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데미안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18
헤르만 헤세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산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


삶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나의 세계는 그 모순과 맞물려 또 다른 모순을 낳는다. 내가 삶을 이해할 수 없으며, 내가 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에 나는 내가 만들어 놓은 알 속에 갇혀있다. 그 딱딱한 껍질은 모순을 거듭할수록 단단해지며 그 딱딱한 껍질을 깨부수는 행위는 모순이 거듭될수록 위험해진다. 하지만 새는 본래 알을 깨고 세상을 향해 비상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에 나의 본능도 내가 만들어놓은 세계에 갇혀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모순을 거듭하더라도 언젠가는 비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소망을 품고,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한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 처절한 몸부림이 나를 비로소 새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면, 그 처절한 몸부림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나의 몸뚱이가 찢기고, 뭉개져 앙상한 뼈만 남게 된다고 할지라도…….


소년 싱클레어가 성장하면서 경험하는 사건들이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많은 것들과 맞물려 수많은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을 간접적으로 바라보면서 그에게 투영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어느 대상에 내 자신을 투영시켜 간접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내 자신과 나를 분리시켜 객관화 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줌과 동시에 나의 인식의 틀 안에서 또 다른 인식의 틀을 내가 이미 만들어 놓은 편협한 세계에 한정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가능한 것들의 모순 사이에서 나는 삶의 모순을 발견하고, 내 자신의 모순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내가 바라보는 세계와 나를 바라보는 세계가 동시에 공존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그 공존하는 것들 사이에 하나의 객체로써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다는 것이 전부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앎이란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추론과정일 뿐이며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나의 감각과 감정을 동반되는 정신세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불확실함의 연속이며 모호함과 애매함으로 가득한 허상일 뿐이다.


그것은 알에 갇혀있는 나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자연스러운 현상에 의문을 던지고, 데미안의 존재에 끊임없는 회의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나의 정신세계의 혼돈이 나의 알을 깰 수 있는 아주 작은 시도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그런 인정이 모순을 낳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모순을 낳을수록 그 시도의 강렬함이 더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이 나의 알에게 아주 작고 미세한 ‘금’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이 모순으로 가득한 글이 나의 가슴을 울린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자들의 움직임이 나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이 의심스러우면서도 끊임없이 나의 뇌리를 스치는 섬광들이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므로 나의 손가락은 통제력과 자제력을 상실했다. 어쩌면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인지 나의 섬광들이 문자를 타고 움직이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모호함 속에서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알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므로 나의 알이 깨지는 그 날까지 나는 나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

알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을산 2005-11-10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드는 생각.
20여년 전에 읽었던 고전들을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떻게 읽힐까?
아들네미 읽으라고 사준 데미안의 첫머리를 얼마전에 조금 읽었는데.....
(요즘애들은 작은 글씨 세로로 박힌 옛날 전집은 보려고도 안하지... )
음... 딱 우리 아들내미 또래 이야길세.......
음..... 다음에 마저 읽어봐야겠다...... 지금 읽으면 어떻게 다가올까?

가시장미 2005-11-10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 언니~ 그 아들내미가 어느 또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지금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고전이라.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 5번 가까이 읽었는데도 여전히 저의 인식의 틀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편협된 시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 틀을 깨는 발상은 아이들이 제시해줄때면 아주 큰 희열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굉장히 초라한 자아를 발견하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저의 알이 깨어질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 초라함이 곧 자긍심으로 변하기도 한답니다. ^-^
아마, 지금 읽으시면 그 때의 '알'과 지금의 '알'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시겠죠?!

2005-11-10 0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5-11-10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저도 그 글귀 아주 마음에 와 닿았어요. 찌리리~~~ 했었죠. ^-^
격려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비밀리에 감사해야 하는 글만 써주시는 것 같아요. 으흐흐
 
