘 세상과 소통하면서 저는 제 자신이 낯설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세상과 익숙해지려고 소통하는 게 아니라
가장 익숙한 자기 자신을 낯설게 만들기 위해, 더 많이 소통해야 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