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베이스 제국
심슨 가핀켈 지음,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센터 옮김 / 한빛미디어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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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보 집적, 그 유용성과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정보화사회라고 한다. 인터넷에는 없는 정보가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가 흘러 넘쳐납니다. 그래서 『데이터 스모그』라는 말까지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정보에 대해 둔감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즉 정보가 지니는 힘에 대한 명확한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얼마 전에 네이스인지 무엇으로 인해 한동안 시끄러운 적이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일의 효율을 위해 정보를 집적할 필요가 있다고 반면에 다른 편에서는 그 가치로 인해 피해가 따르기에 조심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일의 효율성에 선 사람들은 전산화가 이루어지면 효율이 오를 뿐만 아니라 통제, 기술의 발달 등을 가져온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편에서는 정보가 흩어져 있는 것과 반대로 한 곳에 집적되어 있으면 그 가치는 달라지며, 가치를 쫓는 기업이나 사집단에 의해 큰 피해가 있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지은이에게 물어본다면, 그는 단연코 반대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아무리 기술이 발달을 하여도 주체는 기술이 아닌 사람이기에, 사람의 의해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즉 "내 직감에 '빅브라더'가 미국에 출현한다면, 그는 탐욕스런 권력욕자일 뿐만 아니라 효율성의 망상에 사로잡힌 잔혹한 관료가 될 같다(47쪽)"는 반스 패커드의 말을 인용합니다.

데이터의 집적은 누구를 위해서 움직이는가? 거대기업의 이윤, 조직에서의 효율성, 전자민주주의의 발전. 세계화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데이터의 집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지은이는 묻습니다. 이 전제 조건에 '사생활 보호'는 명시되어 있는가? 혹은 기업 등으로 피해를 입었을 경우 법적으로 구제를 받을 수가 있는가?

이 책은 5년 동안 쓰여졌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자료는 1990년대 중후반의 것입니다. 작게는 5년, 조금 반올림을 하면 지은이는 10년 전의 사회를 내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신용정보를 통해 피해를 보았지만 나 몰라라 하는 신용회사. 피싱을 통해 내 개인정보를 얻어서 이윤을 얻는 기업, 언제 어디를 가나 체크되는 사회, 나의 지난 병명과 수시로 드나드는 광고물 등은 나를 어지럽게 합니다. 어느 한 순간 나를 조용히 놔두지 않고 있습니다.

신용카드를 잃어버렸는데, 누군가가 복제를 하여 돈을 빼갔다는 이야기를,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제세공과금을 보내달라는 사기 등을 보면서 나는 데이터의 피해를 직접 목격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기사거리고 생각하고 지나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초보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데이터가 모여지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아직 모릅니다. 지은이의 글쓰기 또한 문제제기와 피해를 고발하는 단계이지 적극적 현상의 도출은 없습니다. 데이터 집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데이터의 집적을 분산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 대안(?)이 없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책이 나온 지가 조금 지났다 보니, 새롭다는 느낌을 들지가 않습니다. 다만 지은이의 정성어린 충고가 하나의 기우가 아니라는 것이 티비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데이터가 모여지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아직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빅브라더가 조율자가 될 것인지, 공산주의의 독재자가 될 것인지는... 지금 고민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그려질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별제,-----
지은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수많은 연구와 데이터의 직접으로 인해, 선진국들은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고 이를 다시 특허라는 제도를 이용하여 생산성을 높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연구를 하거나, 상업적 목적을 사용할시 에는 이미 정보의 노예, 식민지로 전략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유전자 분야에 특히 두드러지며, '하늘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라는 장에서도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인공위성이 지구를 돌면서, 내 모습과 내 고향을 촬영하여 상업적 도구로 팔아먹습니다. 하지만 나는 초상권을 행사할 수가 없으며 아무렇게나 우리 집 안방을 훔쳐보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냅니다. 즉 정보의 데이터가 보여지다 보니 시너지 효과가 나오고, 이런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잠시 엉뚱한 생각으로 붙여 보았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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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강수돌 지음 / 그린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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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슴에 교육은 무엇인가요?’]