노인과 바다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품은 헤밍웨이의 걸작 중의 하나이며, 그가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은 상어로 상징되는 죽음에 의하여 패배하지만, 용기와 자기극복으로 과감하게 죽음과 대결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존엄한 존재인지를 실존주의 철학을 담아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간결하고 힘찬 문체는 삶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드러내기에 충분했는데 특히 “인간은 싸움에 패배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야. 죽었으면 죽었지, 패배하는 법은 없어.” 라는 문구에서는 최선을 다한 싸움에서 적에게 쓰러지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단지 파괴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담겨있었고, 이는 강인한 인간의 힘을 믿는 헤밍웨이 작가 정신을 요약한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즉, 그것은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거기에 굴복하는 것이야말로 패배라 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항해 끝까지 싸우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힘을 보여주는 것일 뿐 결코 패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어부의 생활을 천직으로 여기는 노인이 85일째 되던 날 18척이나 되는 큰 고기를 만나고 사흘간의 힘들고 고단한 시간을 끝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나 결국 상어 떼를 만나 물고기는 뼈만 남게 된다. 결국 그가 항구에 돌아왔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18척의 물고기가 남겨놓은 흔적뿐 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써 우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즉, 인생은 ‘공수레 공수거’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쳐야 하고 그 순간 자신이 이룩한 성공과 업적이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들이 대단하고 위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없어진 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한 노인은 그 허망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바다로 나가길 꿈꾸면서 사자 꿈을 꾸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가 인간으로써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수용하고, 자연의 섭리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인생의 결과물보다는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이겨내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재확인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라는 공통적인 속성을 지니고, 삶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을 꿈꾼다. 우리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고,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도 너무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공통점은 그것에 순응하고 그것에 대항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노인이 보여주는 삶의 자세와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책이 고전으로 우리에게 널리 읽혀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책에 등장하는 노인의 모습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이데아’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습은 그 이데아의 속성이 조금 드러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절대적인 이데아의 속성을 지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이데아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조율해나가고 자신이 추구해야하는 인생의 목표를 수정해가면서 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에 모습에 도달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노인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 해 가는 것이다. 결코, 완벽하지 않지만 완벽을 지향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이러니 하지만 아름답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장바구니담기


생애 첫키스! 그 순간을 얼마나 꿈꿔왔던가! 주변 풍경도 여느 날과는 달랐다. 하늘을 나는 왜가리, 석양, 거친 아름다움을 지닌 황량한 들판,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음악소리, 마리아는 그를 밀어내는 척하다가 힘껏 끌어안았다. 그녀는 영화와 잡지, 텔레비젼에서 수없이 본 동작을 따라했다. 리드미컬하면서도 다소 어색하게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젖히며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 대고 꽤나 격렬하게 비벼됐다. 때때로 청년의 혀가 자신의 앞니에 와 닿는 느낌이 무척이나 달콤했다. -23쪽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온 우주가 그 사랑을 위해 공모하는 것 같다. 오늘 석양 무렵,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 하지만 뭔가 하나만 잘못되어도 모든 것이 무너져 사라진다! 노을 속을 나는 왜가리,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소리, 달콤한 그의 입술, 그 모든것, 몇 분 전만 해도 분명히 거기 있었던 아름다움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라질 수 있었을까? 삶은 아주 빠르다. 삶은 우리를 천국에서 지옥으로 데려다놓는다. 단 몇 초 사이에. -24쪽

그의 혀가 자신의 앞니에 와 닿을 때가 가장 짜릿했다고, 그러자 한 친구가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 너 입을 벌리지 않았던 거야? "

순간,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 왜 입을 벌려? "
" 그래야 혀가 들어올 수 있지. "
"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데? "
" 키스는 그렇게 하는거야."-25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시장미 2005-11-01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첫키스 열풍이라. 11분을 읽다가 기억에 남았던 장면을 올려봅니다.
이 책은 다시봐도 참.. 민망하고........ 발그레한 내용이 많은것 같아요. (-_-;;)~ ㅋㅋ

가시장미 2005-11-01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척하는 남자가 쓴 여자? 흠... 그래? 나도 다시 읽어보고 리뷰써야겠다. ㅋㅋ
 
지킬박사와 하이드 삼성 어린이 세계명작 (고학년) 17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윤종태 그림, 한상남 엮음 / 삼성출판사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선과악.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그것.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선과악이 공존하지만 그것의 경계선은 불분명하다. 그 경계선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경과 학습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자아와 본능을 주관하는 초자아의 영향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초자아는 부모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성장과정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간다고 말했다. 그것은 동양권에서 성악설로 불리우는 사상과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그것은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따른 학습에 의해 본능에 내재되어 있는 악한면을 억압당하고 그와 반대되는 선한면은 사회적으로 계속 지지받고 강화받음으로써 더 의식화되고, 표면화된다는 것이다.

