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생각: 먼지와 쓰레기]

 


오늘은 아침부터 정말 분주한 하루였다. 결혼하면서부터 설거지는 본인이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쳤던 신랑이 손목터널증후군으로 고생하는 바람에 한동안 설거지를 회피하기 시작했다. 설거지는 자연스럽게 최근에 재택근무를 많이 했던 나의 차지가 되었고, 딱히 아픈 사람을 탓하지는 않았지만, 눈치가 보였던 신랑은 어느 날, 식기세척기를 사야겠다며 설레발이었다. 알아서 잘 사주길 바랐지만, 생각보다 너무 컸던 식기세척기를 받고 나서야, 그가 사이즈를 확인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싱크대는 이미 가전제품이 빼곡하게 차 있고, 가전제품에 맞춤형으로 짰던 싱크대였기에 식기세척기를 둘 공간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방치되었던 식기세척기를 큰맘 먹고 오늘 싱크대 수납장에 넣기로 하고, 오늘 드디어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싱크대 수납장의 칸을 넓히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신랑은 이미 일터로 출근을 했고, 아시는 목수님과 나는 싱크대 수납장을 분리하기 위해서 냉장고 두 곳에 있는 모든 짐을 빼고, 냉장고 두 대를 모두 끄집어내야 했다. 그리고 수납장을 분리하기 위한 작업 공간을 마련한 후, 수납장에 있었던 모든 집기를 모두 꺼내고 배수관을 만들기 위해 위 상판과 옆 상판에 큰 구멍을 내고, 식기세척기가 들어갈 수 있도록 공간을 배치하고 다시 싱크대 수납장을 조립했다. 물론, 목수님이 해주셨지만,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가 떠나고 난 후, 난장판이 된 부엌을 정리하는 일은 오롯이 내 몫이라는 사실에 암담했다.


싱크대 수납장이 적절하게 조립되고 식기세척기의 자리가 정해진 후, 나는 전쟁터와 다름없는 부엌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던 먼지와 쓰레기를 응시했다. 버려야 할 음식과 버려야 할 집기는 너무 많았고, 미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빼곡하게 쌓인 먼지들은 솜사탕처럼 몽실몽실 모여서 커졌다. 정신없이 쓰레기봉투에 담고, 닦고, 정리하고, 또 닦았다. 모든 집기와 물건들이 자리를 잡으면 큰 쾌감을 느끼지만 급격하게 밀려오는 피로감 또한 만만치 않았다. 불현듯,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식상한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면서 비워야 하는 것이 과연 먼지와 쓰레기뿐일까, 라는 생각에 이내 숙연해졌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변화가 많았던 한 해를 되돌아보면 참 안쓰러웠던 한 해였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려놓거나 버리지 못했던 아집과 미련함이 기억 곳곳에 숨어있었다. 그것들도 먼지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켜켜이 쌓여서 털어내지 않으면 몽실몽실 자라난다. 한때는 꽤 쓸모가 있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낡거나 불필요해서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생각과 감정도 쓰레기처럼 주기적으로 버리고 털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붙들고 있으면 새로운 감정이나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고, 늘 그대로인 것 같은 나도 변한다.


그 변화에 순응하기 위해서, 아니 그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주어지는 시간에 새로운 감정과 변화된 상황에 집중하며 매 순간 새로운 경험을 할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 시작은 켜켜이 쌓여온 과거의 기억이나 감정에서 벗어나는 일, 현재가 과거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변화를 모든 감각을 일깨워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까. 그렇게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고,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그려가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나 자신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 그렇게 켜켜이 쌓였던 먼지와 쓰레기들을 뚝딱 정리해 버린 것처럼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이나 정서를 정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아지고 있음을, 나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앞으로 기필코 과거보다 나아질 것이고, 내가 원하는 미래로 나아갈 것이라고 다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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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01-15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장미님 반가워요^^
 


