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들이 아이들의 심리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

 

 

 
상담을 하다보면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은 보상대가에 대한 부분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아요”, “전 정말 노력했는데, 아무도 그걸 몰라요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에서는 조금만 노력해도 점수가 오르고, 레벨이 오르는데, 현실에서는 아무리 많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도 도대체 보상이나 긍정적인 대가는 돌아오지 않으니, 아이들이 공허한 마음을 게임으로 충족하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된다.
 
사실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일은 보상이나 대가가 없어도 선택 그 자체는 모두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결과가 없는 상황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참 힘든 일이 된다. 더군다나 아이들이 선택해야 하는 것들은 강요된 것들이 더 많다.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닐지도 모를 수많은 인간들이 감내해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한없이 굴러 떨어지는 돌을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인간은 누구나 운명과 숙명처럼 여겨지는 선택과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시지프스가 신이 내린 벌에 굴복하는 나약한 인간이 아닌 것처럼, 한 없이 굴러 떨어지는 돌을 끊임없이 굴려 올린 것이 그의 자유의지라면 그것은 더 이상 강요된 선택이 아닌 것이 된다. 그가 스스로 돌을 굴러 올리는 행위에 신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저항의식을 부여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 아이들이 하기 싫은 공부학업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 역시 스스로 선택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도록 할 것인가? 수동적인 선택을 자발적인 선택으로 바꿀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만약 내적 동기부여를 잘 학습한 아이라면 스스로 부모의 도움 없이 자신이 해결해야 할 과제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적절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학습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외부의 강화장치가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심리적 보상 메커니즘이나 심리적 강화물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심리적 보상 메커니즘은 아이들 스스로가 할 수도 있고, 부모나 타인이 주는 강화처벌에 의해 학습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들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인간이 스스로의 삶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심리를 적절하게 통제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나 교육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면 부모들이 해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우선 심리적 보상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일이고, 그 다음으로는 아이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심리를 이해하고 적절한 강화물을 설정할 수 있도록 환경조성을 해주는 일이다.
      
부모가 심리학자나 심리치료사도 아닌데 아이의 심리를 이해해야 한다니 참 부모의 역할이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 아이의 심리를 이해하다보면 자신의 심리를 엿보게 된다. 아이만큼 부모와 밀착된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 관계를 이해하다보면 자신의 심리를 이해해야 함을 물론 자신의 내면적 성숙이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이의 심리를 이해함은 물론 자신의 심리를 이해하는 과정은 삶에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그것이 일시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해결해 나가야 할 지난한 과제가 될 지라도 아이의 행복과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함께 노력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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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3-09-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들이 접하는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이 자녀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닌가 싶네요.
그나저나 오랫만이네요. 아직 살아계시고 소장님도 되신듯 하고...ㅎㅎ

가시장미(이미애) 2013-09-14 00:30   좋아요 0 | URL
잉크님.. 넘 반가요! ^^ 잘 살아있죠. 여러 일이 많았고... 중심 잡고, 새로운 일도 시작했구요. 상계동에 센터를 오픈했어요. 함 놀러오세요 ㅋㅋㅋ:)
 

 

여는 글- “우리아이의 상처를 기억하시나요?”

 

 

얼마 전 아파트 복도에서 한 어머니가 딸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어머니는 시험지를 들고 계셨고, 초등학교 3~4학년으로 되어 보이는 학생은 시험 결과를 알린 듯 했다. 어머니는 고함을 치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게 한 문제야? 한 문제 틀렸다면서?”

 

아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고, 엄마는 아이가 시험을 못 봐서 화가 나셨는지, 거짓말을 해서 화가 나셨는지 머리끝까지 화가 나신 얼굴로 아이의 몸을 거칠게 밀고, 급기야 집 앞에서는 무서워서 집으로 들어가지 못 하는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 쥐시면서 집안으로 잡아끌었다.

 

뭘 잘했다고 서 있어? 빨리 안 들어와!”

 

정말 그 모습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돼지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아이가 너무 불쌍했고,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심히 걱정되었지만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 했다. 우리나라의 문화에서는 가정사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잘 모르면서 남의 가정사에 참견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보다 밀접하여 누군가가 끼어든다는 것이 참 어렵다. 그들이 타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관계는 지인과 친지라도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틈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일까? 단지 부모라는 이유로 사랑을 빌미로, 보호를 빌미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과 말도 서슴없이 하게 되는 이유? 자신의 책임 영역이 확실해서 자녀에게 준 상처조차도 부모가 책임질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일까?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은 것을 해 주었는데!” “내가 널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했는데!” 라는 말을 방패삼아 어쩌면 수많은 부모들은 자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평생 자녀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자녀를 존중하고, 늘 친구처럼 이해하고 배려해준 부모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부모들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방식 또한 고유의 영역이라 제 삼자가 판단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단지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느냐 혹은 자녀가 그렇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그러므로 자녀가 스스로 부모를 너무 사랑하고, 존경하고, 배려한다면 그것이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큰 사랑을 주었다 할지라도 자녀에게서 그런 근거가 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다면, 부모는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아이에게 준 상처는 없을까?”

