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다. 만나는 사람마다 덕담을 건넨다. 그런데 그 덕담들이 내게는 전혀 ‘덕담’이 아닌 때가 더 많다. 나를 황당하게 만드는 ‘덕담’ 가운데 1위는 뭐니 뭐니 해도 단연 ‘새해엔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세요.’이다.




 비혼주의자인 내게 ‘결혼’을 권하다니……. 일부일처제를 선택해서 결혼한 사람들에게 ‘새해에는 바람 피세요.’, ‘이제 살만큼 사셨으니 이혼하세요.’라는 게 덕담이 될 수 없다면 내게도 그런 인사가 모욕이란 것쯤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언제쯤이면 이런 욕 안 먹고 살 수 있을까?




 새해엔 평소보다 더 많은 모욕을 당하고 살아야하는 내 삶이 너무도 꿀꿀해서 친구와 술  한 잔 하면서 툴툴댔더니, 오래된 내 친구가 하는 말이

 “차 선생, 새해엔 제발 그 성격 좀 죽이고 사세요. (나를 비꼴 때면 늘 ‘차 선생’이란 호칭과 경어체를 사용하는 버릇이 있다). 결혼을 하라는 게 본질이 아니고, 댁이 나이 서른여덟 되도록 혼자 사는 게 외로워 보이니 누군가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보내는 거라고 좀 좋게 해석하세요. 이제 낼 모레면 마흔 줄에 접어드는데 그 놈의 성격은 어찌 그래 수세미보다 더 까칠하신지…….”




 아, 그렇구나. 그 말은 내 외로움을 염려해주는 살가운 말이구나. 그런데 그러니까 더 궁금해진다. 결혼하면 외롭지 않나? 결혼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결혼해서 사니 정말 외롭지 않니?




 솔직히 나는 혼자 사는 지금, 연인이 없는 지금 조금도 외롭지 않다. 오히려 연애를 할 때가 더 외로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외로움을 덜어줄 거란 기대가 있으니까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공허함과 외로움이 더 짙어지는 걸 경험했다. 연애의 유용성은 심심함을 덜어주는 정도로 밖에 기억되지 않는다. 그래서 연인이 없는 요즘은 가끔 아주 가끔 심심할 때는 있지만 결코 외롭지는 않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 배타적인 성적 사랑, 결혼을 통해서 가족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안착시키는 방법을 선택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구태의연한 방법에 나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결혼제도가 주는 안정감(반면 권태로움과 지루함은 한 세트로 배달된다.)이야 당연한 것이라 하더라도 외로움을 해결하는데 뭐 그리 도움이 될까 싶다.




 내 경우는 연인보다, 가족보다 사유를 함께 나누는 친구야 말로 내 삶을 외롭지 않게 해주는 존재였다.




 어느 글에서 ‘성적 사랑은 인류의 재생산에 기여하지만 정작 인류 공동체를 유지 존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비성적 사랑이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있다.

 성적 사랑도 비성적 사랑도 자연의 어머니가 우리 인간에게 선사한 매력적인 선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인류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이 두 종류의 사랑은 그 모습이 너무도 다르다. 성적 끌림이 마치 자석과 같아서 그야말로 끌어당기고 끌려가는 불같은 것이라면 친구와의 만남은 낚시 바늘로 인연을 걸어 올리는 섬세한 작업이 아닐까 싶다.

 

 내 마음의 철을 가늘게 다듬고, 상대의 감성에 맞추어 적절히 구부리고, 거기에다 상대와의 대화 속에서 소통의 지점을 오래 오래 참고 기다렸다가 순식간에 낚아채는 것. 그 작업이 조금이라도 불성실하면 여지없이 빈 망태로 터덜터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 친구와 나누는 지적교류가 아닐까?




 내 마음을 통제할 수 없이 끌어당기는 배타적사랑도 좋고, 거부할 수 없는 구속과 배려를 동시에 안고 있는 가족도 좋고, 소소한 일상의 한없는 남루함을 자글자글 풀어내는 술친구도 좋지만, 철학적 사유와 지적 감성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 삶은 충만함으로 가득할 텐데…….




 연애가 천국과 지옥을 하루에도 수차례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삶의 마약이라면, 지적사유를 공유하는 친구란 천국의 정원을 바라보며 천천히 음미하는 짙은 국화차 한 잔 같다.

 지적 사유를 함께 하는 친구를 만나면 내 언어가 빛나고, 내 사유가 춤추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운 날이다.

 

 지금 사랑에 빠져 세상 무엇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사랑의 유효기간은 그대의 생각보다, 그대의 바람보다 짧으니, 그 연애가 지루해질 즈음엔 이런 친구 하나 찾는 작업 해 보는 게 어떨지…….




 자,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드리는 새해 덕담.

 부디 새해엔 그대의 언어를 빛나게 하고 사유를 춤추게 만드는 멋진 벗 하나 만나시기를 …….


* 지난 해 지나가는 단상을 페이퍼에 옮겨놓았다가 다시 갈무리 해서 글을 썼답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8-01-04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 사유를 함께 하는 친구를 만나면 내 언어가 빛나고,
내 사유가 춤추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

오.. 하하하.
새해에 즐거운 덕담을 듣습니다. 산딸나무님.

책 좋아하는 지인과 술한잔 하며, 밤새워 책이야기.. 하하
40대 초반의 특별한 즐거움이었지요.


산딸나무 2008-01-04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께서도 새해엔
좋은 벗 만나시길 빕니다.

시골사람 2008-01-04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 나이 들수록 그 의미가 더 커집니다. 술친구도 좋고, 수다친구도 좋고, 생각을 나누는 친구도 좋고, 마음을 나누는 친구도 좋고~~ 친구... 친구...^^

산딸나무 2008-01-04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나중에 다시 연애를 하게 된다면
이 글을 보고 '어느 미친 인간이 저딴 소릴...'해댈지도 모르지만
분명 연인이 가져다줄 수 없는 충만함이 친구에게 있는 것 같아요.
꼬박님도 새해에 좋은 친구들 많이 만드시길...

비로그인 2008-01-12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딸나무님 책소개 없으니,
심심하다. 하하


산딸나무 2008-01-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새해 되니 좀 바빠서요^^

가이아 2008-01-18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친구란 자유를 의미하지요, 괜한 규칙으로의 자유,저도 소실적 좋아했던 아가씨들 열정적으로 집착하다 다 떠나보냈는데, 차라리 친구가 연인 보다 더욱 가치있는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던데여.산딸나무님 성격이 좋으신것 같은데 좋은친구 많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산딸나무 2008-01-1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가이아 님.
근데 비성적 사랑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구요,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성적 사랑의 가치만 추앙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좋은 덕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