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리부트 - 혐오의 시대를 뚫고 나온 목소리들
손희정 지음 / 나무연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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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의 주제는 현대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정동(감정)인 혐오다. 혐오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갖추고 있는 어떤 감정의 형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의 발현은 사회가 주조해낸다. 2017년 한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그는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스놉 구별을 차용한다. 스노비즘은, 자연에 대항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상태에 다다랐음에도 이전 시대의 행위 양식을 계속 유지하는 상태를 뜻한다. 손희정의 눈에 한국인의 혐오 감정은 스노비즘의 한 형태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렀음에도 풍요 속 자유주의의 한 형태를 끈질기게 유지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한국식 스노비즘의 구체적 기원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혼동이다. 사람들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했으며, 그 가운데에서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체성의 정치를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조직해나갔다. 이런 경향은 표면적으로는 각자의 차이를 심리적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소비자 정체성 이외의 모든 것을 삭제하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고정관념을 잔존시킴으로써 지배이념에 복무했다. 이 차이에서 차별이 파생되었고, 차별은 혐오 감정의 근거가 되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와 혐오는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맞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이른바 “리부트”된 페미니즘을 선언할 수 있을까? 2장에서 그는 확답을 주지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을 탐색해본다. 2세대 페미니즘이 천착했던 정체성의 정치학은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담론에 포섭되어, 정치를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구닥다리인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여성은 ISA에 의해 소비 주체로서만 호명당할 뿐, 정치적 주체로서 자리매김하지는 못한다.


자유로운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척 했던 1990년대 영화 뿐만 아니라, 이른바 여성향인 BL코드를 깔고 있는 흥행 상업영화를 통해, 우리는 포스트-페미니즘 시대를 읽을 수 있다. 왕의 남자나 고지전 같은 영화들은, 여성주의적 일탈로 여겨졌던 BL 코드를 영화 전반에 배경으로 깔아둠으로써 관객들에게 “부녀자”가 된 듯한 일탈을 제공한다. 하지만 내용에서는 배경, 형식으로는 영화로서만 소비될 뿐인 그런 코드는 오히려 관객들에게 남성적 연대의 끈끈함만 전시하고 여성관객을 이 연대의 이념에 소비자로서 포섭시킨다.


현대 한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대중문화의 형식은 TV다. 3장은 TV 프로그램에서 대중문화와 페미니즘 사이에 긴장과 협력이 동시에 벌어지는 장면을 포착함으로써, 대중문화-페미니즘의 또 다른 면모를 고찰하려고 시도한다. 대중문화와 SNS의 영역에서 소비자는 자유롭게 욕망을 분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산의 단계에서부터 사회의 지배이념이 반영되기 때문에, 욕망의 분출로서의 자유는 반쪽짜리 자유다. 그럼에도 소비주체로서의 정체성은 지배이념에 반대하는 저항이념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페미니스트들은 그것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표현함으로써 소비자정체성과 운동의 이념을 결합시킨다.


“가모장” 개념을 탄생시킨 김숙은 이 둘의 건강한 긴장을 가장 잘 표현하는 사례로서 인용될만하다. 또한 트위터에서 급진적인 언사를 펼치거나 다른 SNS에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을법한 사건을 폭로해서 해시태그를 통해 짧은 시간이나마 연대체를 구성해내기도 한다. 에릭남이 무언가 잘나서가 아니라 사람이라서(문명인이라서) 사랑받는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한국남자들은 야만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대놓고 가리킨다. 반면 김숙과 같은 기획사의 장동민은 십 수 차례나 대놓고 여성혐오 발언을 일삼았는데도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고 있고, 몇몇 얼척없는 영화관계자들은 여성관객들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가감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대중문화와의 관계 만큼이나, “리부트된” 페미니즘을 이끄는 동력도 이전의 페미니즘과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4장에서는 이 근거를 정동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한다. 정동은 이성에서 이탈해, 새롭게 구성된 기억에 의존한다. 이렇게 진행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 토론에 의해 구성된 공공 영역이라는 미명 아래 정치로서의 여성의 목소리가 체계적으로 배제된 역사 덕분이다. 


정동에 기반한 새로운 양식의 운동은 구체적 사건을 통해 집단의 기억을 재생하고, 기억의 양식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지배이념의 산물인 습관을 해체하고 관념의 새로운 연합을 구성한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상징하는 뚜렷한 문구인 “여자라서 죽었다”는 인식의 공유는 새로운 정동의 탄생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트위터는 이런 정치적 정동이 주목경쟁과 결합해 가장 극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그래서 트위터는 자본의 자유의 폭력에 대항하는 “공유지”의 지위를 차지하고, 정동공동체인 사이버 스페이스의 성격을 획득한다.


