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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ㅣ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0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향연』은 사랑에 관한 책이다. 이 짧은 말은 『향연』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주면서도, 동시에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누군가에겐 매력적일 수도, 누군가에겐 지루할 수도, 누군가에겐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향연』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랑에 관해 논한다. 파이드로스는 모든 역경을 뛰어넘는 영웅적인 행위의 원천으로서 사랑을 말한다. 파우나시아스는 사랑의 대상에 따라 세속적 사랑과 고귀한 사랑은 나누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만이 우리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에뤽시마코스는 조화를 사랑으로 정의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달을 닮은 인간의 원형에 대한 설화를 죽 늘어놓으며, 하나됨(충만함)을 향한 욕구를 사랑과 동일시한다. 아가톤은 그 자체로 칭찬할만한 것으로서 사랑의 여러 측면들을 밝히고, 소크라테스는 자기 생각을 디오티마에게 들은 양 아가톤을 논박한다. 그 와중에 만취한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얼마나 사랑하며, 또 소크라테스는 얼마나 사랑받을만한 사람인지를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
이렇듯, 그들이 사랑을 논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향연』이 사랑에 관한 책이라는 설명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선 도입부터, 전해들은 것을 전해들었다고 전해줌으로써 이 이야기에는 논리적 연결고리 따위는 뭉텅이로 빠져있을 수 있다는 점을 예고한다. 등장인물들은 때로는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다가도, 한 페이지 뒤에선 사랑의 상징인 에로스 신에 관해 떠들고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껍데기만 같을 뿐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서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의미를 구겨넣기도 한다. 등장인물들과 우리 사이의 시공간적 차이와 함께, 이런 중구난방식 논의는 우리가 이 책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의 이해를 가리는 “거대한 문화적 맥락의 숲”(독일 철학자 빌렘 플루서의 표현)을 조심스럽게 헤쳐나가는 것이 고전읽기의 묘미인 것 같다.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나, 내가 지금까지 사랑한다고 말하고 다녔던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가,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나는 지금껏 결핍을 채우는 것을 사랑이라고 간주해왔고, 내 주변 사람들을 사실상 착취해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착취는 사랑에 대한 나의 잘못된 관념과, 사랑“한다”는 내 생각을 드러낼 때 내가 보여준 수많은 잘못들로 설명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사랑은 앞으로 어때야할까. 나는 어떤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으며, 그럴만한 자격은 어떻게 갖출 수 있을까. 낯선 표현방식이지만, 그래서 난 사랑에 관한 많은 고민과 그에 대한 단편적인 대답이 이 책에 담겨있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렵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디오티마 부분부터는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납득할 수 없어서, 한 문장을 두 세 번씩 되풀이하며 두 번이나 읽어내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을 다 이해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특히, 모든 성질이나 대상에 그에 대응하는 형상이 존재할 것이라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발상은 여전히 내 취향이 아니다. 그저,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거대한 담벼락같은 어려움을 피하거나 넘기기를 바랄 뿐이다.
PS. 명색이 철학으로 석사"씩이나" 한 자로서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이 책을 한 번 완독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학교 다닐 때 읽었던 플라톤의 작품들(에우튀프론이 묶여있는 박종현 번역본)에 관해서 내가 갖고 있던 인상보다 훨씬 더 난이도가 높았고, 독해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철학사에서 유명한 그리고 매우 어려운 작품을 하나 클리어한 것이 뿌듯하다.
PS2. 번역이나 다른 판본들과의 비교 같은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어쨌든 번역된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던 것은 미주와 각주를 동시에 쓴 이 책의 방침인데, 한꺼번에 미주로 처리하거나 한꺼번에 각주로 처리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학술적인 내용+문화적 맥락에 대한 설명인 것은 별 차이 없었던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