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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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에 대한 말들, 누군가에 대한 생각들, 누군가에 대한 평가들, 그것들이 과연 그 누군가에게 해당되는 것들일까? 살아가면서 온전히 자신에 대해 혹은 자신에게 주어진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을 다른 사람에 대해 배우고, 생각하고,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좀머씨에 대해 알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좀머씨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면서 나의 내면에 귀를 기울였을 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과연 그럴까?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누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사실, 그것만큼 어리석고, 두려운 일은 없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내가 알고 지내는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이 책의 화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틀린’것이 아니라 ‘다른’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은 입을 모아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순식간에 ‘틀린’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입을 모아 이야기 했던 그 많은 것들이 결국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릴 때, 그것은 ‘다른’것도 ‘틀린’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생활과 자신의 모습이 ‘중심’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책은 ‘좀머씨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잉크반점이 뭉쳐있는 형상을 바라보면서 어떤 그림을 떠올리는 것과 같은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좀머씨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그의 모습은 형태를 알 수 없는 잉크반점과 같고, 떠올렸던 그림은 다름 아닌 자신의 생의 일부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더 이상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좀머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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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25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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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8-25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의 저 마지막 구절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의미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음...이 리뷰는 잉크반점이 들어감으로써 더 빛을 발하는군요.ㅎㅎ

가시장미 2006-10-31 0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 언니. ^-^ 도리도리~~ 도 해주세요 ㅋㅋ

잉크냄새님 으흐흐 그러네요. 잉크님의 냄새가 있어서 더욱더~! 빛났으면 좋겠어요.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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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서 팔잖아.


팔지 않는 카스테라는 없다고.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살 수 없는 카스테라는 없다고, 예전에 내가 생각했듯이. 결국 나는, 이 시시한 논리를 시시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한 조각의 카스테라를 스스로 만들어 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계란과 밀가루를 반죽해 빛이 나올 때까지- 하다못해,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 P 331, 작가의 말 中


모든 물건에는 가격이 있고, 물건은 팔려고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몸담고 계신 시장판에서 눈동냥하면서 배운 사실은 싸게 사들이고 비싸게 팔아치우는 행위가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의 규칙에 따라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박민규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대단한 생존의 규칙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언짢고 시시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작가의 말 중에서 저 다섯줄을 읽고, 책을 읽었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넋을 놓고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오븐과 계란과 설탕과 밀가루가 있는데…….


같은 지구에서 같은 규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비슷한 재료를 가지고자신의 카스테라를 오븐 밖으로 선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그 노력의 근원은 원초적인 본능을 바탕으로 ‘시장’의 흐름과 규칙에서 도태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 대한 악담을 퍼 붓는 사람을 훈계하면서 시장을 찬양하고, 개인의 자유와 사회 계약이라는 관념을 ‘시장’과 불가분의 관계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시장’을 끌어안고 있는 덕분에 우리는 때로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해야 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하지만 당연한 것은 위험하다.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구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도 평범하고, 누구나 다 만들 수 있는 카스테라를 만든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당연한 것을 회피하고, 보편적인 것과 평범한 것을 거부한다. 그의 문체가 그렇고, 그의 사고가 그렇고, 그의 생활이 그렇다. 그것은 마치 세계 최고의 빵집을 운영한다는 푸알 랜이 기존의 제빵사 들을 채용하지 않는 대신 기꺼이 몇 년씩 그의 도제가 되겠다는 청년들을 고용하는 것과 흡사하다. 어쩌면 그는 에디슨의 카스테라, 가가린의 카스테라, 지미 핸드릭스의 카스테라, 이백의 카스테라, 제인 구달의 카스테라, 테레사의 카스테라가 탄생을 찬양하고, 기억하며, 그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카스테라를 만들 수 있기를 소망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인류를 위해서가 아닌(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형편없는 카스테라를 만들었다면 그 실패에 대한 비난은 쏟아지겠지만 그것은 우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카스테라를 만들어내는 요리법(일종의 아이디어)에 대한 비난이다. 그런 비난을 회피하든, 부인하든, 합리화 시키든,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런 비난이 또 하나의 요리법을 탄생시킬 수 있는 배경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맛있는 카스테라를 탄생시킨 또 하나의 재료가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작가 박민규 만이 소유하고 있었던 특이한 재료 중에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나는 삶이 나에게 부여한 과제의 이름을 이렇게 붙이기로 했다.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살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위대한(의미있는) 카스테라의 탄생을 위하여! '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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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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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 소년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투명하다. 투명하지 않은 것도 투명하게 ‘여과’시켜서 바라볼 수 있는 여민이가 자랑스럽기만 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의 시각 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시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끼고 있는 색 안경의 색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색이 흐릿해진다고 해서 투명해질 수는 없겠지만 흐릿해진 렌즈사이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여민이의 눈에 보이는 많은 등장인물들은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주인공 여민이 조차도 그 고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마도 ‘아홉’이라는 숫자는 ‘열’을 향해가는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과도기의 역할을 하는 시점이기 때문에 스물아홉의 작가가 서른을 향해가는 시점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넘어서서 또 다른 현실을 동경하게 되는 시점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열 살이 되었다. 그래서...” 라고 여운을 남기는 이유..?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은 어느 한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신을 관조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여민이에게 비춰진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자극이 되어 독자의 이면에 있는 많은 면들을 투사시킬 수 있을 때 비로써 가능해진다. 가장 불쌍해 보이는 사람도, 가장 슬퍼 보이는 사람도, 가장 아이러니해 보이는 사람도, 가장 고상해 보이는 사람도, 모두 우리의 그림자 일 뿐이다.