하지만 사이버 스페이스엔 베충이와 깨시민들이 훨씬 더 많이 기거하지 않는가? 페미니즘 비평이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이 한남편향적 공간에 대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할 것이다. 5장은 박가분, 김어준, 유시민과 386에 관한 이야기다. 각 인물들은 각각 합리적인 척하면서 선별적으로 사실을 짜깁기하고, 합리성을 완전히 포기한 채 복수를 위한 스토리텔링에 눈이 멀고, 그 눈먼자들을 위한 지식정보를 제공하는 자들을 상징한다. 전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셋은, 역설적으로 모두 반지성주의라는 키워드로 묶여있다.


반지성주의 핵심은 진실을 말한다는 사실과 진실을 말한다고 부여된 자격 사이를 구별하지 않고 지식인 집단을 싸잡아 매도하는 태도다. 나무위키는 서브컬처 향유자들의 집단지성의 금자탑으로 불린다. 이용자들은 익명성에 기반해 진실을 말한다고 부여된 자격을 체계 내에서 박탈하고 사전의 형식을 빌림으로써, 선별된 감정의 나열을 팩트로 가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전환은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에 가장 성공적으로 활용되었다. 밝은 서재의 운영자 박가분은 이 전투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느라 바쁘다. 


이에 대한 거울쌍인 김어준(과 유시민과 386)은 끊임없는 소수자 정체화와 죽은 전 대통령에 대한 미안한 감정의 소환을 통해 진실의 중요성을 폐기하고, 우리는 언제나 속이는 거대 악의 끊임없는 환기를 통해 개별 행위자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자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적 수준을 막론하고, 진실을 외면한 채 어용 시민으로서 자신을 규정하기에 바쁘다. 베충이와 깨시민 모두, 진리를 말한다는 사실과 진리를 말한다고 부여된 자격을 (무의식 중에 혹은 의도적으로) 섞어버린 뒤에 양쪽을 모두 폐기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한 거울쌍이다.


1장에서 5장까지가 페미니즘과 직접 관련된 사회 현상에 대한 독해인 데 비해, 이후의 6~9장의 내용은 미디어 상품에 대한 이론적 접근의 성격에 조금 더 무게가 실려있다. 물론, 페미니즘이라는 이론적 기반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후의 논의도 앞쪽과 어느 정도는 연결점이 있다.


“구멍의 정치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적당할 6장의 전체 논지는, 영화와 관련된 몇몇 “구멍”들이 기존과 다른 시공간을 상상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기회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첫번째 구멍은 필름의 양쪽으로 나있는, 영사기에 걸기 위해 필요한 구멍이다. 이 구멍은 실제로 스틸컷을 동영상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즉 여러 스틸컷을 균질적이고 깔끔하게 배열해서 마치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이것은 시공간의 배열에 대한 근대적 관점을 투명하게 반영한다. 하지만 실제 필름의 효과는 그 구멍이 아니라 컷과 컷 사이에서 발생한다. 만약 컷과 컷 사이를 전혀 다르게 구성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갖고 동영상을 만든다면, 이 구멍에 의해 비선형적 세계가 펼쳐진다. 이 상상력이 바로 정치의 영역이다.


우리는 이 곳에 무엇을 집어넣어야 할까? 영화 만신은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근대적 변화에 의해 미신으로 치부되어 밀려난 굿을 의도적으로 비춘다. 이 굿은 컷과 컷 사이의 균열 그리고 미신의 복권이라는 사회적 맥락에 기반해서 근대의 정점에 균열을 낸다. 이 균열은 영화정치가 작동해야만 하는 또 다른 “구멍”이며, 이 구멍을 채우는 일이 영화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다양한 계층의 외국인을 조명하는 것은 방송의 단골 소재다. 7장은 최근의 이방인 촬영작인 JTBC 비정상회담을 통해서 분화된 이방인의 구조를 추적한다. 짧게는 IMF, 길게는 70년대 이후 세계경제에 편입되어 신자유주의의 장 아래 놓인 우리에겐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생겨났다. 백인과 비백인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고, 또 같은 인종이라도 남성과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각각에 대해 서로 다른 반응은 자본주의와 민족주의, 남근주의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교차하면서 생겨났다.


비정상회담과 가장 뚜렷하게 비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10년 전의 미녀들의 수다다. 설령 선진국의 백인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배치 방식과 진행 등 방송에 동원된 여러 장치에 의해 패널들은 이중적인 역할을 떠안게 되었는데, 하나는 성적 소비의 대상이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성적 소비 대상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지적사항의 나열이다. 반면 10년 뒤의 비정상회담은, 성적 대상으로는 비춰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들과 대등한 자리에서 논의를 나누는 남자들의 말의 성찬을 보여줌으로써 젠더 권력을 은밀히 드러낸다.


