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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김남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1999년 2월
평점 :
품절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 말라"]
나는 가끔 잊고 산다. 지금 내가 누리는 자유가 단지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내게로 왔다는 아름다운 착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주의 시를 접하면, 단지 '바람에 부는 풀잎'이 아니라는 걸 알게된다. 그건 싸움이였으며, 자기 삶의 가장 고귀한 자유와 맞바꾼 싸움. 그 싸움의 결과로 얻어진 값이며, 거룩한 정신이란걸 느낀다. 흔히 공기가 없어야 공기의 소중함을 안다는 우스게 소리를 하는데, "오랫만에, 참으로 오랫만에 살찐 젖가슴과도 같다는 검은 흙"을 일년에 체 한 번 정도 만져보며 지낸 세월. 인생에 대한 회의는 없었을까? 후세 사람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바른길인가에 대한 고뇌 없이 어떻게, 저렇게 확신을 하며 나아갈 수가 있을까?
스스로의 행동이 옳다고 믿으며,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않고 싸워간, 긴 시간을 감옥에 갇혀 있으며 '스스로의 자유를 억압' 당하고 만인(萬人)의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 왜 그토록 김남주에게 거룩한 싸움을 하였는가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화답하지 않을까? "형님,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심어놓은 나무에서 그 열매를 따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식들을 위해 매일처럼 땀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 폭넓게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개인 또는 가족들만을 위해서 나무를 심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따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나무를 심고 기르고 가꿉니다. 나 또한 이러한 생각에서 어떤 일을 했는데 지금에 와선 이런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형님 난 결코 후회하거나 실망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고통의 생활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습니다. 새벽의 햇살을 보기 위해서 우리 인간은 밤의 어둠 속을 헤매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단련되지 않고서야 어찌 이 지상에서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225쪽)"
그는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싸운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이들을 위해 자유를 억압당한 것이다. 김남주가 가족이 아닌 우리라고 말을 했을 때에는, 분명 나도 거기에 섞여 있었으리라. 나는 김남주를 통하여 다시 자유가 시간의 흐름 속에 떠밀려 온 것이 아닌, 내가 모르는 수 많은 이들의 자유와 맞바꾼 싸움이라는걸 생각한다.
김남주는 이렇게 말한다.
"징역 초기에는 철장너몰 보이는 달이 제법 서정을 자아내기도 했는데 이젠 그것이 아무리 밝고 아름다와도 별 감각이 없다네.(251쪽)" 김남주는 "일년 삼백예순날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정량의 가벼운 운동, 요가, 냉수마찰"을 하면서 스스로의 몸을 지킨다. 이는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기 위함이겠지만,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건강한 시를 적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이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서 "이 밤으로 단식 3일 째가 끝나고 아마 내일 쯤이면 어떤 물리적인 힘이 우리를 덮치게 될 것이오. 지겹고 소름이 끼치는 일이지만 담담한 기분으로 모든 것을 받아 들이기로 했소. 아무런 저항도 이번에는 시도 하지 않겠소. 탄압의 도구들에 대한 환멸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고. 도대체 인간이란 것에 지쳤소. 자연 속에서 인간처럼 잔혹하고 야비하고 저속하고 이기적인 동물이 또 있을까요?(104쪽)" 광숙에게 묻지만, 그의 마음은 "내가 바라는 좋은 세상"과 "광숙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지쳤으면서도 사람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한 인간의 고귀함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
덧붙임 :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89년, 삼천리]에서 간행한 초판본입니다. 제목은 『김남주 옥중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