온종일 이불 안에 있고 싶은 날이다. 책상에 앉고 싶지 않아서 베드로 가져온 노트북을 베개로 받친다. 추워질 날씨에 대비해 앞으로 이불 안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베드 용 책상을 샀다. 앞으로는 침대 위에서 책도 읽고, 노트북도 할 예정이다. 오늘은 그럭저럭 책상 대신 베개다. 가을의 끝자락이 너무 아쉽다. 가을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고, 가장 싫어하는 계절은 겨울인 탓이다. 두꺼운 패딩으로 몸을 감싸면 마음마저 무거워지는 기분이라서 겨울에는 외출을 많이 하지 않는다. 올겨울은 유난히 칩거하는 날이 많을 것 같다. 코로나 상황도 여전히 끝나지 않았으니, 더욱더 집에만 있는 날이 많으리라. 뭐 어쩌겠는가. 이 시국에는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장기하의 ‘상관없는 거 아닌가?’라는 산문집을 읽으면서 유난 눈에 들어온 문장이 ‘뾰족한 수가 없다’는 구절이었다. 꽤 여러 번 등장한 이 구절이 참 와 닿았다. ‘행복 앞에서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별다른 바 없다고 생각한다.’는 문장에는 다 담지 못했지만 우리는 꽤 많은 점에서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대책 없다는 표현보다는 가볍고, 어쩔 수 없다는 표현보다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표현이 ‘뾰족한 수가 없다’였다. 앞으로 나도 이 표현을 자주 쓰게 될 것 같다. 어쩌면 체념일지도 모르는 포기와 다른 받아들임이 인정되는 상황 속에서 ‘뾰족한 수가 없다’는 말은 어떤 맥락에서는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다소 담담하지만 절망적이지 않도록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로. 


화려한 표현이나 미화된 문장력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쉬운 표현이지만 허를 찌르는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작가가 아닐까. 작가의 첫 산문집이지만 ‘상관없는 거 아닌가’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술술 읽히게 글을 참 쉽게 쓸 수 있구나. 인생에 군더더기가 없다는 데서 오는 쾌감을 아는 사람의 글에도 군더더기가 없구나. 군더더기가 없는 글을 읽는 것도 독자로써 느낄 수 있는 쾌감이구나. 너무 많은 기준과 기대 수준에 맞춰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상관없는 거 아닌가’라는 말은 어쩌면 합리화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자기다움과 자기 기준에 명료한 사람이 내뱉은 말이라면 수많은 고뇌와 자기 성찰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라는 믿음을 준다. 


장기하의 산문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다. 자기다움을 알고 있는 사람의 지극히 자기성찰적인 고백과도 같은 진정성이 느껴지는 글. 그것들은 군더더기 없음은 필요와 불필요를 알고, 선택적으로 욕구와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성찰의 결과이며 동시에 타인의 관점과 태도에 대한 이해와 수용의 결과로 만들어진다는 느낌을 전해주었다. 태도뿐만 아니라 사고 또한 자유로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와 이해랄까. 물론 작가가 실제로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독자에게 그런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을. 꼭 같은 생각으로 비슷한 태도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정답이 있는 삶은 없고, 성공한 삶의 모습이나 가치가 모두 다를 수 있음을 이해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그런 삶이 감당해야 하는 막연함, 외로움, 고독도 예상과 같이 등장했다. 단 그것을 감당하는 태도는 예상과 달랐다. 그것마저도 즐기면서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태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의 밑바닥을 해부하듯 들여다보는 연습을 수없이 많이 한 사람은 그것을 음악으로 글로도 승화시킬 수 있구나! 역시 아티스트는 다르구나! 하고 감탄할 수 있었다. 창조적인 행위를 밥벌이로 하는 사람들의 삶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고단할 수밖에 없고, 힘들 수밖에 없을 시간을 관통하는 자기 이해와 자기 고백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기도 한다. 그런 삶을. 자신을 다독이며 자기답게 살아내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노래로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가수 장기하는 글로도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작가 장기하가 되었다. 나처럼 위로받은 독자가 많을 테니 말이다. :)



"예나 지금이나 남을 위로하겠다는 큰 뜻을 품기보다, 내 마음 하나만이라도 잘 들여다보자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나 자신이라도 잘 위로해주자. 그것만이라도 잘 해낸다면, 그리고 운이 좋다면, 결과적으로 누군가 위로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 정도가 노래를 만들 때 위로라는 것에 대해 내가 가지는 생각이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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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0-16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가시장미님이다. 제가 아는 그 가시장미님 맞나요? 친구로 뜨는거 보면 막겠죠? 진짜 오랫만이예요. 잘 지내셨죠?