다시 영화비평으로 돌아온 8장은, 장소의 문제를 다룬다. 근대적으로 조직된 장소에서 근대적으로 규율되지 않은 사람은 쫓겨난다. 이것은 남성의 젠더 권력에 의해 조직된 곳에서 여성은 비정상으로 간주되어 축출되거나 굴종의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지만 몇몇 영화들은 이런 공간성의 위계를 뒤집어, “무장소성” 사이의 연대를, 탈규율의 영역에서의 연합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 공간의 재편을 남성 권력과 짝지을 때, 그 대립항으로서 무장소성은 여성 젠더와 결합한다.


푸코는 이것을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 장소는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는데, 위기와 일탈의 관리라는 측면을 지닌다. 역설적으로, 위기와 일탈이 춤추는 공간이기에 모든 것이 가능하며, 이 공간을 구성한 사람들에게는 해방의 역할을 한다. 영화 김씨표류기는 밤섬을 배경으로, 우리집에 왜왔니는 다른 이의 집에 침입한 사람을 소재로, 페스티벌은 서울에서 가장 헤테로토피아적인 마포구에 머무르며 각각의 영화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한국의 페미니즘 진영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단연 위안부 문제가 아닐까? 특히 민족주의적 선입견을 비판하고 식민지적 남성권력의 가부장제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와, 그 대립물인 귀향 류의 강제징용과 강간의 눈물 서사 모두를 제대로 비판하고 넘어서는 것은 한국의 페미니즘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것처럼 보인다. 9장은 이 뜨거운 감자를 차분히 풀어가며, 사회의 지배이념을 이해하는 박유하의 방식이 얼마나 단순한지, 그리고 위안부가 실제로 어떤 식민지 이념에 복무했으며 어떤 지배이념들이 교차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려는 시도다. 그리고 이를 통해 페미니즘 비평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두 번 말할 것도 없이 식민지의 복잡성을 가부장제로 단순하게 환원한다. 이 비판을 위해 (다른 글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고진의 자본-네이션-남근 스테이트 구상을 끌어들여, 식민지 착취는 이 세 가지 지배이념이 동시에 작동해야만 식민지 위안부라는 개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을 놓친다면, 실제 민족주의 즉 네이션 개념에 기반해 행정 체제를 굴렸던 일본 제국주의의 면죄부를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귀향은, 비평의 관점에서 실패한 영화다. 폭력을 폭력으로, 고통을 찡그린 표정으로만 재현하는 게으르고 손쉬운 재현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반면 똑같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면서도 영화이자 드라마인 눈길은 폭력 대신 비루함을, 고통 대신 비참함을 전시함으로써 독특한 미학적 성취를 이뤘다. 이 차이는 익숙한 서사의 강화와 새로운 서사의 발견이라는, 전혀 다른 반응을 이끌어낸다.


나는 페미니즘이 “리부트”되었다는 손희정의 진단이, 반은 맞고 반은 모호하다고 생각한다. “리부트”의 결과물은 이른바 헬페미, 트페미의 급진적 운동들로 귀결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직까지, 역사상 있었던 다른 종류의 급진적 페미니즘과 비교했을 때 지역의 차이 말고는 뚜렷한 이념적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자본-네이션-남근 스테이트라는 논의를 받아들인다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교차하는 사회에 대항하는 페미니즘 또한 운동이나 담론의 측면에서 차이를 보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헬조선의 페미니스트들이 역사 속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과 얼마나 다른 담론을 제시했는가? 나는 아직 모르겠고, 아마 그것은 내 과문함 탓이리라.


그저 느낌일 뿐이긴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최근의 다양한 페미니스트 운동에 대한 양가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체계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그래서 그것에 균열을 내기 위해선 분명 급진적 운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배이념의 힘은 세고, 급진적 수사는 때로 다른 운동의 영역을 폄훼하거나 침범한다. 그래서 이런 운동으로부터 일말의 가능성을 애써 발견하려는 태도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낙관적 전망을 애써 내놓고픈 분투로 점철된 지식인의 자세다. 그것이 바람직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나는 아직 판단 유보의 상태다. 나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비슷한 태도를 지닌 사람을 책을 통해 만났다는 점에서, 이 책은 내게 일종의 위안이었다.


이런 양가감정은 트위터에 대한 서술에서도 느껴진다. 다른 모든 SNS에선 왜곡된 시장논리나 검열에 의해서 페미니즘이 사라져갔다. 반면 막말의 전시를 동반하는 주목경쟁이라는 트위터의 환경은 오히려 페미니스트 진영이 그곳에서 존속하게 만든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주목경쟁이 이념의 당위를 넘어서는 순간이 너무나도 빈번하게 연출되는 그 곳에서, 이른바 먹물들은 어떤 의미를 읽어내야 할까. 이런 작업을 통해,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작업을 통해 그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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