지킬박사도 악한 자신의 본능을 억압하고 선한면을 최대한 부각시키고 표면화 시키면서 살아온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덕망과 명성을 중요시했으며 그에 부합되지 않는 악한면을 볼 때면 심한 괴리감을 느끼고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는 쾌락을 중요시여기고 자신의 본능을 억압하는 것에 심한 불안을 느꼈기 때문에 죄책감이나 괴리감이 없이 자신의 악한본능을 들어내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 그래서 신비한 약을 발명했으며 그 약을 먹은 후에 변신한 자아를 하이드라 불렀다. 하이드는 그의 내면에 있는 10%정도에 지나지않는 악한면?의해 만들어졌지만 100%악으로만 이루어진 악의 결정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결국 지킬박사는 자신의 이중적인 면이 주는 고통에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자신의 삶을 파멸시킨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한면을 알게되고 그것을 알게되었을 때 자아가 불리되는 듯한 심한 괴리감을 경험할 것이다. 나는 그런 경험을 하게될 때면 내 자신의 성향이 아닌 주어진 상황에 귀인시켜 나의 입장을 합리화시키거나 또 다른 나의 모습이 아닌 마치 다른 사람의 모습인양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의 잘못을 반성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내 안에 악하지 않은 선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면도 공존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하지만 악한면만이 분리되어서 만들어진 하이드에게는 '반성'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된다. 그는 오로지 악에 대해 알 뿐 선에 대한 개념도 인식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보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알수없는 불쾌감과 소름끼치는 공포감의 대명사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닌 인간에 의해 발명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악의 결정체인 인간이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모습을 정당화시켜주고, 오히려 그것이 완벽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만약 지킬박사가 지나치게 한쪽방향만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버리고, 보통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자신에게 내재되어있는 이중성을 인정하면서 조율을 추구했다면 스스로가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가진 욕망은 인간의 본능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 이상이다. 우리의 이중적인 본능을 조율하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만든다면, 특히 악한면이 극단적으로 많이 표면화되게 된다면 그것은 ' 반성의 부재' 를 낳게 되고, 결국 우리의 삶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과악이 내재된 이중성적인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조율하기위해 끊임없이 반성하는 인간만이 완벽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시장미 2005-11-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썼던 리뷰중 유일하게 저장해놓은 리뷰입니다,. ㅠ_ㅠ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을 풀어내고 있는 이 책은 정말 사소한 사건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시각을 보여준다. 한 줄 한 줄 꼼꼼하게 읽으려고 하면, 저자와의 의사소통이 결코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결코 내 삶의 본질과 다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전해지는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문자를 문자 그대로 읽어서가 아닌, 문자의 모습이 모여서 이루는 전체적인 맥락이 주는 느낌이 마음에 와 닿아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와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은 저자의 분석적인 시각과 반대되는 전체적인 시각을 가지고 마음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어쩌면 모든 책에서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인지도 모른다. 한 편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책이라면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듯이 하나하나의 사건이 아닌 전반적인 인생의 패턴을 살펴봐야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이유는 이 책이 사소한 사건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유는 이 책에 등장하는 태평양 한가운데 고아처럼 살아남은 포유류에 속하는 한 인간이 살아남고자 끊임없이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모습 속에 위협을 주는 대상을 향한 경쟁심과 증오감과 두려움을 볼 수 있었고, 결국 그런 자극조차도 삶의 의지를 자극하는 하나의 원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포용하고 사랑하려는 모습은 한 마리의 호랑이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토록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다고 느꼈던 같은 포유류의 존재가 같은 부류의 존재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같은 욕망과 갈등 속에서 끊임없이 경쟁을 하고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여 서로를 견제하고 갈등을 일으켜야 하지만 그런 것들이 삶의 절망 속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의 모습은 나에게 주어진 삶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해주었다.


삶의 끊임없는 모순 속에서 우리는 그것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이 자연스러운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그것들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절망에서 구원해준 호랑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낸다. 그리고 대화를 건넨다. 자문자답,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에게 대답을 구하는 모습, 어쩌면 그는 호랑이와 자신을 동일시시켜 이 황량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하나의 개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삶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자세라는 생각을 해본다. 끊임없이 뒤틀리고 끊임없이 왜곡되는 것들이 인간의 속성이고 삶의 속성이므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리라.


그것은 ‘신’이라는 절대자가 없더라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숙명이겠지?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시지프스라는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끊임없이 돌을 언덕으로 굴려야하고 끊임없이 떨어지는 돌을 다시 언덕으로 올려야 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나는 삶과 죽음을 보았다. 그리고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의지를 보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태평양 한가운데 남을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인간의 모습은 모순과 왜곡으로 가득한 삶에서 살아가야 하는 불쌍한 인간의 숙명과 동시에 삶과 죽음 그리고 삶의 의지를 보았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수용해왔고, 포용하려고 노력했는가? 그것들이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알면서도 얼마나 많은 시간 그것들을 외면해왔는가? 외면한다고 부정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는 모순과 끊임없는 굴곡을 만들어가는 나의 모습이 참으로 딱하게 보이면서도, 그런 모습을 알아가고 이해하고 포용하려고 노력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위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니깐.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시장미 2005-10-30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선물해준. 서연사랑언니! ^-^ 사실, 처음에는 이 책을 왜 추천해주셨는지 많은 생각을 해야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언니가 무엇 때문에 이 책을 선물해 주셨는지...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

파란여우 2005-10-30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는 아까아까 읽었는데 추천은 지금!
왜? 한번 더 읽어보려고. 캬아, 난 자기 나이였을때 왜 이런 글을 못 썼을까?
모하느라고..

가시장미 2005-10-30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감사! 칭찬이 과하십니다요~ 제가 언니나이가 되면 언니가 쓰시는 그런 내공있는 글을 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ㅋㅋ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