가시장미 2020-10-1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안녕하세요^^ 바람돌이님!! 아직 서재활동하시는군요~ 저도 잘 지낸답니다! ㅎㅎ 바쁜 시절을 지나서 책 읽고 서평쓰던 시절이 그리워서 다시 돌아왔죠! :) 종종뵈어요! 날이 많이 차네요. 갖기조심하시고요~^^

바람돌이 2020-10-17 00:43   좋아요 1 | URL
저도 올해 돌아왔어요. ㅎㅎ 몇년 쉬다가 올해부터 조금 여유가 생기니 돌아와지더라구요. 자주 뵈어요. 님도 감기조심하시고요.
 

꽤 애착을 가졌던 공간이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다른 곳에 글을 올리느라 정말 오랜만에 들여다본 이 공간에는 삶의 흔적과 생각과 감정의 무늬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공개하지 않고, 닫아둘 수밖에 없는 글들도 많다. 이유는 돌이켜보면 좋았던 기억도 있지만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이 많은터다. 물론 없었던 일로 지우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 공개하고 싶지는 않다. 닫아버린 페어퍼의 카테고리가 열어둔 것보다 많다는 것은 치기어린 글들이 돌이켜보니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아프고 힘들었던 일들도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앞으로는 좀 더 의미있는 감정과 생각의 무늬로 이 공간을 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들은 버려야 새로 채울 수 있으니깐. 이젠 버리는 것에 익숙하고, 버려지는 일이 당연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근데 새로 무언가를 채운다는 게 예전처럼 쉽지는 않다. 충분히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일 여유도 없고, 주어진 일상을 벗어나 사색을 하거나 상념에 빠지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나마 황금연휴가 주어져서 책을 읽고, 필사를 하고,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도 느낀다. 글이 감정을 배출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지만 기억의 무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매일 매일 내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예전처럼 종종 이곳에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비슷한 무늬를 만나면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안부를 물을 수도 있겠지. 그 손으로 많은 애정이나 애착을 나눌 수는 없겠지만.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은 요즘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주로 읽는다. 이동할 때도 작은 가방에 쏘옥 들어가는 작은 책을 선호한다. 읽으면 따뜻해지고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글귀는 메모를 해두고 싶을만큼 마음에 와 닿는 책. 특히, 이기주 작가의 책이 그렇다. 더 쓰지 않고, 덜 쓰려고 노력한 흔적에서 느껴지는 배려와 따뜻함.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물론 치열하지 않은 삶이나 지난하지 않은 글쓰기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렵고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을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쉽게 쓰려는 노력은 배려의 한 태도라 여겨진다. 


그리고 말줄임표로 끝나는 문장의 끝은 생각의 여백이자 독자와 생각을 나누고자 하는 손짓으로 느껴지도 한다. 많은 뜻을 쉽게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으로만 채우지 않는 배려. 그런 글이 따뜻한 글이 아닐까. 글뿐 아니라 말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말하면서도 늘 들을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멋진가. 돌이켜보면 어쩌면 너무 많은 말을 했을 지도 모르는 시간들. 나는 얼마나 들으려고 노력했던가를 생각하게 한다. 물론 내 생각을 표현하지 못 하는 멍청이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내 생각이 전부라고 우기는 바보 멍청이는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배워보고자 한다. 따뜻한 표현의 기본이 되는 덜 채우면서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방법. 이기주 작가의 글의 품격을 읽으면서 고민해본다. 