우리는 그 그림자들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울고, 웃고, 슬퍼하고, 좌절하고, 희망차고, 기쁘다. 하지만 추구해야 한다는 것과 추구할 수 있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 그 순간, 순간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일부이고,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9살 때도, 19살 때도, 29살 때도, 39살 때도, 49살 때도....... 생의 마지막 아홉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생의 방향성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나 또한 내 아홉 살에 울타리를 치고 싶은 생각은 결코 없다. 내 인생은 아홉 살에서 끝날 게 아니므로, 그리하여 우리는 또다시 인생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꺼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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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공선옥 지음 / 당대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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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이라는 것이 때로는 진실을 가능하게 해주지만 때로는 거짓을 가능하게 한다. 알기 때문에 거짓을 말할 수 있고, 알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작가는 삶을 알기 때문에 거짓을 말할 수 있고, 삶을 알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느꼈을까? 그녀의 작품을 많이 접해보지는 못했지만 알고 있기에 고뇌하는 모습을 통해, 그 모든 것을 부인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쓴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지도 못하면서.

 

짧지도 길지도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엄살도 부리고, 한탄도 하고, 고뇌도 했던 나의 지난 시간들이 온전히 나 자신을 향해 있었다는 사실이 이토록 부끄럽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급박하여 내 앞가림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면서도 내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주위를 둘러보지도, 마음에 담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일까? 정작 무엇을 위했으면 정작 누구를 위했다는 말인가? 나는 나의 작은 세계를 가슴에 품고 그것이 전부일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계지만 모두의 세계는 다르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세계가 전부일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기 위해 투쟁하고, 이토록 몸부림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세계는 없으며 그 누구도 온전한 세계를 알지 못하기에 더 강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자든 후자든 자신의 인식 안에 갇혀 그 이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은 어리석다.

 

물론 작가의 시각도 작가의 인식에서 비롯되었으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세계가 온전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그녀와 나의 차이점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느냐의 여부와 온전하지 못한 것을 깨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느냐의 여부이다. 때때로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은 세계를 깨부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양가감정은 나의 오만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만함은 굴곡을 만들고 그 굴곡은 내 자신을 바로 보지도, 바로 듣지도, 바로 생각하지도 못하게 만들 것이다. 끝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 땐,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믿고 싶어지겠지? 그것이 삶이 가지고 있는 모순된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고 믿어야하고, 그런 반복이 거짓과 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게 된다면 삶은 거짓과 다름없는 것 이 된다. 그래서 사는 게 때때로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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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 말의 가치를 일깨우는 철학 동화
위베르 니생 지음, 크리스틴 르 뵈프 그림, 유정애 옮김 / 현암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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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이 줄 수 있는 해악 점을 극대화 시킨 한편의 짧은 철학동화를 읽으면서 나는 ‘언어’가 인간에게 부여한 많은 것들을 떠올린다. ‘언어’라는 것은 동물과 차별화되는 고차원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솔직히 ‘언어’라는 광범위한 단어는 동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까지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부분을 고려하여 이 책에서는 ‘언어’라는 표현을 쓰기보다 ‘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그 의미를 축소화 시키고 있는 듯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초록개미와 파란개미는 마법에 의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 전에는 비교적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그들만의 언어로 서로의 의사를 표현했으며 서로의 영역에 대한 구분을 명확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말’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이 후로 그들 사이에서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속사정을 정확하게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으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정확하게 어떤 ‘단어’를 사용하여 내 뱉게 되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칼로 무 자라듯이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모든 ‘언어’는 인간의 사유와 심상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그 아무리 정확한 표현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인지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말’을 내 뱉고 나면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뜻을 생각하게 되고, 그것에 모든 것을 한정짓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는 분명 온전히 표현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며 왜곡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때때로 그런 어려움이 큰 불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 불화로 파란개미와 초록개미처럼 ‘말’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은 파란개미와 초록개미처럼 ‘말’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를 불신하는 마음으로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면 파멸이 올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나는 그 경고를 들으면서 지난날의 나의 과오를 떠올리면서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말’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화를 하는 사람과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것과 신뢰를 잃은 사람과 대화를 할 때는 최대한 정중하고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정확한 표현을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여전히 나에게 어려운 과제이므로 ‘말’을 조심하고, 아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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