내가 표현하는 것들이 아이가 원하는 사랑의 방식일까?”

 

유년시절에 아이들이 받은 상처는 부모의 기억보다 아이의 기억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그럴 수도 있지. 그 정도쯤이야.’라고 쉽게 생각하고, 넘긴 것들이 아이의 가슴 속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오랜 시간 트라우마컴플렉스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런 상처의 결과물은 한 시점에서 드러나거나 해결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반복되고, 비슷한 형태의 불만이나 갈등으로 표출된다. 그러므로 현재 아이와 부모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이나 문제는 앞으로도 반복될 여지가 있으며 과거의 미해결된 과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빠는 늘 그랬어. 엄마는 전에도 그랬잖아!”

 

이런 식의 표현은 과거의 문제가 현재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직접적인 근거이다. 보통 아이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부모들은 왜 지난 일을 이야기 하니? 내가 언제 그랬니? 한두 번 그런 걸 왜 확대하니?” 라는 식의 변명을 할 뿐,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이가 지적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마치 아이에게 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아이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고 우의를 점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말 아이를 사랑한다면, 정말 아이가 타인을 신뢰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부모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함은 물론 앞으로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세 또한 필요하다. 그것이 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길이며 아이보다 성숙한 어른이라는 증거이며 스스로의 결점도 채워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상처를 기억하고, 아이의 상처를 감싸 안아주는 부모, 그런 부모가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조금 더 행복한 세상을 꿈꾸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부모들이 적절한 방법으로 우리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을 써보려 한다. 그 글이 우리 부모님과 우리 아이들의 사랑과 행복에 일조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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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상처 이해하기

 

 

인간은 살아가면서 때론 사소한 것으로부터 때론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끊임없이 받고 산다. 마음의 상처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 상처는 삶 자체는 고해다.” 혹은 상처 또한 자신의 일부이고, 불행 또한 삶의 일부라는 것을 수용하지 못 해서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삶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 자신만큼은 남에게 상처받지 않으려는 마음, 혹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보호하려는 마음. 그런 방어 심리가 사실은 상처를 만들어내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나는 남보다 행복해야 하는데, 나는 나 자신에게 인정받아야 하는데, 나는 나의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데, 나는 반드시 사랑받아야 하는데,’ 그런 경직된 생각들은 어쩌면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마주하기 두려워서 거짓된 자아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들이며 많은 심리학자들이 그것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유년시절의 경험, 가장 친밀한 대상과의 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스스로가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거짓된 자아를 만들어 내는데 소비하는 시간보다 자신의 과거를 이해하고, 아직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린 자아를 껴안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0세에서 5세 이전의 기억들이 무의식에 잠재되어 생에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하자. 그 과정에서 술 먹는 아버지, 엄격한 어머니, 때리는 부모, 방치하는 부모, 비판적인 부모 등의 성숙하지 못 한 부모와의 관계에서 어린 자아의 상처가 무의식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고, 그것을 적절히 치료하지 못 한 채로 성인이 되어 억압하고 마음 한 구석에 그 상처를 묻어두었다면, 어른이 되어서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치료할 것인가?

 

설사 자신을 학대했던 부모가 늙고 힘이 없어지고, 지난 시절의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사과한다고 한 들, 이미 깊어질 데로 깊어진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까? 사실 그 상처를 돌이켜 기억하려고 해도 이미 잘 떠오르지 않을 만큼 의식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잘잘못을 따져 묻는 것은 치유책이 되지 않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스스로가 어떤 이유로, 어떤 경험에 의해 상처를 받았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된 이상 부모가 아닌, 다른 대상(부부 혹은 연인)을 통해 이해 받고, 수용 받고, ‘거짓된 자아본래 자아의 모습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상처가 있는 사람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는 눈으로, 그들과 나눈 경험의 기억으로 타인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 혹은 새로운 가정을 이룬 가족들에게도 억압된 상처는 전이되거나 투사하게 된다. 편안하고 불안하지 않은, 자아가 건강한 상태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제에 직면하고, 불안하고, 자아가 혼란에 빠졌을 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발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보호하여 타인에게 자신의 것을 떠넘기지 않으면 스스로가 견딜 수 없다고 판단될 때, 자신의 상처는 타인의 잘못으로 둔갑하게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신경증이나 성격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을 탓하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분명 타인이 자신의 상처를 건드렸다거나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도록 이끈 촉발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상처를 건드린 것은 타인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은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같은 인격체가 아닌 이상 아무리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본인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타인이 미리 알고 있었을 리 없다. 그러므로 타인이 어느 정도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지라도 그 이상의 분노를 표출하고, 원망을 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대상에 대한 것까지 분풀이를 할 뿐인 꼴이 된다.

