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 창비교양문고 20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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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기에 메모만 옳긴다"]

서승과 서준식의 동생이라는 말 때문에 책을 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서준식은 그의 여동생에게는 편지를 썼지만 경식이게는 많이 하지 않은 듯 하다(전 3권 가운데, 1권만 읽었음) 그런데도 나는 그의 형제라는 감정 때문에,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비교를 한다는 것이 안 좋은 것인 줄 알면서도, 나는 서준식의 글이 겹쳐지는 것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서경식의 글에 낯설은 이국 이름이 나와서만은 아닐 것이다. 서준식은 물이 미끄러지듯이 글을 잘 쓰 내려간다. 나는 물결 위에 몸을 실고만 있으면 어느 바닷가에 닿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가려 해도 물을 거꾸로 거스르는 연어처럼 서경식의 글은 힘들다. 그의 미술 비평에 대한 어려움이 아니라 글 자체에 대한 어려움이다. 이 어려움을 글 읽기에 대한 반감만 키우며 이해의 폭을 좁게 한다.

나는 서경식의 글을 읽었지만 솔직히 무엇을 읽어 내려갔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장마라서 빗물에 씻겨져 내려갔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책을 읽으면서 내가 메모한 부분은 옮겨 적는다.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奔流)가 되지만, 대개는 맥 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 두꺼운 구세력(舊歲力)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시 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이 사실을 정말로 이해는 일은 간단치 않다. 쁘라도 미술관이 내 마음을 암담하게 만드는 것은, 벨라스께스나 고야를 바라보고 있는 중에, 이 간단치 않은 이해를 무조건 강요받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91쪽)


고야의 그림을 통해, 진정한 자유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스레 느끼면서도 자유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형에 대한 또 다른 믿음 때문일 것이다. 지은이는 고야를 보며 감옥에 갇혀 있는 두 형을 생각했을 것이며, 지금 누리고 있는 자신의 자유를 형들의 투쟁으로 얻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그림을 보면서 느껴지는 지은이의 감상은 형들의 자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은 거미줄에 걸린 여행이기 때문이리라.

135쪽
나는 정말 늦지 않았을까? 왜 이리 여행을 다닐 만큼 여유가 있는걸까?
지은이는 그림을 통해 고국을 생각하고, 감옥에 있는 두형을 생각한다. 나는 지은이를 통해 내 모습을 투영한다. 32살에 여행, 30살의 여행. 그가 아무리 어영부영한다해도 나 보다 머리도 좋고, 사회적 지위도 좋고……. 나는 뭔가, 나는 뭔가. 어제 등대섬에서 만난 아가씨의 말이 머리에서 맴돈다.
"여행하면 뭐가 좋아요?"

삶이란 죽음 앞에서, 삶을 기억하는 것.
지은이는 무명쟁이가 그린 그림을 보며 발길이 멈춰 선다. 그리고 거기에서 형의 모습을 보거나 보지 않거나가 중요하다. 죽음은 자기에게 까지 온 것이다. 그는 죽음을 생각하고 일상을 엮어간다. 낮에 죽음의 시간과 마주보았지만 6주 동안의 강행군은 그를 지치게 했으며 배고픔마저 잊게 한 정도로 잠을 불러온다. 그는 죽음에 대한 집요한 집착보다 6주 동안 따라 붙은 피곤에 몸을 숙인다. 그리고 긴 잠을 자고 일어나니 배가 고프다. 아침에 산 계란을 꺼낸다. 계란은 어릴적 추억을 불러오고, 아버지를 불러온다. 아버지는 죽은 사람에 대한 마음을 불러오고 우리나라의 제사를 불러온다. 낮에 본 죽음과 환영이 자기의 실체를 데려가지 않았을까? 잠시 멈칫한 그는 "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이 미치지 않는 구석의 어둠 속에 누군가가 가만히 웅크리고 (168쪽)"있는 모습에 한숨을 쉰다. 낮의 그림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스스로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을까?

