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이불 안에 있고 싶은 날이다. 책상에 앉고 싶지 않아서 베드로 가져온 노트북을 베개로 받친다. 추워질 날씨에 대비해 앞으로 이불 안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베드 용 책상을 샀다. 앞으로는 침대 위에서 책도 읽고, 노트북도 할 예정이다. 오늘은 그럭저럭 책상 대신 베개다. 가을의 끝자락이 너무 아쉽다. 가을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고, 가장 싫어하는 계절은 겨울인 탓이다. 두꺼운 패딩으로 몸을 감싸면 마음마저 무거워지는 기분이라서 겨울에는 외출을 많이 하지 않는다. 올겨울은 유난히 칩거하는 날이 많을 것 같다. 코로나 상황도 여전히 끝나지 않았으니, 더욱더 집에만 있는 날이 많으리라. 뭐 어쩌겠는가. 이 시국에는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장기하의 ‘상관없는 거 아닌가?’라는 산문집을 읽으면서 유난 눈에 들어온 문장이 ‘뾰족한 수가 없다’는 구절이었다. 꽤 여러 번 등장한 이 구절이 참 와 닿았다. ‘행복 앞에서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별다른 바 없다고 생각한다.’는 문장에는 다 담지 못했지만 우리는 꽤 많은 점에서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대책 없다는 표현보다는 가볍고, 어쩔 수 없다는 표현보다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표현이 ‘뾰족한 수가 없다’였다. 앞으로 나도 이 표현을 자주 쓰게 될 것 같다. 어쩌면 체념일지도 모르는 포기와 다른 받아들임이 인정되는 상황 속에서 ‘뾰족한 수가 없다’는 말은 어떤 맥락에서는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다소 담담하지만 절망적이지 않도록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로. 


화려한 표현이나 미화된 문장력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쉬운 표현이지만 허를 찌르는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작가가 아닐까. 작가의 첫 산문집이지만 ‘상관없는 거 아닌가’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술술 읽히게 글을 참 쉽게 쓸 수 있구나. 인생에 군더더기가 없다는 데서 오는 쾌감을 아는 사람의 글에도 군더더기가 없구나. 군더더기가 없는 글을 읽는 것도 독자로써 느낄 수 있는 쾌감이구나. 너무 많은 기준과 기대 수준에 맞춰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상관없는 거 아닌가’라는 말은 어쩌면 합리화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자기다움과 자기 기준에 명료한 사람이 내뱉은 말이라면 수많은 고뇌와 자기 성찰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라는 믿음을 준다. 


장기하의 산문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다. 자기다움을 알고 있는 사람의 지극히 자기성찰적인 고백과도 같은 진정성이 느껴지는 글. 그것들은 군더더기 없음은 필요와 불필요를 알고, 선택적으로 욕구와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성찰의 결과이며 동시에 타인의 관점과 태도에 대한 이해와 수용의 결과로 만들어진다는 느낌을 전해주었다. 태도뿐만 아니라 사고 또한 자유로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와 이해랄까. 물론 작가가 실제로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독자에게 그런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을. 꼭 같은 생각으로 비슷한 태도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정답이 있는 삶은 없고, 성공한 삶의 모습이나 가치가 모두 다를 수 있음을 이해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그런 삶이 감당해야 하는 막연함, 외로움, 고독도 예상과 같이 등장했다. 단 그것을 감당하는 태도는 예상과 달랐다. 그것마저도 즐기면서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태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의 밑바닥을 해부하듯 들여다보는 연습을 수없이 많이 한 사람은 그것을 음악으로 글로도 승화시킬 수 있구나! 역시 아티스트는 다르구나! 하고 감탄할 수 있었다. 창조적인 행위를 밥벌이로 하는 사람들의 삶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고단할 수밖에 없고, 힘들 수밖에 없을 시간을 관통하는 자기 이해와 자기 고백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기도 한다. 그런 삶을. 자신을 다독이며 자기답게 살아내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노래로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가수 장기하는 글로도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작가 장기하가 되었다. 나처럼 위로받은 독자가 많을 테니 말이다. :)



"예나 지금이나 남을 위로하겠다는 큰 뜻을 품기보다, 내 마음 하나만이라도 잘 들여다보자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나 자신이라도 잘 위로해주자. 그것만이라도 잘 해낸다면, 그리고 운이 좋다면, 결과적으로 누군가 위로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 정도가 노래를 만들 때 위로라는 것에 대해 내가 가지는 생각이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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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0-16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가시장미님이다. 제가 아는 그 가시장미님 맞나요? 친구로 뜨는거 보면 막겠죠? 진짜 오랫만이예요. 잘 지내셨죠?