 

나는 인간의 마음이 강가에 뒹구는 조약돌 같다고 생각한다. 낮 동안 햇살에 달궈진 조약돌은 저녁 어스름이 내려도 따뜻함을 유지한다. 마음도 매한가지가 아닐는지. 아무리 현실이 팍팍해도, 무언가에 혹은 누군가에 의해 슬며시 데워진 마음은 한동안 온기를 지닌다. 이때 냉기가 감돌던 마음이 데워지는 과정에서 나름의 온도 차가 발생하는데, 그러면 세상살이에 쪼그라들었던 마음도 한껏 부풀어 오른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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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0-11-27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랫동안 애정을 갖고 지내던 공간이고 또 오랫동안 특별한 이유없이 떠나있던 입장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요.

가시장미 2020-12-03 00:46   좋아요 0 | URL
ㅋㅋㅋ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나요?? 코로나로 전 세계가 앓고 있는데.. ㅠㅠ 무탈하신가요?
 

인간은 살아가면서 때론 사소한 것으로부터 때론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끊임없이 받고 산다. 마음의 상처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 상처는 삶 자체는 고해다.” 혹은 상처 또한 자신의 일부이고, 불행 또한 삶의 일부라는 것을 수용하지 못 해서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삶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 자신만큼은 남에게 상처받지 않으려는 마음, 혹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보호하려는 마음. 그런 방어 심리가 사실은 상처를 만들어내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나는 남보다 행복해야 하는데, 나는 나 자신에게 인정받아야 하는데, 나는 나의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데, 나는 반드시 사랑받아야 하는데,’ 그런 경직된 생각들은 어쩌면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마주하기 두려워서 거짓된 자아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들이며 많은 심리학자들이 그것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유년시절의 경험, 가장 친밀한 대상과의 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스스로가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거짓된 자아를 만들어 내는데 소비하는 시간보다 자신의 과거를 이해하고, 아직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린 자아를 껴안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0세에서 5세 이전의 기억들이 무의식에 잠재되어 생에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하자. 그 과정에서 술 먹는 아버지, 엄격한 어머니, 때리는 부모, 방치하는 부모, 비판적인 부모 등의 성숙하지 못 한 부모와의 관계에서 어린 자아의 상처가 무의식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고, 그것을 적절히 치료하지 못 한 채로 성인이 되어 억압하고 마음 한 구석에 그 상처를 묻어두었다면, 어른이 되어서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치료할 것인가?

 

설사 자신을 학대했던 부모가 늙고 힘이 없어지고, 지난 시절의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사과한다고 한 들, 이미 깊어질 데로 깊어진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까? 사실 그 상처를 돌이켜 기억하려고 해도 이미 잘 떠오르지 않을 만큼 의식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잘잘못을 따져 묻는 것은 치유책이 되지 않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스스로가 어떤 이유로, 어떤 경험에 의해 상처를 받았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된 이상 부모가 아닌, 다른 대상(부부 혹은 연인)을 통해 이해 받고, 수용 받고, ‘거짓된 자아본래 자아의 모습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상처가 있는 사람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는 눈으로, 그들과 나눈 경험의 기억으로 타인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 혹은 새로운 가정을 이룬 가족들에게도 억압된 상처는 전이되거나 투사하게 된다. 편안하고 불안하지 않은, 자아가 건강한 상태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제에 직면하고, 불안하고, 자아가 혼란에 빠졌을 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발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보호하여 타인에게 자신의 것을 떠넘기지 않으면 스스로가 견딜 수 없다고 판단될 때, 자신의 상처는 타인의 잘못으로 둔갑하게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신경증이나 성격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을 탓하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분명 타인이 자신의 상처를 건드렸다거나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도록 이끈 촉발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상처를 건드린 것은 타인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은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같은 인격체가 아닌 이상 아무리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본인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타인이 미리 알고 있었을 리 없다. 그러므로 타인이 어느 정도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지라도 그 이상의 분노를 표출하고, 원망을 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대상에 대한 것까지 분풀이를 할 뿐인 꼴이 된다.

