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메모만 옳긴다"]
서승과 서준식의 동생이라는 말 때문에 책을 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서준식은 그의 여동생에게는 편지를 썼지만 경식이게는 많이 하지 않은 듯 하다(전 3권 가운데, 1권만 읽었음) 그런데도 나는 그의 형제라는 감정 때문에,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비교를 한다는 것이 안 좋은 것인 줄 알면서도, 나는 서준식의 글이 겹쳐지는 것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서경식의 글에 낯설은 이국 이름이 나와서만은 아닐 것이다. 서준식은 물이 미끄러지듯이 글을 잘 쓰 내려간다. 나는 물결 위에 몸을 실고만 있으면 어느 바닷가에 닿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가려 해도 물을 거꾸로 거스르는 연어처럼 서경식의 글은 힘들다. 그의 미술 비평에 대한 어려움이 아니라 글 자체에 대한 어려움이다. 이 어려움을 글 읽기에 대한 반감만 키우며 이해의 폭을 좁게 한다.
나는 서경식의 글을 읽었지만 솔직히 무엇을 읽어 내려갔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장마라서 빗물에 씻겨져 내려갔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책을 읽으면서 내가 메모한 부분은 옮겨 적는다.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奔流)가 되지만, 대개는 맥 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 두꺼운 구세력(舊歲力)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시 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이 사실을 정말로 이해는 일은 간단치 않다. 쁘라도 미술관이 내 마음을 암담하게 만드는 것은, 벨라스께스나 고야를 바라보고 있는 중에, 이 간단치 않은 이해를 무조건 강요받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91쪽)
고야의 그림을 통해, 진정한 자유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스레 느끼면서도 자유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형에 대한 또 다른 믿음 때문일 것이다. 지은이는 고야를 보며 감옥에 갇혀 있는 두 형을 생각했을 것이며, 지금 누리고 있는 자신의 자유를 형들의 투쟁으로 얻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그림을 보면서 느껴지는 지은이의 감상은 형들의 자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은 거미줄에 걸린 여행이기 때문이리라.
135쪽 나는 정말 늦지 않았을까? 왜 이리 여행을 다닐 만큼 여유가 있는걸까? 지은이는 그림을 통해 고국을 생각하고, 감옥에 있는 두형을 생각한다. 나는 지은이를 통해 내 모습을 투영한다. 32살에 여행, 30살의 여행. 그가 아무리 어영부영한다해도 나 보다 머리도 좋고, 사회적 지위도 좋고……. 나는 뭔가, 나는 뭔가. 어제 등대섬에서 만난 아가씨의 말이 머리에서 맴돈다. "여행하면 뭐가 좋아요?"
삶이란 죽음 앞에서, 삶을 기억하는 것. 지은이는 무명쟁이가 그린 그림을 보며 발길이 멈춰 선다. 그리고 거기에서 형의 모습을 보거나 보지 않거나가 중요하다. 죽음은 자기에게 까지 온 것이다. 그는 죽음을 생각하고 일상을 엮어간다. 낮에 죽음의 시간과 마주보았지만 6주 동안의 강행군은 그를 지치게 했으며 배고픔마저 잊게 한 정도로 잠을 불러온다. 그는 죽음에 대한 집요한 집착보다 6주 동안 따라 붙은 피곤에 몸을 숙인다. 그리고 긴 잠을 자고 일어나니 배가 고프다. 아침에 산 계란을 꺼낸다. 계란은 어릴적 추억을 불러오고, 아버지를 불러온다. 아버지는 죽은 사람에 대한 마음을 불러오고 우리나라의 제사를 불러온다. 낮에 본 죽음과 환영이 자기의 실체를 데려가지 않았을까? 잠시 멈칫한 그는 "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이 미치지 않는 구석의 어둠 속에 누군가가 가만히 웅크리고 (168쪽)"있는 모습에 한숨을 쉰다. 낮의 그림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스스로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을까?
정리되지 않은 글 읽기는 메모를 그냥 여기에 써 둔다. 중간에 여행에 대한 물음은 며칠 전에 내가 여행을 떠나왔기 때문이며, 168쪽에 나타난 그림은 [죽은 연인들]이다. 135쪽이라 함은 지은이가 여행하면서 느끼는 감정부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