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한다니는 것이 책을 모으는 것과 동일한 것일까?
며 칠 전에 나이 조금 드신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은 철학은 두고두고 볼 책이면 집에 놔두지만 그렇지 않다면,
공중에 날려서 여러사람이 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사장님의 집에 와서는
"사장님, 집에는 책이 없네요?"라면 신기한 듯이
묻으면 사장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두번 다시 보지 않을 책은 집에 놔두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책은 도서관에 빌려 보면 된다는 것이다.
사장님의 말씀에 백번 고개를 끄떡여도 나의 수집벽은,
감성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무엇이든 다,
차 창문에 꽃힌 "오빠 나 외로워요. 060-000-0000" 이라는
광고문구마저도 다 읽는다하는데... 나 역시 예외는 아니며,
더 나아가 좋은 책이 올라오면,
무조건 사고 본다.
내가 사는 이유는 딱 하나!
나는 책의 가치를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다른 이에게는 종이 뭉치에 불과하지만 나에게는 한 송이 책꽃인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흘러, 뒷늦게 사람들이 책을 종이뭉치가 아닌 꽃을
마주대할 때에 꽃은 이미 시들어버린 경우가 발생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열혈독자들에 의해 다시 피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지만
모든 경우을 이에 대입하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이,
..."내가 도서관이다."
며 칠 전에 두번 다시 읽지 않은 책은 집에 두지 않는다는 사장님의
말씀을 백번 고개를 끄떡여도 내 수집벽으로 놓지 않는 것은
먼 훗날 누군가가 책을 찾을 때에 내 서재를 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금 당장 책에 날개를 달아,
"한 권의 책을 만 사람이 읽는" 것도 좋겠지만
"만 권의 책을 만만 사람이 읽는 서재"도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아집이다. 그래서 난 좋은 책은 사고 또 사고 한다.

이두호의 『객주』 정확히 김주영이라는 원작자가 있지만, 그의 작품은
백성민이 자기의 책 『장길산』을 두고 잃은 것은 예술성이다라고 우리나라를
한탄핸 적이 있는데... 『객주』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용만이가 간다』는 『수다맨이 간다』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더 정(情)스러운
"용만이'를 택했다. 투니버스에서 "기동아 부탁해", 만화로 『하나다 소년사』로 지금
새롭게 나오지만 해적판이 더 친근하다. 『좋은 친구들』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더니,
『피아노의 숲』에서는 깨 알려졌다. 『좋은 친구들』을 보면 참 맑은 만화라고만
생각했는데... 분명 『피아노의 숲』에서 깊이가 더 해짐은 느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내가 넘지 못할 금(線)이다. 아직은...
하지만 내가 그의 자양분을 먹고서 그를 넘고야 말테다. ㅋㅋ
『추억은 방울방울』은 옛날이라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 하고,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도 뒤 늦게 빛을 보는 듯하다. 이 작품은
만화나 애니나 모두 뛰어나다고 하든데....
난 무엇보다도 『붉은 돼지』가 좋다. 그러고 보면
지은이는 돼지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겟다.
『원령공주』에서 멧(山)돼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부모들의 돼지.
과연 무슨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