 

그러므로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대상과도 싸우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상대를 아픈 자신을 더 힘들게 한 대상으로 폄하시킨다면 결국 자신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악순환의 늪으로 빠지고 만다. 자신의 기억, 자신의 상처를 기꺼이 기억하고, 그 원인이 과거에 있음을 즉시하고, 더불어 그런 과거로 인해 자신이 어느 행동이나 에 상처를 잘 받는지 상대에게 이해시켜야 하며 그 과정에서 적절한 소통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새로운 대상과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의 상처가 치유될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므로 기꺼이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고, 자신의 아픈 기억을 들춰내야 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스스로의 치부까지 보여주고, 이해를 구할 수 있을 때, 상처를 치유하는 첫 단추를 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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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lash of clans hack
    from clash of clans hack 2014-02-17 00:38 
    [드림하이 학욵상담 센터] "책과 통하뚔 블로그, 앜라딘 서재!"
 
 
숲노래 2013-06-25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풀이를 하고 나서,
왜 '화'가 나한테 찾아왔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면
다음에는 화가 찾아오지 않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는 틈을 내는 사람이 너무 적어,
나중에도 다시 화가 찾아오고 마는구나 싶어요.

가시장미 2013-06-25 16:31   좋아요 0 | URL
자기 분석이 그래서 꼭 필요한데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알아가는 것 또한 참 힘들인인 것 같아요. ^^' 함께살기'님 첫 댓글 감사합니다 ㅎㅎ 몇 년만에 들어왔더니, 이 곳이 참 많이 달라져 있더라구요. :)


프레이야 2013-06-2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므낫, 가시장미님! 그동안 어케 지내셨어요? 물론 잘지내셨겠죠. ^^ 아들 많이 자랐겠어요.

가시장미 2013-06-26 15:2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 언니! ^^ ㅎㅎ 잘 지내셨어요? 저야 이런 일 저런 일 겪으면서 자라기도 하고, 주춤하기도 하면서 지냈죠. 반겨주셔서 감사해요! 언니의 글이 그리웠어요. :)
 

 

1.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 누군가의 실체에 대해 혹은 그 실체를 대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떠올릴 수 있다면, 이 세상이 아닌 마음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 세상을 떠난 그녀를 한번도 본 적이 없더라도, 그녀의 글을 통해 그녀가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껴왔고, 여전히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비록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없지 않을까?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이따금씩 그녀를 떠올리고, 그녀와 나눈 글을 생각하고, 그녀가 남긴 글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그녀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 속에, 기억 속에서...

2.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것을 희망하는지도 모른다. 무한하지 않은 삶을 살더라도, 아주 오랜시간이 지나 자신의 유골조차 흔적 조차 없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해주길, 그래서 영원히 존재할 수 있기를.. 영생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떤이는 업적이 연연하고, 명예와 권력을 갈망하고,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창작물에 열정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러나 어떤 분야에서 성공하여 그 업적과 훌륭함을 인정 받은 사람만이 누군가의 하나의 '의미'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자신의 삶의 향기를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소시민적인 삶을 살고, 평범한 삶을 살아도,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노력하고,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가고, 이웃과 소통함으로써 자신이 실존함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군가에게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일상에서 생기는 모든 불안의 근원, 도취상태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것,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는 그 불안감의 정체가 '죽음'이라고 말했다. 인간에게 그 불안감은 숙명적이며,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고 주장하며, 그는 죽음의 불안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실존을 되찾는 길이라고 했다. 즉, 죽음을 앉아서 기다리거나 그 불안에 허덕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앞질러 그 죽음을 떠안으면 '죽음의 불안'은 오히려 '죽음으로 부터의 자유'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웃으로 그녀의 글을 엿보면서, '죽음의 불안'이 아닌, '죽음으로 부터의 자유'를 보았다. 그래서 무례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마지막도 그렇게 자유로웠으리라 확신한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이와같은 생각을 하도록 한다는 것은 그녀의 삶, 그것의 의미를 증명하는 것이리라.   

4.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나도 그에게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인간은 '나'와 '너'의 관계로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인간은 현실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피상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를 알아가려고 노력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은 '관계'로 이어지고, 그것은 가상공간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던 기억들이 결코 가상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나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허락해주고, 슬픈 일이 있었을 때, 새해가 되었을 때, 먼저 와서 안부를 물어주던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더 좋은 세상에서, 더 건강한 모습이길....부디 편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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