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리사 크론 지음, 문지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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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학과 이야기를 조합시킨 면에서 석영중 작가의 <뇌를 훔친 소설가>가 떠오른다. 물론 저자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지라 과학적 접근은 본론에 올려진 고명 정도지만. 중요한 건 내가 이토록 친절한 시나리오 작법서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입문서로 추천할 만한 책이 생겨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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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그는 수분 작용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글 가운데는 암컷의 성기와 비슷한 입술 모양의 꽃잎이 있는 작은 난초가 곤충의 수컷을 유혹하는 얘기가 나온다. 과학도로서 플렛은 그 현상이 모호하고 혼란스럽다고 여겼다. 특히 흥분한 수컷이 말없는 꽃잎 가장자리에서 교미하는 몸짓을 한다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랬다. 또한, 비록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해도, 그는 자기 집에 살고 있는 열한 살 난 데이지 굿윌의 존재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 애가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대담한 몸짓이라든가 여름옷 사이로 드러난 팔뚝, 그리고 최근에 어둡게 만들어놓은 그 애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시트 밑으로 드러난 아름다운 몸매의 굴곡을 보고 자신이 느꼈던 비정상적인 갈망이 그랬다.

p.104

아직 어린 데이지 굿윌에 대한 기묘하고 혼란스러운 성적 욕망을 수컷 곤충을 유혹하는 난초에 비유하고 있다.

그가 무엇보다 감동한 것은(그가 생각하기로는) 순전히 그녀의 육체 그 자체였다. 물결치듯 풍부한 살집과, 문에 잘못된 점을 지적할 때 뽀얗게 드러난 팔뚝에 그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작게 부풀린 듯 머리 위에 얹힌 머리 다발하며 통통한 얼굴, 불룩한 옷깃이며 어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들이 한데 합쳐져서 필사적으로 보호해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천진함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팔꿈치 안쪽에 입을 대고 싶었다. 비단결같이 부드러우면서 우아하게 불록 튀어나와 있는 눈 밑의 살결을 손끝으로 만져보고 싶었다.

p.56

그의 음성은 듣기 좋다. 마치 고운 나뭇결과도 같다. 색깔로 비유하자면 노란색이 약간 섞인 밤색 같다. 어조와 흐름과 울림에 있어서 그 음성은 전형적인 남성의 음성이지만, 참나무 교탁에 바른 니스칠보다 투명한 스코틀랜드 사투리가 약간 섞여 있다. 그 사투리 덕분에 그의 음성은 마냥 무르기만 하지 않고 어느 정도 단단함을 느끼게 한다. 그는 곧장, 줄줄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도중에 잠깐씩 말을 멈춤으로써 청중은 가까스로 황홀감에서 빠져나오곤 하는데, 이러한 기교는 자연스럽게 일종의 감각적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p.73

흔히 전쟁은 항복이나 휴전이나 협정으로 종결된다고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은 그 자체로 소진되고 더는 아무런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때, 그리고 문득 천박한 짓으로, 커다란 세계가 저지르는 무례한 짓으로 비치기 시작할 때 끝나는 것이다.

p.109

그는 남자들이(여자들도 물론이지만) 기차에서 플랫폼으로, 플랫폼에서 기차로 쉽게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는 당황했다. 그들은 너무 쉽고 변덕스럽게 옮겨 다니면서 웃고 떠들고 서로 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지리적 변화에도 무심하고, 멀고 낯선 타지방에 왔다는 사실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모자를 쓰지 않았고, 밝은 색채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갖고 다니는 가방은 들고 다니는 모양으로 보아 깃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것들은 실제로 짚과 천으로 만든 것들로, 불과 며칠 전에 구입해서 아직 닳지도 않은 아버지의 암갈색 글래드스톤 가방을 조롱하는 듯했다.

p.130

그 하나하나는 주민들이 있고, 온갖 설비가 갖춰진 작은 세계였다. 그리고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이 쓰는 말투라니! 끊임없는 말들. 그들은 혀로 사는 것 같았다. 그들이 하는 말 대부분은 바보 같은 얘기였지만, 동시에 이치에 닿았다. 말은 그들로 하여금 화를 내지 않도록 해주었다. 마치 장사꾼이 현금을 주고받는 것처럼 그들은 말을 주고받았다.

p.146

모든 인생에는 거의 읽히지 않는, 분명코 큰 소리로 읽히지 않는 그런 페이지가 있게 마련이다.

p.159

남자들은 자기 인생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 덕에 독자적인 영예를 누리는 반면, 여자들은 똑같은 경우에 툭하면 무시당하고 마는 듯이 보였다. 어째서 그럴까? 어째서 이렇게 되어야 할까? 어째서 남자들은 인생사의 갖가지 모험들을 훈장처럼 가슴에 잔뜩 붙인 채 으스대며 다녀도 좋고, 여자들은 그 무게에 짓눌린 채 침울한 얼굴로 침묵해야 한단 말인가?