정리되지 않은 글 읽기는 메모를 그냥 여기에 써 둔다. 중간에 여행에 대한 물음은 며칠 전에 내가 여행을 떠나왔기 때문이며, 168쪽에 나타난 그림은 [죽은 연인들]이다. 135쪽이라 함은 지은이가 여행하면서 느끼는 감정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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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김남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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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 말라"]

나는 가끔 잊고 산다. 지금 내가 누리는 자유가 단지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내게로 왔다는 아름다운 착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주의 시를 접하면, 단지 '바람에 부는 풀잎'이 아니라는 걸 알게된다. 그건 싸움이였으며, 자기 삶의 가장 고귀한 자유와 맞바꾼 싸움. 그 싸움의 결과로 얻어진 값이며, 거룩한 정신이란걸 느낀다. 흔히 공기가 없어야 공기의 소중함을 안다는 우스게 소리를 하는데, "오랫만에, 참으로 오랫만에 살찐 젖가슴과도 같다는 검은 흙"을 일년에 체 한 번 정도 만져보며 지낸 세월. 인생에 대한 회의는 없었을까? 후세 사람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바른길인가에 대한 고뇌 없이 어떻게, 저렇게 확신을 하며 나아갈 수가 있을까?

스스로의 행동이 옳다고 믿으며,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않고 싸워간, 긴 시간을 감옥에 갇혀 있으며 '스스로의 자유를 억압' 당하고 만인(萬人)의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
왜 그토록 김남주에게 거룩한 싸움을 하였는가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화답하지 않을까?
"형님,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심어놓은 나무에서 그 열매를 따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식들을 위해 매일처럼 땀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 폭넓게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개인 또는 가족들만을 위해서 나무를 심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따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나무를 심고 기르고 가꿉니다. 나 또한 이러한 생각에서 어떤 일을 했는데 지금에 와선 이런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형님 난 결코 후회하거나 실망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고통의 생활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습니다. 새벽의 햇살을 보기 위해서 우리 인간은 밤의 어둠 속을 헤매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단련되지 않고서야 어찌 이 지상에서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225쪽)"

그는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싸운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이들을 위해 자유를 억압당한 것이다. 김남주가 가족이 아닌 우리라고 말을 했을 때에는, 분명 나도 거기에 섞여 있었으리라. 나는 김남주를 통하여 다시 자유가 시간의 흐름 속에 떠밀려 온 것이 아닌, 내가 모르는 수 많은 이들의 자유와 맞바꾼 싸움이라는걸 생각한다.

김남주는 이렇게 말한다.

"징역 초기에는 철장너몰 보이는 달이 제법 서정을 자아내기도 했는데 이젠 그것이 아무리 밝고 아름다와도 별 감각이 없다네.(251쪽)" 김남주는 "일년 삼백예순날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정량의 가벼운 운동, 요가, 냉수마찰"을 하면서 스스로의 몸을 지킨다. 이는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기 위함이겠지만,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건강한 시를 적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이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서 "이 밤으로 단식 3일 째가 끝나고 아마 내일 쯤이면 어떤 물리적인 힘이 우리를 덮치게 될 것이오. 지겹고 소름이 끼치는 일이지만 담담한 기분으로 모든 것을 받아 들이기로 했소. 아무런 저항도 이번에는 시도 하지 않겠소. 탄압의 도구들에 대한 환멸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고. 도대체 인간이란 것에 지쳤소. 자연 속에서 인간처럼 잔혹하고 야비하고 저속하고 이기적인 동물이 또 있을까요?(104쪽)" 광숙에게 묻지만, 그의 마음은 "내가 바라는 좋은 세상"과 "광숙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지쳤으면서도 사람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한 인간의 고귀함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덧붙임 :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89년, 삼천리]에서 간행한 초판본입니다. 제목은 『김남주 옥중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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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5-06-26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사람에게 지쳤어도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이 놀랍습니다.
 
툴루즈-로트렉 - 열화당미술문고 206
장소현 / 열화당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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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관찰자-천재적인 기질 혹은 인간적 성찰?"]

그는 몽마르트의 환락가나 창가(娼家)에서 생활하면서 그곳의 많은 인간들의 분위기를 꾸밈없이 그렸다. 그는 매우 개성적인 화가였다. (12쪽)

환락가라서, 가난하다고 사랑이 없거나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같이 숨쉬며, 얘기하고, 일상의 지친 어깨를 누이면서도 가슴에는 누구나 꿈 하나 품고 산다. 나는 성적인 호기심과 그네들이 나와는 다르지 않지만 왠지 가려진 베일과 신비함을 살짝 들쳐보고 싶어서...

