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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윤김지영 지음 / 일곱번째숲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래퍼 슬릭의 마이크 스웨거 프리스타일에서 “헬페미”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이 바닥은 아직도 기집애 같다는 말을 욕으로 쓴다”면서 “그게 힙합이라면 난 힙합 관”둔다는 “hell of fucking feminist” 슬릭의 외침은, 어딘가 통쾌했다. 지옥이라는 단어가 아니면 묘사가 불가능한 한국의 현실이 폐를 쥐어짜는 “ㅎㅔㄹ” 발음을 통해 터져나온다는 미학적 쾌감이 있다, 는 식의 멋드러진 묘사를 하고 싶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그 통쾌함의 이유는, 그냥 내가 슬릭의 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은 “ㅎㅔㄹ” 페미니즘의 궤적을 추적하며 한국에서의 포스트-페미니즘을 정당화하는 시론이다. 헬조선 담론에서 배제된 여성 청년들을 말하고, 메갈리아를 둘러싼 트위터와 세계의 담론을 드러내 (줄여서 말하면 절대 안되는 바로 그 단어) 한국남자들의 남성 연대와 유사 매카시즘을 지적하고, 폭로라는 발화 형식을 통해서야 공공의 논쟁의 대상이 된 강간문화를 비판하며, 최소한의 주관성마저 탈각된 정동의 형태인 통감의 사회화를 통해 여성(과 다양한 소수정체성)의 목소리를 유체연대의 형식으로 복권시킬 것을 주장한다.
전체적인 논지엔 대체로 동의한다.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의 구분선이 임의적이며, 공공 영역에 권력과 남성을 동시에 놓는 개념적 조직을 통해 이념의 역사에서 그리고 권력의 역사에서 여성이 체계적으로 배제되어 왔다. 이런 배제는 사회 전체의 성격을 결정짓는 구획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성차별(sexism)이 아니라 여성혐오(misogyny)라고 불러야만 한다. 여성혐오에 포획된 문명사회의 구성원들은 (성을 가리지 않고) 미시적으로, 일상 속에서, 단 1g의 나쁜 의도도 없는 말로 이것을 실천한다. 나를 시민으로 만들어준 인간의 조건 자체가 나에게 적대적이니, 이런 상황에 처한 여성들을 지옥에 떨어져있다고 말하지 않다면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굳이 “헬”조선의 페미니스트 뿐만 아니라, 몇 세대가 되었건 페미니즘을 자각한 모든 여성들은 “헬페미”가 될 수 밖에 없다.
반면 마뜩찮은 부분도 없지는 않다. 우선, “헬”조선의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헬페미”라고 부르는 것 이외에 “헬페미”가 다른 21세기 페미니즘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려면, 한국 사회 특유의 쓰레기같은 가부장제도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필요할 것 같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이 이론가의 일이 아니라고 반박할 것 같고, 그 반박은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하이데거식 말장난”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개별 단어에 대한 독창적인 의미부여도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갈만하다. 분노와 혐오, 폭로와 고백, 동정과 공감과 통감 등 “헬페미니즘”으로 나아가는 노정에 놓여있는 이 책의 중요한 논지들은 거의 전적으로 이 방식에 기대고 있다. “이미 알려진 것”을 둘러싼 정치운동의 감정으로 분노와 혐오를 분석한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폭로와 고백 사이에는 제도적인 간극이 놓여있다는 충분한 설명이 있으니, 그래도 납득할 수 있었다. 반면 동정-공감-통감 사이에 책에서 설명하는 분량 만큼의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결국 세 가지 다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작용인데, 우리가 내면을 성찰해서 저 셋을 구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이론적인 논의들을 뒤로 하면, 누가 뭐라고 하든 한국사회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이 책에 언급된 몇몇 사건에 내 친구들이 연루가 되었기에, 그 변화는 관찰과 분석과 연구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시간으로서 내 마음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 되새김이 앞으로도 한동안은, 어쩌면 평생, 나를 어딘가 불편하게 하는(또는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무엇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 글을 어떻게 맺어야할지 모르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