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가슴에 교육은 무엇인가요?’]
중앙집중화는 기본적으로 엘리트구조이며 기득권구조를 말한다. 사회의 구조가 동심원적 구조로 중첩되면서 상층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기본적으로 소외계층이나 민중이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제한된 자원에 넓게 접근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집중화의 구조는 대규모의 정치와 대규모의 경제를 지향하는 것으로, 정치에 있어 국가 중심적, 경제와 시장에 있어 재벌 중심적 구조를 강화하는 성격을 갖는다. 대규모의 정치는 정치 아젠다를 설정함에 있어 국가에 유리한 입지를 제공하고, 사회의 다양한 균열과 이익이 경쟁하는 데 불리한 조건을 만든다.(154쪽)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교육, 어떻게 보아야할까? 어떻게 보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교육부의 몇 년에 걸친 대대적인 공사로 인해 거듭 나아지고 있는 대입제도나 높은 학구열 등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산이나 바다에 있는 삼이 집에 하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원불변이 아니며 홍역을 앓듯 1년을 조용히 지내면 별 문제가 없다. 왜 굳이 교육에 시비를 걸려고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내가 거는 모든 희망은 교육에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게 있어 교육은 지금보다 더 낳은 삶을 지향하는 대안 공동체이며, 구습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실험체이기 때문입니다.
난 교육이라는 것을 볼 때면, 예전에 읽은 『멋진 신세계』를 떠올립니다. 거기에는 두 분류의 기계적인 인간만이 존재합니다. 남을 지배하는, 그리고 그를 위해 봉사하는... 하지만 그네들은 자율 의지에 스스로의 삶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강압적인 세뇌를 받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틀에 찍혀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이 이렇다고 한다면,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것일까요?
솔직히 내 주위에 선생이 없으니, 그네들의 수고는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생활을 보면, 교육은 지배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를 재생산하고 효율적인 통치기구로 전략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많은 선생들이 열심히 구습과 싸우고, 학생들은 치열한 자아 정립을 한다는 것을 인지하지만 너무 힘이 약해 보입니다. 이렇듯이 제가 교육에 다가가는 시선은 금(線)밖에 있습니다. 조금 어두운 말로 분위기를 꽉 눌러 놓았네요^^*
지은이의 시선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참 좋은 제목입니다. ‘내’가 바꾸지 않고 세상이 바뀌기를 바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진정 내가 꿈꾸는 세상이 있다면 난 그 꿈을 향해 발을 내딛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같은 줄에 선, ‘나부터’라는 말과 ‘교육’이라는 강한 집합력에 끌려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지은이는 우리 아버지의 삶을 “헛”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여 좋은 직장을 가서, 밤낮으로 피땀 흘려 자녀를 다시 대학에 보내는 일련의 과정이 끝나고 어느덧 회사에서 밀려나게 된 다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헛살기(45쪽)’ 다름 아니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회사에서 밀려나게 된 다음에 자기를 뒤돌아보게 되고, 그때에 가슴을 채우는 것은 공허함이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일하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나?
아마도 “집단적 광기(51쪽)”가 지배하는 학교에서, 뺏지 않으면 뺏겨 버린다는 강박관념을 통해 스무해 동안 배우는 것은 경쟁의식입니다. 이는 산업화라는 특수한 시대상황과 맞물려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톱니바퀴 굴러가듯 합니다. ‘빨리’와 ‘뺏지 않으면 뺏긴다’는 생사(生死)의 결투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볼 여기 없이 우리는 “숙련된 무능력“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이 옳고 그런가, 내게 무엇이 필요한가는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상은 차려져 있고 우리는 숟가락을 가지고 와서 국을 떠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는 것만 날름 받아먹고 보니, ”내면적 자율성“을 갖추지 못한 마음만 가지고 사회로 나오게 됩니다. 사회는 산업화에 의한, 단순 노동과 기계적인 반복 일을 하는 사람들을 환영하며 그네들을 열심히 부려먹습니다. 그렇기에 ”‘뼈 빠지게’ 일해도 항상 먹고 살기 힘들다“라는 말과 ”삶의 가치관이 질 중심이 아니라 양 중심(68쪽)“으로 돌아섰습니다.
“부모, 교사, 관료라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케르베로스가 학생들이 하루 종일 갇혀 지내는 지옥이라는 학교의 문을 지키고(21쪽)“ 있으며, 이들은 ”출세와 성공(34쪽)“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옥죄고 있습니다. 또한 ”각 개별 교육 주체들이 가진 이해관계 때문에(35쪽)“ 학생들은 스스로의 주체를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극적 세계관 지은이는 "부모, 교사, 관료“라는 무리들이 자라나는 내면을 허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답은 명확합니다. 이 무리들이 지금까지 누려온 기득권적 특혜를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하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폭력 문제는 우리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존재의 문제, 즉 나와 타자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존재의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풍성한 관계를 맺을 것인가. 아니면 그 다름을 상하 질서 속에 위계화시켜 지배-피지배, 강자-약자 관계로 갈 것인가? 이 뿌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현상적 공격 행위만을 제도적으로 규제하고자 한다면, 불행히도 폭력은 그 모습만 달리하면서 영원한 골칫거리로 남을 것이다.(83쪽)"
사람은 자기가 선 자리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 이에 의하면 지은이는 너무나 낭만적입니다. 현실의 가장 냉처한 목소리를 목도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기에 위와 같은 말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나는 제도를, 틀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진 자에게 당신이 가진 부(富)를 나누어 우리의 겨울을 따뜻하게 살자하는데... 현실을 보라!! 더 무얼 말하겠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정부의 강인한 의지에 의한, 명확한 철학을 통해, 대안에 이르도록 온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은이의 생각은 너무나 낭만적입니다. “우리 같이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자!”라는 말이 통했더라면, 이미 이런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현실의 모순을 혁파하기 위해서는 말이 아닌 ‘힘(무력)’과 ‘제도’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힘’은 잘못 쓰면 다수의 피와 균열을 일으키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즉 ‘제도’를 합법적 패러다임을 도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개혁에 맞먹는 ‘혁명’이 필요합니다. 교육이 백년대계라 하며 지지부진 끌기만 한다면 기득권의 시비에 말려서 개혁을 하지도 못하고 진을 빼고 말 것입니다. 즉 개혁이라는 무늬아래 혁명적 전략을 구사해야 합니다.(무슨 선동문 같네요^^)
지은이는 논조는 너무 확실합니다. 사회 현상을 전체적으로 그려보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십대에 품었던 이상에 대한 동경, 그 꿈의 프리즘으로 보았을 때에 가슴 아픈 우리의 현실을 인지하고 글쓰기를 한 것입니다. 책에는 우리의 이웃 이야기와 신문 기사가 많이 나옵니다. 이는 가장 가까이에서 뛰는 심장소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글쓰기는 교육의 헤게모니를 제대로 찾지 못한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즉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였기에, 오늘의 취업난(이는 이십대의 취업난과 우리 아버지의 명퇴와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자리의 축소가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을 단순히 경쟁구도로만 보고 있습니다. 즉 제로섬 게임이나 힘의 권력, 신자유주의에 의한 무단점거(?)에 대한 통찰, 정치권력의 헤게모니로 만들어지는 교육의 재생산 구조(-“집단적 무능력”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이는 현상을 본 것에 불과합니다.)를 살피지 못하고, 기득권이 쉽게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가에 대해 너무 감상적 접근 등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될 것입니다.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로부터라는 화두를 던진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되지만... 구조적인 문제 접근은 나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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