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 오 미쎌...^^*]
푸코, 동성애자라 특이 취향(?) 보다는 68혁명 때 학생의 편에 서 있었다는 그 하나만으로 내 머리에게 크게 각인이 되었습니다. 어설픈 내게, 한 방울의 지식이 목말라 하는 내게, 문화적으로 부국인 듯한 프랑스의 68혁명은 10월 혁명과 같이 하나의 신화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 깊이 알게 되면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실체 접근이 이루어지지만 앞 못 보는 이가 코끼리를 더듬 듯 하여 어깨너머로 듣은 지식의 나부랭이, 스스로 성(城)을 만들어 튼튼한 아집을 형성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하지 않을까 합니다.
『미셜 푸코』'만화로 읽는 삶과 철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한 사람의 과정을 놓고-그가 동쪽 방에서 먹고 서쪽 방에서 잠을 자고, 7살에 본 강 위의 아가씨에 반한 이야기라든가 죽음 끝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그가 생산한 '책'을 통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나라 선거 벽보용(用)에 붙은 학교 약력이 그 부분은 정말 미미합니다. 그의 사상적 노고가 집대성한 책을 통한 접근은 공사(公私)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큰 방에서 운우지정(雲雨之情)를 나누든 작은 방에서 학생의 점수를 맺기든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절대 명제에서 출발을 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에서 출발하지만, 우리는 절대적 진리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절대적 진리라는 생각 자체를 없애 버린다면, 앎이란 무얼 뜻하는걸까? 그건 아무래도 일단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이게 참이다'라고 정한거 아니겠어.(10쪽)"
아는 것이 힘이다. 그렇다면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닌, 아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자연(自然)의 모든 지식을 안다는 것보다 사람과의 관계에 선 지식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힘도, 자신의 생각만이 옳고 진실된다고 다수에게 강요하는 힘센 소수들에 의해 행사되고 있다.(11쪽)" 보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지식을 안다는 것은 적은 지식으로 힘을 쓸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그렇다면 '안다는 것은 절대 진리인가?'
푸코는 "절대적 진리라는 생각 자체를 없애 버린다면"이라는 가정을 통해,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답을 찾고 있습니다.
" 인간에 대한 앎이나 사회과학 또는 푸코가 말하듯이 인간과학 분야에도, 무엇이 진실인지를 결정하는(진리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또 그런식으로 일반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12쪽)" 그렇다면 "왜 한줌밖에 안되는 사람들"을 추종하는가? 이는 프로이드의 공격자와의 동일시 개념과 동일하다고 생각됩니다.
푸코는 "광기, 질병, 변태에 대한 정의가 시대에 따라 크게 다르다(20쪽)"는 가정을 검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대에 따름에 대한 다름을 역사적 고찰을 통해, 누군가의 의해 조종(-한줌밖에 안되는 사람)당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광기와 문명』에서는 어떻게 광기가 한 집에서 살지 못하고 두 집 살림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진료소의 탄생』에서는 개인의 사물화에 대해, 이는 푸코의 제자를 많이 양산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몇 몇 분야에서 탁월한 이야기를 끌어낸다. 『여자들이 의사의 부당의료에 속고 있다』와 『헬로우 블랙잭』 등의 책이 있습니다.
『사물의 질서』에서는 담론……. 내겐 조금 힘겨운 부분^^;
『감시와 처벌』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힘의 권력. 즉 예전에는 칼로 찢어 공개 처형을 함으로써 그들의 힘을 과시하였지만 "그러나 18세기에,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 정부를 위해 별로 좋은 이미지가 아니라고 철학자들이 비판하고 나서는 한편, 고문과 사형의 현장을 구경하러 나온 군중들도 점점 더 통제불능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뭔가 조취를 취해야만 했다.(123쪽)"
푸코는 이를 "규율"이라고 부른다. 그 원리는 공간배치, 행동에 대한 철저한 통제(특히 시간표를 이용하여), 반복 훈련은 "정상으로 만들기 위한 평가"의해 줄 세워집니다. 뭔가 떠오르는 생각…….
" 그 아이디어는 이렇다. 각각의 사람들은 작은 방에 격리 수용되고, 그들은 중앙 탑의 한 사람에 의해 계속적으로 감시를 받는다. 반지 모양 건물의 원 둘레에 칸칸이 분할된 이 방들은 밖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므로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중앙 탑의 감시자에게 자세히 보인다. 그러나 수감자들은 중앙의 감시자를 볼 수 없고, 옆칸의 다른 수감자도 볼 수 없다. 벤담은 이 기본적인 개념을 공장, 학교, 막사, 병원, 정신병자 요양소 그리고 특히 감옥에 쓰이도록 고안했다.(130쪽)"
또한 여름과 겨울에 있는 방학!! 놀랍도록 잘 지켜지는 방학의 시간표. 몇 시에 일어나서 무엇을 하고 몇 시에 무엇을 한다는 생활계획표. 우리의 친절한 선생님은 스스로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하고서 이러한 주문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사고에 대한 무개념적 접근인지……. 하지만 둘 다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비판적인 사고를 인지하고 있으면서 생활계획표를 주문한다는 것은 푸코가 말하는 "힘센 소수"라는 기득권적 권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개념적 접근이라면,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 기득권에 줄 선 아름다움 선생님으로 불려 질 것입니다.
둘 백년 이 지나는 사이에 정상과 비정상이 갈리고, 정상은 비정상을 구속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서로를 나누는 힘이 되고, 일상에 숨어서 내 세계관을 구속하여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게 한다는 점입니다. 프로이드의 공격자와의 동일시 개념을 잠시 빌리면, 내 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진 자에 대한 동경과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낮은 눈빛.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회에서, 우리는 달콤한 사탕을 하나 지기위해 수백 명이 뛰어든 것입니다. 사탕을 어떻게 더 많이 만들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미지에 대한 욕심. 그리고 "규율"로 위장된 권력자들의 폭력. 약한 자의 소리를 비정상적인 구호로 보는 현재의 나 시선 등은 지금까지의 권력을 더욱 튼튼한 동아줄로 엮게 할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 헤게모니를 깨기 위해서는 절대 진리에 대한 개념을 상대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제로섬 게임이라는 무대위에 놓여있다는 커다란 시선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가져봅니다.
나는 푸코가 어디에서 무슨 학위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쓴 책과 이런 알림에 대한 고민을 왜? 왜, 어려운 작업을 핸가에 대하여 궁금할 뿐입니다. 학생들이 기득권자에 맞설 때, 선뜻 자기의 방을 내어준 교수. 그의 실천적 지식에 대한 행위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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