로르텍은 냉혹할이만큼 꾸미없는 인간 표현을 통해 비극을 넘어서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포용한다. 인간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기에 그는 어떠한 비극이나 추악함 마저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었다. 사랑함으로써 비극은 극복된다. 아니, 본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비극은 이미 비극이 아닌 것이다. 로르텍은 결코 현실을 미화(美化)시키지 않는다. 다만 참모습을 찾아내어 표현함으로써 현실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할 뿐이다.(13쪽)

로르텍은 두번의 사고로 인하여 다리 아래로는 컴이 멈춰버린다. 즉 배 아래 보다, 배 위가 더 큰 사람인 것이다. 배 아래 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중요할 것이다. 지은이는 로트텍에 대해 "어떠한 비극이나 추악함 마저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사회의 눈 초리 속에서, 스스로의 감정 속에서 스스로를 알을 깨고 나올 수가 있었을까?

아웃사이더
그는 아웃사이더로 머문다. 이는 신체적 아픔에 갇힌 자아가 더 나아가지 못해서가 아닐까? 그리고 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밖으로 돌다가 그가 찾아드는 곳은 몽마르트 언덕이며, 그곳에서 그가 마음의 안식을 찾았는가 하는 점은 의문이다. 그는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 있지만... 지은이의 말을 빌리며, 비극이나 추악함 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현실에 대한 카타르시스, 즉 스스로의 눈물을 통해 걸러내어짐이 있어야 한다. 이는 (극단적)자기 부정을 통해 서 있을 수도 있고, 스스로를 한 없이 낮추어 볼 수도 있다. 흔히 자살의 끝에서 발을 돌린 사람들이 마음이 편안한 이유는 스스로를 비웠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 객관적 관찰자로 설 수가 있다. 이는 모든 현실 속 초월한 평상심을 유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설이나 야화를 담지 못하고 있다.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에 객관적 관찰자로 멈춰서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기 부정을 통하지 않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머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경우는 천재적 기질을 통해서이며, 천재적 기질이기에 인간적인 성찰이 결여된 기술로 밖에 표현되지 못할 수 있다.

로르텍의 객관적 관찰자가 수잔 손택이 칭찬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의 씌여짐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다면 그는 분명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엄청난 슬픔을 안겨 주지만 그의 전작 『작은 목소리』에 비하여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은, 스스로를 정화(Katharsis-淨化)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은 목소리』가 슬픔 뒤에 오는 감정을 스스로 추스리고 적은 글이라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로르텍의 접근은 이러한 자기 관찰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 그의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자리가 천재적 기질인지 자기 부정을 통한 인간 사랑인지는....?

로트텍은 신체적 결함을 통해 아웃사이더로 머물고, 그는 현실에 다각지 못하고 객관적 관찰자로서 머물다 몽마르트 창가에서 그들을 그리곤 한다. 하지만 지은이도 말하듯이 그는 모든 그들을 그린 것이 아닌, 몇 명의 그들을 그렸다. 스스로 위안을 찾으로(?) 간 곳에서 조차 마음을 열지 않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고 내 생각--
자기 고독은 연민이 아니다. 사랑이다. 이 사랑은 부족함이 없지만 스스로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밖에 내어본다. 하지만 가만히 한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뿐, 취하지(狂) 못한다. 그는 사람 속에 부대끼지 못하고 '냉철한 관찰자'로 남은 기록자이다. 즉 안에서도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찾지 못하고, 밖에서도 사랑에 다가가지 못하니, 감성을 죽어버린 이성만 머리 속에 채우고 있다. '냉철한 관찰자'는 소녀의 음부까지 거칠게 묘사하지만 진정 소녀의 이야기를 담아냈을까르는 점에서는,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진다.