p.173

이제 날씨는 그의 편이었다. 길고 온화한 낮과 저녁이 이어졌고 마른 땅은 탄력 있게 밟혔다. 그는 태양만 가지고 방위를 잡았다. 고향. 북쪽을 향해 시골길을 걸어가는 그의 귀에 그 말이 콧노래처럼 울려왔다. 그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어느 새의 노랫소리보다도 감미롭게, 마치 버터를 듬뿍 바른 빵으로 식사를 하기라도 하듯 그에게 포만감을 안겨주었다. 어느 도랑에서 그는 매끄럽게 다듬은 나무 막대기를 발견했는데, 손에 딱 맞았다. 그는 이 막대기를 가지고 먼지가 이는 길을 걸어가는 동안 박자를 맞춰 땅을 두드렸다. 그의 얼굴에서는 하얀 구레나룻이 곱고 부드럽게 자랐다.

p.195

천장에 생긴 금에서 내가 두려워한 것은 그 지속성이었다. 그 금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마치 나와 함께 붙어 다니겠다는 것처럼, 내 일부가 되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p.318

전날 아침만 해도 결핍과 운명을 느끼며 잠을 깼지만,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의지라는 폭풍에 휩싸여 잠이 드는 것이다. 아침이 되면 내 눈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희고 매끄러운 들판을 향해 뜨리라. 나를 괴롭혀왔던 그 천장은 이제 한낱 추억 속의 추억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나는 그저 그것을 덮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다. 마치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p.320

여자들은 늘 부서지기 쉬운 법이다. 그 말은 어느 한 가지 커다란 문제로 낙담하는 것이라기보다 머리 위로 수없이 작은 낙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 비는 홍수가 되는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이 그 홍수에 익사한다는 것이다.

p.345

플렛 할머니의 몸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그것은 앙상한 손목을 감고 있는 흰 플라스틱으로 된 환자용 팔찌로 빛이 반사될 때마다 `데이지 굿윌`이라는 글자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냥 데이지 굿윌이었다. 사무를 담당한 누군가가 실수로 플렛이라는 성을 빠뜨렸는데, 덕분에 처녀 시절의 이름만 마치 튤립처럼 아무 장식 없이 덩그러니 적혀 있게 되었다. … 이것은 그녀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되었다. 그녀는 이 비밀을 소중히 여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이것을 자신의 영혼이 겉으로 드러난 표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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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ve the Cat! : 흥행하는 영화 시나리오의 8가지 법칙 Save the Cat! 시리즈
블레이크 스나이더 지음, 이태선 옮김 / 비즈앤비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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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제본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내용 만큼은 알차다. 분량만 보고 개괄 수준 정도겠거니 싶었는데 막상 펼쳐서 읽다 보니 이 바닥에서 구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통찰이 군데군데 느껴져서 좋았다. 특히 10가지 영화 장르 카테고리 구분은 상당히 실용적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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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극해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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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으레 범하는 실수인 선악의 단순화가 없어서 좋다. 개인의 악과 제도적 악이 맞물려 발생하는 상황을 다양한 층위로 그려냈다. 작가는 일본인과 한국인, 제국과 식민지라는 표면적 소재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보다는 인간 본질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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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서 뿜어져나오는 불빛과 불을 둘러싼 군인들의 그림자가 땅바닥에 흩어지는 모습은 마치 욱일기의 모습과도 같았다. 욱일기는 돌고 돌고 또 돌았다. 그 욱일기 밑에서 설사를 참을 수 없는 조선인들과 대만인들, 필리핀 사람들이 아래로는 질질거리면서도 언제 또 먹을 수 있을지 모를 고기를 다시 꾸역꾸역 입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고래 기름으로 불을 켜면 고래 특유의 바다향이 났다. 등유의 탁한 연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급스러운 향이었다. 그 향에 피비린내가 섞였다. 정섭은 고래를 해체하던 순간이 떠올라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곳에선 사람이 해체되고 있었다. 고래처럼 살이 갈리고 내장이 쏟아졌다. 테이블 주변엔 등이 많았지만 어떤 어둠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빛 속에서 짙어졌다. 허공 속에서 떠오른 어둠은 점점 커졌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잠식해갔다. 어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여긴 이렇게나 환한데.

고개를 돌리면 어디든 물이 있었다. 다만 마실 수 없을 뿐이었다. 파도는 출렁일 때마다 미로의 벽처럼 치솟았다 사라졌다. 이곳은 가장 푸른 사막이자, 가장 단순한 미로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순간은 대개 수많은 어쩔 수 있는 순간들의 무심한, 혹은 안이한 선택 끝에 찾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생각했다. 왜 고통받는 사람들이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것일까? 고통받는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보며 생각한다. 겨우, 그걸 가지고! 그것은 선생이 애초에 믿었던 윤리관에 반하는 일이었다. 선한 약자와 악한 강자는 그가 배웠던 문학의 원형이었다. 그러나 유키마루에서 생활하며 선생은 그것조차 어떤 당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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