중앙집중화는 기본적으로 엘리트구조이며 기득권구조를 말한다. 사회의 구조가 동심원적 구조로 중첩되면서 상층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기본적으로 소외계층이나 민중이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제한된 자원에 넓게 접근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집중화의 구조는 대규모의 정치와 대규모의 경제를 지향하는 것으로, 정치에 있어 국가 중심적, 경제와 시장에 있어 재벌 중심적 구조를 강화하는 성격을 갖는다. 대규모의 정치는 정치 아젠다를 설정함에 있어 국가에 유리한 입지를 제공하고, 사회의 다양한 균열과 이익이 경쟁하는 데 불리한 조건을 만든다.(154쪽)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교육, 어떻게 보아야할까? 어떻게 보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교육부의 몇 년에 걸친 대대적인 공사로 인해 거듭 나아지고 있는 대입제도나 높은 학구열 등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산이나 바다에 있는 삼이 집에 하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원불변이 아니며 홍역을 앓듯 1년을 조용히 지내면 별 문제가 없다. 왜 굳이 교육에 시비를 걸려고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내가 거는 모든 희망은 교육에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게 있어 교육은 지금보다 더 낳은 삶을 지향하는 대안 공동체이며, 구습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실험체이기 때문입니다.

난 교육이라는 것을 볼 때면, 예전에 읽은 『멋진 신세계』를 떠올립니다. 거기에는 두 분류의 기계적인 인간만이 존재합니다. 남을 지배하는, 그리고 그를 위해 봉사하는... 하지만 그네들은 자율 의지에 스스로의 삶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강압적인 세뇌를 받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틀에 찍혀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이 이렇다고 한다면,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것일까요?

솔직히 내 주위에 선생이 없으니, 그네들의 수고는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생활을 보면, 교육은 지배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를 재생산하고 효율적인 통치기구로 전략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많은 선생들이 열심히 구습과 싸우고, 학생들은 치열한 자아 정립을 한다는 것을 인지하지만 너무 힘이 약해 보입니다. 이렇듯이 제가 교육에 다가가는 시선은 금(線)밖에 있습니다. 조금 어두운 말로 분위기를 꽉 눌러 놓았네요^^*

지은이의 시선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참 좋은 제목입니다. ‘내’가 바꾸지 않고 세상이 바뀌기를 바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진정 내가 꿈꾸는 세상이 있다면 난 그 꿈을 향해 발을 내딛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같은 줄에 선, ‘나부터’라는 말과 ‘교육’이라는 강한 집합력에 끌려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지은이는 우리 아버지의 삶을 “”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여 좋은 직장을 가서, 밤낮으로 피땀 흘려 자녀를 다시 대학에 보내는 일련의 과정이 끝나고 어느덧 회사에서 밀려나게 된 다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헛살기(45쪽)’ 다름 아니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회사에서 밀려나게 된 다음에 자기를 뒤돌아보게 되고, 그때에 가슴을 채우는 것은 공허함이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일하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나?

아마도 “집단적 광기(51쪽)”가 지배하는 학교에서, 뺏지 않으면 뺏겨 버린다는 강박관념을 통해 스무해 동안 배우는 것은 경쟁의식입니다. 이는 산업화라는 특수한 시대상황과 맞물려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톱니바퀴 굴러가듯 합니다. ‘빨리’와 ‘뺏지 않으면 뺏긴다’는 생사(生死)의 결투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볼 여기 없이 우리는 “숙련된 무능력“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이 옳고 그런가, 내게 무엇이 필요한가는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상은 차려져 있고 우리는 숟가락을 가지고 와서 국을 떠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는 것만 날름 받아먹고 보니, ”내면적 자율성“을 갖추지 못한 마음만 가지고 사회로 나오게 됩니다. 사회는 산업화에 의한, 단순 노동과 기계적인 반복 일을 하는 사람들을 환영하며 그네들을 열심히 부려먹습니다. 그렇기에 ”‘뼈 빠지게’ 일해도 항상 먹고 살기 힘들다“라는 말과 ”삶의 가치관이 질 중심이 아니라 양 중심(68쪽)“으로 돌아섰습니다.