책이 너무 얇다 보니, 주제가 갇힌 듯한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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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5-06-26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모가 눌려있기에 내면적으로 엄청 호색이었다더군요. 그래서 객관적 관찰가로 보다는 창부를 가깝게 더 잘 이해하는 내부자로 보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동성애, 성병 검사 받으러 치마 들고 서있는 여인들, 노쇠한 늙은 창부(한때 유명했던) 같은 주제는 여느 다른 화가에서 찾기 어려운 소재입니다. 그림이 오래 남을 수 있는 건 소재의 선택의 특이성 뿐 아니라 소재가 가지고 있는 생생한 내면이 살아있기 때문 아닐까요?
 
금요일 저녁에 떠나는 5만원 2박 3일
오동명 지음 / 삼성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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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뺄걸 빼니 내용이 없고 거짓말만 남네..."]

잠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5월 말에 지리산 자락이라는 책 하나 들고 차를 몰고 지리산으로 갔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궁금한 것이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궁금증이였습니다. 하지만 집안에 있는다고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며, 왠지 집안에만 있는 것 자체가 내 자신이 게을러진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문득 떠나고싶다는 생각을 해 보곤 합니다. 무작정... 아무런 이유없이!!

다시 떠났습니다. 지리산을 갔다오고 나서 다시 이번에는 위쪽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번 여행에는 다분히 목적의식이 조금 깔려 있었습니다. 춘천이며 설악 그리고 동해안 바닷가 등이 내가 둘러볼 장소였습니다. 나는 떠나기에 앞서 몇 권의 책을 보며 지남철을 갖고 싶었습니다.

『5만원 2박3일』 5만원으로 이틀밤을 보낼 수가 있다면 괜찮은 경비라는 생각이 듣었습니다. 아울러 2박 3일은 주5일 근무에 들어선 요즘에 딱 맞다는 생각이 듣었습니다. 십 만원의 절반으로 이틀밤과 사흘 낮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상당히 궁금하기도 하고, 나도 이렇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듣었습니다.(-참고로 지리산 3박4일 동안 혼자서 13만원 정도의 돈을 섰습니다.)

우선은 내가 가보고 싶은 곳 부터 펼쳤습니다. 나는 떠나기 앞서 주위 사람으로 부터 춘천에서 하룻밤은 보내야 할 정도로 볼 것이 많다는 것과 설악으로 갈 때에는 인제로 하여 미시령으로 가고, 설악동이나 대청봉에는 꼭 올라가 보아라는 이야기를 듣었습니다. 하지만 지은이는 서울에서 춘천으로 오지만, 오는 여정이 목적이지 춘천이 목적지가 아니였습니다.(이 부분은 제 떠남과 목적이 다름^^) 또한 춘천에 대한 알림은 역에서 무료료 나누어 주는 관광알림 책자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듣었습니다. 춘천 청평사(119쪽)에 들어갔는데, 내용이 너무 없네요. 느낌이 없어서인가? 춘천 청평사로 가기 위해서는 소양강 댐 나룻터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거나 뒤로 돌아서 차를 몰고 와야 합니다. 배를 타고 가면 아마 8천원 가량의 배 운임이 들 것이며, 차로 간다면 38선을 넘습니다. 그리고 길이 꼬불꼬불하여 조심해야 하며, 지은이 말대로 공주와 상사뱀의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비켜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춘천 청평사에는 적멸보궁이 있는데, 가는 길이 조금 험하며 오봉산은 초보자인 내게 힘든 산타기였습니다.

설악산 부분은 올라가지 않고 오른 듯한 이야기를 하는 듯합니다.(-정확히 올랐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이야기 전개는 오른 것처럼 되어있습니다.-102쪽) 그건 다름아닌 남설악에서 오르는 대청봉입니다. 새벽 4시에 오르면 8시에 대청봉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아울러 그곳에서 금강산의 비로봉을 볼 수가 있으며, 나처럼 다시 내려오거나 혹은 소청봉을 통해 백담사로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8시에 내려오면서 몇 번을 쉬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남설악에 내려왔을 때에는 12시가 다 되었으며, 지쳐서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어린아이가 오르기에는 솔직히 물리인 길이라 생각이 됩니다.(거리상으로 이십오리입니다.)

