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나를 보고 애국자가 아니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구역질이 나도록 싫어하는 나로서는 애국자라는 말이 오히려 모욕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말이다. 그런데 그 까닭을 듣고 보니 너무 어이가 없다.
그들은 내가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았으니 애국자가 아니란다. 출산율이 바닥을 기고 있는 이 시대에 아이를 쑥쑥 낳아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야 하는 게 국민 된 자의 도리인데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는 여자라서 그렇단다.
비혼주의자로 살면서 온갖 편견들을 만나봤다. 살림이라곤 손도 까닥할 줄 모른다, 똑똑한 척하면서 제 잘난 맛에 산다, 남자한테 모질게 차인 기억이 있을지도…….
그런데 이제는 결혼 안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애국자가 아니라니. (정말 살다 살다 별 꼴을 다 보는군.) 처음엔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야길 진지하게 강론하는 사람들을 몇몇 만나고 나니 억울해서라도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육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은 우리 어머니를 종종 할머니로 착각하기도 했다. 어머니로 봐서는 자식 여섯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내 또래 친구들은 70년대 태어난 세대이다 보니 자매, 형제들이 둘, 많아봤자 셋인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국민학교를 다닐 때, 새 학년이 시작되면 늘 가정환경을 조사하는 시간이 있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던 그 무식한 인권유린에 마음을 다치지 않은 아이가 몇이나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 주 몇 회 섹스를 하는지 묻는 것 보다 더 낯 뜨거운 폭력이었음에도 당시는 선생님이 묻는 대로 순순히 손을 들었다.
그런데 그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부모님이 두 분 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보신 것도, 집에 냉장고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바로 자매, 형제의 수를 묻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자매, 형제가 하나인 사람, 둘인 사람, 셋인 사람까지 묻고는 “손 안 든 사람?”하고 덧붙였다. 그러면 보통 서넛 정도 손을 드는데, 넷이라고 대답하는 아이가 있으면 아이들은 모두 “우와!” 하며 놀란다. 그런데 내가 “여섯이요.” 하면 반 전체가 술렁인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학교 곳곳을 장식하던 시절이었으니, 아이들의 놀람이 무리도 아니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 나는 얼굴이 벌겋게 되고, 하루 종일 부끄러워서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 아이를 많이 낳는 여자는 무식하고, 교양 없는 여자였다. 아이를 많이 낳아서 국가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그런 반애국적인 여자가 바로 내 어머니였던 것이다.
아이를 많이 낳았다는 까닭으로 내 어머니와 내가 당했던 정신적 수모가 아직도 생생한데, 그 국가가 이젠 아이를 낳지 않는 나를 보고 교양 없고 이기적인 여자 취급을 한다.
국가는 늘 여성들의 삶을 그렇게 통제해왔다. 전쟁이 일어나서 남자가 모자라면 일터에서 일하는 씩씩한 어머니를 극찬하며 바깥으로 내몰고, 남자들의 일자리가 모자라면 조신한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떠받들어 올려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게 마치 여성이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란 듯 꾸미면서.
그러고 보니, 지금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결혼, 모범적 가정, 성실한 직장인의 모습은 어쩌면 국가와 자본이 만들어낸 매트릭스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만들어진 행복에 내 삶을 끼워 맞추며 행복하다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로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 가슴으로 꿈꾸는 일이다. 모범 답안의 행복을 거부하고 내 오감으로 체험하는 행복을 찾아서 떠나는 길, 그 길에서 찾은 삶만이 진짜 삶이다. 그것이 결혼이든, 독신이든, 아이 열을 낳아 키우는 삶이든, 낳지 않고 사는 삶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