“부모, 교사, 관료라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케르베로스가 학생들이 하루 종일 갇혀 지내는 지옥이라는 학교의 문을 지키고(21쪽)“ 있으며, 이들은 ”출세와 성공(34쪽)“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옥죄고 있습니다. 또한 ”각 개별 교육 주체들이 가진 이해관계 때문에(35쪽)“ 학생들은 스스로의 주체를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극적 세계관
지은이는 "부모, 교사, 관료“라는 무리들이 자라나는 내면을 허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답은 명확합니다. 이 무리들이 지금까지 누려온 기득권적 특혜를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하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폭력 문제는 우리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존재의 문제, 즉 나와 타자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존재의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풍성한 관계를 맺을 것인가. 아니면 그 다름을 상하 질서 속에 위계화시켜 지배-피지배, 강자-약자 관계로 갈 것인가? 이 뿌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현상적 공격 행위만을 제도적으로 규제하고자 한다면, 불행히도 폭력은 그 모습만 달리하면서 영원한 골칫거리로 남을 것이다.(83쪽)"

사람은 자기가 선 자리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 이에 의하면 지은이는 너무나 낭만적입니다. 현실의 가장 냉처한 목소리를 목도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기에 위와 같은 말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나는 제도를, 틀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진 자에게 당신이 가진 부(富)를 나누어 우리의 겨울을 따뜻하게 살자하는데... 현실을 보라!! 더 무얼 말하겠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정부의 강인한 의지에 의한, 명확한 철학을 통해, 대안에 이르도록 온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은이의 생각은 너무나 낭만적입니다. “우리 같이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자!”라는 말이 통했더라면, 이미 이런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현실의 모순을 혁파하기 위해서는 말이 아닌 ‘힘(무력)’과 ‘제도’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힘’은 잘못 쓰면 다수의 피와 균열을 일으키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즉 ‘제도’를 합법적 패러다임을 도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개혁에 맞먹는 ‘혁명’이 필요합니다. 교육이 백년대계라 하며 지지부진 끌기만 한다면 기득권의 시비에 말려서 개혁을 하지도 못하고 진을 빼고 말 것입니다. 즉 개혁이라는 무늬아래 혁명적 전략을 구사해야 합니다.(무슨 선동문 같네요^^)

지은이는 논조는 너무 확실합니다. 사회 현상을 전체적으로 그려보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십대에 품었던 이상에 대한 동경, 그 꿈의 프리즘으로 보았을 때에 가슴 아픈 우리의 현실을 인지하고 글쓰기를 한 것입니다. 책에는 우리의 이웃 이야기와 신문 기사가 많이 나옵니다. 이는 가장 가까이에서 뛰는 심장소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글쓰기는 교육의 헤게모니를 제대로 찾지 못한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즉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였기에, 오늘의 취업난(이는 이십대의 취업난과 우리 아버지의 명퇴와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자리의 축소가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을 단순히 경쟁구도로만 보고 있습니다. 즉 제로섬 게임이나 힘의 권력, 신자유주의에 의한 무단점거(?)에 대한 통찰, 정치권력의 헤게모니로 만들어지는 교육의 재생산 구조(-“집단적 무능력”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이는 현상을 본 것에 불과합니다.)를 살피지 못하고, 기득권이 쉽게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가에 대해 너무 감상적 접근 등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될 것입니다.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로부터라는 화두를 던진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되지만... 구조적인 문제 접근은 나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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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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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없는 집권은 제발...ㅜ.ㅜ]

노무현의 정치개혁 실패는 정치와 국민들을 이분화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이익을 정치적으로 표출하고 대표하여 대안을 조직함으로써, 한편으로 대중참여의 기반을 넓히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체제의 안정에 기여하는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민주주의는 기존의 냉정반공주의의 헤게모니와 보수독점의 정치구조에 그저 얹혀 있는 외피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특권적 기득구조와 계급구조는 심화되었고 사회의 공동체적 기반은 더욱 약화되었으며 개인의 삶도 황폐화되었다.(17쪽)"