지은이의 책은 어린 아이를 동반한, 차타고 가는 볼거리 먹거리 여행입니다. 체험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용이 없습니다. 어디가면 무엇이 있다는 도로표지판 읽기 그 이상은 없다고 보여집니다. 내가 발을 딛고 그곳에 서서 느낀 감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허겁지겁 차를 타고 이곳 저곳으로 떠나며 보기에 바쁩니다.

아울러 배신감을 느낀 것은 5만원 2박3일... 차라리 3만원 2박 3일로 하면 안될까요. 즉 지은이를 포함하여 아이 엄마가 든 경비는 15만원 가까이 나옵니다. 이를 3으로 나누면... 그렇다면 때거리로 가면 할인이 되기 때문에 가격이 더 내려가는 것은 아닌가?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한다쳐도 기름값?

즉 지은이의 내용은 내용 없음을 떠나서 솔직하지 못한 점이 좋지 않습니다. 제가 춘천, 설악, 동해화진포, 오대산을 6박 7일 동안 두른 경비는 약25만원 정도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기름값이 80%입니다. 집이 밀양이다 보니, 차로 움직인 거리가 1500km였습니다.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는 기름값에 막대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 부분을 지은이는 살짝 비켜가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보길도 까지오는데 경비가 5만원...ㅋㅋ

추신: 내용은 도서관에서 잠시 보면 될 듯합니다. 제가 본 느낌은 별....無. 조금 사색이나 공부를 하고 떠나심은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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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속에서 떠오르는 희망 - 옥중서간집 3
서준식 지음 / 형성사 / 198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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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절대 고독에 갇힌 인간의 외침!!"]

지난 10년 동안 한 개체가 어떻게 성장한 것인가에 대한 지루한 관찰이였다면 81.6.22~82.5.117 까지의 편지는 서준식의 가치관을 더욱 굳건히 하며, 결혼을 통해 현실과 꿈의 갈림길에 선 선아와 순자. 대학생이 되어 사회에 대한 본질을 탐구하는 순자의 동생 순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에 대한 편지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서준식을 훔쳐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체 1년이 되지 안는 기간 동안에 수 없이 쓰여진 편지는 갓 싹을 튀운 새싹을 보는 듯하며, 분명 무슨 꽃을 피울 것인가에 대한 윤곽은 스스히 드러나는데 얼마나 크게, 얼마나 깊이 향기를 날릴 것인가는 의문으로 남습니다.

다음의 서평은 『옥중 서간집1』 [부제: 모래 바람 맞은 영혼] 에서 81년 이후로 보낸 편지에 대한 간략한 서평입니다. 서준식은 앞서 10년 동안 즉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까지 이렇다 할 만한 사고를 형성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아니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안부 등이 오고 가며, 간혹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동생들(선아, 순자, 동생 등)에게 무슨 책을 읽어라는 등의 간헐적인 충고를 할 뿐입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돌아가신 일 년 동안 많은 편지들이 오고갑니다.(앞부분은 개인적으로 읽은 지가 조금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본격적인 부분은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서준식, 인권사랑방나라는 인간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불쌍하다 불쌍하다는 생각에 골똘하다 보니, 문득 내가 혼자서 열을 올리고 있음을 깨닫곤 하는 것이다. 이런 때의 심정이란 <고독> 바로 그것이다......
10년 전 나는 미결수로서 서울구치소에서 절도범들과 혼거했었다. 형이 확정되어 기결수가 된 절도범들은 자꾸 기결감방으로 넘어가고 그대신 신참자들이 자꾸만 새로 들어와 나의 감방에서 잠깐동안 맴돌다가 쉴 새 없이 나의 곁을 흘러 어디론가 사라져 가곤 했던 죄수들을 나는 수십 명이나 상대해 본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이 거기서부터 완벽하게 소외되고 있는 문화의 알맹이, 고상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대하는 참된 즐거움, 훈훈한 인간다운 삶의 기쁨 같은 것(그들의 성장과정은 이런 것들과는 철저히 무관하고, 그들은 한겨같이 찌꺼기 속에서 찌꺼기를 먹고 찌꺼기처럼 살아간다)을 찾고 맛보게 해주고 싶어 무던히도 애를 태웠었다. 그러나 그런 정성이 받아야 하는 <대가>란 때로는 몹시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중략>...
하지만 나는 "도둑놈들은 어쩔 수 없어! 그놈들은 종자가 따로 있는 거야!" 따위 소리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이 말은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자처하는 어느 목사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것은 저 미결동의 10왓트짜리 전등 밑에서 나란히 누워 매일 저녁마다 들은 저 <어쩔 수 없이 비뚤어진 인간성을 가진 악당놈들>의 신세타령들이, 모두가 작은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저마다의 슬픔의 역사들이 그 당시 나에게 얼마나 커다란 충격을 주었는지를 내가 지금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슬픔의 역사는 지금도 나의 가슴 속에서 파상(波狀)을 이루면서 남아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헌신>했다고 그 <대가>를 요구하고 큰 소리를 칠 수가 있겠는가.....(218쪽)
81.8.31 동생 영실에게 씀


