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서 뿜어져나오는 불빛과 불을 둘러싼 군인들의 그림자가 땅바닥에 흩어지는 모습은 마치 욱일기의 모습과도 같았다. 욱일기는 돌고 돌고 또 돌았다. 그 욱일기 밑에서 설사를 참을 수 없는 조선인들과 대만인들, 필리핀 사람들이 아래로는 질질거리면서도 언제 또 먹을 수 있을지 모를 고기를 다시 꾸역꾸역 입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고래 기름으로 불을 켜면 고래 특유의 바다향이 났다. 등유의 탁한 연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급스러운 향이었다. 그 향에 피비린내가 섞였다. 정섭은 고래를 해체하던 순간이 떠올라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곳에선 사람이 해체되고 있었다. 고래처럼 살이 갈리고 내장이 쏟아졌다. 테이블 주변엔 등이 많았지만 어떤 어둠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빛 속에서 짙어졌다. 허공 속에서 떠오른 어둠은 점점 커졌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잠식해갔다. 어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여긴 이렇게나 환한데.

고개를 돌리면 어디든 물이 있었다. 다만 마실 수 없을 뿐이었다. 파도는 출렁일 때마다 미로의 벽처럼 치솟았다 사라졌다. 이곳은 가장 푸른 사막이자, 가장 단순한 미로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순간은 대개 수많은 어쩔 수 있는 순간들의 무심한, 혹은 안이한 선택 끝에 찾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생각했다. 왜 고통받는 사람들이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것일까? 고통받는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보며 생각한다. 겨우, 그걸 가지고! 그것은 선생이 애초에 믿었던 윤리관에 반하는 일이었다. 선한 약자와 악한 강자는 그가 배웠던 문학의 원형이었다. 그러나 유키마루에서 생활하며 선생은 그것조차 어떤 당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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