이 책은 4부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1부에서는 문제제기를 하며, 2. 3부에서는 한국의 보수적 민주주의 기원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살피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에 벌어지는 시간의 연장선상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에 한국의 보수적 민주주의가 생성되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어떤 모습인가를 그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국가보안법입니다. 국보법이 한 개인이 아닌 국가나 정치 담론에 미치게 될 경우 그 파장은 어디까지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한국의 보수적 민주주의를 통해 굳건하게 굳어지는 것은 개인 삶의 황폐화이자 계층 구조간의 큰 갈등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보수주의는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가? 내가 본 지은이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양당체제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한국은 민주주의 형성과정에서 이념적 논의가 없다는 점입니다. 투표권이 투쟁에 의한 획득(자의식 형성)이 아닌 "1948년 5월 10선거를 기하여 일거에 부여(60쪽)"되었으며, 선거를 "분단국가를 제도화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학생. 좌파세력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보이콧 한 상태에서 치러지며, 더욱이 "민간조직이었지만 경찰이 주도한 사실상의 공조직인 향보단(鄕保團)"의 통제가 이루어졌으며, 제주 도민들이 보이콧하기 위한 소요가 4.3사건으로 번졌습니다. 즉 선거를 분단국가로 인식한 민족적 세력(좌파를 포함)은 보이콧한 반면에 수구 기득권 세력들은 선거를 통해 자기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태생적 한계를 품게 됩니다.

한국전쟁을 거치게 되면서 북한에서는 민주주의가 사라진 반면에 남한에서는 좌파적 세력과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제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념의 극단화가 이루어집니다. 좌파가 사라짐은 다양한 정당의 형성을 막는 보루가 되었습니다.

"이 두 그룹만이 정당체제를 주조하게 됨으로써 한국의 정당체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게 되었다. 첫째, 여야당은 이념적으로 동일한 지평위에서 경쟁한다. 둘째, 양당은 밑으로부터의 대중적 이익이나 요구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엘리트 중심적 성격이 강하다. 섯째, 사회의 계층적.직능적.직업적 이익들은 그들 스스로의 조직화를 통한 방식으로는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한다. 넷째, 그러면서 여야당을 막론하고 사회 전체, 국가 전체, 민족 전체의 대의와 이익을 내세움으로써 포괄정당적 성격을 갖는다.(52쪽)"

이렇게 양당체제의 동일한 이익을 추구하는 정당은 "정당체제의 저발전(203쪽)"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정치사회를 시민사회로부터 분리 내지는 괴리된 자율적 영역으로 구축하면서 산업화, 민주화를 통한 국가를 형성합니다. 그들만의 잔치, 수동혁명(위로부터의 혁명)은 한동안 한국 정치의 테제가 되었으며 보수적 민주화를 형성하였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 대한 기대와 희망, 그에 대한 실망은 정치에 대한 거리감을 키웠으며……. 비판과 견제가 없는 정부는 난장판이며, 행정 관료는 무사안일. 보신주의를 화석화되어갑니다.

한국의 양당체제는 아직까지 별다른 문제를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설령 안으로 곪아서 썩어갈지언정 상처가 없는 한국 사회는, 좋은 무늬를 덮어씌운 고물 자동차에 비유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吳越同舟
한국 정부가 양당체제를 통한 정치권력을 이루면서 묵시적 합의가 이루어진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국보법입니다. 내 서재에 『태백산맥』이 꽂혀져 있지만 아직 판결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이니 이적표현물 소지에는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즉슨 이적 표현이나 불고지죄 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남몰래 구속이 되지 않으니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지은이는 이런 나의 협소한 사고를 큰 틀에 가두어 새롭게 보여 주었습니다.

국보법이 미치는 파장은 "자기검열"이며, "다양한 정치적 이념"을 가두어 버리고 "획일화 된 이념"을 통해 중앙 집중화를 시킨다고 합니다.

"냉전반공주의의 또 다른 부정적 효과는, 한국사회의 정치현실에서 보편적인 정치언어로서 좌와 우라든가, 또는 영어의 people, 프랑스의 peuple, 이탈리아의 popolo 등에 해당하는 적절한 말을 사용하기 어렵게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상적인 정치언어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쉽게 채색될 때 인민. 민중. 계급 등의 말들은 이내 일체의 좌파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결합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북한 공산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이념적 불러내기(ideological interpellation)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언어와 담론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정치의 실천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정치사회의 여야구조 또는 정당체제는 이념적으로 좁게 열린 스펙트럼에서 각축할 수밖에 없고, 사회 세력이 시민사회의 수평적. 기능적 갈등을 조직하거나 사회의 약자를 대변할 수 있는 대안적 담론이나 정치운동을 조직화하기는 어렵다.(65쪽)"

우리의 국회 혹은 나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둔감하다는 것은 우리들의 이념적 편향이 얼마나 우물 안에 갇혀져 있는가를 반증하는 것일 될 수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한국 정당의 갈등 구조는 정치이념에 의한 것이 아닌 자기의 이익을 통한 이권다툼이 아닌 것입니다.