서준식의 편지를 읽어가다 보면, 치킬박사와 하이드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절대 고독에 의한 몸부림을 숨기기 위해 동생들에게 삶에 대한 당부로 위장합니다. 동생 영실에게, 이종 동생 선아.선암, 고종동생 순자와 순전이에게 건내는 말은 그가 말했듯이 스스로의 암시가 되며,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더더욱 굳건히 하는 뼈대가 됩니다. 그는 말을 하면 할수록 자기 암시를 걸며 스스로의 성(城)을 쌓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이 외부와의 차단을 통해 절대고독이 아집이나 독단으로 흐르지 않을까라는 고뇌가 이모, 고모 그리고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에서 들어납니다. 그는 동생들에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꿈과 이상을 위해 조화롭게 건설하라 하는데, 이를 스스로에게 비추어보면 독단과 아집에 머물지 않되 스스로의 주체성을 상실한 자아가 되지 말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즉, 동생들에게 열심히 설교를 하며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에 대한 다짐입니다. 동생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벽이 없음에 벽을 만들어 메아리를 울려 잠자거나 엇나가는 그를 깨우려는 행위이며, 이러한 처절함은 아버지 편지를 통해 거울처럼 비추어집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가 추구해야 하는 고귀한 삶이며, 동생들은 그와 함께 현실을 살되 부모님처럼 고귀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자아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상을 포기하고 현실 속으로 매몰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현실감각과 이상이 보다 안정된 균형을 이루어가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순전이는 그러한 균형을 이루는 데 있어서 스스로에게 부족된 요소가 어떤 편인가를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한창 꿈이 많은 나이인 순전이에게 어쩌면 이런 소리는 가혹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혹한 것은 말이 아니라 현실이다.
...<중략>...
사람은 누구나 이상과 현실과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양자의 보다 나은 균형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겠다. 젊어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자신의 꿈을 쫓는 사람들은, 혹은 한바탕의 열풍과 좌절 뒤에 <현실>로 회귀하는 마당에서, <희망이란 무엇?-그것은 갈보다!>라고 절규하게 되는 것이리라.
젊어서 <꿈>에 자신의 인생을 걸어 보지 못한 사람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꿈>을 쫓아가다가 좌절도 해보는 그런 해위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해서 성공적으로 <어른>이 되는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이상과 현실감각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이룬 삶, 이상은 현실감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현실감각은 이상을 허황한 꿈이 되어버리지 않도록 보다 세련되게 하여 주는 그런 삶을 이루는 일이 결국은 최종목표이어야 하겠다. 그것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구태어 <꿈>을 쫓아 보는 우회로가 별 필요가 없다.(244 ~246쪽)
81.11.12 순전에게


책을 읽으면서 순자에 대한 그리움(?)이 많이 생깁니다. 마음씨는 착하지만 공부는 조금 못하는 듯한 순자, 똑똑하며 공부를 잘 하는 선아가 어떻게 커 가는지, 순자의 동생인 순전이가 사회에 눈을 떠 가는 과정, 위에서 말한 서준식의 가치관에 대한 믿음과 성찰은 책 읽는 재미를 줍니다.

이상 1권의 서평였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서준식의 『옥중서간집』 1989년 형성사에서 전3권으로 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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