 

그러므로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대상과도 싸우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상대를 아픈 자신을 더 힘들게 한 대상으로 폄하시킨다면 결국 자신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악순환의 늪으로 빠지고 만다. 자신의 기억, 자신의 상처를 기꺼이 기억하고, 그 원인이 과거에 있음을 즉시하고, 더불어 그런 과거로 인해 자신이 어느 행동이나 에 상처를 잘 받는지 상대에게 이해시켜야 하며 그 과정에서 적절한 소통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새로운 대상과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의 상처가 치유될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므로 기꺼이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고, 자신의 아픈 기억을 들춰내야 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스스로의 치부까지 보여주고, 이해를 구할 수 있을 때, 상처를 치유하는 첫 단추를 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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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lash of clans hack
    from clash of clans hack 2014-02-17 00:38 
    [드림하이 학욵상담 센터] "책과 통하뚔 블로그, 앜라딘 서재!"
 
 
숲노래 2013-06-25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풀이를 하고 나서,
왜 '화'가 나한테 찾아왔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면
다음에는 화가 찾아오지 않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는 틈을 내는 사람이 너무 적어,
나중에도 다시 화가 찾아오고 마는구나 싶어요.

가시장미(이미애) 2013-06-25 16:31   좋아요 0 | URL
자기 분석이 그래서 꼭 필요한데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알아가는 것 또한 참 힘들인인 것 같아요. ^^' 함께살기'님 첫 댓글 감사합니다 ㅎㅎ 몇 년만에 들어왔더니, 이 곳이 참 많이 달라져 있더라구요. :)


프레이야 2013-06-2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므낫, 가시장미님! 그동안 어케 지내셨어요? 물론 잘지내셨겠죠. ^^ 아들 많이 자랐겠어요.

가시장미(이미애) 2013-06-26 15:2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 언니! ^^ ㅎㅎ 잘 지내셨어요? 저야 이런 일 저런 일 겪으면서 자라기도 하고, 주춤하기도 하면서 지냈죠. 반겨주셔서 감사해요! 언니의 글이 그리웠어요. :)
 

 

1.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 누군가의 실체에 대해 혹은 그 실체를 대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떠올릴 수 있다면, 이 세상이 아닌 마음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 세상을 떠난 그녀를 한번도 본 적이 없더라도, 그녀의 글을 통해 그녀가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껴왔고, 여전히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비록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없지 않을까?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이따금씩 그녀를 떠올리고, 그녀와 나눈 글을 생각하고, 그녀가 남긴 글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그녀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 속에, 기억 속에서...

2.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것을 희망하는지도 모른다. 무한하지 않은 삶을 살더라도, 아주 오랜시간이 지나 자신의 유골조차 흔적 조차 없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해주길, 그래서 영원히 존재할 수 있기를.. 영생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떤이는 업적이 연연하고, 명예와 권력을 갈망하고,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창작물에 열정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러나 어떤 분야에서 성공하여 그 업적과 훌륭함을 인정 받은 사람만이 누군가의 하나의 '의미'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자신의 삶의 향기를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소시민적인 삶을 살고, 평범한 삶을 살아도,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노력하고,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가고, 이웃과 소통함으로써 자신이 실존함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군가에게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일상에서 생기는 모든 불안의 근원, 도취상태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것,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는 그 불안감의 정체가 '죽음'이라고 말했다. 인간에게 그 불안감은 숙명적이며,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고 주장하며, 그는 죽음의 불안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실존을 되찾는 길이라고 했다. 즉, 죽음을 앉아서 기다리거나 그 불안에 허덕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앞질러 그 죽음을 떠안으면 '죽음의 불안'은 오히려 '죽음으로 부터의 자유'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웃으로 그녀의 글을 엿보면서, '죽음의 불안'이 아닌, '죽음으로 부터의 자유'를 보았다. 그래서 무례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마지막도 그렇게 자유로웠으리라 확신한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이와같은 생각을 하도록 한다는 것은 그녀의 삶, 그것의 의미를 증명하는 것이리라.   

4.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나도 그에게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인간은 '나'와 '너'의 관계로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인간은 현실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피상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를 알아가려고 노력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은 '관계'로 이어지고, 그것은 가상공간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던 기억들이 결코 가상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나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허락해주고, 슬픈 일이 있었을 때, 새해가 되었을 때, 먼저 와서 안부를 물어주던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더 좋은 세상에서, 더 건강한 모습이길....부디 편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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