"한국의 정당체제에서 정당이 대표하는 사회균열의 범위와 기반은 매우. 협소한 반명, 정당간의 갈등의 강도는 격렬할 정도로 강하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갈등의 강도가 높은 이유는 갈등의 범위가 매우 좁기 때문이다. 정당들의 이념적 기반이 매우 유사한 조건에서 정당간의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재란, 내용은 없이 감정을 자극하고 적대적 열정을 동원하는 것밖에 없다.(208쪽)"

분명 우리는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제왕적 권력을 쓰면서 남의 나라를 함부로 침략하고, 일본이 대동아 구상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중국이 동북아 공영권을 구상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의 국회는... 남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자 강아지처럼 짖는 행위가 아닌 자주적으로 우리 땅을 지키고 앞으로 나아가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유대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는 밑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념의 다양화와 실천 가능한 대안을 통한 집권, 개방성과 자율성을 통해 다양한 목소리 등에 귀 담아 듣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울 공화국이 자치하는 중앙집중적 권력도 분산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할 것이다. 그리고 행정관료의 무사안일주의 정책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며, 언론은 가십거리의 기사를 흘려보내 국민들의 눈을 어지럽게 할 것이 아니라 커다란 시야를 형성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정치에 대한 갈망은 커지는 반면에 집권당의 행태는 구습을 벗어나지 못하니 가관이다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여야당의 전략적 행위라면... 우스게 소리로 하는 "일본은 관료가 하고, 한국은 언론이 한다"는 시쳇말 속에 뼈가 있지 않나 생각을 가져봅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과연 우리는 수많은 피의 댓가로 얻어낸 민주화를 민주주의라는 틀로 잘 꾸려가고 있는가? 피 흘리며 죽어간 동지와 선배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오늘을 살고 있는가? 아직 넘어야 할 뫼(山)가 많은 듯 합니다.

덧붙임 : 지은이는 한국의 재벌에 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데, 장하준의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은 이와는 다른 곳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박정희가 이룩한 근대화에 대한 경험적 결과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를 한다는 점입니다. 국가의 강인한 견인차를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한 사람이 지니는 무한 가치를 잘 활용하는 정부의 혜안(慧眼)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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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5-01-06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과 좋은 글입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는데 피만 가지고는 안되는 것 같아요. 더 많은 무엇인가가 필요하겠죠. 진보를 열우당만 독점하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히가 나밖에 안된다고 하던 것과 똑 같은 사고방식이죠.
 

윌리엄 A.유잉 지음, 오성환 옮김 / 까치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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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자연스러울 수가 있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지 않을 수가 있으며,
          모든 것은 자연스러울 수가 있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1928년에, "사진의 역할은 세계를 단편적으로 분할하여 형식화된 네모진 틀 안에 가둠으로써 사실과 다른 사건을 만들어내며 진실을 허구의 이미지로 변화시킨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레마르크의 말에 충분히 동의를 하면서도 난 그가 한 면만 이야기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이라는 것은 내가 보려고 하는 것만 보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모든 것을 재구성하기도 합니다. 이는 세계를 단편적으로 분할하기도 하지만 부분을 전체화하기도 하고, 내가 알지 못한 세계나 애써 외면한 세계를 대면케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똑바로 보도록 강권합니다. 그리고 지은이는 사진의 양면성을 이야기 합니다.

"사진은 1세기 이상 몸에 깊은 영향을 미쳐왔다. 사진이 인류에게 유용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우려를 초래해온 것 역시 사실이다. 예컨대 포르노 사진에 이용된 이미지가 남녀의 몸의 타락을 조장했으며, 이상화된 청춘을 광고에서 극단단적으로 미화한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심어주어 일반 남녀들이 자신의 몸으로부터 소외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의학사진이 몸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촉진함으로써 수명을 연장시키고 건강을 향상시킨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결국 '수치화된 사체'는 실제 인간의 몸을 찍은 수천 장의 사진으로 합성된 것이다.(10쪽)"