가시장미 2020-10-1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안녕하세요^^ 바람돌이님!! 아직 서재활동하시는군요~ 저도 잘 지낸답니다! ㅎㅎ 바쁜 시절을 지나서 책 읽고 서평쓰던 시절이 그리워서 다시 돌아왔죠! :) 종종뵈어요! 날이 많이 차네요. 갖기조심하시고요~^^

바람돌이 2020-10-17 00:43   좋아요 1 | URL
저도 올해 돌아왔어요. ㅎㅎ 몇년 쉬다가 올해부터 조금 여유가 생기니 돌아와지더라구요. 자주 뵈어요. 님도 감기조심하시고요.
 

꽤 애착을 가졌던 공간이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다른 곳에 글을 올리느라 정말 오랜만에 들여다본 이 공간에는 삶의 흔적과 생각과 감정의 무늬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공개하지 않고, 닫아둘 수밖에 없는 글들도 많다. 이유는 돌이켜보면 좋았던 기억도 있지만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이 많은터다. 물론 없었던 일로 지우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 공개하고 싶지는 않다. 닫아버린 페어퍼의 카테고리가 열어둔 것보다 많다는 것은 치기어린 글들이 돌이켜보니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아프고 힘들었던 일들도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앞으로는 좀 더 의미있는 감정과 생각의 무늬로 이 공간을 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들은 버려야 새로 채울 수 있으니깐. 이젠 버리는 것에 익숙하고, 버려지는 일이 당연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근데 새로 무언가를 채운다는 게 예전처럼 쉽지는 않다. 충분히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일 여유도 없고, 주어진 일상을 벗어나 사색을 하거나 상념에 빠지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나마 황금연휴가 주어져서 책을 읽고, 필사를 하고,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도 느낀다. 글이 감정을 배출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지만 기억의 무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매일 매일 내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예전처럼 종종 이곳에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비슷한 무늬를 만나면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안부를 물을 수도 있겠지. 그 손으로 많은 애정이나 애착을 나눌 수는 없겠지만.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은 요즘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주로 읽는다. 이동할 때도 작은 가방에 쏘옥 들어가는 작은 책을 선호한다. 읽으면 따뜻해지고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글귀는 메모를 해두고 싶을만큼 마음에 와 닿는 책. 특히, 이기주 작가의 책이 그렇다. 더 쓰지 않고, 덜 쓰려고 노력한 흔적에서 느껴지는 배려와 따뜻함.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물론 치열하지 않은 삶이나 지난하지 않은 글쓰기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렵고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을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쉽게 쓰려는 노력은 배려의 한 태도라 여겨진다. 


그리고 말줄임표로 끝나는 문장의 끝은 생각의 여백이자 독자와 생각을 나누고자 하는 손짓으로 느껴지도 한다. 많은 뜻을 쉽게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으로만 채우지 않는 배려. 그런 글이 따뜻한 글이 아닐까. 글뿐 아니라 말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말하면서도 늘 들을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멋진가. 돌이켜보면 어쩌면 너무 많은 말을 했을 지도 모르는 시간들. 나는 얼마나 들으려고 노력했던가를 생각하게 한다. 물론 내 생각을 표현하지 못 하는 멍청이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내 생각이 전부라고 우기는 바보 멍청이는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배워보고자 한다. 따뜻한 표현의 기본이 되는 덜 채우면서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방법. 이기주 작가의 글의 품격을 읽으면서 고민해본다. 




 

나는 인간의 마음이 강가에 뒹구는 조약돌 같다고 생각한다. 낮 동안 햇살에 달궈진 조약돌은 저녁 어스름이 내려도 따뜻함을 유지한다. 마음도 매한가지가 아닐는지. 아무리 현실이 팍팍해도, 무언가에 혹은 누군가에 의해 슬며시 데워진 마음은 한동안 온기를 지닌다. 이때 냉기가 감돌던 마음이 데워지는 과정에서 나름의 온도 차가 발생하는데, 그러면 세상살이에 쪼그라들었던 마음도 한껏 부풀어 오른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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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0-11-27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랫동안 애정을 갖고 지내던 공간이고 또 오랫동안 특별한 이유없이 떠나있던 입장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요.

가시장미 2020-12-03 00:46   좋아요 0 | URL
ㅋㅋㅋ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나요?? 코로나로 전 세계가 앓고 있는데.. ㅠㅠ 무탈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