지은이는 사진으로 12개의 장으로 분류하여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①단편성②인물상③탐색④육체성⑤강건미⑥에로스⑦소외⑧우상⑨거울⑩정치성⑪변신⑫마음이라는 12개의 장을 나누었습니다. 단편성은 부분을 통한 낯설기입니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우리 몸의 일부를 찍습니다. 지은이는 단편성을 3개의 범주로 나뉘는데, 리얼리즘.형식주의 단편성, 다의성입니다. 하지만 언어에 대한 명확한 개념 정의가 없기에 혹은 국문학을 통해 형성된 언어 정의와 지은이가 내리는 정의가 조금의 마찰을 읽으켜 혼란스럽습니다. 그리고 모더니즘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지은이의 시선과 내가 보는 시선의 차이는 큰 강을 만들어 냅니다. 솔직히 이런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강한 의문을 품게 만드는 작품이 앞에 탁 버티고 서 있으니 책을 넘기기가 수월하지만은 않지만 인물상에 펼쳐진 여자의 누드는... 보기만 해도 행복하다(!)는 느낌을 전해 줍니다. 인물상을 표현주의라고 한다면, 육체성은 리얼리즘을 지향합니다. 단순히 육체적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 육체를 통해 숨겨진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는 에로스나 소외 우상의 표현 방식과는 동일하지만 그 의미는 차이가 있습니다. 에로스는 인물상에서 한발 더 나아간 에로티시즘이나 포로노 그라피를 창조하고, 우상은 기계화되거나 이상화된 몸을 드러냅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속물과 결합되어 상업성을 창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외는 철저하게도 현실 고발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금(線) 밖으로 내쫓아 버린 사람들이 그곳에서 우리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은이는 사진이라는 것이 에로티시즘적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향도 지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단편성' 부분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적었습니다.
내가 본 순간, 내 시선을 3초 이상 잡아두는 무엇. 내 시선은 나의 세계관에서 출발하기에 예술가와 치열한 투쟁을 무의식에서 벌이고 있다. 예술가는 나의 세게관이 좁다 말할 것이며, 난 그의 세계관이 정의되지 않거나 광의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괴리. 하지만 나와 작품의 치열함(?) 투쟁에서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말은 무의미하다고 단정짓기에는 그들의 세계관과 지금까지의 이어온 토대의 구축에 대한 평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게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난 잠재적 보류라는 간판을 내 머리에 달아 두어야겠다.

"젖꼭지는 마치 눈과 같고 배꼽은 심술궂은 입처럼 보이는 이 동체는 스스로 웃을 수 있다. 몸의 실상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이 사진은, 수 많은 광고판과 잡지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경쟁하는 몸의 이상화된 변형들과는 다르다. 뒤엉킨 체모가 뒤덮고 있는 코플란의 상반신상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일무이한 몸의 특성을 두려워하고 과소평가하도록 만드는, 몸을 부인하는 관습을 비판하고 있다.(142쪽)"

"비정상적인 사람이나 불구자의 몸을 이용하는 사태를 우려하는 마음에서의 침묵은 인간적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의 상태를 직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병적이다. 다수의 현대 사진가들은 그와 같은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 질병을 주제로 삼아왔다.(239쪽)"

난 책을 읽으내려가면서 간판을 거두며 지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그가 펼친 사진을 하나씩 차근히 봅니다. 누드 사진에 눈이 더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신체의 부위를 찍은 사진이나 소외에 나타난 모습. 다양한 사진을 차근히 살펴봅니다. 처음에 느껴지는 언어에 대한 명확한 개념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느낌은 희석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수긍을 하게되었습니다.

사진을 통해 보여질 수 있는 것이 다양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사진이 처음 나타났을 때 그 사회의 흐름도 어느 정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다양한 사진을 통해 다양한 모습, 사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게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은 추상스런 비평이 아주 살짝 엿보여 내 머리를 어지럽게 했지만 지은이의 시선은 사진과 현실을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임 : 임산부나 마음이 약한 사람이 보기에는 조금 부담이 될 듯 합니다.
            사진과 글, 행복한 읽기였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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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MEER - 요하네스 베르메르 위대한 미술가의 얼굴 16
파스칼 보나푸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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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사로잡은 VERMEER^^*]

진주 귀걸이 소녀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진주 귀걸이 소녀에 대한 환상을 쫓겨 되면서 난,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책을 보게 되고 『VERMEER』라는 책도 보게 되었다.

우선 『진주 귀고리 소녀』는 책을 읽는 내내 나와는 별 세계라는 느낌으로 진흙을 걷는 기분이였습니다. 하지만 마흔을 맞이한 우리 실장님(女)은 참 좋은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한때 문학 소녀였으며, 책을 좋아하는 실장님에게 한 권 권내준 책은 내가 읽은 것과 똑같은데... 그 느낌은 천지 차이랍니다. 실장님은 지은이가 들려주는 베르메르의 이야기와 하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그림을 그리 듯, 생각을 품어갔다 합니다. 하지만 나는 자기 집과 주인 집을 오락가락 하면서, 가슴 한편으로 주인을 품고 있는 하녀의 모습이 전부라며, 이게 전부다라고 쉬이 단정을 내려버렸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난, 내 삶을 돌아보는 거울로 보고 싶거나 혹은 지식 나부랑이 하나를 더 건지려는 욕심에 지은이가 들려주는 애뜻한 감정에는 쉬이 동(動)하지가 않았습니다. 아침에 실장님이 건내는 이야기를 듣고는 난, 소설이라는 것은 이렇게도 다른거구나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소설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다시 내가 이 작품을 읽게 될 지는 의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VERMEER』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에 대한 일생을 부활시켜냅니다. 지은이는 지난 역사적 자료를 통해 그를 다시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 묻힌 낱줄을 몇 개 꺼내어 줄을 새로이 붙였기에 입체적 조명이 아닌 단선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지은이는 베르메르에 대한 인물을 여러가지에서 쫓고 있으면서, 또한 그의 작품에 나타난 특성을 살피고 있습니다. 서른 다섯편 정도의 작품 속에는 반복되는 유형이 많이 나오고 있으며, 진주라는 보석이 던져주는 빛의 찬란함, 인물들의 정숙함과 사실을 사실대로 그리지 않았다는 등을 여러가지 살피고 있습니다. 이렇게 베르메르에 대한 정밀한 조사를 한 다음에 출생을 시작으로 하여 그가 살았던 델프트의 지형을 보면서, 그림을 보여줍니다.

그림 하나하나를 살펴가면서 보는 재미는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장점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더구나 지은이는 동시대의 그림이나 같은 혹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베르메르의 그림이 지니는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책 어디를 펼치든 베르메르의 커다란 그림 하나가 오른쪽에 펼쳐져 있습니다. 내 삶이 피곤하거나 혹은 아름다운 이국 정취에 빠지고 싶을 때 책꽃이에 꽃여진 책을 꺼내어 한 묶음의 종이를 넘길 것입니다.

그림에 대한 만남은 정말 두고두고 볼 작품이지만, 이야기로서의 만남에서는 조금 망설여집니다. 지은이가 서른 다섯편의 작품을 일일이 분석한 다음에 찾아낸 그의 유형이 깊이 있는 분석이 된다할지라도, 그림을 이야기 하면서 입체가 아닌 단선적으로 머물러 있는 내용은 정말 아쉬움입니다. 물론 베르메르에 대한 비밀이 너무 많아서 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지은이는 풀어가지 않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책을 덮고 나서 곰곰히 생각해 낸 것은, 지은이가 너무 베르메르에 심취하였기에, 그의 작품의 위대함만 풀어놓았지 그림 속의 이야기는 풀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편지를 든 하녀와 함께 있는 젊은 여인"


"졸고 있는 처녀"

『진주 귀걸이 소녀』가 하인과 주인(화가)에 대한 애뜻한 시선이라면, 『VERMEER』는 베르메르에 대한 지은이의 예찬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덧붙임 :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D/B를 구성하니, 책을 펼치지 않아도 우린 그림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난 지친 몸으로 집에서 와서는 아무렇게나 앉아 책장에 꽃힌 베르메르를 불러낼 것이다.
위의 그림은 오넷아트에서 가져왔습니다. 책에 나온 그림과 사이트의 그림이 조금 틀린 부분이 있습니다.

"졸고 있는 처녀"라는 작품에는 그가 술을 반 잔 정도 먹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하얀 잔이 술이 반 정도가 남아있기 때문이죠. 보이시나요? 그리고 이렇게 사실에 의거하여 분석하는 지은이는, 보는 것만 보려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진주 귀걸이 소녀"에 대한 환상은 이 책에서는 찾기가 힘든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값이 조금 부담이 되네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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